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지난 오늘˝ 메뉴를 열어 과거 오늘 쓴 글들을 보면 유난히 더위와 폭염 이야기가 많았다. 특히 2018년은 더욱 많았다. 그 해는 기상청에서 밝힌 역대 두 번째로 더웠던 여름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 해 나는 기후위기 강의를 하러 여기저기 불려다녔는데, 실제로 여름에 강의를 했을 당시에 참가자들의 호응이 컸다.

역대 가장 더운 해였다는 1994년은 이상하게 내 기억에 더위에 대한 기억이 없다. 학교라고 부르고 감옥이라고 느껴야하는 갇혀있는 삶을 살았던 마지막 해였고, 폭력사건에 휘말려 경찰서와 법원을 오가야 했던 시간들이 바로 그해 늦봄에서 초여름이었다. 뒤돌아보니 그랬다. 그 시절에 나는 그냥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여서 폭염도 뭐도 그냥 다 신경쓰지 못하고 지냈나보다. 그저 원했던 것은 하루라도 빨리 이 감옥 같은 학교를 졸업하는 일 뿐이었다. 하긴 그 시절의 교실에는 겨우 벽걸이 선풍기 여섯대 정도가 더운 바람을 보내고 있었을 뿐이었을 것이고, 에어컨은 상상도 하기 어려웠기에 아무리 더워도 그냥 덥구나. 하고 말았을 것 같기는 하다.

아, 그런데 올해 여름은 정말 견디기가 힘들다. 이미 에어컨이라는 신문물에 익숙해진지 오래인 이 몸은 에어컨이 없는 집에서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이 생활을 창고 지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처음 한동안은 어차피 더우니 아예 옷을 벗고 운동을 하고 땀을 씻고 개운한 기분을 느끼면 되리라 여겨 그렇게 지냈다. 땀을 씻고 그 개운한 느낌을 느끼는 것 까지는 정말 좋은데, 그러고 나와서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온 몸이 땀에 젖었다. 사실 깨어있을 때에는 뭐 어차피 더위를 피할 수 없으니 그냥 땀을 닦으며 견디다가 못 견디겠으면 찬물을 뒤집어쓰고 선풍기 앞에서 버티면 그나마 버틸만 했다. 문제는 밤이다. 밤에 잠을 자야 다음날 활동을 할텐데, 무더위와 높은 습도 때문에 잠이 들 수가 없었다. 새벽까지 뜬 눈으로 물을 뒤집어 쓰고 선풍기 앞에 버티기를 반복하다가 피로에 지쳐 기절하듯 잠이 들어야 겨우 두세시간 잠을 잘 수 있었다.

도저히 이렇게는 지낼 수 없다 싶어서 동네 혼자 사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았다. 몇 년 전부터 더워서 못 견딜 것 같으면 언제든 오라고 한 친구 집에서 3일을 내리 머물렀다. 마지막 3일째에도 그는 저녁에 또 올 것인지를 물었다. 그저 올 거라면 같이 저녁을 먹을 것인지 등을 이야기하기 위해 물은 것이다. 아마 더 오래 머물렀어도 그는 문제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불편했다. 그래서 그날 밤은 집으로 돌아왔는데, 아! 정말 내가 이래서 집을 떠나있었지! 하고 다시 깨달았다. 새벽까지 이러다 쓰러져 잠들겠지 하고 기다리다가 도저히 못 견디고 사무실로 피난을 왔다.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에어컨을 켜고 온도를 높이고 바람의 세기를 낮추고 반대편에 선풍기를 세팅하고 맨 바닥에 종이박스와 스티로폼 판대기를 깔고 누웠다. 다른 사람들이 오기 전에 깨도록 알람을 맞춰두고 누워있었는데, 어느 순간 잠이 들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소음들 때문에 알람이 울리기 전에 먼저 깼는데, 딱 2시간 반 정도 잤더라. 그런데 그 잠이 너무나도 달고 개운했다.

또 다른 친구에게서는 가끔 주말에 저녁을 같이 먹자고 연락이 오곤 한다. 그런 날 자연스럽게 그 친구 집으로 가서 거기서 자고, 어떻게 핑계를 대서 하루 정도 더 머무리기도 했다. 물론 이 친구도 내가 힘들다고 말하면 얼마든지 재워줄 수 있는 사람이다. 그저 그 연락을 하는 타이밍이 좀 안 맞았을 뿐.

지금은 아이들과 부산에 와있다. 부모님께서는 긴 폭염에도 에어컨을 안 켜고 버티시다가 아들과 손주들이 오고서야 에어컨을 켜셨다. 내가 에어컨을 쓰면서도 전기요금 덜 나오는 방법을 알려드려도 소용없다. 암튼 그래서 어제 밤은 시원하게 잘 잤다. 에어컨 설정 온도를 28도나 29도로 높이고, 바람 세기는 제일 약하게 해두면 실외기가 일을 적게한다. 그렇게 긴 시간 켜놓아도 전기요금은 적게 나온다. 물론 에어컨의 수명과 기종에 따른 차이는 있을 수 있다.

어제 아이들과 부산행 기차를 탈 때 조금 힘들었다. 아이들에게 아침에 늦지 않게 출발해야 한다고 여러번 신신당부를 해놓고 일부러 기차 시간보다 훨씬 여유있게 약속을 잡아놓았는데, 역시 아이들은 늦게 왔다. 아직은 조금의 여유가 있다고 여겨 아이들을 안심 시켰는데, 전철을 갈아타는 과정에서 생각보다 환승통로가 너무 멀어서 다음 열차를 놓칠 위기에 처했다. 나는 순간 판단을 잘 못하여 뛰면 탈 수 있을 줄 알고 무거운 가방을 메고 또 손에도 든 채로 아이들에게 뛰라고 했는데, 결국 눈 앞에서 열차를 놓쳤다. 이젠 정말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무거운 짐들을 들고 뛰었던 나와 아이들은 이미 완전히 땀에 젖고 지쳐있었다. 아직 오전이었는데 실외 공간이었던 전철역은 완전 찜통이었다.

