용서하지 않을 권리
김태경 지음 / 웨일북 / 202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임상심리학자이자 범죄심리학자로 임상-수사심리학자로도 불리는 김태경 교수의 책 <용서하지 않을 권리>. 지금까지 알려진 강력범죄를 떠올려보면 사건의 잔혹함과 범인만 생각날 뿐 피해자가 먼저 생각나진 않습니다. 우리가 외면한 사건 뒤에 남겨진 사람을 생각하는 <용서하지 않을 권리>는 피해자가 경험하는 고통에 대해 들려줍니다.


범죄 피해자 심리 치료 및 트라우마 상담 전문가 김태경 교수는 피해자에겐 용서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합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처럼 부적절한 관심한 불필요한 지지 행동은 오히려 피해자의 회복을 방해한다고 합니다. 고통은 잊히지 않습니다. 다만 사건 기억과 더불어 현재를 살아갈 수 있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게 트라우마 치료입니다.


김태경 교수가 살인사건 유족을 살인사건 생존자라고 부르는 것을 보며, 솔직히 그동안 얼마나 피해자에 대해 잘 알지 못했는지 깨닫게 됩니다. 살인으로 사망한 가족에 대한 애도는 트라우마적 비애라고 부릅니다. 자연스러운 죽음과 살인으로 인한 죽음이 유족에게 어떻게 달리 경험되는지 유족의 목소리로 보여줍니다.


최소 1년가량이 걸린다는 상실을 받아들여야만 최소 3년 이상 걸린다는 애도가 시작될 수 있고, 애도가 시작되어야 삶의 재건이 가능해진다고 합니다. 이 과정에는 회복에 대한 저항뿐만 아니라 회복을 방해하는 여러 외부 요인도 등장합니다. 중요한 건 유족의 시간과 주변 사람의 시간은 다른 속도로 흐른다는 데 있습니다. 국가적 참사에서도 어느 순간부터 유족이 너무 오래 비통해하는 것처럼 느끼며 되려 유족을 비난하는 상황을 심심찮게 봐왔지 않았던가요.


범죄자에게만 집중하며 정작 피해자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무관심한 사회. 범죄 자체보다 피해자를 더 고통스럽게 만드는 오해와 편견이 난무합니다. 권선징악적 가치를 내제화한 사람은 일종의 벌이라고 생각하고, 피해자다움에 집착하기도 합니다. 피해자를 비합리적이고 가학적인 방식으로 낙인찍기 일쑤입니다. 범인에게는 묵비권이 있음에도 피해자에게는 진술의 신빙성을 문제 삼으며 결국 극단적 선택을 하게 만드는 2차 가해를 하기에 이릅니다. 합의를 하지 않으면 독하다고 하고, 합의를 하면 역시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이 사회는 피해자에게 용서를 강권합니다.


김태경 교수는 피해자의 합의에 대한 이야기도 짚어주는데요. 대부분의 피해자는 범인을 용서해서가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상황으로 어쩔 수 없이 합의 요청에 응한다고 합니다. 합의금 없는 합의서까지도 써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범인 가족에 대한 연민으로 말이죠. 하지만 합의서를 제출하는 순간 자책감과 허무감은 짙어지고 피해자의 회복에는 사실상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용서는 상대가 청한다고 해서 가능해지는 게 아니고, 상대를 위해 용서를 결심한다고 해서 마음속 상처가 저절로 치유되는 것도 아님을 짚어줍니다.


<용서하지 않을 권리>에서는 피해자의 형사사법 절차상 경험을 자세히 소개합니다. 신고 순간부터 경찰 출동, 고소, 사망 고지, 수사 과정, 재판 과정 등에서 생기는 다양한 일들을 피해자의 사례로 들려줍니다.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펼쳐지더군요. 신고 전화에 대응하는 이의 말이나 사망 고지할 때의 태도 등 피해자로서 경험하지 않는다면 알 수 없는 이야기들입니다. 긴 여정을 함께 읽어나가다 보면 그제서야 피해자의 고통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 신고부터 재판까지 사건과 관련한 절차 과정에서 수없이 받는 2차 가해. 그리고 재판이 끝나고 나면 미뤄두었던 치유 작업이 겨우 시작됩니다.


