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근데 그게 맞아?
이진송 지음 / 상상출판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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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보다가도 어느 지점에서 탁 거슬리게 하고 불편하게 하는 상황을 만난 경험이 있으신가요.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며 찰나의 재미에 집중한다면 인지하지 못한 채 넘어가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동화와 드라마를 보면서 폭발적으로 물음표를 띄운 이진송은 미디어 비평가로 활동하며 관심사와 문제의식을 자극하는 수많은 콘텐츠를 만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이진송의 아니 근데>에 연재된 글을 엮고 보완한 책 <아니 근데 그게 맞아?>에서는 여성, 아동·청소년, 외국인, 노동자, 장애인… 미디어에서 재미를 위해 착취되고 희생되는 존재들을 다룹니다. 


콘텐츠를 둘러싼 다채로운 소란을 짚어주는 이 책은 어떤 것이 맞다라는 방향지시등이 아닌 결이 비슷한 사람끼리 시원하게 긁어주는 등긁이 역할을 합니다. 아무데나 '논란'을 갖다 붙이는 언론 보도의 문제는 부당한 공격을 논란으로 탈바꿈시키는 작태를 짚어줍니다. 온라인 학대·폭력이 논란이라는 단어로 변질되었을 때 피해자는 자신을 해명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고, 대중 역시 자기반성이 뒤따르지 않게 됩니다. 


미디어의 관습적인 프레임은 수없이 많습니다. 타인의 고통을 재미로 소비하는 극복 엔터테인먼트의 문제는 스스로 극복하는 준비없이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몰아넣는, 그야말로 배려와 공감 없는 폭력과도 같다는 걸 알려줍니다. 콘텐츠 소비 속도가 빠른 시대에 끊임없이 새로운 것, 더 자극적인 것을 추구하는 대중과 제작진의 윤리 의식은 어느 수준일까요. 이진송 저자는 재미와 웃음의 이면에 담긴 것을 바라보게끔 부추깁니다. 


살인, 불륜, 폭행은 그대로 내보내지만 성소수자가 등장하는 장면은 징계를 받는 시대입니다. 우물 안 개구리에서 서로의 세계를 확장하며, 관습을 넘어서보자고 응원하는 <아니 근데 그게 맞아?>. 내가 이해할 수 없다거나, 잘 모르겠다는 것은 혐오와 차별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걸 짚어줍니다. 


흠잡을 데 없이 도덕 교과서를 만들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과장된 연기에는 재미있게 빠져들기도 하고 위안을 받기도 합니다.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건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스며 들어와 경험이나 인식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현실의 해석과 접근이 필요한 부분이라는 걸 지적합니다. 





"한 사람의 세계는 필연적으로 편협하다. 우리는 물리적 한계가 뚜렷한 몸에 기거하며 경험이 선을 그어놓은 범위 안에서 살아간다." - 책 속에서


권력 있는 사람의 갑질만큼이나 위험한 건 평범한 사람이 가진 왜곡된 사고방식입니다. 정치권은 그렇게 사회적 합의를 핑계 삼아 교묘하게 빠져나갑니다. 이분법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문화가 어떻게 이 사회를 차별로 구축되는지 생각해 보게 합니다. 


음지 문화로만 여겼던 BL은 왓챠의 첫 번째 오리지널 드라마 <시맨틱 에러>의 히트처럼 변화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삭제 당함을 경험하면서도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의식 있는 제작진들도 있습니다. 정상성에 대한 이분법적이고 편협한 사고방식을 넘어서기 위한 노력은 꾸준히 있습니다. 


드라마, 영화, 예능, 다큐멘터리, 유튜브 등에서 찾아낸 이 세상의 모습을 통해 우리 모두의 윤리 의식과 기민한 문제의식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대중문화 비평서 <아니 근데 그게 맞아?>. 수동적으로만 받아들이던 것에서 이제는 의문을 표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그럼으로써 더욱 다채로운 삶을 긍정하는 쇄신을 경험하기를 응원하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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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와 부모를 위한 긍정 훈육 - 내면이 단단해지는 상호존중의 공감 수업
제인 넬슨 지음, 김선희 옮김, 김성환 추천 / 더블북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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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러 심리학을 잇는 긍정 훈육의 표준을 제시한 제인 넬슨의 <교사와 부모를 위한 긍정 훈육>. 훈육과 양육의 살아있는 교과서, 육아서의 고전으로 알려진 이 책을 몇 년 전에 한 번 읽었는데 더블북 출판사 버전의 최신 완역판으로 다시 만나봅니다. 