간신히 기차 시간에 맞춰 타고 부산으로 오니 부산은 더 더웠다. 그야말로 불볕 지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짧은 기간동안 아이들과 뭘 하고 놀지를 계속 고민하고 있었는데, 아이들은 시원한 에어컨 바람 쐬면서 집에 그냥 머물기를 원했다. 음, 이정도 더위라면 진짜 그게 나으려나 모르겠다. 암튼 정신 없었던 휴가 첫 날을 어찌어찌 지나고 이제 둘째 날 아침이다. 오늘은 저녁에 사직구장에서 야구를 볼 예정이고 운 좋게도 꼭 원했던 1루 내야 좋은 자리를 구했었다. 큰 아이가 가장 기대하는 일이다. 비록 엄청 더울 테지만, 맛있는 것 먹고 재밌게 보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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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4-08-08 22: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94년의 폭염을 정확히 기억하는 것은 점심식사후 강제로 주어지던 두 시간의 오침 때문입니다. 두 시간의 오침후 한 시간의 전투 수영, 그리고 해질녘까지 이어지던 전투 축구. 군바리가 아닌 태능선수촌 선수처럼 보낸 그해 팔월은 이십대이후 가장 더웠던 시절입니다.

감은빛 2024-08-19 18:06   좋아요 0 | URL
어우! 그 더위를 국가대표 선수처럼 보내셨다니, 대단하시다는 생각과 함께 얼마나 힘드셨을지 상상도 하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점심식사 후 두 시간의 오침은 좋은데요. 군대 있을 때는 철책선에서 야간 경계근무 섰던 시절 날들을 제외하면 꿈도 못 꿀 일이었어요.

그나저나 며칠이 휙 지나는 동안 서울의 열대야 기록이 기상관측사상 가장 길게 이어지는 것으로 발표가 났네요. 정말 사람 잡는 더위입니다.


희선 2024-08-18 03: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난 여름은 괜찮았던 것 같은데, 이번 여름은 습도가 높아서 더 덥군요 더워서 그런지 조금 어지럽기도 하고... 부산은 이번 여름 아주 덥겠습니다 더운 낮에는 바깥에 나가지 않는 게 좋죠 조금 시원해지려나 했는데, 다시 더워진 느낌도 듭니다 덥다 해도 여름 가겠지요 지금은 부산에서 돌아오셨겠네요 감은빛 님 두 따님과 좋은 시간 보냈기를 바랍니다


희선

감은빛 2024-08-19 18:08   좋아요 1 | URL
부산도 서울도 둘 다 엄청 덥네요. 두 도시 모두 기상관측 이래 최장 기간 열대야 기록을 세웠다고 해요. 참 올해도 더위 때문에 너무 힘드네요.

희선님, 덕분에 아이들과 즐거운 휴가 보내고 잘 돌아왔어요. 일상으로 돌아오면 일상에 적응을 해야 할텐데, 자꾸 마음은 딴 곳에 가 있네요.
 

야구 이야기, 아니 어느 롯데 팬 이야기


올해 봄부터 시간이 많아져서 야구를 열심히 보고 있다. 늘 야구를 좋아했지만, 지난 10여년 동안 워낙 여유가 없는 삶을 살아서 야구까지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대학동기이자 친한 친구는 해마다 봄부터 여름까지 롯데 자이언츠의 경기 결과에 따라 희비를 오가며 기분이 오락가락하곤 했다. 아마 우리 아버지도 늘 그러셨을 것이다. 멀리 살아서 볼 수는 없지만, 안 봐도 눈에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친구와 아버지 뿐 아니라 수많은 롯데 팬들 모두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올해 내가 아주 오랜만에 그 무리에 다시 합류했다.


집에 티비가 없는 나는 야구를 보기 위해 티빙에 가입했다. 이게 예전에는 포털 사이트에서 무료로 공중파 티비 중계를 볼 수 있었다고 하던데, 올해부터 바뀌어서 유료로 티빙에서 봐야 한다고 하더라. 자주 야구를 챙겨보다 보니 당연히 야구장에 가서 경기를 보고 싶어졌다. 그렇다고 혼자 가기는 좀 심심하고, 여기 서울에 아는 롯데 팬은 내 친구가 유일하지만, 그 친구는 평소 바빠서 야구장을 같이 가기는 어려웠다. 나는 아이들을 꼬셨다. 큰 아이는 몇 해 전 야구를 소재로 한 드라마 [스토브 리그]를 나와 함께 봤었기 때문에 야구에 관심이 있었다. 작은 아이는 야구를 전혀 모르고 관심도 없었지만, 언니가 간다면 같이 가겠다고 했다. 그래서 몇 차례 야구장 표를 예매했다.