형이 확정되면 사건은 종결되지만, 범죄가 남기는 상흔은 깊습니다. <용서하지 않을 권리>에서는 피해 당사자의 신체·정신·관계 영역에서 끼치는 영향과 피해자 가족에게 끼치는 영향을 세심하게 짚어봅니다. 더불어 이웃 및 범죄 피해자 지원 실무자가 받는 고통까지도 다룹니다. 범죄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은 어마어마하다고 합니다. 단순히 피해 당사자에 국한되지 않는 범죄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범인이 표적으로 삼는 순간 누구나 범죄 피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피해자에게 보이는 연민과 배려가 필요하지만, 2차 가해임을 인식조차 못 한 채 주변인이 흔히 하는 행동과 말도 많습니다. "죽은 아이는 그만 잊고 둘째 낳아서 허전한 마음 채워요."라는 이웃의 말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직접 경험하지 않고도 상대의 고통에 쉽게 공감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고 합니다. 자신의 이해가 정확하며 자신의 언행이 충분히 공감적이라고 믿습니다. <용서하지 않을 권리>에서는 2차 피해를 줄이는 데 초점 맞춥니다. 피해자가 건강한 이웃으로 돌아오도록 돕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알려줍니다.


범죄 피해 트라우마를 입은 아이는 성인과는 굉장히 다르다고 합니다. 이때만큼은 아이는 어른의 축소판이 아닙니다. 문제는 사건 후 아이가 드러내는 말과 행동이 유무죄를 가르는 중요한 단초가 되면서도 사실상 아동 범죄 피해자의 특유함에 대한 일반인과 형사사법 관계자의 이해 폭은 넓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범죄 유형별 아동의 독특성을 알려주며 아이의 회복을 위해 필요한 일을 고민해 봅니다.


<용서하지 않을 권리>는 살아서 불행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얼마나 이 사회가 무신경한지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입니다. 피해자를 그저 범죄자의 심리를 이해하는 도구로 소비해 버리는 공동체가 아닌, 피해자 입장에서 범죄 사건을 조망하고 피해자를 공동체 일원으로서 보호하고 지원할 방법을 모색하고자 고민하는 김태경 교수의 이야기가 울림을 줍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작고 슬퍼서 아름다운 것들 - 한 글자로 시작된 사유, 서정, 문장
고향갑 지음 / 파람북 / 202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부산스러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며 사유의 세계로 이끄는 극작가 고향갑 산문집 <작고 슬퍼서 아름다운 것들>. 경기신문에 현재도 연재하고 있는 고향갑의 난독일기 코너에 실린 글과 미발표글을 엮은 책입니다.


모든 글의 표제어는 한 글자입니다. 겨우 한 글자이지만 '한 글자'를 넘어 '수만 글자'와 함께 사는 '한 글자'임을 이야기합니다. 나무가 모여 숲이 되듯 전혀 다른 둘이 만나면서 하나가 되는 모습처럼 하나와 둘을 애써 가를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하고 묻습니다. “둘이 모여 하나를 품고, 품은 하나 속에 둘이 있습니다.”라는 말은 결국 혼자가 아닌 함께 살아가는 세상살이의 이치를 담은 이야기입니다. 표제어 <둘>에서 풀어내는 이야기입니다.


노동자의 삶을 알기에 그늘진 삶이 슬며시 배어있는 고향갑 작가의 글은 담담한 서정 속에서도 애환이 보이기도 합니다. 글노동자로 살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글은 글이고 밥은 밥일 뿐이지만 자본이 주인인 세상에서 넘어진 하루를 일으켜 세우는 건 글이 아니고 돈이라는 것도 사무치게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글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을 엿볼 수 있으니 애틋하게 다가옵니다.


