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소설 속에 도롱뇽이 없다면 - 살아 움직이는 캐릭터 만들기
이디스 워튼 지음, 최현지 옮김, 하성란 추천 / 엑스북스(xbooks) / 202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순수의 시대> 원작 소설가이자 이 작품으로 1921년 여성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이디스 워튼이 남긴 소설 쓰기 책 <당신의 소설 속에 도롱뇽이 없다면>. 제목이 무척 독특해서 눈길을 사로잡았는데, 원제는 The Writing of Fiction으로 나름 평범한 제목이더라고요. 번역판 제목이 정말 탁월하지요. 여기서 도롱뇽은 이야기의 '영혼'을 뜻합니다.


"벤베누토 첼리니는 어린 시절 어느 날 아버지와 함께 난롯가에 앉아 있다가 둘 다 불 속에서 도롱뇽을 보았다고 자서전에 썼다. 그때도 그 순간의 광경은 이례적이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곧장 아들의 귀를 감쌌고, 그로써 그는 자신이 본 것을 결코 잊지 않게 되었으니 말이다. (중략) 이는 또 다른 요점으로 이어진다. 보여 줄 도롱뇽이 없다면, 독자의 귀를 막아 봤자 소용없다는 것이다. 당신이 지핀 작은 불꽃의 중심부가 살아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래서 다른 무언가를 움직이지 않는다면, 소리를 지르거나 흔들더라도 독자의 기억 속에 일화를 각인시킬 방법은 없다. 이야기를 말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근본적인 의미를 상징하는 존재가 바로 도롱뇽이다." - 책 속에서


이디스 워튼의 소설 쓰기 책은 일반적인 소설 작법서와 결이 다릅니다. 작가의 역량, 소설 쓰기의 본질을 파고듭니다. 단순히 기술을 논하는 책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실 읽는 데는 조금 힘에 부쳤습니다. 이 책은 무려 1925년에 출간되어 100여 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습니다. 오늘날의 소설 작법서는 빠르게 완벽하게 해내는 법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100년 전 이디스 워튼은 그야말로 걸작의 힘을 이야기합니다.


자연스럽게 이 책에는 19세기 문학사 대표작들과 위대한 소설가들이 대거 등장합니다. 고전문학이라 알려진 소설들을 파고들어 좋은 소설이란 무엇인가를 들려줍니다. 반면 불완전하고 미숙해 보이는 소설도 거침없이 지적합니다.


이디스 워튼은 발자크에게 큰 점수를 주고 있는데요. (알쓸인잡에서 김영하 작가가 발자크 에피소드를 재미나게 풀어내는 바람에 저도 발자크에 관심이 훅~! 이디스 워튼도 칭찬 일색이니 그의 작품들이 더 궁금해집니다) 생생히 살아있는 인물들을 보여주는 그의 소설들을 통해 살아 움직이는 캐릭터의 중요성을 이야기합니다.


삶의 단면을 보여주는 기법이니 의식의 흐름 기법이니 하는 소설의 기법에 대한 당시 유행 흐름도 만날 수 있습니다. 수준이 미미한 작가들은 경향에 따라가기 마련이고 지름길을 추구합니다. 그마저도 풍부한 창의성이 부족하다면 그 소설은 결국 묻히기 마련입니다.


독자의 주의를 끌고 뇌리에 남도록 만들기 위해선 그 순간을 결정적으로 만드는 무언가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설가로서의 역량이 중요합니다. 전방위적인 시각으로 성공적인 소설을 쓸 수 있는 역량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어떤 주제든 온전히 발현되려면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깊이 생각하며 창작자가 길러 온 모든 인상들과 감정들로 채워져야 한다." - 책 속에서


쉬운 성공에 물든 젊은 창작자들을 위한 사려 깊은 조언을 만날 수 있습니다. 진정한 독창성은 새로운 형식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에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 새로운 시각은 표현 대상을 충분히 오랫동안 바라봄으로써 작가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만 달성할 수 있다고 합니다. 더불어 풍부한 지식과 경험으로 키워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형태로든 '내가 왜 이 이야기를 읽고 있는 거지?' 독자의 내적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소설이어야 합니다.