사직 구장 직관의 마지막이 아마도 대학 1학년 이었던 90년대 중반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30년 만에 야구장에 다시 갔다. 올해 첫 직관은 고척 구장이었다. 키움이란 구단이 생겼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키움이 어떤 구단인지, 어떤 선수가 있는지는 전혀 몰랐다. 이왕 아이랑 같이 야구장을 가게 된 것이니, 좋은 자리에 앉아 야구를 즐길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다. 예매 시작 시간을 미리 알아두고 알람을 맞춰놓았다. 예매는 오후 2시 시작이었다. 정각 두시가 되자마자 예매 버튼을 눌렀는데, 대기 번호 1450번대의 번호를 받았다. 그래도 다행히 번호는 빠르게 줄었다. 약 4분 정도를 기다려 예매 화면으로 들어왔는데, 이미 좋은 자리들은 빈 자리가 별로 없었다. 이게 앱의 오류인 건지 사람들이 몰려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예매 화면에서는 해당 구역에 빈 자리가 있다고 빨간색 숫자가 떠 있지만, 좌석을 선택하는 화면으로 넘어가면 빈 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이 작업을 두세 번 반복하면서 화면이 넘어가는데 기다리는 시간을 포함해 오랜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고, 빈 자리를 뜻하는 빨간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어, 이러다가 자리를 못 구할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나는 롯데 팬이기 때문에 당연히 3루 내야 자리를 찾고 있었는데, 내가 원했던 1층과 2층의 좋은 자리들은 이제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3층 이상 위층으로 가면 너무 멀어서 잘 안 보일 것 같았고, 외야로 가기도 싫었다. 결국 조금 고민한 후에 3루를 포기하고 1루 쪽을 살폈다. 3루 쪽 좋은 자리는 아주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지만, 1루 쪽은 아직 자리가 좀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구역을 선택해 빈 좌석을 선택하려 들어가면 또 보이지 않았다. 결국 3층 자리를 알아보는 것으로 마음을 바꾸고 다시 3루를 봤는데, 그새 3층의 좋은 자리도 다 사라져버렸다. 다시 1루로 돌아와 겨우 3층 자리 2개를 예약했다.


그런데 이렇게 어렵게 예약을 해놓았는데, 큰 아이가 갑자기 중요한 일이 생겼다고 야구를 못 보겠다고 했다. 나는 실망이 컸지만, 어쩔수 없었다. 이미 성인이 된 아이가 내 맘대로 움직인다는 보장은 없는 것이니까. 그래서 표를 취소할까 생각하다가 마침 나처럼 시간이 많은 친구가 생각나서 그와 함께 첫 직관을 갔다. 고척 구장이 돔이라서 처음엔 좀 신기했는데, 내가 예매한 3층 자리는 정말 멀어서 선수들이 잘 보이지는 않았다. 결과적으로 시작 시간을 기다려 좋은 자리를 구하려했던 내 시도는 완전 실패였다. 그리고 고척 구장은 표가 좀 비쌌다. 금요일 경기라 주말 가격으로 받아서 더 비쌌다.


그 다음은 잠실이었다. 두산과의 경기였는데, 잠실은 그래도 구장이 크고 좌석이 많아서 고척처럼 예매가 어렵지는 않으리라고 예상했고, 실제로 대기번호 1000번대를 받았다가 들어가니 3루 1층 좋은 자리들이 제법 남아 있었다. 주중 3연전 중 둘째날 경기를 큰 아이와 함께 보고, 그 다음날인 셋째날 경기를 작은 아이까지 셋이서 함께 보았다. 장마 기간이라 경기가 비로 취소되는 것은 아닌지 마음을 졸였는데, 다행히 두 경기 모두 취소되지는 않았다. 마지막 날 셋이 갔을 때에는 경기 중에 무조건 비가 올 거라는 예보가 있어서 비닐 우비를 3개 사서 들어갔는데, 운이 좋게도 우리가 앉은 자리는 위에 지붕이 씌워져 있어서 비를 맞지 않을 수 있는 좋은 자리였다. 전혀 모르고 표를 예매했었는데, 정말 운이 좋았다. 그래서 경기 중에 비가 오락가락 할 때마다 대다수의 관중들이 우비를 입거나 우산을 펼치는 모습을 지켜보며 우리는 아주 마음 편하게 경기를 보았다. 3루측 1층 자리 중에 그렇게 비를 피할 수 있는 자리는 정말 소수였는데, 딱 거기에 우리가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그 다음 두 번은 인천 문학경기장을 갔었다. 인천까지 거리가 멀어서 평일에 가는 것이 조금 망설여지긴 했는데, 그래도 오가지 못할 거리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예매를 했다. 이번에 구한 자리가 지금까지 예매했던 자리들 중에서 응원단상과 가장 가깝고 선수들도 잘 보이는 곳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함께 가기로 한 아이들 둘이 모두 아팠다. 둘 다 못 가서 아쉬워했다. 나도 실망하고 표를 취소할 생각이었는데, 다른 일을 하다가 그만 취소할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을 넘겨버렸다. 이대로 몇 만원을 낭비하기에는 너무 아까워서 다시 처음에 고척 구장을 같이 갔던 친구랑 또 다른 한 명을 급하게 섭외해 다녀왔다. 마지막도 문학이었다. 이번에는 1층을 포기하고 4층을 예매했다. 문학구장의 경우 4층 맨 앞에서 경기장이 가깝게 잘 보인다는 글을 어디선가 보았었다. 1층을 포기하고 바로 4층 맨 앞자리를 찾았는데, 몇 개가 보였고, 제일 좋은 위치로 두 자리를 예매했다. 큰 아이와 같이 둘이 갔는데, 아이도 자리가 좋다고 무척 만족했다. 