시를 읽는 것처럼 은유 가득한 문장도 있고, 일기를 읽는 것처럼 현실어로 채워진 문장도 있습니다. 고향갑 작가의 한 글자에는 나와 너, 그리고 세상이 담겼기에 공통의 공감대가 형성됩니다. 문학은 손으로 꺼내는 가슴속 언어라고 합니다. 문학을 거꾸로 읽으면 학문입니다. 하지만 거창한 학문이 아닌 문학다움만을 지키려 합니다. 비장하게 힘이 들어가지 않은 그의 글은 그 경계를 넘지 않으려는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69편의 우리 모두의 이야기 <작고 슬퍼서 아름다운 것들>. 같은 표제어로 나라면 어떻게 페이지를 채워나갈지 생각해 보는 재미도 있습니다. 글을 먼저 읽고 나서 표제어를 확인하면 뜻밖의 울림을 주는 기발한 표제어도 많습니다. 짧은 글쓰기를 연습하려는 이들에게도 본보기가 되는 산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카노 교코의 서양기담 - 무섭고도 매혹적인 21가지 기묘한 이야기
나카노 교코 지음, 황혜연 옮김 / 브레인스토어 / 202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과학이나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일들은 창작의 씨앗이 되기도 하고 음모론으로 발전하기도 합니다. 여러 미스터리 중에서는 거짓이나 착각이라 일컬을 만한 일도 있고, 여전히 증명되지 않은 미스터리로 미종결된 사건도 있습니다. 


'무서운 그림 '시리즈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희대의 이야기꾼 나카노 교코가 각양각색의 기담을 선사하는 <나카노 교코의 서양기담>에서 무섭지만 매혹적인 21가지 기묘한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괴수, 유령, 도플갱어, 골렘, 마녀, 뱀파이어 등 공포의 존재들은 물론이고 실존 인물들의 미스터리한 사건까지 등장합니다. 


익히 들어본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저자가 툭툭 던지는 한 마디가 정신을 환기시킵니다. 공포와 잔혹함을 무심하게 서술하면서도 그 이면을 들여다보는 나카노 교코의 관점은 인간 본성의 이면을 들추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가 등장했는지, 무서움 뒤에 자리 잡은 시대적 배경과 가치관을 짚어줍니다. 그저 공포물, 기묘한 이야기의 짜릿한 중독성에 홀리듯 끌린 이들에게 오히려 한 방 날리는 셈입니다.


독일의 작은 마을 하멜른을 배경으로 한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 이야기는 동화로 어렸을 때부터 접했던 이야기인데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었어요. 그림 형제의 《독일 전설》에 수록된 이 이야기는 13세기 말 행방불명된 130명의 아이들에 관한 겁니다. 그저 창작 스토리라고 생각했는데, 아이들의 실종이 당대 공문서에 기록된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라는군요. 


실제 사건이 이야기가 되려면 변형되기 마련입니다. 피리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떠돌이 악사 이미지가 덧붙여졌고, 흑사병과 연결해 쥐 떼가 등장합니다. 나카노 교코는 "동화의 껍질을 벗겨내면 지극히 단순하지만 충격적인 진실의 나열만이 남는다."고 합니다. 많은 연구자들이 수많은 가설을 발표했음에도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은 이 사건을 나카노 교코는 아이들의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피리 소리에 이끌려 몽유병자처럼 걷고 있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낯선 땅을 서성이고 있다면 얼마나 공포스러울지 말입니다. 어떻게 아이들이 사라졌는지에만 집중했던 시선을 단번에 전환하는 나카노 교코의 한 마디입니다.


