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앞 상하수도관 공사의 소음이 버거워서

아이를 등교시키자마자 공원을 한바퀴 돌고

단골 카페로 향했다.



작지만 커피가 아주 맛있는 곳.

오늘은 사장님이 아닌

알바생이 있었는데,

알바생을 보자마자마

'아, 오늘은 커피맛이 덜하려나.'

싶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초심자의 정성이 있으니

더 맛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기대감도 생겼다.




처음 일이 서툴때는

하나하나에

공을 들이고 애쓰다가

익숙해지면

기계적으로

매뉴얼 따르듯

해버렸던 경험은 나에게도 있으니까.




커피를 주문할 때

물 한잔도 부탁했는데,

알바생은

서툰 라떼 아트와 

따뜻한 물 한 잔을 가져다주며,

"아... 제가 일을 배우는 중이라

라떼아트는 실패했지만...

맛있게 드셔주세요"라고 했다.



풋, 웃음이 나왔다.

굳이 하지 되지 않아도 될 말로

자신을 설명하고

이해받고 싶은 마음이

나랑 똑같았으니까.



나는 늘 설명이 길다.

단조로운 문장 하나로

나를, 내 마음을 설명하기엔

너무도 부족해 보였으니까. 



이 계절 따뜻한 음료를 시키며

물을 달라고 할 때는

시원한 물을 원하는 것인데,

따뜻한 커피를 시켰으니

물도 따뜻한 걸 원할 거라 생각해

따뜻한 물을 준 것도 귀여웠다.



나름의 배려.

내가 원하는 것과 달랐다 해도

그 마음과 세심함이 예뻤다.




어쩌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하는 사람은,

그럼으로써 자신을 온전히

증명하고 설명하고 싶은 사람은

상대에 대해 더 많이 신경쓰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단순하고 명확한 말 속에

자신을 넣을 수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미처 하지 못한 말까지

신경쓰고 이해하긴 힘들지 않을까. 




불필요한 설명을 덧붙이는 사람은

연약한 마음 안에

타인에 대한 이해를 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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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2-05-13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커피도 따뜻하고 물도 따뜻하고 그걸 바라보는 시선도 따뜻하고 그 나름의 배려도 따뜻하고,,,,요즘 난데없이 서늘했는데 좀 따스해졌어요.

마음을데려가는人 2022-05-15 13:19   좋아요 0 | URL
잉크님의 시선도 따뜻하고요^^ 5월이 맞나 싶은 날씨에요.. 이전과 다른 계절감각이라 시간이 더 빨리 가는 듯한 착각에 빠져요. 가을인가 싶거든요

2022-05-15 1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5-17 14: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유령의 마음으로
임선우 지음 / 민음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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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작인 <유령의 마음으로>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위로받았던 책.

부러 피했던 마음들과 직면하는 이야기.

일상 속에 갑작스레 침투하는 판타지가 멋스럽다. 



나는 유령의 우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에게 도달하지 못한 감정들이 전부 그 안에 머무르고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유령의 두 눈에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손에 닿지는 않았지만 분명 따뜻했고, 너무나 따뜻해서, 나는 울 수 있었다. 대체 어떤 유령이 눈물까지 흘리는 거야. 내가 말했다. 나는 유령이 아니니까. 유령은 우는 와중에도 그렇게 말했다. 잠시 뒤에 유령이 나를 끌어안았는데, 그것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아보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전한 이해였다. 여기까지인 것 같아. 안긴 채로 내가 말했을 때 유령은 그래, 라고 대답해주었다. 

-<유령의 마음으로> 28p



왜 버티는 건데? 이제 공연도 다 끝났잖아.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사실은 청소기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묻고 싶었다. 어차피 사라질 텐데 왜 그렇게까지 열심인 건지. 그렇게 버티어서 얻을 수 있는 게 대체 무엇인지. 청소기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다가, 자신의 손으로 버튼을 누를 수가 없다고 말했다. 가수가 되려고 지금까지 노력했는데, 버튼을 누르면 그게 다 무효가 될 거 아니야.

