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의 말 - 남성 중심 사회에 맞선 불꽃 인생
나혜석 지음, 조일동 옮김 / 이다북스 / 202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수원에는 '나혜석거리'가 있습니다. 주변 문화예술회관과 야외 음악당이 있어 그저 스쳐 지나갔던 정도뿐이었는데 이제는 나혜석의 삶을 생각하며 찬찬히 거닐어보고 싶어집니다.


수원 태생 나혜석은 우리나라 여성 최초 서양화가이자 작가, 여성의 주체적 권리와 인권을 펼친 운동가입니다. 조혼이 횡행하던 시절 여성도 인간임을 주장하는 단편소설 <경희(1918)>를 썼고,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육아맘의 경험을 공론화시켜 사회적 파문을 일으킨 <모(母)된 감상기(1923)>, 이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솔직하게 드러낸 <이혼 고백서(1934)> 등 한결같은 마음으로 여성의 주체적 권리를 위한 행보를 펼쳤던 여성입니다.


당시 가부장적 시대 상황을 생각해보면 정말 입이 쩍 벌어질만한 이야기를 많이 털어놓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족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으며 몸과 마음이 병들게 됩니다. 엘리트 코스를 밟은 신여성으로 살면서도 시대의 벽을 허물지 못한 그의 말년은 정말 안타까울 정도입니다. 심신이 병들어간 채 무연고자로 사망해 무덤조차 있지 않은 나혜석의 삶이 애잔하게 다가옵니다.


<나혜석의 말>은 나혜석의 산문과 대담, 논평 가운데 여성권을 비롯해 진보적인 관점에서 쓰고 밝힌 것을 엮은 책입니다. 남성 중심 사회에 맞선 나혜석의 말은 100년의 세월이 흐른 이 시대에 읽어도 공감할 바가 많습니다.


현부양부란 말은 없으면서 현모양처라는 말로 여성들의 삶을 속박한 사회와 가정. 여자는 자각 없는 존재고, 사물에 어둡고, 처리가 둔하다는 편견은 오랜 세월 자리 잡았습니다. 똑 부러지게 말하는 여자는 드센 여자고, 말 없고 생각 없는 자를 여자답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집에서는 아버지를 좇고 출가해 남편을 좇고,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을 좇으라는 삼종지도도 있지요. 


이미 남녀평등사상이 널리 퍼져 여자의 지위가 변해 가기 시작한 당시 서양처럼 나혜석은 "조선 여자도 사람이 될 욕심을 가져야겠소."라는 말로 변화를 촉구합니다.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이 필요했듯 나혜석은 "자기 소유를 만들려는 욕심과 활동할 욕심"을 가져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우리도 남과 같이 사람다운 여자가 되고 남의 일을 나도 판단할 줄 알며,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 할 줄 알며, 더러운 것을 더럽다 할 줄 알거든." - 나혜석의 말 


낮밤 가리지 않고 우는 아이 때문에 심신이 쇠약해진 나혜석은 날것 그대로의 감정을 쏟아내기도 했습니다. "내 평생소원은 잠이나 실컷 자 보았으면."이라고 할 정도로 수면 장애를 가진 아이를 키운다는 건 경험해보지 않은 이라면 그 고통을 짐작할 수 없을 겁니다.


모성애에 대해 이성과 감정의 충돌을 제대로 겪고 쓴 나혜석의 글은 지금 시대라면 공감할 육아맘들이 정말 많을 테지만 당시엔 두들겨맞는 비난 일색이었습니다. 한창 경력을 쌓을 나이에 육아를 하느라 경력 단절을 겪고, 본능적으로 맹목적으로 육체와 영혼을 자식을 위해 바치는 여성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건만. 그가 받은 비난들은 사실 일반 여성, 조선 여자 전반에 대한 혐오에서 비롯된 말들이었습니다.


"우리 조선 여자는 너무 오랫동안 자기에게 제일 중요한 것을 잃고 살아왔습니다. 즉 나도 '다른 사람과 같이 생명이 있다.' 하는 것을 억제하고 왔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제 숨소리를 들어보시오. '여자도 사람이다.' 하는 자부심이 이상스럽게 전신에 흐르리다." - 나혜석의 말


자신을 잊고 살아온 삶을 처량하게 생각할 줄 알았던 나혜석은 가정 살림살이 개량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남자가 자기만 일하는 줄 알고 자기만 잘난 줄 알며, 사회제도가 그릇되고 교육이 잘못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거기에 더해 여자들의 대물림 과실도 짚었습니다. 자기를 잊고 살아온 여자들에 대한 일침입니다. 자기 자신을 진실로 사랑할 줄 알면 진심으로 살 수 있을 거라는 한 줄기 희망을 안겨줍니다.


10년의 결혼 생활과 사 남매를 뒀던 나혜석은 이혼을 하게 됩니다. 그 여정도 참 파란만장합니다. 이혼 과정에서 겪은 사건과 감정을 기록한 <이혼 고백서>는 정말 눈물겹습니다. 주부로서 화가 생활을 어떻게 견뎌냈고, 이혼 과정에서 경험한 남편과 자식에 대한 감정을 토해 놓았습니다.


너무 슬픈 말년을 보내 가슴이 아린 나혜석의 삶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존재로서 살기 위해 여성의 목소리 대신 사람답게 살기 위한 한 인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책 <나혜석의 말>. 화가와 작가이기 전에 인형이 되기를 거부한 여성 나혜석을 새롭게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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