원리를 알아도 직접 경험한다면 정말 초자연 현상으로 여기며 기이한 체험을 했다고 말할 것 같은 브로켄 현상.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어도 여전히 놀랍습니다. 과학 용어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브로켄의 요괴라고 불린 이것은 발푸르기스의 밤 전설과 결부됩니다. 바로 마녀 집회입니다. 히브리어로 안식일을 일컫는 사바트가 중세엔 마녀 집회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마녀 사냥과 관련해서는 참 복잡한 시대적 상황과 종교적 암투가 얽혀있지요. 북유럽 신화권의 유럽에서 열린 악령을 쫓는 봄의 제전인 오월제가 기독교 입장에선 이단 축제가 되어버린 겁니다. 나카노 교코는 광신적인 집단 히스테리가 어떻게 오랜 세월 마녀사냥을 유지하게 했는지 핵심을 짚어줍니다.


엑소시스트에 관해서는 영화로도 많이 접하는 소재인데요, <나카노 교코의 서양기담>에서는 17세기 프랑스에서 실제로 일어난 '루덩의 악마' 사건을 소개합니다. 십여 명의 수녀가 일제히 몸을 뒤틀면서 울부짖는 일이 발생하며 수도원이 난리가 난 겁니다. 공개 구마를 통해 문란한 주임신부 그랑디에의 실체가 폭로되었고, 루덩의 카사노바가 화형에 처해진 이 사건은 정말 보여진 것 그대로였을까요.


귀종유리담이란 고귀한 혈통으로 태어난 자가 모국에서 멀리 떠나 정처 없이 떠돌며 무수한 시련을 통과하여 신이나 고귀한 존재로 거듭나는 설화의 한 유형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가상의 인물은 영화 <아이언 마스크>로 재탄생한 철가면을 쓴 프랑스 루이 14세의 쌍둥이 동생 이야기입니다. 친아버지라는 설도 있지만 어쨌든 루이 14세와 관련이 있다는 것, 누구나 아는 얼굴이라는 점 때문에 음모론이 풍성한 이야기입니다. 그 외 17세기에 일어난 러시아 류리크 왕조의 가짜 드미트리 사건, 19세기 뉘른베르크에 홀연히 나타난 '유럽의 고아' 카스파 하우저도 있습니다.


1959년 냉전기 소련에서 일어난 미제사건인 디아틀로프 사건도 미스터리투성이입니다. 우랄과학기술학교 엘리트 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탐사대가 우랄산맥을 스키로 등반하다 연락이 끊겼고, 전원 처참한 모습으로 발견됩니다. 텐트는 안쪽에서부터 찢긴 상태였고, 겨울 산을 견딜 수 없는 차림으로 격투의 흔적 또는 차에 치인 듯한 상처를 입은 채 시신으로 발견됩니다. 러시아 정부는 수많은 연구자가 부정해온 산사태로 결론 내렸지만, 여전히 20세기 최대의 미스터리로 불릴만한 기담입니다.


골렘 설화의 근원을 살펴보면서는 미래의 골렘인 로봇에 대한 이야기를, 어둠의 슈퍼스타 드라큘라의 이야기가 전승되며 덧붙여진 삶과 죽음의 의미 등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의 매력을 전달하는 <나카노 교코의 서양기담>. 명확한 결론이 없는 이야기이기에 매료되는 기담이지만, 그 이면에 담긴 인간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에 단순한 오락적 공포를 넘어서는 기담의 세계를 선사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알리알리 알라성 - 알수록 행복해지는 유쾌한 性 이야기
오세비.김경헌 지음, 임유영 만화 / 비전C&F / 202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청소년 현장의 전문가 오세비, 김경헌 저자가 알려주는 청소년의 성 이야기 <알리알리 알라성>. 디지털 발달로 왜곡된 성을 쉽고 빠르게 접하는 오늘날 올바른 성 의식 형성과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성교육 이야기가 필요한 때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기성세대의 편협한 시선이 자녀의 성교육을 방해하기 일쑤입니다. 2020년에 한 고등학교에서 '바나나에 콘돔 끼우기'를 시연하려다가 학부모들의 항의가 빗발쳐 취소되었다는 기사처럼 논란이 될 수 있다는 현실에서 살고 있습니다. 부모가 올바른 성교육을 경험하지 못했기에 단단한 장벽이 쉽게 허물어지지 않습니다.