단편소설에 대한 이야기도 등장합니다. 단편소설은 소설의 시나리오가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공적인 이야기와 성공적인 소설은 같지 않다고 합니다. 소설엔 사람들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물론 몇몇 위대한 단편소설은 상황의 극적인 표현 덕에 생동감을 얻기도 했지만요.


여기서 초반에 언급한 도롱뇽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이야기를 말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상징 도롱뇽. 단편소설은 그 궤적이 몹시 짧아 번개와 천둥이 거의 동시에 칩니다. 빈약하고 축약된 단편소설을 쓰지 않으려면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단편보다는 장편을 좋아하는데 이디스 워튼의 글을 읽으며 진짜 멋진 단편소설을 읽어보지 못해서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이디스 워튼이 말하는 단편소설은 삶의 표면에 느슨하게 걸친 거미줄 대신, 인간 경험의 본질로 곧장 향하는 최적의 통로를 만들어 냅니다.


독창적이고 위대한 영국 단편소설을 자랑하기도 하는데요. 그러고 보면 으스스한 소설의 거장들이 무척 많습니다. 거장들은 공포 요소를 늘어놓는 게 아니라 누적되게 만든다는 걸 일깨웁니다. 다채로운 공격 대신 조용한 반복이 더 무서운 법이니까요. 이디스 워튼은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을 극찬하는데요. 200페이지 내내 유령 같은 분위기를 유지하는 초자연적 이야기 중 독보적인 책이라고 합니다.


이디스 워튼이 이 책을 쓴 시점은 마르셀 프루스트가 사망했고 곧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완결 편을 기다리던 시기였습니다. 그의 작품을 너무나도 사랑하는지 아예 한 파트를 프루스트만으로 이야기할 정도입니다. 첫 권이 나왔을 때 혁신가로 평가받은 프루스트는 그 사이 고전 반열에 오를 정도로 당시에도 핫한 작가였습니다. 혁명가처럼 떠오른 작가를 이디스 워튼은 어떻게 평가하는지 만나보세요.


왜 누구는 후대까지 남길 만큼 널리 읽히는 소설을 썼고, 왜 누구는 매력적이지 않은 소설을 써 묻히고 마는지 걸작이 되고 못 되고의 갈림길을 만날 수 있는 시간 <당신의 소설 속에 도롱뇽이 없다면>. 발자크, 스탕달, 톨스토이, 제인 오스틴, 프루스트 등 위대한 거장들이 가졌던 비법을 파헤치고 있으니 고전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에게도 또 다른 깊은 맛을 선사하는 책입니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장 현실적인 재테크는 창업이다
송진혁 지음 / 상상력집단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창업을 고민하는 MZ세대에게 추천하는 책 <가장 현실적인 재테크는 창업이다>. 과거와 달리 요즘은 창업의 문턱이 낮아진 느낌입니다. 내 관심사를 수익화하는 것에 관심 많은 MZ세대들의 분위기 덕분입니다.


전통적인 방식의 매뉴얼식으로 구성된 수많은 창업 관련 책들이 시중에 있지만 창업을 고민하는 단계에서 또는 창업을 시작한 초보 소상공인이라면 실제사례와 성공기업들의 메시지로 전달하는 멘토 역할을 하는 이 책을 꼭 읽으면 좋겠습니다.


똑같은 업종인데도 왜 매출 건수가 차이가 날까, 같은 상권인데도 업종에 따라 왜 매출 건수가 차이가 날까, 같은 점포인데 왜 작년과 올해 매출 건수가 차이가 날까... 반복되는 단어로 매출 건수가 등장합니다. 송진혁 저자는 신용카드회사와 가맹점을 연결해 주는 VAN사를 운영하는 대표입니다. 약 16년간 2만여 명의 창업자의 흥망성쇠를 마주했습니다.


카드 승인 건별로 수수료를 받는 구조다 보니 매출, 경기흐름, 사업성공의 관계를 방대한 빅데이터를 바탕으로 통찰하게 된 저자는 이를 바탕으로 창업자 컨설팅을 통해 수많은 창업자에게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노력에 비례한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와야 하는 창업. 실패의 함정에 빠지지 말고 성공의 공식을 따라가야 합니다. <가장 현실적인 재테크는 창업이다>는 물이 없는 곳에선 절대 우물을 완성할 수 없듯 올바른 방향으로 스마트하게 노력할 수 있도록 길잡이 역할을 합니다.