구도(야구도시) 부산에서 자란 나는 어렸을 때 그러니까 국민학생 때부터 프로야구를 좋아했다. 가난한 집이었는데도, 부모님을 졸라서 롯데 자이언츠 어린이 클럽 뭐 그런 이름의 멤버쉽에 가입해 자이언츠 유니폼과 같은 디자인의 셔츠와 모자를 받았었다. 최근 아이들에게 어릴 때 이 셔츠를 입고 모자를 쓴 사진을 보여주며, 아빠는 이렇게 어렸을 때부터 롯데 팬이었어 라고 자랑처럼 말했다. 정확한 연도는 기억나지 않지만, 프로야구 초창기였다. 아버지와 함께 혹은 다른 친척들까지 해서 여러번 사직 야구장에 갔었다. 요즘도 고척 돔 구장에서는 가방 검사를 하던데, 그 시절 야구장에서도 가방 뿐 아니라 옷에 술을 숨겨들어오지는 않는지 옷까지 검사했다. 아직 국민학생이라 어렸던 나는 검사를 안 받고 그냥 통과했는데, 그래서 아버지는 내 옷에 소주를 서너병 씩 숨겨 들어가게 하셨다. 그 시절 야구장에 대한 기억들 중에 유독 술에 취한 아저씨들이 소리를 지르고, 폭력을 휘두르는 장면들이 많았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친구랑 같이 자주 야구장을 다녔다. 그때 사직구장은 7회부터 무료로 열어줬다. 대략 시간을 맞춰 근처에 가서 조금 기다리다 보면 들어갈 수 있었고, 컵라면을 먹으며 야구를 보곤 했다. 고등학생 때는 학원을 핑계로 야간 자율학습을 빼먹고 야구장을 가곤 했다. 가끔 용돈이 있으면 표를 사서 1회부터 들어갔고, 돈이 없을 때에는 7회까지 기다려서 들어가곤 했다. 그 시절에는 매일 스포츠 신문을 사서 보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 친구가 신문을 다 보면 빌려와 프로야구 기사들을 꼼꼼히 읽고, 팀 순위와 선수들 성적 등을 공책에 적어두곤 했다.


해태 선동열 선수와 롯데 최동원 선수의 맞대결은 딱 세 번 있었다. 상대 전적 1승, 1무, 1패. 저 1무에 해당하는 경기가 영화 [퍼펙트 게임]로 만들어진 바로 그날 경기였다. 너무 오래전이라 디테일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데, 나는 두 선수가 맞붙은 경기 중 롯데가 졌던 경기를 사직 구장에서 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본 경기가 저 전설적인 경기가 아니었던 것이 아쉽지만, 단 3번 밖에 없었던 전설들의 맞대결 중 하나라도 본 것이 어딘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롯데의 우승은 1984년과 1992년이었다. 마지막 우승 후 30년이다. 현재 프로야구 리그 10개 팀 중 우승을 못한 지 가장 오래된 팀이 바로 롯데다. 저 92년에 나는 고등학생이었는데,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몰래 라디오로 롯데의 가을 야구 중계를 들었다. 나 말고도 우리 반에 그렇게 몰래 라디오로 야구 중계를 듣는 아이들이 많았다. 조용한 교실에서 라디오를 듣다가 롯데가 점수를 올리면 조용히 몸 동작으로만 환호하곤 했다. 84년은 그야말로 최동원의 원맨쇼로 우승을 했고, 92년엔 투타 모두 우승 전력이라 하기엔 조금 아쉬움이 있었지만, 그래도 좋은 선수들이 적시적소에 멋진 활약을 펼쳐 우승까지 갈 수 있었다. 올해 롯데 경기를 꾸준히 보다보니 확실히 롯데가 야구를 못하는 것이 맞긴 하더라. 해마다 하위권 성적이라 좋은 선수들을 데려올 수 있는 기회는 많았을텐데, 왜 이렇게 잘하는 선수가 별로 없을까? 롯데와 함께 긴 시간 하위권에 머물렀던 한화는 그래도 좋은 선수들은 많던데, 롯데는 왜 이런지 모르겠다.


그래도 올해 롯데 타선은 흔히 말하는 윤고나황 이라는 젊은 타자들의 성장 덕분에 그래도 괜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윤동희는 타격감도 괜찮고 수비도 잘 하고 어깨가 좋아서 외야에서 바로 홈으로 던지는 송구도 좋다. 얼마 전 강하고 빠른 송구로 홈으로 들어오던 주자를 아웃시킨 장면은 오래 기억에 남을 명장면이었다. 고승민도 약간 기복이 있긴 하지만 타격이 참 좋고 수비가 좋다. 나승엽은 이들 중에서 그래도 장타력이 조금 더 있고, 타격감이 좋다. 1루수라서 수비는 그렇게 눈에 띄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중에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바로 마황이라 불리는 황성빈이다. 지난 주였던가 2루 주자로 있었을 때 윤동희가 친 타구가 중견수의 호수비에 잡혔고 태그업을 해서 3루로 뛰기 시작했는데, 타구가 펜스에 맞을 정도로 깊어서 그랬는지 3루에서 멈추지 않고 그대로 홈으로 돌더라. 어! 하고 저러다 잡히면 어쩌려구 하는 순간 송구가 포수를 향했고, 아슬아슬하게 황성빈은 홈으로 들어왔다. 야구를 오래 좋아했지만, 태그업으로 홈까지 들어오는 장면은 처음 봤다. 황성빈은 정말 발이 빨라서 내야 땅볼로 아웃될 정도의 타구에도 벌써 1루에 들어와 있기도 하고, 일단 나가면 2루는 거의 매번 훔친다. 황성빈이 달리면 상대 투수와 수비진이 흔들려서 실책이 자주 나오고 그렇게 공이 빠지면 또 달린다. 6월이었던가? 볼넷으로 1루로 나간 황성빈이 도루와 실책으로 3루까지 가고 그 다음 희생플라이로 태그업해서 안타 하나도 없이 홈으로 들어와 1점을 올리는 것을 보았다. 아니, 황성빈이 일단 나가기만 하면 그런 정면이 생각보다 자주 나온다. 