부모 세대라면 구성애 선생님의 방송을 한 번쯤 접해본 적 있을 겁니다. 당시 얼마나 쇼킹했던가요. 성교육하면 구성애라는 이름이 바로 떠오를 정도로 성교육에 있어서 대단한 아우라를 가진 분이시죠.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시는 구성애 선생님이 추천하는 책 <알리알리 알라성>. 수치스럽거나 부끄러운 것이 아닌 일상적인 대화로 이어지는 주제가 되도록 청소년 자녀를 둔 부모라면 이 책을 읽어보세요.


<알리알리 알라성>은 오세비 저자가 쓴 청소년 편과 김경헌 저자가 쓴 부모 편으로 구분해 구성을 조금 달리해서 보여줍니다. 청소년 편에서는 만화가 함께 있어 책을 안 읽는 청소년들의 진입 장벽을 낮췄습니다. 성별 구분은 따로 하지 않고 함께 알고 있어야 할 이야기들이 등장합니다. 오히려 다른 성에 대한 호기심을 해소하는 데는 이런 책만큼 좋은 게 없지 싶어요. 부모가 직접 말로 하기 까다로운 이야기를 청소년 스스로 읽어가면서 습득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 알라와 알리가 사춘기를 보내면서 자연스럽게 경험하는 성을 다루고 있어 스토리텔링의 맛이 좋습니다. 짤막한 만화로 상황을 보여주고, 관련 주제를 좀 더 깊게 파고드는 방식입니다. 그림 설명을 볼 수 있는 QR 코드가 있는 페이지도 있습니다.


청소년기 학교생활을 하면서 겪을 수 있는 다양한 고민도 다루고 있는데, 피부 문제라든지 연애라든지 부모도 충분히 그 시절 겪었던 일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작 내 아이에게는 몸의 변화와 고민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다는 부분을 깨닫고 반성하게 됩니다.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그저 다양성을 존중하라는 식의 조언이 나올 거라 예상했는데 의외의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동성 친구를 좋아하는 마음과 성적 취향을 혼동하는 경우가 꽤 있다는 겁니다. 성소수자의 의미를 제대로 짚어주면서 성 정체성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후회 없도록 조언을 하고 있습니다.


청소년 임신에 관한 이야기에서는 함께 행동한 것에 대한 책임지는 모습을 강조하는 조언이 무척 마음에 들었고, 올바른 성교육 마인드를 가늠할 수 있게 되었어요. 건강하게 잘 성장하고 있다는 신호인데도 잘 알지 못한다면 두렵게 받아들일 수도 있기에 정확한 정보를 얻는 게 중요한 성 지식입니다. 챕터마다 유용한 Tip과 해당 주제에 관련한 청소년들의 궁금증을 Q&A로 보여주는데 저도 미처 생각지 못한 이야기들이 이 코너에서 많이 등장하더라고요.


요즘은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걱정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디지털 성범죄자들이 교묘한 수법으로 접근한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N번방 같은 디지털 성범죄에 이용될 위기에 빠진 청소년이 어떤 도움을 청해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알리알리 알라성> 청소년 편에서는 청소년이 성에 대한 자기 결정권이 있다는 걸 분명히 알려줍니다. 원치 않는 성 행동은 언제든 거절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지혜롭고 현명하게 행사하는 어른이 되어가도록 돕습니다.