그러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마음은 대체 어떤 마음일까. 끝까지 버티면서 지켜 내고 싶은 것이 있는 마음은. 

-<커튼콜, 연장전, 라스트 팡> 251p



나는 이랑에게 바깥에 나왔으니 하고 싶었던 것을 하라고 말했다. 그러자 이랑은 고개를 저었다.

..........

이랑의 말을 듣자 나도 모르게 마음이 다급해졌다. 이랑은 죽고 나서도 무대에 서려고 했던 사람이었다. 자신을 힘들게 한 사람들에게는 주먹도 날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랑이 그런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되었다. 그런 마음을 잃는 것이 때로는 죽는 것보다 나쁘다는 사실은 내가 잘 알았다.

-<커튼콜, 연장전, 라스트 팡> 25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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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월째 집에서 요가를 하고 있다.

처음에는 '아래를 향한 개 자세'라고 불리는

다운독만 좀 해볼까 했던 건데,

요가강사 출신인 아이 친구 엄마가

요가는

늘였으면 수축하는 자세도 해야 

균형이 맞는다고 해서

플랭크도 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

두 자세가 다 들어가있는

태양경배자세를 하게 됐고,

또 A를 하니 B도 하게 됐다.

5분이 10분이 되고,

10분이 20분이 됐고,

이제는 30~40분 정도?

시간적 육체적 여유가 있을 때는

한 시간 정도 수련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꾸준히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정말.



생각해보면 원대한 열망을 가지고 시작한 일들은

늘 쉽게 지치고 나가떨어졌다.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세세한 것들까지 컨트롤하려 했을 땐

그 과정에 지쳐서

마음이 이미 떠나버릴 때가 많았다. 



오히려

묵묵히

생각없이

그냥

할일없으니까

하는 일들은

어쩌다 보니

이렇게 길게 이어진다.



이렇게 오래 하다니

대단하다고들 말하는데,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어리둥절하다.

꾸준히 뭔가를 하기 어려워하는 내가

'어쩌다 보니' 이렇게 오래 하게 됐다는 것도 신기하고,

너무 마음을 들이지 않고, 애쓰지 않는 것들은

이렇게 길게 할 수도 있구나 싶어서. 



물론

습관처럼 만들어야겠다 싶어서

하루도 빼먹지 않고 하려고 애썼던 시간들도 있었다.

그 시간은 좀 힘들기도 했고,

'요가'보다는 '운동'을 한다는 느낌이 강했는데,

그렇게 차곡차곡 쌓아올린 시간들을 지나니

'요가를 한다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과가 돼버렸다.



딸아이와 남편이

나를 보면 꼭 물어보는 말이

"오늘 요가했어?"인 것만 봐도.



어떤 날

딸아이가 물었다.

"엄마, 근데 왜 그렇게 요가를 열심히 하는 거야?"

뭐라고 답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러는 거다.

"아니, 요가를 했으면 사람이 좀 차분해지고 그래야 하는 건데,

화내는 것도 똑같고!!!! 변한 게 없잖아?"



요가를 하면 차분해지는 거라는 말 따윈 한 적도 없는데,

아이가 이런 말을 하는 게 넘 웃겨서

좀 있다 다시 물어봤다.

"근데 요가해서 엄마가 변한 게 진짜 하나도 없어?"

고민하던 아이가 말한다.

"있어!"

"그게 뭔데?"

"음.................. 힘들어해!!!!!!!!!!"




하하하하;;;

벅찬 자세들을

아등바등 따라하면서

너무 힘들다고 외치던 나의 모습.

아이 눈엔

그게 엄마의 요가였나 보다.



마음의 평화 따위

엄만 바라지도 않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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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2-03-24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가 8개월이면.... 설마 이 페이퍼도 왼다리 목에 걸치시고 작성하신 겁니꽈??

