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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살 것 같은 느낌에 관하여 - 저항의 문장가 윌리엄 해즐릿 에세이의 정수
윌리엄 해즐릿 지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25년 10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윌리엄 해즐릿 에세이집 세 번째 책 『영원히 살 것 같은 느낌에 관하여』. 불안의 시대, 해즐릿이 던지는 직격탄을 만나보세요.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 『왜 먼 것이 좋아 보이는가』, 『영원히 살 것 같은 느낌에 관하여』를 관통하는 것은 윌리엄 해즐릿의 정면돌파적 시선입니다.
시대의 권위에 맞섰던 급진적 지식인이었던 해즐릿은 일상의 사소한 감정부터 인간 존재의 근원적 조건까지 예리하게 들여다보았습니다. 이 세 권은 그가 에세이라는 형식을 통해 어떤 담론의 무기로 자리매김했는지를 보여주는 사유의 무기고입니다.
우리는 지금 해즐릿이 살았던 시대와 놀라울 만큼 유사한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권위주의의 부활, 혐오의 확산, 경제적 양극화, 지적 나태함, 그리고 무엇보다 착한 척의 범람. 해즐릿은 이 모든 것에 대한 해독제입니다.

해즐릿의 글은 지금 우리의 삶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알고리즘의 노예가 되어 사고를 외주화하며, 불편한 진실에서 눈을 돌리는 우리 자신을 보여 주는 거울 말이죠. 해즐릿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정말 생각하는가? 당신의 신념은 진짜 당신의 것인가? 당신은 살아 있는가 아니면 그저 존재하는가?
그럴듯한 말로 포장된 위로에 둘러싸여 있는 우리를 흔들어 깨우는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해즐릿은 그 역할을 합니다. 19세기 영국의 급진적 공화주의자였던 윌리엄 해즐릿. 그는 보수주의자들에게 증오의 대상이었고, 1830년 런던 소호의 허름한 하숙집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문장들은 200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팍을 후벼 팝니다.
『영원히 살 것 같은 느낌에 관하여』는 아티초크 출판사가 국내에 소개하는 세 번째 해즐릿 에세이집입니다. 이번 선집에는 저항의 문장가라는 수식어가 왜 붙었는지 보여 주는 여덟 편의 에세이가 실려 있습니다.
첫 번째 에세이부터 해즐릿은 칼을 빼 듭니다. "그에게 지금 유행하는 생각을 포기하라고 설득하는 건, 마치 옷의 앞뒤를 돌려 입으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가 늘 입에 올리는 '최고의 사람들'이란 실은 자기 소유지에 살면서 타인의 생각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뜻한다."라는 문장이 와닿습니다.
해즐릿이 공격하는 '진부한 비평가'는 문학 평론가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의 초상화입니다. 유행하는 담론에 편승해 마치 자기 생각인 양 떠드는 현대인 말이죠. 해즐릿은 이런 지적 나태함을 짚어냅니다.
"그가 말하는 '세상의 의견'이란 것도 사실은 자신이 드나드는 작은 모임 안에서 오가고 들리는 말들일 뿐이다."라며 에코 챔버 현상을 19세기에 이미 예견한 듯한 이 문장은 우리가 얼마나 좁은 세계 안에서 전부를 본다고 착각하는지 일깨워 줍니다. 해즐릿은 진부함이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위험이라고 봤습니다. 독립적 사고의 부재는 권위주의가 자라나는 토양이니까요.
두 번째 에세이에서 해즐릿은 우리 사회가 찬양하는 '온화함'을 비판합니다. "온화함, 또는 흔히 그렇게 여겨지는 성품은 모든 덕목 가운데 가장 이기적인 것이다. 열에 아홉은 그저 게으른 기질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라고 말입니다.