'부모' 편에서는 잘못된 성문화가 청소년에게 영향을 끼치는 오늘날의 모습을 짚어보며 부모로서 자녀들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질문을 던집니다. 청소년들의 성문화를 들여다보고, 호기심과 질문에 대해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합니다. 모르는 게 문제가 아니라 잘못 알고 있는 게 더 큰 문제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2015년 학교 성교육 표준안의 내용에는 비현실적인 대처 방안과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 차별적 내용이 그대로 담겨 있다고 합니다.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이 던지는 성에 대한 질문 목록을 뽑아 보여주는데 성교육에 대해 관심이 있는 부모라 할지라도 선뜻 대답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더라고요. 청소년은 자신의 행동보다 반응하는 부모의 행동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고 합니다. 성의 부정적인 내용만을 강조하거나 청소년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의 문제점도 짚어줍니다.


성적 자기 결정권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부모에게도 생소한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제대로 그 의미를 배운 경험이 없으니까요. 자기 결정권에 대한 오해와 무지를 깨뜨리는 조언이 이어집니다. <알리알리 알라성>에서는 한국여성민우회 가족과성상담소에서 개발한 성적 자기 결정권 진단표를 소개하는데 자신의 권리와 동의의 원칙을 확실하게 이해하는 것이 그 시작입니다.


부모는 아이를 키우면서 함께 성장한다는 말이 이처럼 잘 맞는 주제가 있을까요. 나도 이런 교육을 일찍 받았더라면 좋았겠다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었습니다. 청소년들의 시선에 맞춘 성 고민과 청소년의 성문화를 현실적으로 짚어준 <알리알리 알라성>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낀대 패싱 - 튀고 싶지만 튀지 못하는 소심한 반항아들
윤석만.천하람 지음 / 가디언 / 202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대의 공정과 50대의 정의 사이에 ‘낀’ 세대 3040 이야기 <낀대 패싱>. 1979년생 윤석만 기자와 1986년생 변호사이자 정치인인 천하람 저자가 586과 MZ 사이에 끼어 있는 ‘낀대’를 정치사회학적으로 분석한 책입니다.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 간 간극을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 ‘낀대’. 1970년대 중반에서 1980년대 후반에 태어난 이들을 일컫습니다. X세대와 MZ세대에 중첩돼 있는 이들입니다. 586에 치이고 90년대생에 낀 샌드위치 세대 ‘낀대’는 대중문화 역사상 최초로 ‘개인’의 탄생을 경험하며 문화적 역량에선 특출났지만, 다른 분야에선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 정치권에서 낀대는 패싱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게 현실입니다.


사회에 존재하는 갈등과 균열을 조정하고 해결하는 게 정치입니다. 사회가 분화하며 갈등 요소는 보다 다양해졌는데, 대한민국은 두 거대 정당이 한국 정치를 양분해왔을 뿐 세대 간 이해와 합의점 찾기는 소홀했습니다. 책 <낀대 패싱>은 낀대가 가진 실체와 의미를 짚어보며 청년세대와 기성세대 간의 핵심 갈등을 분석해 우리 사회의 정확한 갈등과 균열 지점을 찾아내 해결 단초를 제공하고자 합니다.


사회적 통념상 MZ세대는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까지 태어난 세대를 일컫지만, 생년 중심 세대 구분법은 현실에서 애매합니다. MZ세대임에도 본인의 정체성은 X세대에 가까운 81년생도 있고, 586세대에 가까운 70년생도 있습니다. <낀대 패싱>에서는 기계적인 세대 구분법을 탈피하고 ‘낀대’에 대해서만이라도 새롭게 정의 내리고 있습니다.


