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헌터 - 어느 인류학자의 한국전쟁 유골 추적기
고경태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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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놀라웠고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도 여운이 길게 남습니다. 현대사의 한 장면으로 몇 줄 정리된 교과서만으로 접했던 지식이 얼마나 얄팍했는지 깨닫는 시간입니다.


70여 년 전 국가와 개인 사이에 벌어진 집단살해 사건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고경태 사회부 기자가 한겨레에 연재한 역사 논픽션 <본 헌터>가 책으로 나왔습니다. 독자의 마음에 직접 파고드는 잔상을 남기는 스토리텔링 방식이 매력적입니다.


“나는 앉아 있었다.”

‘나’의 시선으로 들려주는 이야기에 금세 빠져듭니다. 2023년 3월 10일 오전 9시 30분에 앉은 채로 발견되어 29일 아침 9시, 73년 만에 드디어 쭉 뻗어 눕게 되었습니다. 주인공은 A4-5. 아산 성재산에서 61명의 동료와 함께 수습된 유골입니다.


A4-5의 두 손은 군용전화선인 삐삐선에 묶여 있습니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남자로 추정합니다. 온전한 형태로 수습된 데다가 표정이 보이는 듯한 자세 때문에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데올로기 전쟁의 여파는 학살의 광풍을 남겼습니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지만 그해 11월 말부터 이듬해 1월까지 1.4후퇴의 역사를 가진 한국전쟁. 군경은 후퇴하면서 너무나도 쉽게 총부리를 민중에게 돌렸습니다.


그 짧은 기간 동안 모든 수사기관에서는 부역자 일제 검거에 착수했고, 1개월 만에 재판에서 1298명이 사형 집행됩니다. 하지만 부역 혐의 딱지를 붙여 재판조차 받지 않고 처형된 이들은 수백, 수천배일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한국전쟁은 거대한 청소의 시간이 됩니다. 당시 점령한 지역의 세력이 바뀔 때마다 대대적인 학살 작업이 이어집니다. 광복 후 친일 세력 검거 문제, 한국전쟁 당시 부역 혐의 문제 등 이미 갈등의 골은 깊어진 상태였고 그 여파는 학살로 이어집니다. 그것도 가족 단위로 말이죠.


1.4후퇴 당시 부역 혐의는 어처구니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모함과 밀고의 반복, 복수의 현장입니다. 인민군이 그 집에서 개를 잡아먹고 갔다고 가족이 끌려갑니다. 밥해주면 죽이고, 재워줘도 죽이던 때입니다. 한 집에서 10살 미만 아이 한 명만 살려준다 해서 간신히 살아남은 유족의 사례도 등장합니다.


은비녀의 시점으로 들려주는 이야기도 충격적입니다. 유골에서 분리된 머리카락 뭉치에 꽂힌 비녀가 무려 98개가 발견되고, 아이를 포함해 208명의 유해가 발견된 장소도 있었습니다. 도대체 아이의 손을 잡은 비녀를 한 여인들이 왜 한 장소에 모였을까요. 부역 혐의자 가족의 운명은 이러했습니다.


2000년부터 한국전쟁 전사자 유해 발굴이 시작되었습니다. 22년도까지 총 23년간 1만 3121구를 수습합니다. 그중 선갑의 이야기는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모티브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죽음의 진실은 군인들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민간인의 유해가 수없이 발견됩니다. 결국 민간인들이 나서야 했습니다. 2007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 유해발군단을 시작으로 국가 폭력의 민낯과 드디어 마주하게 됩니다.


<본 헌터>에서는 충남 아산 부역 혐의 희생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중점으로 다룹니다. 성재산, 설화산, 새지기, 탕정, 신창, 선장... 아산에서 일어난 일들입니다.


놀랍게도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쓴 홍세화 저자 역시 만 세 살이었기에 기억은 하지 못한다지만, 아산 새지기 사건의 생존자였습니다.





국군 전사자 유해 발굴 사업의 육군유해발굴단 책임조사원 자리에서 국군 전사자 유해를 발굴했고,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공공대표이자 발굴단장을 맡아 민간인 희생자 유해를 발굴한 인물은 놀랍게도 동일 인물입니다.


유해 발굴에 진심이었던 박선주 교수. 조선인 강제징용 민간인 희생자 발굴 때도 홋카이도 현장에 참여했고,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기 위한 남북 공동유해발굴조사단 발굴단장이기도 했습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도 선주 씨를 찾아오고, 세월호 때도 두 달 반 동안 바닷속 유해를 마주합니다.


뼈에 눈을 번뜩이는, 숨은 뼈를 찾아내는 사냥꾼 본 헌터. 뼈에 담긴 수수께끼를 푸는 추적꾼으로서 박선주 교수의 기나긴 여정에 경탄하게 됩니다.


한국전쟁 국군 전사자와 민간인 희생자, 강제 징용자, 인권 침해 사건 등의 희생자들 뼈를 마주했던 그의 시간은 현대사의 아픔 그 자체입니다. <본 헌터>는 한국전쟁의 또 다른 고통을 마주하고 직시할 수 있는 소중한 책입니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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