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운규의 말 - 전설이 된 한국 영화의 혼불 / 다시 태어나도 영화를 하련다
나운규 지음, 조일동 엮음 / 이다북스 / 2020년 12월
평점 :
절판




한국 영화의 선구자로 불리는 나운규 배우 겸 감독을 아시나요. 대표작 <아리랑>을 포함해 그의 작품들은 현재 만날 길이 없지만, 한국 영화 역사에 나운규 시대를 당당히 펼쳐 보인 주인공을 만나봅니다.


이다북스의 시리즈 중 한국 최초의 여성 운동가 나혜석의 글을 엮은 《나혜석의 말》도 느낌이 참 좋았고, 이번에는 시대의 정신을 영화에 담으려 애쓴 나운규의 글을 만나봅니다.


나운규는 1902년에 태어나 3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뜬 1937년까지 일제 강점기 시대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독립군 비밀 단체 활동을 한 바 있어 1993년에는 건국훈장을 추서 받습니다. 춘사 나운규라고 부르는데 춘사라는 이름은 2년간의 옥살이 당시 얻었다고 합니다.


신문과 잡지에 게재한 글과 대담을 모은 《나운규의 말》. 개인사보다는 영화인으로 활동하며 토로하는 당시 영화계 현실을 엿볼 수 있는 글이 많습니다.


연기력 갖춘 배우로 주목받으며 데뷔 후, <아리랑>에서 시나리오와 감독 및 주연을 맡으며 1인 3역을 두루 해내는 만능 영화인으로 이름을 날리게 됩니다. 신파물, 번안물 중심 영화계에서 핍박받던 조선의 현실과 민중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영화화한 <아리랑>은 그야말로 대박을 쳤습니다. 1926년 단성사에서 개봉한 조선 영화 최초의 대형 흥행작이자 문제작이었습니다. 해방 이전에 만들어진 최고의 걸작, 무성 시대를 대표하는 영화로 손꼽힙니다.


당시 일본인 사업가들이 출자해 세운 영화사에다가 걸핏하면 가위질 투성이었던 현실에서 어떻게 민족의 혼이 담긴 <아리랑> 같은 영화가 상영될 수 있었을까요? 수차례의 검열을 거친 데다가 감독 이름도 일본인으로 내세워서야 개봉이 가능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영화 <아리랑>은 우리 민족의 혼을 담은 영화로 평가받으니, 과연 어떤 스토리인지 궁금할 수밖에요.





책 《나운규의 말》 후반부에는 아리랑 소설도 실려있어 줄거리를 살펴볼 수 있는데, 그야말로 숨겨진 맛이 제대로인 스토리더라고요. 지금 읽어도 두근두근 대는데 당시엔 얼마나 큰 이슈를 불러일으켰을지 상상이 안 됩니다.


좌익영화인 평론가였던 서광제(책에서는 서군이라 부릅니다)와의 논쟁은 영화사에서도 유명한데, 이 책에서는 나운규의 반박글이 실려있습니다. 그의 영화가 비현실적이라 평하는 이들에게 되려 현실을 망각한 평이라며 조목조목 따지고 있습니다. 뭔가 시원한 느낌이 들면서도 빵 터졌는데, '그러면 니가 만들어 봐라' 식으로 한마디 내지르거든요. 양심 있는 붓을 들어야 하지 않겠냐며 혼내고 있어요. 그들은 허울만 좋은 이상적인 이야기만 하고 있을 뿐이라며 비꼰 거죠.


"지금까지 우리가 만들고 있는 영화는 영화가 아니요, 영화 비슷한 장난감이다. 우리는 이 장난감을 영화라는 수준으로 끌어가야 한다." - 책 속에서


배우로서, 감독으로서 한 작품이 발표되기까지의 사정을 속속들이 털어놓기도 합니다. 광대는 천하게 쳐온 당시 현실 속에서 배우를 신광대 취급하는 이들에게 한 마디로 하기도 하고, 영화 기술의 부족한 상태에서 원하는 장면을 찍을 수 없어 대체하게 된 사정, 조선 내 영화 시장 규모의 빈약함에 대한 안타까움 등을 보여줍니다.


당시엔 결국 연애 타령하는 영화만 나오는 수준이었으니까요. 그 역시 자신의 작품들을 한데 모아놓고 불질러 버리고 싶다고 소회한 적도 있지만, 조선 영화를 어느 수준까지 끌어가고 싶었던 그의 의지가 그만큼 잘 드러납니다.


나운규는 '혼이 있고, 정신이 있고, 피와 살이 있는' 영화를 만들고자 애썼습니다. '불구를 완전한 물건으로 만들려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고 선언합니다. 해외에서 당당히 조선인의 감성을 보여줄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민족의 혼을 영화로 승화시키려 애쓴 나운규. 시대적 고민을 담으려 노력한 나운규의 발자취를 그의 글을 통해 엿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다북스의 'OOO의 말' 시리즈의 다음 번 주인공은 누구일지 벌써 기다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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