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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안녕
유월 지음 / 서사원 / 2025년 5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매일 타인의 아픔을 기록하는 가사조사관의 눈으로 바라본 우리 시대 가족과 관계의 민낯 그리고 상처와 치유의 과정을 섬세하게 담아낸 소설 <마침내, 안녕>.
배우 최강희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라 극찬했고, 출간과 동시에 드라마 제작이 확정된 이 소설은 법원이라는 공간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인간군상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모두의 외로움과 연결에 대한 갈망을 포착해냅니다. 유월 작가의 데뷔작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뛰어난 감정 묘사와 섬세한 시선으로 깊은 여운을 남기는 이 소설, 꼭 만나보세요.
주인공 도연은 법원에서 근무하는 가사조사관입니다. 이혼, 재산분할 등의 사건에서 당사자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는 일을 합니다.
기대와 달리 법원은 기이한 모습을 보입니다. 근엄하고 합리적이어야 할 법원의 이면에 존재하는 보수적이고 때로는 우스꽝스러운 현실을 날카롭게 포착해냅니다. 풍자를 넘어서 제도권 내에 자리 잡은 관습과 형식이 얼마나 허망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 안에서 생존해야 하는 사람들의 모순적 상황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도연이 조사실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사연은 각양각색이지만, 그들의 표정은 우울과 불안과 분노가 필요한 만큼 적당히 섞인 얼굴로 묘사됩니다. 그러면서도 저마다의 사연 속에 담긴 취약함과 아픔을 세심하게 들여다봅니다.
자신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아이를 남기고 재혼을 선택한 엄마, 조직폭력배였던 과거를 숨기고 결혼했다가 폭력과 술로 자기 삶을 망친 남자, 갑작스러운 조현병으로 가족을 잃게 된 가장 등 다양한 사연들이 등장합니다.
19세 소녀 시재의 이야기가 인상 깊었습니다. 가정 내 권력 관계와 그 속에서 희생되는 아이의 모습을 식물의 은유를 통해 섬세하게 포착해냅니다. 작가는 가정폭력의 심각성을 고발하면서도 그 속에서도 자라나는 시재의 생명력을 놓치지 않습니다.
도연은 자신이 돌보지 못했던 언니의 상처를 시재를 통해 다시 마주합니다. 이혼한 부모, 새아빠, 가정폭력의 그림자 아래 자라며 자신을 음지 생물처럼 여기던 시재의 사연은 도연의 과거를 소환합니다.
도연과 시재 사이의 관계는 치밀한 돌봄 대신 무심한 듯 연결되는 정서적 동조의 힘을 보여줍니다. 유월 작가는 소리 없이 흘러가는 위로의 미학을 펼쳐보입니다.

법원이라는 공간은 누군가의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장면들을 압축해 보여주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 장면들을 반복해서 접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도 문제가 되기 전까지는 문제를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누구에게도 닿지 않는 도연의 말은 점차 무력해졌고, 보고서를 쓰는 것마저 지겨워질 때쯤 사건을 빨리 털어내는 것만이 목적이 되었다."라며 도연의 안일함은 버티기 위한 전략이 됩니다.
도연은 언제나 성실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을 지키려 애쓰던 아이였습니다. 하지만 타인의 인생을 끊임없이 듣는 일을 하면서 오히려 점점 무감각해지고 맙니다. 도연의 회피는 단순한 무책임이 아니라 매일 불행을 마주해야 하는 감정노동자의 방어기제와도 같습니다.
도연은 "협조하지 않는 당사자는 진상이라고 규정하면 그만"이었다며 자신의 안일함을 인정합니다. "남을 탓하는 건 언제나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는 인식을 통해 자신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모습마저도 공감됩니다.
<마침내, 안녕>은 다양한 에피소드를 거치며 도연의 과거를 조금씩 드러냅니다. 대학병원에서 임상심리사로 일했던 경험, 어릴 때부터 최선을 다해서 살라는 아버지의 말에 시달렸던 기억, 언니와의 복잡한 관계 등이 차츰 모습을 드러냅니다.
유월 작가는 인물들의 상처가 변화하는 여정을 세심하게 따라갑니다. 소설에서 만나게 되는 이 변화와 성장은 대단한 결심이나 드라마틱한 반전으로 그려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회복이라는 느리고 반복적인 감정의 물결이 관통합니다. 과거를 향한 회한, 당사자에 대한 연민 그리고 자신에 대한 이해. 도연은 조용히 그리고 느리게 변화합니다.
무엇보다 <마침내, 안녕>은 타인의 고통을 들여다봄으로써 자기 자신도 치유해 나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소설의 제목은 어떤 사람과의 작별, 과거의 상처에 대한 작별, 성실한 삶이라는 강박과의 작별입니다. 동시에 안녕이라는 단어 덕분에 새로운 인연, 새로운 시작을 받아들이는 선언을 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섬세한 문장들을 읽는 그 자체만으로 위로가 됩니다. 누군가의 고통이 사사롭게 처리되지 않을 때, 그 고통을 진지하게 듣고 공감할 때 우리 모두가 조금씩 회복될 수 있다는 메시지가 가슴에 머무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