전통적인 오프라인 매장을 운영하는 것 이외에도 재능이나 취미를 활용한 창업에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그런데 이 역시 쉬운 건 아닙니다. 점포를 얻는 비용을 대신하려면 기발한 아이디어, 탁월한 재능, 남다른 노력이 필요합니다.


얼마 전에 읽은 <마케팅 추월자>에서도 도움을 주는 전문가로서의 위치에 대해 강조했는데 송진혁 저자도 이 부분을 중요하게 다룹니다. 유익한 정보, 보는 즐거움을 꾸준히 제공하면서 고객 확보에 총력을 다해야 하는 시점과 방법에 대해 세심하게 짚어주고 있습니다.


잘못된 방향으로 빠지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톡톡히 하는 책입니다. 저처럼 창업 N차가 된 이들이라면 매너리즘에 빠질 즈음 브레이크를 걸어주는 역할을 하는 조언도 가득하고, 이 책에 나온 조언들을 창업 초반 일찍 깨달았더라면 한결 수월했을 텐데 싶은 공감 메시지가 가득합니다.





무엇보다 생각을 깨뜨리는 아이디어와 관점을 이야기하는 방식이 마음에 쏙 듭니다. 악어가 되어 경쟁하기보다 악어새가 되어 실속 챙기는 역할도 창업의 세계에선 필요하듯 역발상을 많이 할 수 있게 굳은 머리를 환기시키는 메시지들이 많습니다.


요즘 창업 트렌드를 이보다 더 확실하게 만나긴 힘들 것 같습니다. 요즘 인기 있는 무인점포에 대해서도 단순히 무인점포의 장단점을 짚어주는 것을 넘어 장점을 더 활용하고 단점을 확실하게 보완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해 주니 훌륭한 창업 컨설팅을 받는 느낌입니다.


마케팅에 대해서도 멋진 비유가 등장하더군요. 군인이 아무리 광을 내고 멋을 내도 사람들의 눈엔 군인일 뿐이라고 말이죠. 개성 없고 평범한 마케팅 대신 노력의 방향이 맞는 마케팅에 대해 들려줍니다. 저도 언제나 경계하는 부분이긴 하지만 내 기준과 고객의 기준은 다를 수 있음을 일찍이부터 알았더라면 시행착오를 조금이나마 줄였을 텐데 하는 후회가 있거든요.


창업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흔한 착각들을 깨뜨리고, 창업 준비 과정에서 놓치면 결국 후회할 수 있는 소소한 부분들을 꼼꼼히 짚어주는 <가장 혁신적인 재테크는 창업이다>. 내수 시장이 엉망인 이 시대에 굳이 창업을 해야 하나 고민 많은 이들에게 추천합니다. 뿌린 대로 거둔다고 하죠. 지혜와 전략과 노력의 올바른 방향을 만나보세요. 40가지 성공법칙을 바탕으로 프로 N잡러의 길을 열어주는 창업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 노래가 내게 고백하라고 말했다 안녕, 시리즈 2
이경 지음 / 아멜리에북스 / 202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흔 꼭지의 글에 스며든 노래를 만나는 시간 <그 노래가 내게 고백하라고 말했다>. 사랑, 사회 경험, 가족, 글 쓰는 삶...  그 모든 순간에 있었던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음악 에세이입니다.


멜로디 파인 저는 노랫말을 음미하는 음악 애호가의 취향 언저리에도 못 미치는 데다가 가사를 찬찬히 곱씹으며 노래를 듣는 행위의 경험 자체가 적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이경 작가의 이야기를 읽으며 한때는 저도 가사에 집중했던 시절이 있었다는 걸 기억해 냈어요.


처음으로 가사에 끌려 줄창 들었던 임창정의 <이미 나에게로>의 어떤 가사가 내 마음을 두드렸었는지 어렴풋한 기억을 되살려보기도 하고, 고등학생 시절 친구가 추천한 신승훈의 신곡을 들으며 나름 센티멘털한 감성을 뿜뿜했던 그날을 (해가 질 무렵이었는데 거실 불을 안 켜서 살짝 어둑했던 그 분위기까지)  소환하기도 합니다. 잊고 있었던 기억이 노래를 떠올리는 순간 깜박깜박 켜지는 경험이  꽤 묘한 감정을 안겨주네요.