"널 사랑해. ( ) 안 돼."에서 괄호 안에는 어떤 단어가 들어갈까요. 대부분 '하지만'이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오를 겁니다. 긍정 훈육에서는 다릅니다. 괄호 안에 '그리고'를 집어넣습니다. 문법적으로 맞는 말인가 싶을 정도로 낯설게 느껴질 테지만, 널 사랑한다는 부드러움 뒤의 '안 돼'는 단호하게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드러움과 단호함을 상황에 따라 다르게 사용한다고 생각했던 저도 충격적인 사고방식이었습니다. <교사와 부모를 위한 긍정 훈육>은 부드러움과 단호함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고 말하는 책입니다. 처벌도, 자유방임도 아닌 중간지대를 찾아내도록 도와줍니다. 가정과 학교라는 적용 환경이 다를 뿐 교사와 부모 모두에게 유용한 긍정 훈육법을 알려줍니다. 


어른과 아이의 상호 작용에는 세 가지 접근법이 있습니다. 지나친 통제, 자유방임 그리고 긍정 훈육입니다. 아이와 지루한 힘겨루기 싸움에 지친 부모라면 긍정 훈육을 배워보세요. 이 책에서는 벌을 주지 않고도 훈육할 수 있는 수많은 아이디어가 등장합니다. 긍정 훈육은 수치심 없는 훈육입니다. 그러고 보면 저도 그동안 비난과 창피함을 불러일으키는 잔소리를 해왔던 것 같아 반성하게 됩니다. 


부드러움과 결합한 단호함은 아이를, 부모를, 상황을 배려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긍정 훈육은 상호 존중과 문제 해결 능력을 함께 배워나가는 셈입니다. 이는 건강한 자존감을 갖추게 되고 유용한 삶의 기술로 이어지게 됩니다. 아이의 그릇된 행동에 대처하다 보면 자칫 보복의 악순환에 빠지게 되는 일이 많습니다. 긍정 훈육은 그릇된 행동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아이들은 그릇된 행동을 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신의 연령에 맞게 행동할 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어른들은 그릇된 행동으로 취급해버리고, 아이들이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통제하는 법을 배우기를 바랍니다. 


문제는 부모나 교사 역시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통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고, 아이들의 자존감에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도 아이들의 행동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 자신은 물론 아이들의 행동을 제대로 이해하면 할수록, 우리의 역할을 더 효과적으로 해낼 수 있다고 합니다. 





인간의 최우선적인 목표는 소속감과 중요성을 느끼는 거라고 합니다. 누구나 관심을 받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지나칠 때 문제가 생깁니다. 그릇된 행동은 그릇된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지나친 관심 끌기, 힘의 오용, 보복, 아무것도 못 하는 척하기를 통해 아이들은 그릇된 행동을 하게 됩니다.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합니다. 


긍정 훈육은 아이들이 간절히 원하는 소속감을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을 목표로 해결법을 고민해야 한다는 걸 짚어줍니다. 그릇된 믿음과 목표를 확인하는 실마리와 효과적인 대처법을 알려줍니다. "문제가 무엇인가? 그렇다면 해결 방법은 무엇인가?" 긍정 훈육은 해결 방법에 초점을 맞춥니다. 우리의 태도와 기술을 조금만 조정하면 가능한 일이라고 합니다. 


처벌성 타임아웃과는 다른 긍정적인 타임아웃을 아시나요. 잘못한 짓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는 타임아웃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긍정적인 타임아웃입니다. 격려도 긍정 훈육의 핵심 키워드입니다. 흔히 칭찬을 많이 해주면 좋다고 알고 있었는데, 즉각적인 결과에 대한 칭찬에 비해 자기확신이라는 장기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격려가 필요하다는 걸 배우게 됩니다. 격려를 받았을 때, 우리는 이해받고 인정받고 특별한 존재라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 격려의 과정은 학급회의와 가족회의에서도 적용됩니다. 흥미롭게도 이 책을 읽고 있는 부모와 교사도 격려받고 있다고 느끼도록 고안되었다고 합니다. 


