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렇게 덧없이 줄달음치는 생존 속에는 고정된 것이 하나도 없다. 즉 무한한 고통도, 영원한 즐거움도, 변치 않는 인상도, 영속되는 즐거움도 그리고 전생애를 일관하는 결심도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은 세월의 흐름 속에 녹아서 없어진다. 시간 속에 개재된 분초, 사소한 사물에 깃들여 있는 무수한 원자, 그리고 우리들의 단편적인 하나하나의 행동은 주위의 모든 위대하고 용감한 것을 황폐하게 만드는 치충들이다.

이 세상에는 진지하게 대해야 할 것이 하나도 없다. 티끌 같은 이 세상에 그럴 만한 값어치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인생은 큰 일이건 작은 일이건 언제나 계속해서 일어나게 마련이지만 설혹 우리에게 무엇을 약속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상례요, 가령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그 소원의 대상이 얼마나 보잘것 없는 것인가를 절실히 느끼게 할 따름이다. 즉 우리를 기만하는 것은 희망인 동시에 희망의 대상이기도 하다. 인생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었다면, 그것은 다만 다시 찾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우리에게서 먼 데 있는 매력은 우리로 하여금 낙원처럼 그리워하게 하지만 막상 거기 유인되어 가 보면 곧 환상처럼 사라져버린다.

다시 말하면 행복은 항상 미래나 과거에 있으며, 현재에는 햇살을 담뿍 받은 허허벌판에서 한 조각 뜬 구름을 쳐다보는 것처럼 앞뒤가 훤히 보이지만, 그 자체는 언제나 그림자가 비치고 있다.

 

#2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결코 지나친 환희나 비통에 빠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모든 사물은 끊임없이 변화하므로 언제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날지 알 수 없으며, 행불행이나 길흉에 대한 우리들의 판단은 확실치 못하며 일찍이 자기가 한탄한 것도 나중에 생각해 보면 오히려 큰 경사일 수도 있고, 후일에 큰 두통거리가 된 것도 전에는 좋아라고 기뻐한 일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도 이런 견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이제 쓴맛 단맛 다 보았으므로 웬만해서는 즉석에서 여자애모양 눈물을 짜지 않는다. 

 

-쇼펜하우어, 인생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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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6-06-26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님에게 꽂힌 쇼펜하우어의 글을 읽어보니, (저야 쇼펜하우어를 잘 모르지만) 그의 사상은 왠지 허무함을 품고 있는것 같기도 하네요.

마음을데려가는人 2006-06-26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네네네- 허무주의이면서 놀랍게도 불교나 명상에서 말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아요. 의욕하기를 포기하는,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의 경지를 최고로 삼는 것도 그렇고. 읽긴 다 읽었는데 머릿속은 계-속 복잡하담니다. ㅜ.ㅜ

잉크냄새 2006-06-26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허무라기 보다는 동양적인 사상이 강하게 느껴진다고 보는 것이 맞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