어찌 그리도 잘 알아주는지 신기할 정도로 지금의 내 마음을 이야기하는 노랫말을 만날 때면 감정의 쓰나미에 푹 파묻히기도 하다가도 또 시간이 지나면 그 노래가 무덤덤해집니다. 그렇게 잊힌 노래도 많을 겁니다.





그런데 <그 노래가 내게 고백하라고 말했다>를 읽다 보니 지나고 나면 보이는 것들이 있더라고요. 당시에 왜 그 노래에 끌렸는지, 이경 작가의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때 나는 어떤 노래를 들었더라? 하며 시간 여행을 해봅니다. 멋쩍은 기억도 있지만 풋풋한 설렘을 발견하기도 하는 추억 소환에 제격인 음악 에세이입니다.


"음악이 가진 가장 무서운 힘은 과거의 어느 시절로 나를 돌려보내는 일이지." - 책 속에서


독서가에게 좋아하는 책과 작가에 대해 할 말이 많은 것처럼 이경 작가에겐 밤을 새워서 이야기할 수 있는 좋아하는 뮤지션과 가사를 만나는 시간 <그 노래가 내게 고백하라고 말했다>. 수많은 노래들 중에서 잊지 않고 또는 잊었다가도 문득 생각이 나면서 또 며칠 반복해서 듣게 되는 곡도 있습니다. 그렇게 삶 속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지분이 은근 있다는 걸 깨닫습니다. 이경의 음악 에세이는 바로 그 순간의 나의 감정을 가만히 더듬어볼 수 있게 도와줍니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견딜 수 없는 사랑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복복서가 / 202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이언 매큐언의 비운의 걸작 <견딜 수 없는 사랑>. 1997년에 출간되었지만 뒤이은 <암스테르담>, <속죄> 등 부커상 수상 작품에 가려 오히려 유명세를 덜 타버린 소설입니다. 국내에서도 소개되었다가 절판되었던 소설이 복복서가에서 선보이면서 이언 매큐언의 작가로서의 역량이 절정에 달한 시기에 썼다는 이 작품을 드디어 만나봅니다.​


원제 <Enduring Love>의 영원히 지속된 사랑과는 상반된 느낌을 주는 제목 <견딜 수 없는 사랑>. 다 읽고 나니 원제도 한국어판 제목 모두 의미가 어울립니다. 심리 스릴러 소설 좋아하는 독자라면 좋아할 묘사 기법이 덕지덕지합니다. "나는 생각과 느낌과 감각을 갖고 있었고, 그것을 표현할 말을 찾고 있었다."라는 주인공처럼 이 소설에서 생각 흐름을 따라가며 디테일하게 묘사하는 방식이 무척 매력적입니다. 게다가 독자로부터 분노와 답답함을 뽑아낼 줄 아는 의식의 흐름이 수준급인 등장인물들이 가득합니다.​


※ 해당 리뷰는 스포 방지를 위해 출판사 보도자료에서 오픈한 내용을 중심으로 작성했습니다


"우리는 재앙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재앙은 그 자체로 하나의 용광로였다." - 책 속에서


7년 차 연인 조와 클래리사가 소풍을 간 장소에서 일어난 사건이 이들의 운명을 뒤흔듭니다. 소년이 타고 있던 헬륨 기구가 돌풍에 휩싸여 하늘로 치솟을 위기에 처하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달려갑니다.​ 저마다 밧줄을 잡고 힘을 써보지만 3~4미터 높이로 떠올랐을 때 누군가가 줄을 놓쳐버렸고 이내 한 명씩 나가떨어집니다. 하지만 끝끝내 밧줄을 붙잡은 이가 한 명 있었는데 기구는 상공을 향해 치솟아버렸고, 그는 결국 추락사하게 됩니다. 기구에 타고 있었던 소년은 무사했지만, 이 사고로 아내와 두 아이를 둔 가장이 목숨을 잃은 겁니다.