어른의 성격이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파트도 관심있게 읽었습니다. 아이들이 자신의 그릇된 목표를 자각하지 못하는 것처럼 어른도 자신의 삶의 우선순위를 자각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숨겨진 우선순위가 성인의 그릇된 행동을 이끌고, 아이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 파트를 읽으며 저도 아이를 키우면서 제가 유독 스트레스 받는 지점의 이유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안락함에 우선순위를 둔 엄마라면 아이의 잠투정을 최대한 피하고 싶어 하기에 잠잘 시간만 되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삶의 우선순위가 통제인 엄마라면 아이들이 스케줄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우리 삶의 우선순위를 이해한다면 아이들과의 상호작용에 미치는 장단점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긍정 훈육에서는 안락함, 통제, 타인의 시선, 우월성이라는 네 가지 삶의 우선순위가 육아와 교육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짚어줍니다. 중요한 건 모든 아이의 상황에 딱 들어맞는 단 하나의 도구는 없다고 분명히 알려준다는 겁니다. 이 책에서 제시한 긍정 훈육 도구들은 결국 어른과 아이 모두 보다 큰 기쁨, 조화, 협력, 책임감, 상호 존중, 삶과 인간관계에서의 사랑을 경험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입니다. 아이도 부모도 완벽할 순 없습니다. 완벽함보다는 사랑과 기쁨을 가르치는 긍정 훈육, 삶의 버팀목이 되어준다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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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의 서재에는 반드시 심리학 책이 놓여 있다 - 부자는 심리를 읽고 빈자는 심리에 휘둘린다
정인호 지음 / 센시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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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들은 무엇을 바탕으로 판단하고 행동할까요. 그 답을 만날 수 있는 책을 소개합니다. 심리학과 경제학을 오가며 인간 행동심리를 연구하는 GGL리더십그룹 대표이자 경영평론가 정인호 저자의 책 <부자의 서재에는 반드시 심리학 책이 놓여 있다>. 자수성가형 부자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데 도움 됩니다. 


경제학 속의 사람이란 합리적 의사결정자입니다. 하지만 경제가 인간의 비합리성에서 기인한다는 행동경제학의 출현 이후 인간의 심리를 이해할 때 돈의 흐름이 보인다는 걸 알게 됩니다. 인간의 심리를 파악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 부자들은 어느 시점에서 기회가 발생하는지를 직시하고 남들과는 다르게 움직입니다. 


자수성가형 부자와 달리 빈자는 세상이 규정한 원칙과 군중심리에 휘둘립니다. 부자들은 결코 무리 지어 행동하지 않는 맹수와 흡사합니다. 심리에 휘둘리는 빈자와 달리 심리를 미리 읽고 움직이는 부자의 마인드를 이 책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부자의 서재에는 반드시 심리학 책이 놓여 있다>에서는 부자가 어떻게 부를 축적했는지 다양한 사례와 함께 각종 심리학 실험으로 이해하기 쉽게 풀어내고 있습니다. 심리와 관련된 어떤 책을 읽고 적용하는지 부자의 사고방식을 하나씩 짚어줍니다. 


모든 사람이 경제적 자유를 꿈꾸지만, 열심히 일하고 부자 되는 법을 알려주는 베스트셀러 책을 읽어도 대부분은 경제적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돈에 쪼들리면 신경이 온통 거기에 가있습니다. 다른 문제에 직면했을 때 실수하고 잘못된 의사결정을 내리게 만듭니다. 빈자가 유독 사기꾼의 표적이 되기 쉬운 것도 경제적으로 어려울수록 심리 싸움에서 불리하기 때문입니다. 근시안적 욕망에 취약해집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오징어 게임>에서도 바로 이 근시안적 본능의 오류를 가진 이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역사상 위대한 투자가로 칭송받는 사람들은 모두 역발상 투자가입니다. 결코 무리 짓지 않습니다. 유행이나 타인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는 판단력을 가졌습니다. 기본적으로 돈을 벌어들이는 행위의 본질은 '혼자 하는 작업'이라고 합니다. 이에 관해서는 사회적 동조성이라는 심리를 통해 설명하고, 관련된 책을 소개하기도 합니다. 





