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비행
헬렌 맥도널드 지음, 주민아 옮김 / 판미동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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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픽션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새뮤얼 존슨상과 그래 최고의 책에 책에 주어지는 영국의 대표 문학상 코스타상을 석권한 자연에세이 <메이블 이야기>의 헬렌 맥도널드 작가. 이번엔 좀 더 내밀한 사색 에세이 <저녁의 비행 (원제 Vesper Flights)>으로 특유의 깊고 섬세한 글을 다시 만났습니다. 


<메이블 이야기>에서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깊은 상실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작가가 야생 참매 메이블을 길들이는 과정에서 받은 치유를 들려줬다면, <저녁의 비행>에서는 야생동물을 관찰하며 인간이 자연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 묘사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작가는 인간이 일으킨 여섯 번째 멸종의 시대에 상실과 사멸을 문학으로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통계학적 사실은 과학의 역할이지만 사라지는 것들의 의미를 성찰하는 건 문학의 역할이라고 말이죠. 우리가 미처 몰랐던 이 세상 특유의 질감과 감촉과 결을 알려 줄 수 있는 문학으로서의 <저녁의 비행>을 읽으며 자연 에세이로부터 이토록 전율을 느낄 수 있다는 걸 깨달았던 저도 작가의 의도에 공감합니다.


<저녁의 비행>은 우리를 둘러싼 모든 빛나는 존재에 대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송골매, 칼새, 찌르레기, 산토끼, 야생돼지, 백조, 편두통, 브렉시트... 에세이마다 전혀 무관해 보이는 키워드가 연결되는 마지막 문단에 이르면 경이롭다는 감정만이 남습니다. 이번 에세이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는 작가의 경험이 폭넓게 등장합니다. 어린 시절 수집품 중 둥지에 대한 고찰로 시작하는 첫 글만으로도 작가의 노련한 사색 흐름에 감탄하며 읽었습니다.


수집품 중 유난히 불편하게 느껴졌다는 둥지. 새 둥지는 철마다 생겨나는 비밀공간이자 그 시절이 지나면 버려지는 은밀한 공간입니다. 어린 시절엔 집이란 단순히 고정된 장소로 생각했지만 새 둥지로부터 집의 의미를 새롭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집은 그저 고정된 장소의 의미가 아니라 내면에 품은 공간임을 말이죠. 그리고 미숙아로 태어나 인큐베이터에서 홀로 외떨어져 있어야만 했던 작가가 무의식적으로 안고 있었던 상실과 둥지가 연결되면서 비로소 불편함의 정체를 깨닫는 여정을 보여줍니다.


호주 블루 마운틴 국립공원,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센트럴 파크, 아일랜드 그리고 근처 숲에서 만난 동물들. 생각보다 돼지 같지 않다는 걸 깨달은 야생 돼지를 조우한 날에는 2004년 농장에서 기르던 돼지 60마리가 11년 후 1,000마리 이상으로 개체 수가 늘어난 이야기를, 마천루에서 철새 이동을 관찰하던 날에는 빌딩 숲을 이룬 현대 도시의 조명 빛이 철새를 어떻게 현혹시키는지를 들려줍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긴 목초지가 깔끔하게 정비된 바람에 완벽하고 정교한 생태계의 복잡구조와 그 구조를 본래 그대로의 모습으로 만들어 주는 모든 생명체를 잃었다는 것에 애통해하기도 합니다. 수 세기 동안 동식물의 서식지는 사라지고 우리가 자연 세계에 대하여 알고 있는 일상의 생생한 지식이 점차 줄어들고 약해지고 있음을 짚어줍니다. 인간과 야생동물 사이의 수많은 갈등을 통계에서 그치지 않고 현실로 소환해 내는 <저녁의 비행>입니다.


그렇기에 동물과 교감이 이루어진 나날의 경험은 더욱 소중해집니다. 자폐증 아이와 황홀한 교감을 나눈 작가의 반려 앵무새, 이별의 아픔을 겪은 날 콘크리트 계단에 앉아 강물을 응시하던 중에 튼튼한 두 다리로 쿵쿵쿵 걸어와 풀썩 앉아 날개 깃털이 허벅지를 꾹 누르고 있을 정도로 나란히 앉은 모양새로 다가온 백조... 당황스럽고 놀라운 감정은 이내 경이로움으로 자리 잡습니다.


그 외에도 지나가버린 시간과 역사에 관해 사색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쳐 주는 겨울 숲, 편두통 징후와 연결해 들려주는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한 묵시적 사고의 위험성, 칼새를 사색하며 어려움에 대처하는 방식을 주의 깊게 생각하는 등 사색의 범주가 남다른 글이 쏟아집니다. 잠들 무렵 지구 내부 구조를 주문처럼 외웠다는 작가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볼 때부터 독특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요.


흥미로운 점은 동물은 인간에게 어떤 일이나 실체에 대한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짚어줍니다. 작가는 동물이 가르쳐주는 것은 "당신이 생각하기에, 당신은 자신에 대하여 대체 무엇을 알고 있는가?"라고 합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동물을 끌어들여 인간의 여러 면모를 설명해오지만, 사실 어느 누구도 동물을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보지 않는다고 꼬집습니다. 숲도 인간만을 위해 그곳에 존재하는 게 아니듯 말이죠.


나를 깨우치는 생명체들의 이야기 <저녁의 비행>. 동물들을 통해 나는 누구인가, 가족, 집, 고향이란 무엇인가 등 생각의 폭을 넓혀가는 여정 속에서 동물들의 삶이 인간의 삶을 설명하거나 거울 역할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인식하게 되고, 그로부터 오히려 마음의 위안을 받게 되는 특별한 사색의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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