큰 아이와 같이 몇 번 야구장을 가면서 제일 아쉬운 점이 바로 이 수도권에서 우리가 보는 경기는 롯데의 원정 경기라 늘 우리가 3루에서 봐야 한다는 점이었다. 올해 다섯 번의 직관 때마다 홈팀 팬들이 좀 부러웠다. 그렇다고 야구만 보러 부산까지 가기는 좀 돈과 시간이 아까웠다. 그런데 여름 휴가로 부산을 가기로 정해둔 기간에 사직 구장에 야구 경기가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곧바로 예매하러 들어갔다. 이게 참 공교롭게도 예매 시작하고 한 두어시간 후에 그 주중 3연전이 사직에서 열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부모님께 함께 야구를 보러 갈 것인지를 물어보고(안 가고집에서 편히 티비로 보시겠다고 답하셨다.) 아이들에게도 사직 구장에 야구 보러 갈 거냐고 물었었다. 그러니까 하루만 미리 알았어도, 아니면 적어도 두세시간만 미리 알았어도 딱 예매 시작 시간을 맞출 수도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당연히 1루 쪽 좋은 자리는 이미 다 없어진 후였다. 아쉬운 마음에 아무리 예매 페이지를 들락날락해봐도 꼭 앉고 싶었던 구역에 빈 자리는 나오지 않았다. 결국 포기하고 조금 뒤쪽, 조금 외야에 가까운 자리로 세 자리를 예매했다. 아이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자 큰 아이는 "그래도 사직에서 볼 수 잇는게 어디예요."라고 답했다. 그리고 나는 시간일 날 때마다 혹시 취소표가 나오는지 확인하리라고 다짐을 했다. 아마 그날 저녁이었을 것이다. 저녁을 먹으러 나가려고 생각하고 뭘 먹을지 고민하다가 문득 생각나서 앱을 켜고 1루쪽 자리를 찾아봤다. 와! 딱 내가 원했던 구역 한 가운데에 딱 3자리가 나와있었다. 누군가 얼마 전에 취소한 것 같았다. 자리가 없어질까봐 정말 빛의 속도로 예매를 했다.(적어도 기분은 그랬다.) 이 기쁜 소식을 얼른 아이들에게 알리고 낮에 예매했던 외야에 가까운 자리를 취소했다. 취소하기 전에 혹시 내가 실수할까봐 몇 번이나 확인을 거듭했다. 큰 아이는 무척 기뻐했고, "우리 아빠 최고!" 라고 답했다. 


올해 롯데 자이언츠는 팬 세명이 늘었다. 한 명은 2000년대 이후로 바쁜 삶을 살아가느라 야구 경기를 못 보다가 다시 돌아온 팬이고, 나머지 두 명은 본인 의사와는 관계없이 아빠 때문에 팬이 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롯데가 여전히 야구를 잘 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이다. 야구를 잘 하지 못하기 때문에 경기에서 패배하는 날이 많고, 패배하는 날이 많다는 것은 팬으로서 실망하고 기분이 나빠질 날이 많다는 뜻이다. 이왕이면 좀 더 잘하는 팀의 팬이었다면 참 좋았을텐데. 왜 하필 롯데 팬이 되어서 이렇게 패배감을 자주 맛보아야 하는 것인가! 그렇지만 왜 하필 부산에서 태어나 자랐을까 하고 탓할 수는 없는 법. 애들 입장에서는 하필이면 아빠가 롯데 팬이어서 라고 원망할 지는 모르겠다. 올해 다섯 번의 직관은 모두 패배였다. 내가 야구장에 가는 날엔 친한 친구들도 모두 야구를 보거나 최종 점수를 확인한다. 또 패배라고 놀리기 위해서. 차라리 롯데를 위해 야구장을 가지 말라고도 말한다. 이번에 사직 구장에서만은 꼭 롯데가 이겼으면 좋겠다. 직관 1승을 우리 가족에게 꼭 안겨 주었으면 좋겠다. 롯데 자이언츠 선수들 모두 힘 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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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오랜만이야


아주 오랫동안 알라딘 서재에 글을 안 썼다. 결과적으로는 그렇다. 사실 중간에 여러번 글을 쓰다가 완성을 못 하고 닫곤 했다. 한참 시간이 지나 다시 쓰던 글을 보니, 그닥 완성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그냥 지워버렸다. 그걸 여러 번 반복하다 보니 훌쩍 몇 달이 흘렀다. 조금 시간 여유가 생겨서 글을 좀 써보고 싶었는데, 역시 시간이 난다고 하고 싶었던 일을 제대로 하는 것은 아니더라. 한동안은 노트북을 켜서 자판을 두드렸고, 노트북 켜기가 귀찮아진 후로는 휴대폰 메모장을 열어 작은 폰 키보드로 두드렸다. 사실 노트북을 켜기가 귀찮아진 것도 있지만, 언제부턴가 화면 크기가 애매한 노트북 화면으로는 글씨가 잘 안 보여서 더욱 노트북을 쓰기가 싫어졌다. 책상 위엔 큰 모니터가 있어서 노트북을 연결하면 되는데, 책상에 앉기는 귀찮고, 그냥 안방에 앉아서 노트북을 들여다 보려니 글씨가 잘 안 보인다. 삼 년? 아니 사 년 정도 되었나? 노안이 심해진 후로는 안경을 벗고 폰을 들여다보는 것이 제일 편해졌다. 노안이 심해지고 나니 새삼 내 눈은 참 쓸모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아주 심한 근시에 난시까지 있어서 3회나 4회 압축한 렌즈를 사용한 안경을 써도 교정 시력이 1.0이 되지 않는다. 이젠 노안이 심해져 가까운 글씨는 가까워서 안 보이고, 먼 글씨는 원래 안 보였기 때문에 계속 안 보이니, 이런 눈으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나 싶다.


제목을 "알라딘, 오랜만이야."라고 쓰긴 했지만, 실은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는 북플 앱으로 들어왔었다. 제일 먼저 "지난 오늘" 메뉴를 열어 과거 오늘 쓴 글들을 찾아보곤 했다. 글을 자주 쓴 편은 아니어서 없는 날도 가끔 있었고, 두세개 혹은 서너개 정도의 글이 있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아주 가끔은 피드에서 반가운 이웃들의 글을 만나 댓글을 쓰기도 했지만, 일부러 이웃들을 찾아가지는 않았다.