흥미롭게도 부자들은 운의 가치에 대해 인정합니다. 큰 고비에 직면했거나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을 때 이를 헤쳐 나갈 수 있었던 요인의 80퍼센트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우연한 사건과 만남이었다고 합니다. 운의 중요성을 명확하게 인지하는 부자들은 자신이 이룬 그 어떤 성공에도 한결같이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사회적 책임도 기꺼이 이행합니다. 재미있는 점은 대부분 사람들은 운의 영향력이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분야에서 거둔 성공조차 자신의 특별한 재능 덕분이라고 말한다는 겁니다. 실패하면 그때는 운과 같은 외부 요인 탓으로 돌립니다. 더불어 자신이 행운을 맞이할 가능성을 과대평가하고 불행을 겪게 될 가능성은 과소평가하는 행운 편향 인식도 있습니다. 


부자와 빈자의 독서에 대한 차이를 이야기하는 파트도 흥미진진합니다. 대부분의 빈자는 새로운 것보다 익숙한 것에 대해 더 알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폭넓은 공부 대신 필요한 부분만 선택적으로 하려는 경향도 강하다고 합니다. 게다가 독서를 하지 못하는 이유로 가장 많이 하는 핑계는 시간이 없다는 말입니다. 반면 부자들은 불편한 책을 읽습니다. 가용성 편향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과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경험을 공유하고 폭넓게 공부합니다.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경제 주체로 살면서 현명한 부자가 되기를 응원하는 <부자의 서재에는 반드시 심리학 책이 놓여 있다>. 심리학 책 자체를 소개하는 책은 아닙니다. 부자들의 사고방식 사례와 관련 심리 이론을 다룬 책을 연계해 설명합니다. 그 책에서 현실적으로 적용해야 할 사고방식을 짚어주고 있어 직관적으로 와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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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 Last 이제야 흉터가 말했다
리퍼 지음, 가시눈 그림 / 투영체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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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질의 그래픽노블을 만나고 싶을 때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의 추천 작품은 언제나 성공적입니다. 2018년 다양성만화지원사업 선정작 <At Last 이제야 흉터가 말했다>. 기록기와 치유기 두 권으로 구성된 이 책은 성폭력의 일상성과 개인의 치유 과정을 기록한 리퍼 작가와 가시같은 눈으로 예술이란 바늘을 들어 감정의 심장을 찌르는 자라는 의미를 담은 가시눈 작가의 그림으로 탄생한 그래픽노블입니다. 


친척 오빠로부터 결혼 소식을 받은 날, 어린 날의 악몽을 다시 떠올리는 주인공 '이제야'. 어린 시절 친척 오빠로부터 성폭력을 당한 주인공은 기이한 감정을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친척 오빠 한 명만이 아니었습니다. 유치원 시절 이웃집 대학생으로부터, 학원 선생님으로부터, 유행처럼 번지며 못된 행동을 하던 학교 남자아이로부터, 등굣길 버스 안 치한으로부터... 


당시엔 어떻게 대처했을까요. 뭐가 잘못된 건지 인지하지 못하던 시기엔 그저 비밀처럼 입을 다물고 있기만 했고, 친척 오빠의 미안 한 마디에 그냥 넘어가기도 했고, 어떤 땐 엄마에게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은 그를 더욱더 자책감과 죄책감에 빠지게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너는 잘못이 없어."라는 마법의 말을 엄마로부터 듣기까지 했는데도 말입니다. 몇 달 후 엄마가 가해자의 엄마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본 날, 엄마는 정말 다 잊을 수 있는 걸까라며 충격받는 장면에선 저도 어안이 벙벙해졌습니다. 


그 일들은 일상을 좀먹는 벌레처럼 자리 잡습니다. 악몽을 꾸고 우울증에 빠지고 연애와 결혼관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남성들이 호의를 가지고 접근할 때조차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이성적 접근 자체가 혼란스러워진 겁니다. "오빠 좋아하니?"라는 말도 그루밍으로 다가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상대에 대해서도 혼란스러운 건 마찬가지입니다. 


