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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딜 수 없는 사랑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복복서가 / 2023년 3월
평점 :

영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이언 매큐언의 비운의 걸작 <견딜 수 없는 사랑>. 1997년에 출간되었지만 뒤이은 <암스테르담>, <속죄> 등 부커상 수상 작품에 가려 오히려 유명세를 덜 타버린 소설입니다. 국내에서도 소개되었다가 절판되었던 소설이 복복서가에서 선보이면서 이언 매큐언의 작가로서의 역량이 절정에 달한 시기에 썼다는 이 작품을 드디어 만나봅니다.
원제 <Enduring Love>의 영원히 지속된 사랑과는 상반된 느낌을 주는 제목 <견딜 수 없는 사랑>. 다 읽고 나니 원제도 한국어판 제목 모두 의미가 어울립니다. 심리 스릴러 소설 좋아하는 독자라면 좋아할 묘사 기법이 덕지덕지합니다. "나는 생각과 느낌과 감각을 갖고 있었고, 그것을 표현할 말을 찾고 있었다."라는 주인공처럼 이 소설에서 생각 흐름을 따라가며 디테일하게 묘사하는 방식이 무척 매력적입니다. 게다가 독자로부터 분노와 답답함을 뽑아낼 줄 아는 의식의 흐름이 수준급인 등장인물들이 가득합니다.
※ 해당 리뷰는 스포 방지를 위해 출판사 보도자료에서 오픈한 내용을 중심으로 작성했습니다
"우리는 재앙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재앙은 그 자체로 하나의 용광로였다." - 책 속에서
7년 차 연인 조와 클래리사가 소풍을 간 장소에서 일어난 사건이 이들의 운명을 뒤흔듭니다. 소년이 타고 있던 헬륨 기구가 돌풍에 휩싸여 하늘로 치솟을 위기에 처하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달려갑니다. 저마다 밧줄을 잡고 힘을 써보지만 3~4미터 높이로 떠올랐을 때 누군가가 줄을 놓쳐버렸고 이내 한 명씩 나가떨어집니다. 하지만 끝끝내 밧줄을 붙잡은 이가 한 명 있었는데 기구는 상공을 향해 치솟아버렸고, 그는 결국 추락사하게 됩니다. 기구에 타고 있었던 소년은 무사했지만, 이 사고로 아내와 두 아이를 둔 가장이 목숨을 잃은 겁니다.
소설 초반 흡인력이 상당합니다. 특히 조의 내면을 묘사하는 장면은 과학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는 주인공의 사고방식을 아낌없이 보여줍니다. 철학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인 도덕적 딜레마가 등장합니다. 모두가 자신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누군가 줄을 놓았고, 발이 땅에서 떨어질 만큼 몸이 떠올랐을 때 줄을 놓는 것은 본성에 속하는 행동이라고 말이죠. 처음엔 모두가 이타주의자의 마음으로 달려왔고 밧줄을 잡았지만, 어느 순간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 되어버린 상황입니다.
머릿속에서 어떻게든 줄을 붙잡고 있어야 하나 놓아야 하나 갈등할 때 누군가가 줄을 놓고 떨어지는 걸 보자 갈등은 정리됩니다. 그 순간 "이타심이 있을 자리는 없"게 되는 겁니다. 조 역시 결국 줄을 놓고 떨어집니다. 끝까지 줄을 붙잡고 있다가 결국 추락사한 남자를 보며 조는 자신이 살아있음에 안도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렇게 그들은 죄책감과 안도감을 가진 채 헤어집니다.
하지만 조는 그날의 일이 계속 맴돕니다. '나는 무슨 짓을 한 것인가? 혹은 무슨 짓을 하지 않은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지금의 불안감을 딱 부러지게 정의 내릴 순 없지만 충격이 가시지 않은 상태입니다. 조는 계속 논리적으로 답을 찾아내고자 합니다.
게다가 그날 함께 밧줄을 잡았던 이들 중 한 명인 제드 패리로부터 전화가 옵니다. 당신 감정을 이해한다고 말하고 싶어져 전화했다며 말이죠. <견딜 수 없는 사랑>은 이 전화 한 통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사랑의 다양한 형태를 보여줍니다.
논리정연한 대답으로 대응하는 습관이 있는 과학자 마인드를 가진 조, 영국 시인 존 키츠를 연구하며 감성적인 사랑을 원하는 클래리사. 그리고 집착의 사랑을 보여주는 패리까지. <견딜 수 없는 사랑>은 이들의 사랑이 얽히고설키며 사랑을 바라보는 이분법적 시각이 펼쳐집니다.
"이젠 인간이 어떤 문제에 대해 타인의 동의를 얻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우리는 절반만 공유되는 믿을 수 없는 인식의 안개 속에서 살았고, 우리의 감각 정보는 욕망과 믿음의 프리즘에 의해 왜곡되었으며, 그 프리즘은 우리의 기억까지도 왜곡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이로운 것을 보고 이롭게 기억했고, 그러면서 우리 자신을 설득했다." - 책 속에서
당신은 어떤 유형의 사랑을 해봤고, 하고 있나요. 조의 눈에 클래리사의 사랑은 감정적 논리만 주장할 뿐입니다. 클래리사의 눈에는 조가 과잉반응을 하는 것 같고 이성만 따지다 보니 한 마디로 정떨어지는 인간이 되어버립니다. 도끼병 걸린 것처럼 일방적인 사랑을 하는 이도 있습니다. 살인으로 이어지는 스토커 범죄가 심심찮게 뉴스에 나오는 것처럼 심각한 범죄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스토커에겐 그의 행동이 사랑이라고 말할 테지요.
사랑을 하면 사소한 것으로도 기쁨과 배신감의 감정을 오가기도 합니다. <견딜 수 없는 사랑>처럼 견디기 힘든 사랑이 닥쳤을 때 우린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요. 소설 속 인물들의 사랑이 연결되고 해체되는 여정 속에서 우리의 사랑을 더듬어보게 됩니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