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7번째 기능
로랑 비네 지음, 이선화 옮김 / 영림카디널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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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쿠르 신인상을 수상하고 동명의 영화로도 만들어진 <HHhH> 원작소설 작가 로랑 비네의 두 번째 소설 <언어의 7번째 기능>. 역사 덕후답게 이번 소설도 실화의 바다에 픽션 문체를 얹었습니다. 전작을 읽고 나서 그의 다음 소설을 무척 기다렸는데 "누가 롤랑 바르트를 죽였나?"라는 부제처럼 이 책도 '그것이 알고 싶다' 분위기 제대로예요.

 

 

 

 

 

소설 <언어의 7번째 기능>은 프랑스 철학자이자 비평가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의 죽음에 얽힌 사연을 파헤칩니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당시 학계를 주름답던 인물들이 총출동합니다.

 

 

 

 

1980년 2월 25일. 파리에서 세탁물 운반 트럭에 치여 한 달 간 혼수상태를 오가다 3월 26일 사망한 롤랑 바르트. 로랑 비네 작가는 바르트의 죽음을 타살로 설정합니다. 사고 당시 신분증이 사라지고 그가 가지고 있던 종이 한 장이 사라지는데. 소설 <언어의 7번째 기능>은 바르트에게서 훔친 그것의 정체를 찾는 여정입니다.

 

 

 

그날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롤랑 바르트 사건을 맡은 바야르 수사관. 수사 과정에서 지식인들의 용어를 해석해줄 대학교수 시몽과 함께 이 사건을 파헤칩니다. 바르트의 목숨을 앗아갈 만큼 귀중한 텍스트. 텍스트에 관해 아는 자들이 하나둘 제거되고, 1980년 프랑스 정치 상황까지 엮입니다. 당시 대통령인 지스카르 데스탱과 차기 대통령이 될 프랑수아 미테랑의 신경전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신화론』, 『기호학의 원리』, 『사랑의 단상』 등의 저서를 남긴 롤랑 바르트. <언어의 7번째 기능>에서는 기호학과 관련한 이론이 등장합니다.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언어가 가장 좋은 수단이지만 언어로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바르트에게 기호는 단순한 기호가 아닌 세상을 장악하는 지표입니다. 로랑 비네 작가는 소설 속 가공의 인물인 시몽 교수가 007 영화로 기호를 해석하는 방법을 들려주는 강의 장면을 묘사함으로써 독자들은 낯선 기호학 이론을 수월하게 접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권력은 언어죠." - 책 속에서

 

 

 

텍스트의 비밀은 러시아 언어학 대가인 로만 야콥슨의 언어의 기능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알려진 언어의 여섯 기능 외 7번째 기능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 자리에 있지 않은, 혹은 살아 있지 않은 제3의 인물을 능동적 메시지를 전할 대상으로 전환하는 것'이라는 마법적 혹은 주술적 기능입니다.

 

 

 

철학자들의 말은 당최 알아먹지를 못하겠으니, 바야르 수사관과 시몽 교수의 해석은 단비처럼 반갑습니다. 거기에 위대한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가 등장해 독자도 이해 가능한 힌트를 던집니다. 언어의 수행적 기능이 원래 허용된 것보다 훨씬 많이, 무엇이든, 누구에게든, 어떤 상황에서든 더 많은 걸 하게 한다면? 이런 기능을 알게 된 사람, 그것을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세계의 주인이 될 수 있게 되는 거죠.

 

 

 

이제 우리는 언어의 7번째 기능이 가진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롤랑 바르트가 잃어버린 텍스트는 그 기능을 사용할 수 있는 사용법이었던 겁니다. 텍스트를 내 것으로 하기 위해서 달려드는 건 지식인이고 정치인이고 똑같았어요. 어디부터가 픽션인지 혼란스러울 정도로 소설은 지식인 스타들의 내밀한 모습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소설 <언어의 7번째 기능>에서 비중이 꽤 높은 로고스 클럽. 사건을 파고들수록 로고스 클럽이 튀어나옵니다. 이곳에서는 말로 겨루는 결투가 있는데 서열에 따라 도전자의 손가락까지 걸고 하는 무시무시한 결투입니다. 하나의 주제를 두고 두 사람이 대결해 우승자를 가립니다. 이해하고 분석하고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게 하는 방어적인 기호학적 접근법과 설명하고 설득하고 공격적인 수사학적 접근. 대결 장면을 읽을 때면 그들의 생각 정리와 말솜씨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어요.

 

 

 

텍스트를 손에 넣은 자가 로고스 클럽의 위대한 프로타고라스라 불리는 1인자에게 도전할 거라는 소문이 돌면서 텍스트는 누가 가진 건지, 위대한 프로타고라스의 정체는 누구인지 그리고 과연 언어의 7번째 기능은 효과를 발휘할지 클라이맥스를 향해 갑니다.

 

 

 

 

 

소설 <언어의 7번째 기능>에서 로랑 비네 작가는 바르트가 살던 시대의 유럽, 미국 지식인 스타들을 바르트를 살해할 동기가 있는 용의자로 과감하게 다룹니다. 이렇게 픽션을 던지면 명예훼손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죠. 미셸 푸코, 쥘리아 크리스테바, 필리프 솔레르스, 루이 알튀세르, 로만 야콥슨, 존 설, 자크 데리아, 움베르토 에코 등 헉 소리 날 만큼 유명 지식인들이 대거 등장합니다. 2015년 원작 출간된 소설이라 2016년에 사망한 움베르토 에코를 현존하는 마지막 기호학자 중 한 명으로 소개했습니다.

 

 

 

당시 프랑스 정치 상황을 전혀 모르던 제 배경지식으로는 낯선 이야기들이 많았지만, 스토리를 따라가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묵직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어요. 유명 지식인들의 또 다른 모습을 상상하는 맛이 있습니다. 소설에 등장한 지식인들 한 명 한 명의 면모를 더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네요.

 

 

 

누군가는 팔고 싶어 했고, 누군가는 사고 싶어 했고, 누군가는 없애려고 했던 언어의 7번째 기능 사용법이 적힌 종이. 롤랑 바르트의 죽음에 이런 소재를 얹어 유명 지식인들을 소설 속에서 마음껏 갈아버리다니. 성, 폭력  등 로랑 비네 작가의 전작에서도 감지했지만 묘사 수위도 조금 있는 편. 음모론 같은 소설을 내놓은 로랑 비네 작가에게 다시 한번 감탄합니다. 전작 <HHhH>가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도 영화로 만들어졌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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