마음을데려가는人 2022-03-24 23:39   좋아요 0 | URL
왼다리뿐이겠습니까!? ㅎㅎㅎ

잉크냄새 2022-03-25 13:36   좋아요 0 | URL
그럼,,,공중부양???

마음을데려가는人 2022-03-25 15:55   좋아요 0 | URL
모르죠~ 날아다니는지 ㅎㅎㅎ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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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이고 엄마이면서 비정규직 천문학자가 풀어내는 이야기는

다정하고 겸손하다.

아마 우주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그렇지 않을까.

미지로 가득한 거대한 우주에 비하면,

우린 너무 작고 보잘것없으니까.



뭔가 대단한 계기가 있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저자는 어쩌다 보니 천문학자의 길을 걷게 되었고,

어쩌다 보니 토성의 위성인 타이탄을 연구하게 되었고,

이제는 달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한다.



과학에 대한 소양과 지지가 부족한 대한민국에서

묵묵히 우주의 신비를 연구해주는 분들이 계셔서

정말 다행이다. 



위성과 행성의 차이조차 명확하게 몰랐던 나는

내가 사는 지구와 그를 둘러싼 우주에 대해

너무 궁금해졌다.



나는 만약 우주에 갈 수 있다면 가지 않겠다는 쪽이었다.

우주는 너무 광대하고 나는 너무 작고,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는 곳에

나 홀로 남겨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너무 무섭고 막막할 것 같았다.



우주는, 밤하늘은

지구에서 상상하고 올려다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그런데 저자의 글을 읽고 나니,

신비롭고 아름다운 우주를 한번쯤

내 눈으로 보는 것도

(기회가 된다면)

괜찮겠다 싶다.

거대한 행성들의 존재를

두 눈으로 보고싶어졌다. 



인간은 생각하는 별들의 먼지라는데,

생명 탄생의 기원이 되는

우주 속 천체들과

우주 속을 유영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일지도.





*


그런 사람들이 좋았다. 남들이 보기엔 저게 대체 뭘까 싶은 것에 즐겁게 몰두하는 사람들.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정치적 싸움을 만들어내지도 않을, 대단한 명예나 부가 따라오는 것도 아니요, 텔레비전이나 휴대전화처럼 보편적인 삶의 방식을 바꿔놓을 영향력을 지닌 것도 아닌 그런 일에 열정을 바치는 사람들. 신호가 도달하는 데만 수백 년 걸릴 곳에 하염없이 전파를 흘려보내며 온 우주에 과연 '우리뿐인가'를 깊이 생각하는 무해한 사람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동경한다. 그리고 그들이 동경하는 하늘을, 자연을, 우주를 함께 동경한다. 

-13p


돌이겨 생각해보건대, 도중에 그만두지 못했던 것은 떠날 용기가 없어서였다. 그러나 남은 채 버텨내는 데도 역시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따. 떠난 이들은 남지 못한 게 아니라 남지 않기를 선택한 것이었고, 남은 이들은 떠나지 못한 게 아니라 떠나지 않기를 선택한 것이었다. 이제는 안다. 어느 쪽을 선택했든 묵묵히 그 길을 걸으면 된다는 것을. 파도에 이겨도 보고 져도 보는 경험이 나를 노련한 뱃사람으로 만들어주리라는 것을. 

-31p


거의 습관적으로 적은 그 알량한 축복에, 학생은 넘치게 고마워했다. 이제껏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해준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이 젊은 청춘에게, 그따위 싸구려 축복조차 해주는 '선생'한 자가 이때껏 없었다는 게 화가 났다. 넌 잘하고 있다고, 너만의 특질과 큰 가능성이 있다고, 네가 발을 떼기만 하면 앞뒤가 아니라 사방, 아니 만방으로 길은 열릴 것이라고 왜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가. 스무 살, 스물한 살은, 그런 이야기를 차고 넘치게 들어도 되는 나이다. 그런 청춘들이 '대졸자' 꼬리표 하나 달기 위해서 돈과 젊음을 들여 스스로 대학 안에 갇히는 기간, 사회의 틀을 맞추기 위해 스스로의 가능성을 기꺼이 가지치고 분재로 다듬어가는 기간, '멀쩡한 대학 나와서 왜 제대로 된 회사에 취직도 못하느냐'는 어른들의 질문을 향해 전진하는 그 기간이 나는 너무나 아깝다.