소설 초반 흡인력이 상당합니다. 특히 조의 내면을 묘사하는 장면은 과학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는 주인공의 사고방식을 아낌없이 보여줍니다. 철학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인 도덕적 딜레마가 등장합니다.​ 모두가 자신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누군가 줄을 놓았고, 발이 땅에서 떨어질 만큼 몸이 떠올랐을 때 줄을 놓는 것은 본성에 속하는 행동이라고 말이죠. 처음엔 모두가 이타주의자의 마음으로 달려왔고 밧줄을 잡았지만, 어느 순간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 되어버린 상황입니다.


머릿속에서 어떻게든 줄을 붙잡고 있어야 하나 놓아야 하나 갈등할 때 누군가가 줄을 놓고 떨어지는 걸 보자 갈등은 정리됩니다. 그 순간 "이타심이 있을 자리는 없"게 되는 겁니다. 조 역시 결국 줄을 놓고 떨어집니다.​ 끝까지 줄을 붙잡고 있다가 결국 추락사한 남자를 보며 조는 자신이 살아있음에 안도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렇게 그들은 죄책감과 안도감을 가진 채 헤어집니다.


하지만 조는 그날의 일이 계속 맴돕니다. '나는 무슨 짓을 한 것인가? 혹은 무슨 짓을 하지 않은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지금의 불안감을 딱 부러지게 정의 내릴 순 없지만 충격이 가시지 않은 상태입니다. 조는 계속 논리적으로 답을 찾아내고자 합니다.


게다가 그날 함께 밧줄을 잡았던 이들 중 한 명인 제드 패리로부터 전화가 옵니다. 당신 감정을 이해한다고 말하고 싶어져 전화했다며 말이죠. <견딜 수 없는 사랑>은 이 전화 한 통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사랑의 다양한 형태를 보여줍니다.


논리정연한 대답으로 대응하는 습관이 있는 과학자 마인드를 가진 조, 영국 시인 존 키츠를 연구하며 감성적인 사랑을 원하는 클래리사. 그리고 집착의 사랑을 보여주는 패리까지. <견딜 수 없는 사랑>은 이들의 사랑이 얽히고설키며 사랑을 바라보는 이분법적 시각이 펼쳐집니다.


"이젠 인간이 어떤 문제에 대해 타인의 동의를 얻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우리는 절반만 공유되는 믿을 수 없는 인식의 안개 속에서 살았고, 우리의 감각 정보는 욕망과 믿음의 프리즘에 의해 왜곡되었으며, 그 프리즘은 우리의 기억까지도 왜곡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이로운 것을 보고 이롭게 기억했고, 그러면서 우리 자신을 설득했다." - 책 속에서


당신은 어떤 유형의 사랑을 해봤고, 하고 있나요. 조의 눈에 클래리사의 사랑은 감정적 논리만 주장할 뿐입니다. 클래리사의 눈에는 조가 과잉반응을 하는 것 같고 이성만 따지다 보니 한 마디로 정떨어지는 인간이 되어버립니다. 도끼병 걸린 것처럼 일방적인 사랑을 하는 이도 있습니다. 살인으로 이어지는 스토커 범죄가 심심찮게 뉴스에 나오는 것처럼 심각한 범죄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스토커에겐 그의 행동이 사랑이라고 말할 테지요.


사랑을 하면 사소한 것으로도 기쁨과 배신감의 감정을 오가기도 합니다. <견딜 수 없는 사랑>처럼 견디기 힘든 사랑이 닥쳤을 때 우린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요. 소설 속 인물들의 사랑이 연결되고 해체되는 여정 속에서 우리의 사랑을 더듬어보게 됩니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눈이 올 정도로 추운지
제시카 아우 지음, 이예원 옮김, 김화진 독서후기 / 엘리 / 202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이지만 에세이 느낌으로 읽은 제시카 아우의 소설 <눈이 올 정도로 추운지 (원제 Cold Enough for Snow)>. 소담하게 향수에 젖어들게 하는 소설 속 화자 딸의 단상에 흠뻑 빠져든 시간입니다.​ 중국, 말레이시아, 호주... 이주의 역사를 가진 가족의 정체성이 깃든 제시카 아우의 목소리는 동양과 서양 분위기의 혼합이 묘하게 어우러져 낯섦과 익숙함의 조화를 선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10월의 일본으로 여행을 떠난 엄마와 딸. 평소 자주 여행을 떠나는 모녀 관계는 아닙니다. 엄마는 몇 차례 머뭇거림 후 승낙했고, 도쿄에 도착했을 땐 태풍을 앞둔 계절인 탓에 비가 내리는 날이 많았습니다. 딸은 여행을 준비하면서 엄마가 뭘 보고 싶어 할지 고심해서 스케줄을 짰습니다. 첫 번째 장소는 한적한 곳에 자리 잡은 미술관입니다. 아늑한 공간 속에서 따로 떨어져 둘러보기로 합니다. 딸은 2층에 정원과 나무가 보이는 사색의 공간을 마음에 들어 합니다.​