‘낀대’는 국민학교와 초등학교가 혼재하고 삐삐라는 물건을 실제로 경험해 봤습니다. 서태지 세대를 기점으로 1세대 아이돌 팬덤 문화를 만들어낸 대중문화 소비자이자 생산자로 큰 힘을 발휘했고 여전히 대중문화에서만큼은 위력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자신의 계층적 위치와 소득 수준이 부모보다 못하다고 느낀 최초의 세대입니다. 학창시절에 형성된 반골기질이 남아있지만 세대 바깥에선 몰개성이라고 느낄 만큼 집단적이기도 합니다. 학창시절부터 직장생활에 이르기까지 ‘누울 자리를 보고 개성을 발휘해야 한다’는 마인드로, 합리적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엔 조직의 논리를 앞세웁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캐릭터가 중소기업 이야기를 다룬 《좋좋소》의 중간관리직 이과장입니다. 20대 직원의 요구가 합리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꼰대 사장도 알고 보면 거래처의 을이라는 걸 아는 ‘낀대’입니다.


아날로그를 이해하는 마지막 세대이자 5060을 이해하는 세대인 ‘낀대’. 하지만 X세대는 사실상 정치적 패싱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이야기합니다. 자기만의 정치 어젠다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정치에선 잃어버린 세대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90년대생은 윗세대와 다른 정치적 에너지를 가졌다고 합니다.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 기회와 희망의 상실이라는 새로운 결핍이 에너지의 근원입니다. 정치에선 낀대를 넘어서는 변화가 이미 시작되고 있습니다. 낀대 이준석이 당 대표가 된 건 X세대의 지지보다 디지털세대인 Z세대 90년대생의 힘, 특히 20대 남성의 보수정당 지지 현상이 정점을 찍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들이 온전히 보수가 됐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흥미로운 점은 20대 남녀 정치 성향이 정반대라는 데 있습니다. 이대남이라는 용어로 부르는 20대 남자에게서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20대의 아버지인 586세대가 했던 일들이 정작 아무런 기득권도 누리지 못한 20대가 책임을 안게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이 쟁점에는 뿌리 깊은 젠더 갈등이 있습니다. 20대 남성은 오히려 역차별 담론을 꺼냅니다. 불공정이라는 의식을 가진 겁니다. 일부는 여성혐오로 이어지게 됩니다.


서울대 신재용 교수의 <공정한 보상> 책에서도 화이트칼라 MZ세대가 열망하는 공정의 의미를 이미 접한 바 있는데 <낀대 패싱>에서도 공정에 대한 이야기가 빠질 수 없습니다. 수시와 학종 위주의 입시정책 변화, 수능 절대평가 전환 등 고소득층 자녀의 명문대 진학을 쉽게 만드는 교육제도 현실에서 교육은 더 이상 계층 상승의 희망 사다리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눈 떠보니 선진국의 삶을 사는 공정한 90년생과 독재와 민주화를 경험한 586세대의 정의 사이에 낀 ‘낀대’. 정년연장과 정규직 전환, 공정을 핵심 가치로 내세운 MZ노조, 연금 개혁 사안 등 낀대 갈등의 주요 사회 쟁점을 살펴봅니다.


이제는 디지털 네이티브라는 분명한 특징을 가진 90년대생이 정치 사회학적 변화에 한몫하고 있습니다. 메타버스와 NFT 같은 새로운 세계가 당연하듯 익숙한 디지털세대의 현재를 조목조목 짚어보며 ‘낀대’의 역할을 고민합니다.


낀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586세대와 90년대생의 이야기까지 함께 살펴봐야 했습니다. 이도 저도 아닌 세대 ‘낀대’와 한국 사회의 세대 담론을 펼쳐 보인 <낀대 패싱>. ‘낀대’ 역시 처음 등장할 때는 신세대로 규정 받았습니다. 저도 낀대에 해당하는 세대이지만 가족, 직장 등 살아가면서 부대끼는 건 낀대끼리가 아니라 위아래 세대를 아우르니 결국 <낀대 패싱>은 지금 우리 모두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낀대’의 정체성을 알아갈수록 공감하면서도 낀대라는 용어에서 받는 씁쓸한 기분은 들게 되더군요. 정치적 패싱은 있을지 모르나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모두 이해하는 낀대의 가치는 오히려 지금부터일지도 모른다는 저자의 말이 반가운 이유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