-62p


그러나 기초부터 차근차근 되짚어볼 기회는 쉬이 오지 않고, 그럴 시간도 만들기 어렵더군요. 하지만 대신 깨달은 건 있어요. 연습이 부족해서 생긴 빈틈은 그 원리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보는 것으로 메꿀 수 있다는 것. 우리가 구구단은 달달 외워도 인도학생처럼 19단까지 외우진 못하지만, 곱하기의 원리를 이해하고 있으니 계산해보면 19 곱하기 19까지 써내려갈 수 있듯이요. 괴로울 때는 '왜 그때 더 잘하지 못했을까' 하고 과거의 자신을 질책하게 되지만, 그땐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서 삶의 다른 면을 돌보고 있었잖아요.

-70p


나이가 지긋한 과학자에게 무언가에 대해 질문하면 모른다고 대답하는 경우가 많다. 알고는 있지만 설명하기가 어려울 때도 모른다고 하고,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을 때도 모른다고 한다. 확답을 잘하지 않고, 그럴 가능성이 높거나 낮다고만 한다. 우린 항상 잘 모른다. 자연은 늘 예외를 품고 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사실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 그것만이 언제나 어디서나 진실이다. 

-95p


엄마가 일을 한다는 것. 이 짧은 문장 속에는 너무도 많은 한숨이 응어리져 있다.

-10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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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2-03-21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만 보고 천문학 서적인가 했는데, 가슴에 담고 싶은 문장들이 별처럼 꽉꽉 찬 밤하늘 이었네요.

마음을데려가는人 2022-03-21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을 울리는 글들이 많았어요~ 근데 제가 우주에 대해 아는 게 정말 없더라구요. 하하하. 잘 지내시죠?
 
데이비드 호크니의 인생
카트린 퀴세 지음, 권지현 옮김 / 미행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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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다섯 살에도 삶은 여전히 당신에게 선물을 안겨줄 수 있다.

즐겁게 지내려는 마음을 잃지 않고 도전하면 된다.

즐거움과 두려움의 비명을 용기 내어 지르고,

디즈니랜드를 사랑한다고 씩씩하게 말하고,

눈치 보지 않고 솜사탕을 먹고,

순간의 욕망을 따르고,

완성한 결고를 부수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놀고,

어른이라서 스스로 금지했던 일을 하라.

내면에 있는 어린아이와 연결을 끊지 마라."


-135p



겨울이 몇 주밖에 남지 않았다.

겨울에는 해가 여섯 시간만 떠 있으니 서둘러야 했다.

데이비드는 유독 겨울에 나무를 그리고 싶었다.

가지가 잎의 무게를 떠받치느라 인간이 결국 묻힐 땅으로

늘어지는 계절이 아니라 

가지가 살아있는 계절에 말이다.

겨울에는 가지가 자유롭고 가벼워져

하늘을 향하고 하늘과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겨울 나무보다 더 우아하고 자존감 있는 건 없다.


-19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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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1-10-05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나이 관련된 글귀 하나에 밑줄을 그었거든요.좀 쌩뚱맞은 나이이긴 하지만...
˝길을 잘못 들어서는 사치도 스스로 허락하지 못한다면 스무 살일 자격이 없다고도 했다.˝ 주기율표- 프리모 레비

마음을데려가는人 2021-10-05 19:46   좋아요 0 | URL
ㅎㅎㅎ 결국 우리가 꽂힌 건 나이 때문이 아닌 것 같아요~ 삶에 대한 태도!! 그게 와닿았던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