이렇게만 보면 뭔가 식상한 여행기처럼 느껴질 수 있겠지만, 이 소설의 매력은 여행 중간중간 등장하는 딸의 관찰과 기억에 있습니다. 사소한 장면들을 엄마와 함께 맞이할 때면 추억이 따라옵니다. 그 시절의 가족을 떠올리기도 하고 남편과 친척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이 여행에서 엄마는 어떤 걸 느끼는지 궁금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여행 가자는 말에 선뜻 승낙하지 않았던 '엄마가 여기 온 게 스스로 원해서인지 아니면 그저 나를 생각해 온 건지 가늠하기가 어렵다.'는 생각도 듭니다.


<눈이 올 정도로 추운지>에서는 엄마의 표정과 말, 행동에서 비롯한 나의 감정을 묘사하는 문장들이 잔잔하게 가슴을 두드립니다. 내 엄마니깐 적어도 엄마의 마음을 잘 알지 않을까라는 감정과 엄마가 말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거리감까지. 그 절묘한 간극을 담담하게 풀어내고 있습니다.


"엄마 얼굴에 납득하지 못한 질문에 대답하라는 요청을 받고 질겁한 표정이 잠시 스쳤다. 나는 괜찮다고, 무슨 생각이건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된다고 말했다." - 눈이 올 정도로 추운지





여행 중간중간에 엄마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엄마도 할머니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다가 또 순식간에 이 사실을 잊고 어린 시절 고정된 엄마 상으로만 바라봅니다. 이처럼 상이 깨지는 경험을 되풀이하게 된다는 화자의 이야기에 비슷한 생각을 해본 (물론 저자만큼 멋들어진 비유를 들며 표현하진 못하지만) 나의 경험을 떠올리고 당시 내 감정을 되살려보느라 책장을 넘기지 못하게 됩니다.


가게에 들어서면 '우리는 어느새 습관이 된 대로 갈라섰고', 시간이 지난 후 가게 안에 엄마가 없으면 아마 입구 벤치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맞을 때처럼 엄마와 딸은 그렇게 서로를 적당히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여행에서 애초에 딸이 기대했던 알맹이 있는 대화는 나누진 못했습니다. 언제나처럼 말이죠. 그럼에도 엄마는 '우리가 함께 있음에 그리고 말이 필요치 않음에 그저 기쁘기만 한 듯이' 미소 지어 보입니다.​ 저자는 '살아 있는' 글을 최대한 단순한 형식으로 풀어내고 싶었다고 합니다. 건조함과 다정함이 오가는 독특한 문체 덕분에 제가 받은 느낌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가족과 기억과 관계 속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정체성과 존재의 심오함을 저는 제대로 건져올릴 깜냥이 되진 못하지만 말이죠.


도쿄, 오사카, 교토에서 그들이 방문한 장소는 명백히 드러나진 않지만 일본 관광지를 잘 아는 이들이라면 유추할 만한 힌트는 곳곳에 등장합니다. 엘리 출판사 인스타그램에 책 속 장소를 소개하는 피드가 있으니 궁금하신 분들은 모녀가 다녀온 곳을 확인해보세요.​


타인의 마음을 탐색한 <나주에 대하여>를 쓴 김화진 소설가의 후기도 공감 가득한 문장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엄마의 시간에 대해서는 상상하지 못하고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만 상상했다는 그가 이 책을 읽고 깨달은 감정을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친밀한 타인으로서의 엄마와 딸의 관계를 그려낸 소설 <눈이 올 정도로 추운지>. 언제가 될지 모르는 미래에 지금을 환기할 수 있는 조각을 만들어두고 싶어집니다. 함께 기억할 수 있는 것들을 더 채우고 싶어집니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