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올 정도로 추운지
제시카 아우 지음, 이예원 옮김, 김화진 독서후기 / 엘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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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지만 에세이 느낌으로 읽은 제시카 아우의 소설 <눈이 올 정도로 추운지 (원제 Cold Enough for Snow)>. 소담하게 향수에 젖어들게 하는 소설 속 화자 딸의 단상에 흠뻑 빠져든 시간입니다.​ 중국, 말레이시아, 호주... 이주의 역사를 가진 가족의 정체성이 깃든 제시카 아우의 목소리는 동양과 서양 분위기의 혼합이 묘하게 어우러져 낯섦과 익숙함의 조화를 선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10월의 일본으로 여행을 떠난 엄마와 딸. 평소 자주 여행을 떠나는 모녀 관계는 아닙니다. 엄마는 몇 차례 머뭇거림 후 승낙했고, 도쿄에 도착했을 땐 태풍을 앞둔 계절인 탓에 비가 내리는 날이 많았습니다. 딸은 여행을 준비하면서 엄마가 뭘 보고 싶어 할지 고심해서 스케줄을 짰습니다. 첫 번째 장소는 한적한 곳에 자리 잡은 미술관입니다. 아늑한 공간 속에서 따로 떨어져 둘러보기로 합니다. 딸은 2층에 정원과 나무가 보이는 사색의 공간을 마음에 들어 합니다.​


이렇게만 보면 뭔가 식상한 여행기처럼 느껴질 수 있겠지만, 이 소설의 매력은 여행 중간중간 등장하는 딸의 관찰과 기억에 있습니다. 사소한 장면들을 엄마와 함께 맞이할 때면 추억이 따라옵니다. 그 시절의 가족을 떠올리기도 하고 남편과 친척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이 여행에서 엄마는 어떤 걸 느끼는지 궁금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여행 가자는 말에 선뜻 승낙하지 않았던 '엄마가 여기 온 게 스스로 원해서인지 아니면 그저 나를 생각해 온 건지 가늠하기가 어렵다.'는 생각도 듭니다.


<눈이 올 정도로 추운지>에서는 엄마의 표정과 말, 행동에서 비롯한 나의 감정을 묘사하는 문장들이 잔잔하게 가슴을 두드립니다. 내 엄마니깐 적어도 엄마의 마음을 잘 알지 않을까라는 감정과 엄마가 말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거리감까지. 그 절묘한 간극을 담담하게 풀어내고 있습니다.


"엄마 얼굴에 납득하지 못한 질문에 대답하라는 요청을 받고 질겁한 표정이 잠시 스쳤다. 나는 괜찮다고, 무슨 생각이건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된다고 말했다." - 눈이 올 정도로 추운지





여행 중간중간에 엄마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엄마도 할머니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다가 또 순식간에 이 사실을 잊고 어린 시절 고정된 엄마 상으로만 바라봅니다. 이처럼 상이 깨지는 경험을 되풀이하게 된다는 화자의 이야기에 비슷한 생각을 해본 (물론 저자만큼 멋들어진 비유를 들며 표현하진 못하지만) 나의 경험을 떠올리고 당시 내 감정을 되살려보느라 책장을 넘기지 못하게 됩니다.


가게에 들어서면 '우리는 어느새 습관이 된 대로 갈라섰고', 시간이 지난 후 가게 안에 엄마가 없으면 아마 입구 벤치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맞을 때처럼 엄마와 딸은 그렇게 서로를 적당히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여행에서 애초에 딸이 기대했던 알맹이 있는 대화는 나누진 못했습니다. 언제나처럼 말이죠. 그럼에도 엄마는 '우리가 함께 있음에 그리고 말이 필요치 않음에 그저 기쁘기만 한 듯이' 미소 지어 보입니다.​ 저자는 '살아 있는' 글을 최대한 단순한 형식으로 풀어내고 싶었다고 합니다. 건조함과 다정함이 오가는 독특한 문체 덕분에 제가 받은 느낌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가족과 기억과 관계 속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정체성과 존재의 심오함을 저는 제대로 건져올릴 깜냥이 되진 못하지만 말이죠.


도쿄, 오사카, 교토에서 그들이 방문한 장소는 명백히 드러나진 않지만 일본 관광지를 잘 아는 이들이라면 유추할 만한 힌트는 곳곳에 등장합니다. 엘리 출판사 인스타그램에 책 속 장소를 소개하는 피드가 있으니 궁금하신 분들은 모녀가 다녀온 곳을 확인해보세요.​


타인의 마음을 탐색한 <나주에 대하여>를 쓴 김화진 소설가의 후기도 공감 가득한 문장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엄마의 시간에 대해서는 상상하지 못하고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만 상상했다는 그가 이 책을 읽고 깨달은 감정을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친밀한 타인으로서의 엄마와 딸의 관계를 그려낸 소설 <눈이 올 정도로 추운지>. 언제가 될지 모르는 미래에 지금을 환기할 수 있는 조각을 만들어두고 싶어집니다. 함께 기억할 수 있는 것들을 더 채우고 싶어집니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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