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비니아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준영 옮김 / 황금가지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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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에 별세한 그녀의 마지막 장편소설 <라비니아>. 르 귄 작가는 골수팬이 많은 걸로 아는데, 저는 이 책으로 르 귄 표 소설을 처음 접했어요. 평소 좋아하던 미래지향적인 SF 소설의 통념을 깨뜨린 소설이라 신선하게 읽었습니다. 시적이고 신화적인 요소가 풍부해 품격 있는 고전 서사시를 읽는 느낌이었습니다.

 

 

 

라틴어로 쓰여진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이스》에 아주 짧게 등장하는 라비니아. 소설 <라비니아>는 그녀의 삶을 재조명합니다.

 

어머니가 아프로디테이고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토스가 만든 무구를 가진 영웅 아이네아스. 트로이 전쟁 후 트로이 유민들을 이끌고 라티움(로마의 남서부 지역)의 땅에 도착한 아이네아스와 결혼해 아들 실비우스를 낳은 여자가 라비니아입니다. 실비우스는 로마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의 직계 조상이 되었습니다.

 

로마 건국 신화로 이어지는 기원전 8세기를 배경으로 라티움의 왕녀 라비니아의 삶에 초점 맞춘 소설 <라비니아>. 라비니아를 찰나만 등장시킨 베르길리우스가 시공간을 뛰어넘어 라비니아와 직접 만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라는 상상력에서 소설이 탄생했습니다.

 

 

 

죽어가는 사람, 생령으로 라비니아 앞에 나타난 베르길리우스. 당시 열여덟 살인 라비니아를 만나 대화를 나누며 베르길리우스는 한탄합니다. 그의 시 안에서 라비니아는 아무 존재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쓴 서사시는 어리석고 진부하고 상상력 없는 것이었다며, 그녀에 대해 너무나도 몰랐었다고 안타까워합니다.

 

 

 

라비니아의 일생이 담긴 소설 <라비니아>. 어머니는 두 아들을 잃은 후 라비니아에게 정신적 학대를 가했고, 열여덟의 나이에 라비니아가 탐탁지 않아 하는 남자에게 시집보내려 합니다.

 

 

 

하지만 이미 라비니아는 베르길리우스와의 대화로 자신의 미래를 알고 있습니다. 라비니아는 이 땅으로 올 영웅을 기다립니다. 그러던 차에 머리카락에 불이 붙어 활활 타올랐지만 전혀 다치지 않은 사건이 벌어지는데.

 

찬란한 명예, 찬란한 영광이 라비니아의 머리에 씌워지리라.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시민들을 전쟁으로 몰고 가리라.

 

 

 

트로이 유민들을 이끌고 운명의 땅에 도착한 아이네아스. 이방인에게 왕녀를 주지 않기 위해 그와의 전쟁을 불사하는 무리가 생겼고 서로 간에 살육이 이어졌으나 결국 아이네아스와 라비니아는 결혼하게 되죠.

 

하지만 베르길리우스로부터 이미 미래를 들은 라비니아. 아이네아스와의 꽃길은 단 3년뿐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운명을 알고 산다는 것. 아내와 어린아이를 두고 남편이 일찍 죽을 거라는 걸 아는 라비니아의 심정이 절절하네요.

 

아내의 이름을 따서 라비니움이라는 도시를 세운, 위대한 전사였으나 평화를 추구했던 아이네아스. 수많은 조연들이 그와 함께했지만, 영웅 아이네아스를 사랑했고 그가 죽은 후 아들을 잘 지켜내고 라티움의 여왕으로 살다 간 라비니아를 기억해야 할 겁니다. 모든 위대한 영웅에게는 위대한 아내와 위대한 어머니가 있었다는 사실을. 존재감 없었던 라비니아를 생생하게 살아 숨 쉬게 한 소설 <라비니아>. 라비니아의 삶 마지막 즈음엔 울컥하게 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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