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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로 보다, 근현대사 - 한국 근현대사의 순간들이 기록된 현장을 찾아서 ㅣ 보다 역사
문재옥 지음 / 풀빛 / 2025년 4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우리가 무심히 지나쳤던 거리와 골목, 공원, 시장의 풍경에서 역사의 기억을 끌어올리는 <장소로 보다, 근현대사>. 장소를 통해 시대를 읽고, 공간을 통해 기억을 복원하며, 역사적 상상력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저자 문재옥은 여러 역사 박물관에서 활동하는 도슨트로, 그간의 풍부한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서울과 경기 지역 14개 코스를 엮어 근현대사의 흔적을 되살려 냅니다.
교과서에서만 접하던 역사적 사건들은 어딘가 멀리 있는, 우리 일상과는 동떨어진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장소로 보다, 근현대사>는 우리가 매일 지나치는 공간들이 사실은 역사의 현장이었음을 일깨워 줍니다.

한국 근대사의 출발점인 개항의 역사를 되짚는 첫 장은 강화도와 제물포 개항장을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교과서 새 단원마다 제시되는 학습목표처럼 이 파트에서 우리가 왜 이 장소와 역사를 알아야 하는지 콕 짚어줍니다.
병인양요, 신미양요가 벌어졌던 정족산성과 광성보, 강화도 조약 체결 장소인 연무대는 자주국방이란 이상과 식민의 현실이 교차했던 지점을 보여줍니다.
지금의 인천 자유공원에 서 있는 맥아더 동상 자리가 과거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었던 세창양행 기숙사 터라고 합니다. 하나의 장소에서도 여러 시대의 층위가 겹쳐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저자는 장소의 변화를 통해 지워진 역사와 남겨진 흔적의 의미를 짚어냅니다. 응봉산 일대의 서양식 건물들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제물포구락부의 사진 자료는 그 시절을 상상하게 만듭니다. 장소는 기억의 고리이자, 역사를 상기하게 하는 키워드입니다.
두 번째 장에서는 서울의 북촌과 정동으로 시선을 돌려 격변의 순간들을 살펴봅니다. 삼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의 현장인 북촌과 창덕궁,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의 현장인 경복궁 내 건청궁, 그리고 세계를 향해 문을 연 조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정동의 각국 공사관을 찾아갑니다.
서양인들은 한 지역에 모여 사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선택된 곳이 정동이었다고 합니다. 도심 중심부임에도 정동에는 대한제국의 꿈을 품은 흔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건청궁과 환구단, 경운궁 등의 장소는 조선 말기 정치적 혼돈과 새로운 체제의 시도를 보여주는 무대입니다.
세번째 장에서는 일제 침략기의 역사적 현장들을 찾아갑니다. 남산 일대는 일제의 지배가 도심 깊숙이 스며든 흔적의 집합소입니다. 통감관저터, 조선총독부 자리, 조선신궁터, 혼마치까지 식민 지배의 물리적 증거들이자, 우리 근현대사의 가장 아픈 장면들을 기억하게 합니다.
명동은 문화의 거리 혹은 관광지 이미지 이면에, 한때 조선의 중심지였던 과거를 숨기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 공간의 전환을 날카롭게 짚어줍니다. 남촌(지금의 명동, 을지로, 남대문 일대) 지역은 일본인만을 위한 공간으로 재편되었고, 조선인들은 경제·문화적으로 배제되었습니다.
네 번째 장은 3.1운동과 독립운동의 현장들을 찾아갑니다. 3.1운동의 불씨가 타오른 중앙고등학교 숙직실, 독립운동가 여운형과 손병희의 집터, 만세 시위가 일어난 탑골공원과 서울역 광장 등은 평범한 일상의 공간에서 거대한 항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던 현장입니다.
독립운동가들이 겪었던 고통이 단지 일제강점기에만 머무르지 않았다는 사실은 가슴이 아픕니다. 효창공원 내 삼의사 묘역과 임시정부 요인 묘역은 우리가 어떤 역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지를 묻는 장소입니다.

다섯 번째 장에서는 해방 이후의 혼란스러운 정국과 민주주의를 향한 여정을 살펴봅니다. 이화장과 경교장, 서대문형무소와 4.19기념탑은 해방 이후 혼란기와 민주화 운동의 현장입니다. 김구가 왜 경교장에서 죽음을 맞이했는지, 조봉암이 어떤 이유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했는지, 그 각각의 장소는 진실을 향한 침묵의 증거입니다.
4.19기념탑은 민주주의의 씨앗이 어떻게 거리에서 피어나고, 젊은이들의 희생이 어떻게 헌법 정신으로 승화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저자는 정치적 상흔의 현장들을 외면하지 않고 똑바로 응시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마지막으로 산업화와 민주화 이후 대한민국의 오늘을 살펴봅니다. 창신동, 을지로, 청계천, 세종대로, 청와대까지 이어지는 이 코스는 우리 사회가 겪은 변화의 역동성과 그 이면의 그림자를 함께 드러냅니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이 일어났던 평화시장, 도시재생이라는 이름 아래 변모하고 있는 을지로, 세월호 사건과 연결된 청와대 등은 아직도 진행 중인 역사임을 말해줍니다.
역사는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장소로 보다, 근현대사>는 오늘의 발걸음으로 어제를 들여다보고, 내일의 시선으로 현재를 성찰하게 합니다.
문재옥 저자의 시선은 그저 장소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 장소가 말해주는 시간과 기억을 해석해 줍니다. 도시를 사유하고, 골목을 존중하고, 역사를 질문하게 만드는 이 책으로 근현대사를 입체적으로 경험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