엄마에게서 몸을 혼자 씻는 법을 배우던 날, 다른 사람이 만지면 큰일 난다는 말을 한 엄마에게 어떤 큰일이 나느냐고 기필코 대답을 받아내는 '이제야'. 이 장면에서 가정 성교육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여자 인생은 그걸로 뒈지는 거라는 엄마의 대답. 이미 비밀이 있었던 '이제야'에게는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치명타였습니다. 그 일이 있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고, 아니면 잊히기라도 했으면 한다는 처절한 고백. 그저 묻어뒀을 뿐 지워지지 않는 기억들입니다. 상실감, 무력감을 안긴 여러 사건들은 그렇게 비밀을 계속 지켜야 하는 아이로 살게 만듭니다. 


방어적인 태도는 일상 곳곳에서 드러났습니다. 그러면서도 누구보다 평범한 여성으로 보이길 바라는 마음도 가졌습니다.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흉터의 기록기를 쓰면서 그동안 떠올리는 것을 금기시했던 그 사건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그렇게 용서해버린 스스로를 혐오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나쁜 기억들을 떠올리며 하나씩 개별 사건들을 인지하게 됩니다. <At Last 이제야 흉터가 말했다> 치유기 편에서 질문하고 스스로 답을 찾는 여정을 만나게 됩니다. 심리 상담도 해봤습니다. 첫 심리 상담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평생 감정을 표현하지 못했던 그를 자극하는 계기가 됩니다. 나쁜 기억들을 기억의 잔으로 표현한 장면이 인상 깊었습니다. 기억의 뇌라는 컵에 상담이라는 빨대를 휘휘 저으니 나쁜 기억들이 떠오릅니다. 다시 가라앉는 걸 기다려보지만, 평정심을 찾을 때까지의 시간은 오로지 스스로의 몫이라는 걸 깨닫습니다. 


매번 흉터가 찾아와 책망하고 비난했던 시간들. 나쁜 경험을 말하고 그 감정을 이해받는 경험이 없었던 '이제야'는 비로소 감정의 억압을 터트려 풀어주는 경험을 알게 됩니다. 더 이상 그 일이 인생을 휘두르게 둬선 안된다는 생각에 성폭력 피해자들의 자조 모임에도 나가봅니다. 이곳에서 피해자다운 반응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도 깨닫게 됩니다. 성폭력에 대해 공부도 시작하고, 미투 관련 다큐에도 참여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공개적으로 꺼내기로 결심합니다. 


슬프고 화나는 일들을 보면서 누군가는 다행히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며 묘한 안심을 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기억 저 너머로 숨겨뒀던 일을 떠올리며 괴로워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야' 역시 지독한 그림자를 쉬 없앨 순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흉터를 무시하고 침묵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마주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신당동 스토커 살인 사건처럼 여전히 이 세상은 도움을 청한 여성의 목소리를 무심하게 듣습니다. 우리 사회는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림책에서는 엄마에게 말하면 다 해결된다고 나오지만, '이제야'는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작가는 정작 내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대처를 알고 있기는 한 건지 묻습니다. 그리고 그게 엄마의 책임이기만 한건지도 묻습니다. 그저 일부 개인의 경험일 뿐이라며 무관심한 시선을 두지 않길 바라는 리퍼 작가의 마음을 이 책에서 엿볼 수 있었습니다. 


남자가 여성의 성폭력 경험을 듣고 "맘이 아프다"라며 깊은 공감을 하는 에피소드처럼 마음의 흉터를 더 나누며 대화를 해야 하는 세상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의심을 품었던 이들에게는 연대의 힘이 어떻게 흉터를 가진 이들에게 스며들면서 삶의 회복으로 작용하는지 생생하게 바라보게 될 겁니다. 


때로는 은유적이지만 소름 끼치는 그림으로 충격을 안기고, 때로는 귀여운 그림으로 연민의 정을 안기며 리퍼 작가의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가시눈 작가의 매력적인 그림이 인상 깊은 그래픽노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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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의 밤
블레이크 크라우치 지음, 이은주 옮김 / 푸른숲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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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오 가쿠의 초공간과 유명한 사고실험인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통해 설명하는 양자역학의 다세계. 작가의 놀라운 상상력이 더해져 이토록 매력적인 소설로 탄생했습니다. 