과거 오늘 내가 쓴 글들을 계속 살펴보니 이 시기의 내 키워드는 늘 운동이더라. 안 그래도 운동과 몸매 이야기를 또 쓰려고 했으나, 이것도 참 매번 이 주제만 쓰려니 그것도 좀 민망하다 싶다.


식욕 폭발


초봄이었을 것이다. 업무 스트레스가 너무 극심한 상황 때문에 입맛도 없었다. 어차피 몇 해 전 사고 이후로 소식을 해왔기 때문에 위의 크기도 줄어 있었다. 그러다 봄이 끝나갈 무렵 스트레스 상황이 조금 나아졌다. 마음이 편해지고 나니 다시 식욕이 돌아왔다. 위의 용량이 줄어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제법 길었던 것 같은데, 원래대로 늘어나는데 걸리는 시간은 금방이더라. 폭식을 반복하고 나니 배가 뽈록 나오고, 살이 찌기 시작했다. 그 무렵에 나를 만난 사람들이 유독 살이 쪘다는 이야기를 하더라. 친한 여성 한 분은 몇 주만에 만난 나에게 "어머! 살이 왜 이렇게 쪘" 까지 말하다가 손으로 입을 막았다. 차마 "쪘어?" 라고 묻지는 못하고 잠시 말을 멈췄다. 다시 "어머! 왜 이렇게 건강해졌어?" 라고 묻는 것으로 말을 바꿨다. 그 후로 이왕 이렇게 먹기 시작한 거, 그냥 몸매 관리 따위 완전히 포기하고 살자 하는 심정으로 계속 먹었다.


도대체 근육이 어디 있다는 거야?


그렇게 열심히 먹기만 하고 달리기를 제외한 운동은 거의 하지 않고 제법 오래 지냈는데, 근력운동을 오래 쉰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돌아보면 10대 후반부터 군대 제대하고 20대 후반까지 운동을 좀 했었고, 결혼 후 오랫동안 운동을 안 하다가 30대 중반부터 다시 쉬엄쉬엄 운동을 했다. 이혼하고 혼자가 된 30대 후반에 운동을 정말 열심히 했고, 40대 초반에 가장 괜찮은 몸매가 되었다. 결혼 후에는 한번도 본 적 없었던 선명한 복근을 다시 봤던 것도 딱 그 시기이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 교통사고를 당했고, 꽤 긴 시간 운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근손실이 일어났다. 내가 가장 자랑스러워 했던, 여름에 몸에 붙는 옷을 입으면 드러나는 잘 발달한 흉근이 확 줄었고, 원래도 근육이 크지는 않았던 온 몸의 주요 근육들이 다 줄어들었다. 다시 운동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이 되었을 때부터 맨 몸 운동을 중심으로 무리하지 않고 운동을 시작했다. 잃었던 근육들을 다시 찾고 싶었던 것도 있지만, 그 보다는 예전에 내가 좋아했던 난이도가 높은 운동돌, 바벨과 케틀벨을 이용한 여러 전신 운동들을 얼른 다시 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거의 1년 가까이 점진적으로 운동을 했음에도 예전에 비하면 아니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는 목표의 반에 반도 미치지 못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운동은 바벨 스내치와 케틀벨 스내치인데 이 두 가지 운동은 조금 실수하면 관절을 다치기 때문에 사전에 충분히 근력과 유연성을 길러놓아야 한다. 그걸 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는데, 원하는 만큼 잘 되지 않았기에 그 실망이 컸다. 그리고 운동을 하기 위한 동기를 잃었다. 그때부터 운동이 재미가 없어졌다. 노력해도 내가 원하는 동작을 하지도 못 하는데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내가 오래 운동을 쉬고 있었고, 열심히 먹고 있었기 때문에 점점 살이 찌고 배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나와 친한 지인들은 자주 나를 운동하는 사람, 우리 중에 그래도 제일 근육이 있는 사람이라는 말을 종종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여성 지인이 다른 이의 말을 듣고 내 몸을 훑어 보며 "그래서 도대체 근육은 어디 있다는 거야?" 라고 물었다. 웃는 표정이었고, 당연히 농담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리고 그 말을 들어도 반박을 못 할 정도로 운동을 오래 쉬고 있었기 때문에 나도 그냥 웃어 넘기고 말았지만, 실은 뭔가 설명을 해줄까 하는 충동이 자꾸 생겼다. 사실 운동을 한다고 누구나 다 근육이 눈에 띄게 커지는 것은 아니다. 근육을 키우는 운동이 있고, 크기를 키우는 효과는 적어도 근력을 늘리거나 특정 동작을 잘 하게 되는 등의 기능을 향상시키는 운동들도 있다. 어려서부터 근육이 큰 것 보다는 균형 잡힌 단단한 몸매를 원했기 때문에 저중량 고반복의 펌핑운동은 싫어했다. 다만, 흉근이 잘 발달한 것은 중학생 시절부터 바벨을 들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눈에 띄게 커졌다. 물론 앞서 말했듯이 그것도 근손실로 많이 잃었지만.


나는 여름이면 몸에 붙는 옷을 즐겨 입었다. 그렇게 몸에 붙는 옷을 입으면서 배가 뽈록 나와있다면 그만큼 보기 싫은 것도 없기 때문에 해마다 늦어도 5월에는 운동도 하고 먹는 양을 줄이기 위해 애썼다. 그래야 딱 휴가 기간인 7월 말까지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몸매를 만들 수 있으니까. 그런데 작년부터는 그것마저도 다 포기해버렸다. 그래서 여름이 되니 입을 옷이 없어졌다. 뽈록 나온 배를 가리기 위해 한 치수 위의 옷을 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 조금 헐렁한 옷이 참 낯설고 어색했다. 그런데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다. 금방 이 옷에 익숙해졌다. 이젠 다시 운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멀지 않아서 몸에 붙는 예전 옷들도 입을 수 있으리라.


