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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양장)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22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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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함을 선사하는 까만 우주 표지의 <숨>이 반짝반짝 골드빛이 가득한 양장본으로 리커버 된 <숨>으로 변신했습니다. 총 9편의 단편이 수록된 단편집 테드 창 작가의 <숨>. 영화 <컨택트>의 원작 「네 인생의 이야기」가 수록된, SF 소설이 이토록 아름답게 느껴질 수 있다는 걸 보여준 단편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이어 <숨>도 언젠가 읽어야지 하고 때만 기다리다가 리커버 골드 에디션으로 읽게 되었습니다.
5쪽 분량의 초단편부터 꽤 긴 중편에 이르기까지 아홉 작품이 담긴 <숨>. 하드 SF 소설의 면모를 제대로 느끼면서 테드 창 특유의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아홉 편 모두가 제 취향을 완벽하게 만족시키지는 않았지만, 어느 작품 하나 버릴 건 없었어요~
표제작이 된 「숨」은 2008년 작품입니다. 기계 인간의 세계입니다. 두 개의 허파에 공기를 충전해 살아갑니다. 매일 공기를 가득 채운 두 개의 허파를 소비하며, 공기 충전소에서 충전을 하고, 집에는 예비용 허파 한 쌍을 보관합니다.
해부학자인 '나'는 어느 날 자기 해부를 하게 됩니다. 인지 엔진, 기억 저장 부품으로 이뤄진 자신의 뇌가 기능하는 광경을 관찰합니다. 그가 본 것은 금빛 기계로 이루어진 소우주입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라는 존재 자체가 공기 흐름의 패턴임을 보여주는 메커니즘을 발견하고 공기의 역할을 깨닫습니다. 지속적인 아르곤의 흐름으로서 사고가 각인되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우리의 뇌가 느리게 작동하기 시작한 겁니다. 공기의 흐름에 의존해 작동하는 뇌는 공기의 흐름이 감속하자 우리의 사고가 느려지면서 오히려 시계가 평소보다 더 빨리 가는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대체 무엇이 사람의 뇌 속 공기의 흐름을 늦춘 걸까요.
우리의 인지 엔진이 공기를 동력으로 삼는다는 발상, 사고 활동을 하면서 점점 대기 농도가 짙어지며 기존의 대기의 압력 균형을 변화시킨다는 발상은 이 시대의 기후 위기와도 맞물립니다. 지금 우리가 탄소 중립을 위해 노력하듯 이들도 이런저런 방안을 마련합니다. 압력의 종말, 동력의 종말, 사고의 종말 수순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그려보니 아찔합니다. 사고하는 인간이 더 이상 사고하지 않는다면 그 존재는 어떤 의미로 남게 될까요.
과거와 미래를 수정할 수 없는 시간여행을 통해 오히려 잘못을 돌아볼 기회를 얻는다는 그럴듯한 시간여행 이야기를 다룬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 (2007년)」, 자유의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실증하는 기계가 생긴 세상에서 자유의지의 믿음을 잃은 인간의 미래를 그린 「우리가 해야 할 일 (2005년)」,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게끔 훈련시킬 수 있는 애완동물 아바타를 육성하는 프로그램이 있는 세상에서 인간적인 인공지능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력을 보여준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2010년)」. 이 소설은 휴고상 및 로커스 상 중편부문 최우수상 작품이기도 해서 오래전부터 단행본으로 소장하고 있었는데 <숨>에 포함되어 있네요.
「데이지의 기계식 자동 보모 (2011)」는 이상적인 육아는 이상적인 아이들의 탄생으로 이어진다는 육아론을 바탕으로 양육자가 인공지능일 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다룹니다. 외계 지성을 찾는 인간의 행태에 대한 고발을 하는 「거대한 침묵 (2015)」, 우주의 중심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그렇지 않다는 의도 없음 간의 논쟁을 다룬 「옴팔로스 (2019)」, 평행세계의 나와 채팅을 하는 세상에서 일어날 법한 일들을 다룬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 (2019)」.
「숨」 외에 가장 만족스러웠던 작품은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 (2013)」입니다. 전통적인 읽고 쓰기의 방식이 변하는 요즘 세상과도 맞물려 생각할 거리를 가득 안겨줍니다. 모든 일상을 영상으로 저장하고 순식간에 검색되는 정보 접근성이 빠른 세상에서 그야말로 인지적 사이보그가 된 인간을 상상해 보세요. 완벽한 기억력을 가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지도요. 상상하는 것만큼 축복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글쓰기 역시 말할 때마다 버전이 조금씩 달라지는 구전 시대의 종말을 낳았습니다. 무언가를 잘못 기억한다는 행위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존재가 되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흥미진진했어요.
1990년 데뷔작 「바빌론의 탑」부터 2002년 「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까지의 단편들이 테드 창의 첫 번째 단편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수록되었고, 이후 작품들이 두 번째 단편집 <숨>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두 권으로 테드 창의 소설은 클리어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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