할리우드 시나리오 작가 블레이크 크라우치의 SF 스릴러 소설 <30일의 밤>. 애플TV에서 조엘 에저튼 주연으로 드라마 제작 확정된 원작 소설입니다. 오랜만에 SF 소재에다가 액션 스릴러가 가미된 흥미진진한 흐름의 소설을 만나서 어깨춤이 절로 날 지경이에요. 

목요일 밤은 제이슨이 아내와 아들과 함께 하는 가족의 밤입니다. 15년 전 아내 다니엘라는 시카고 미술계 유망주였고, 제이슨은 연구자로서의 갈림길에 서 있었습니다. 그들이 궤도를 이탈하게 된 건 아이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바람에 미술계와 과학계가 손해를 본 셈이라며 우스갯소리를 하지만, 친구들이 그 분야에서 잘 나갈 때면 씁쓸해지는 기분이 듭니다. 하지만 지금의 삶을 사랑합니다. 

제이슨이 잠시 외출한 목요일 밤, 이 삶은 산산이 부서집니다. 괴한으로부터 납치를 당한 제이슨. 이것저것 이상한 질문을 하는 괴한에게 약물을 주사 맞고 정신을 잃게 됩니다. 잠시 뒤 이상한 장소에서 깨어난 제이슨은 누군가로부터 대단히 영웅적인 임무를 수행하고 귀환한 것처럼 환영을 받습니다. 무려 14개월 만에 돌아왔다나요. 


미묘하게 낯선 세계. 직업, 결혼... 모든 것이 달라져 있습니다. 아내 다니엘라와는 15년 전 헤어진 상황이었고 자신은 어떤 비밀 프로젝트를 수행하던 상태였습니다. 


제이슨이 깨어난 곳은 바로 또 다른 세계의 제이슨이 (제이슨2라고 부릅니다) 살던 세계였습니다. 제이슨을 납치했던 괴한이 바로 제이슨2였던 겁니다. 제이슨2는 제이슨의 삶을 빼앗고 이곳으로 보내버렸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생각, 우리가 내릴 수도 있는 모든 선택이 새로운 세계로 분기하며 그 다른 현실들도 존재한다는 것, 다중우주론을 바탕으로 쓰인 <30일의 밤>. 닥터 스트레인지의 판타지적인 분위기나 테넷의 시간 역전보다 오히려 이쪽이 훨씬 실재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제이슨2는 과학자로서 연구를 이어나간 다른 버전의 제이슨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가 만든 건 시공간상으로 동일한 지점의 다른 현실들과 연결해 주는 장치입니다. 제이슨2는 자신이 가지 않은 길에 집착했고, 결국 이런 일을 벌인 겁니다. ​


아쉽게도 제이슨2의 장치는 랜덤템이었습니다. 그가 원하는 세계를 상상하면 최대한 그 세계로 연결되지만 자신이 어느 제이슨의 세계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겁니다. 





우리의 삶은 하루하루 선택의 결과로 이루어져 있는 만큼 다른 버전의 제이슨 세계는 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원래 세계를 찾기 위해 노력하지만 계속된 실패 속에서 제이슨에게 남은 기회는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가 이런 시도를 하면서 그 시점에서부터의 또 다른 제이슨들이 계속 생성되고 있다는 겁니다. 


드라마가 시즌제로 계속 이어진다면 제이슨이 들르는 다양한 세계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만으로도 풍성한 스토리가 만들어질 것 같습니다. 너무나 많은 버전의 나를 상상해 봅니다. 어떤 버전이든 그 속에서 나는 분명 후회를 할 겁니다. 삶은 불완전하니까요. 하지만 그 삶에서 대체 불가능한 무언가는 분명 있을 겁니다. 그것이 그 세계의 나를 지탱해 주고 나의 정체성을 굳건히 해주지 않을까요. 


후회를 없앨 수 없는 장치를 만들어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열망을 빼앗는 것으로 선택한 제이슨2. 당신은 이런 물건이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선택을 후회하며 사느냐, 감수하고 사느냐를 다양한 버전의 캐릭터로 적나라하게 보여준 <30일의 밤>입니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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