10km 달리기


운동을 쉬고 있는 동안에도 달리기는 꾸준히 했다. 과거에는 다양한 운동기구로 다양한 동작을 해보고 성공하거나 잘 되었을 때의 그 쾌감 때문에 운동중독이었다면, 작년부터는 달리기로 인한 즐거움에 빠져서 달리기 중독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달리기를 이어가다가 마라톤을 오래한 지인의 꾀임에 빠져 덜컥 마라톤 대회에 등록하고 말았다. 풀코스나 하프코스는 당연히 아니고 겨우 10킬로미터이긴 한데, 원래 내가 좋아하는 것은 장거리 달리기가 아니다. 나는 평소 3~4킬로미터를 달리고, 그 중에 전력질주와 천천히 달리기를 반복하여 일종의 타바타 방식을 달리기에 적용시킨 방식으로 달리는 걸 좋아한다. 이런 방식을 인터벌 트레이닝이라고 부르기도 하더라. 한번에 쉬지 않고 가장 많이 달려본 것은 6킬로미터로 나를 마라톤 대회에 등록하게 만든 그 형과 함께 달렸기 때문에 가능했다. 어쨌든 아무리 달리기를 더 잘 하게 되고 더 좋아하게 되어도 10킬로 이상 먼 거리를 한번에 달리고 싶지는 않다. 그러니 나는 하프코스나 풀코스는 생각도 없다는 뜻이다. 그래도 꾸준히 달렸으니 10킬로미터 정도는 어렵지 않게 뛰겠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10킬로미터 코스를 선택한 것이다. 나중에 또 생각이 바뀔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그렇다.


9월 초에 10킬로 대회를 등록해두고 한동안은 시간 여유가 많다고 마음 편히 지냈다. 그러다가 최근에서야 이제 한 달 반 밖에 안 남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본격적으로 달리기를 준비해야지 싶었다. 일단 대회 전에 10킬로미터라는 거리에 익숙해져야 하니 일주일에 한 두 번은 10킬로를 달려야지 싶었다. 그래서 며칠 전에 시도했다. 낮에는 엄청난 폭염이라 엄두가 나지 않았고, 밤에 나가서 달렸는데, 그 밤에도 덥더라. 나처럼 밤에 달리는 사람들을 간간히 마주쳐서 외롭지는 않았다. 이제 본격적으로 대회를 준비한다 생각하니 약간 설레는 기분이 들어 초반부터 살짝 오버페이스를 해버렸다. 생각보다 일찍 폐활량에 한계를 느꼈고, 조금 쉬다가 뛰기를 반복해 7킬로미터 까지는 달렸다. 3킬로를 더 채워 10을 찍고 싶었으나, 초반 오버페이스 때문에 너무 빨리 지쳐버렸다.


그날 이후 달리기 뿐 아니라 다른 운동들을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몸이 너무 망가져 이젠 뭘 해도 제대로 못 하는구나 하고 위기감이 들었다. 며칠전부터 덤벨과 케틀벨에 쌓인 먼지들을 털어내고 다시 운동을 시작했다. 악력기도 색깔별로 꺼내서 먼지를 닦은 후에 단계 별로 쥐기 시작했다. 한창 열심히 할 때는 왼손으로는 무지개 악력기의 첫 단계인 체리를 클로징 했었고, 오른손으로는 둘째 단계인 블루를 클로징 했었다. 그래서 왼손은 블루와 체리를 번갈아가며 쥐고, 오른손은 블루와 셋째 단계인 오렌지를 번갈아 쥐곤 했었다. 최근에 다시 했을 때에는 오른손으로는 겨우 체리를 클로징 했고, 왼손은 클로징이 되지 않았다. 거의 붙을 것 같은 상태에서 더 쥐어지지 않았다. 다시 블루를 쥐어보니 오른손은 아까 왼손으로 체리를 쥐었던 것처럼 붙기 직전 상태에서 더 오므려지지 않았다. 왼손은 뭐 어림도 없었다. 그래서 이젠 네거티브 방식으로 전환했다. 체리, 블루, 오렌지를 모두 먼저 쥔 상태에서 최대한 버티는 네거티브 방식. 악력기는 매일 쉬지 않고 계속 하고 있다. 책을 읽을 때나, 유튜브나 영화 등을 볼 때 손은 늘 악력기를 쥐고 있었다. 바벨은 아직 손을 못 대고 있다. 덤벨과 케틀벨로 다시 근력과 유연성을 좀 더 키워야 안전하게 바벨 운동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데드리프트 정도는 지금도 어느 정도 무게는 들어올릴 수 있을 텐데, 클린 앤 저크나 스내치 같은 동작들은 아직 무리라 생각한다.


달리기는 매일 안 쉬고 하려고 노력 중이다. 하루는 점점 거리를 늘려가는 방식으로 좀 힘들게 달리고, 그 다음날은 짧은 거리를 달려 좀 쉬어가는 날로 하는 방식이다. 어제는 처음으로 9킬로미터에 도전했다. 날이 덥고 힘들었는데, 지금 시점에 9킬로를 달리고 한 일주일 안에 10킬로를 시도해야 8월 중순부터는 속도를 높이는 훈련을 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암튼 조금 힘들어도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밤이라도 너무 더워서 5킬로미터를 달리고 나니 물에 빠졌다가 나온 사람처럼 온 몸에 걸치고 있는 모든 것이 젖어버렸다. 조금 쉬다가 남은 4킬로미터를 달렸는데, 이미 지쳐서 속도가 많이 줄어있었고, 마지막 500미터는 정말 너무 힘들어서 죽을 것 같았다. 10킬로미터 정도는 어떻게든 달릴 수 있을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너무 안일한 것이었다고 깨달았다. 내가 장거리 달리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시도해 본 적도 없었으면서 너무 무모했다는 반성을 조금 했다. 하지만 아직 늦지는 않았다. 아직 한 달 조금 넘게 시간이 있고, 8월 10일 정도에 10킬로 완주를 한 번 하고 이후 한 20일 정도는 속도를 높이는 훈련을 할 수 잇을 것이다. 