수많은 '착한 사람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나는 분쟁을 싫어해"라며 중립을 가장한 방관자들 말입니다. 해즐릿은 이런 온화함을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는 인도주의에 불과하다고 일갈합니다. 해즐릿에게 온화함은 위선의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세 번째 에세이는 인간관계의 핵심을 파고듭니다. "첫인상이 가장 진실에 가까운 경우가 많다. 우리는 첫인상을 그럴듯한 말이나 행동에 속아 잊어버렸다가, 결국 대가를 치르고서야 그 사실을 깨닫곤 한다."라고 말합니다.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묘한 불편함을 이성으로 억누르고 "편견을 가지면 안 돼"라며 넘어갔던 순간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면, 그 첫인상이 정확했던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해즐릿은 우리에게 직관을 믿으라고 말합니다. "한 사람의 얼굴은 오랜 세월이 만든 결과물이며, 그의 삶 전체가 표정에 새겨져 있다. 아니, 그것은 자연이 직접 찍어낸 흔적이며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라고 말입니다.
네 번째 에세이에서 해즐릿은 종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급진적 유니테리언 목사의 아들로 자란 그는 종교의 본질과 그것을 악용하는 인간의 위선을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이 에세이는 신앙 자체를 공격하지 않습니다. 대신 신앙을 가장한 자기기만, 경건함의 탈을 쓴 권력욕, 구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을 해부합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차별을 정당화하고, 신앙을 정치적 도구로 사용하며, 구원을 미끼로 권력을 행사하는 현상은 여전합니다. 해즐릿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신앙은 진정한 믿음인가, 아니면 사회적 안전망인가? 당신은 신을 따르는가, 아니면 신의 이름을 빌려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하는가?
다섯 번째 에세이는 가난 그 자체보다 가난이 드러내는 인간관계의 민낯을 이야기합니다. "가난은 굴욕만 안겨 주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민낯까지 드러낸다. 가난 그 자체보다 상처가 되는 것은 가난해졌을 때 받는 대우다."라고 말합니다.
경제적 여유가 있을 때는 친구였던 사람들이 어려워지면 연락을 끊고, 성공했을 때는 관대하게 봐주던 실수들이 실패하면 치명적 결함이 되는 현실. 해즐릿은 가난이 물질적 결핍 이상의 것, 즉 사회적 죽음에 가까운 경험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섯 번째 에세이는 인도인 곡예사의 묘기를 관찰하며 예술과 기술의 본질을 탐구합니다. 해즐릿은 자신의 직업적 고민을 드러냅니다. 곡예사는 실수하면 피를 흘리지만, 작가는 형편없는 글을 써도 당장은 아프지 않습니다. 그 모호함이야말로 글쓰기의 위험이자 유혹입니다. 곡예사의 기술은 생존과 직결되지만, 작가의 기술은 평가와 역사의 심판을 기다려야 합니다.
콘텐츠 범람의 시대. 누구나 글을 쓰고, 누구나 창작자가 될 수 있는 시대입니다. 해즐릿은 예술가의 책임을 말합니다. 피 흘릴 각오가 없다면, 칼을 들지 말라고.

표제작인 일곱 번째 에세이는 청춘을 찬미하면서 동시에 그 허상을 폭로하는 글입니다. 젊음의 가장 큰 자산은 무한한 시간이 있다는 환상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진짜로 '느끼지'는 않습니다. 그 간극이 청춘을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위험하게 만듭니다.
청춘이 영원할 것 같은 느낌은 착각이지만, 동시에 그 착각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역설. 만약 우리가 진짜로 유한함을 체감한다면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을 테니까요. 청춘의 오만함은 필요악입니다. 문제는 그 환상이 깨졌을 때 어떻게 대응하느냐입니다.
마지막 여덟 번째 에세이는 병상에 누워 바라본 세계를 묘사하며, 고통과 고독이 가져다주는 통찰을 이야기합니다. 몸이 무너질 때, 우리는 비로소 무엇이 본질적인지 알게 됩니다. 건강할 때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얼마나 사소한지, 반대로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됩니다.
해즐릿의 문장은 때로는 시처럼 아름답고, 때로는 철학처럼 날카롭습니다. 논리적이면서도 감성을 자극하고, 개인적 경험에서 출발해 보편적 진리에 도달합니다. 해즐릿의 문학 비평론은 월터 페이터와 토머스 칼라일에게 영향을 주었고, 20세기의 조지 오웰과 크리스토퍼 히친스 같은 정치 에세이스트들에게도 이어졌습니다. 버지니아 울프의 에세이에서도 해즐릿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덟 편의 에세이를 관통하는 핵심은 위선에 대한 거부입니다. 해즐릿은 이면에 숨은 거짓을 폭로합니다. 각성의 시작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