어제 9킬로를 달리고 한참을 쉬다가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왔는데, 정말 물에 빠진 생쥐 몰골이었다. 샤워하면서 몸에 걸치고 있던 모든 것들을 다 손으로 빨아 널어놓고 나니 꽤 늦은 시간이 되어 있었다. 머리를 말리기도 귀찮아서 선풍기를 머리 방향으로 켜놓고 멍하니 누워 있었다. 많이 지쳐서 금방 잠들 줄 알았는데, 너무 더워서 잠이 오지 않았다. 샤워를 하고 나와서 빨래들을 널어두는 동작 만으로도 다시 온 몸에 땀이 흘렀다.


에어컨 없는 삶


뉴스를 보니 서울은 어제 밤 기준으로 12일 연속 열대야하고 했다. 그리고 적어도 다음주까지는 열대야가 계속될 예정이라 21일 혹은 22일 연속 열대아가 되리라 예상하더라. 그렇게 된다면 1994년과 2018년에 이어 기상관측 사상 세 번째가 되리라는 예측도 나왔다. 올해 여름도 정말 힘들거라고 예상했다. 그리고 올해는 더위보다 습도가 높은 것이 더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빨래를 널어두어도 습도가 높으니 마르지 않았다. 정말 견디기 힘든 날들은 지인들의 집으로 피난을 갔다. 집에서 견디기 힘들면 언제든 오라는 친구가 있고, 그렇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가겠다고 하면 거절하지 않을 친구들도 있다. 한 곳에 이틀 이상 머물면 나도 불편하고 눈치가 보이니까 이 집 저 집을 번갈아 가며 돌아다니기도 했다. 최근 며칠은 밤에 달리기를 하고 새벽에 집으로 돌아가느라 친구들 집을 방문하지 못했는데, 이젠 미리 연락해두고 새벽에 들어가겠다고 해야겠다.


제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 글은 7월의 마지막 날 쓰기 시작해서, 8월 첫째 날에 조금 이어 쓰다가 완성을 못하고 둘째 날인 오늘 겨우 완성해 등록한다. 오늘은 저녁에 일과 관련한 모임이 있어서 낮에 2킬로를 달렸다. 숙제를 끝냈으니 후련한 기분으로 저녁 일정을 시작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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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4-08-03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는 점점 거리를 늘려가는 방식으로 좀 힘들게 달리고, 그 다음날은 짧은 거리를 달려 좀 쉬어가는 날로 하는 방식이다.˝ - 이것 좋은 방식인 것 같습니다. 저는, 저처럼 마른 사람은 매일 운동을 하는 것보다 격일로 운동하는 게 더 좋을 거야, 하고 합리화하면서 요즘 격일로 걷기 운동을 했어요. 십 몇 년간 매일 한 시간씩 걸었는데 이제 꽤가 난 거죠. 발레는 꾸준히 주 1회로 하고, 추가로 이번 8~9월 월수금 저녁 스트레칭 수업을 등록했는데(주민센터에서 아주 저렴한 수업료로 하는 거라서) 이것도 주 1~2회만 가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나간 김에 걷자는 생각으로 등록했어요. 이런 게 다 건강에 관심이 많아서예요. 연말에 건강검진을 할 때마다 병이 뭐 있나 쫄거든요.ㅋㅋ

감은빛 2024-08-05 17:58   좋아요 1 | URL
페크님, 운동도 중요하지만, 운동 보다 휴식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충분히 쉬어주지 않고 피로가 쌓이면 운동을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거든요.

발레를 하시는군요. 스트레칭 수업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날 더운데 늘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고질병


나는 심각하게 바쁘고 중요한 때일수록 자꾸 딴 짓을 하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고질병이 있다. 머리로는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라고 계속 외치고 있음에도 내 몸은 머리의 말을 듣지 않고 계속 엉뚱한 짓에 몰두해 있곤 한다. 지금 이 순간이 그렇고, 오늘 아침에 그랬고, 어제도 그랬다. 고질병이라 표현했듯이, 당연히, 이번만 그런 것은 아니다. 지금껏 살면서 수없이 많이 그래왔다. 변명을 하자면, 바쁜 때에 잠시 머리를 식히기 위해 딴 짓을 하면,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얼마 남지 않은 남은 시간에 몰려서 더욱 초인적인 집중력을 발휘하여 더 멋지게 일을 잘 할 수 있다고 억지로 우겨본다. 물론 엉뚱한 짓을 할 시간에 일을 멈추지 않고 계속 한다면 조금 더 여유있게 더 잘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딴 짓처럼 보이고, 엉뚱한 짓처럼 느껴지는 일을 하고 있는 그 시간이 내게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잠시 머리를 식히고, 복잡한 머리를 환기 시키는 역할을 할 수도 있고, 그 엉뚱한 일을 통해 뭔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거나, 막혀있던 어떤 흐름을 뚫어주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어쨌거나 확실한 것은 딴 짓 하느라 보낸 시간만큼 더 긴박한 상황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더 긴장하고 더 집중해서 일을 할 수 있다. 대개 이 집중력에 의존하느라 바쁘고 심각하게 중요한 때일수록 자꾸 딴 짓을 하게 된다.


불치병


정말 수십번 반복해서 여기 이 서재에 이야기 하는 것 중 하나는 사람 얼굴과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아주 심각한 병이 있다는 이야기다. 이 말도 여러 번 반복했는데, 과거 개그맨 전유성 씨가 길에서 본인의 딸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다는 말을 듣고, 나도 그렇게 될까봐 두려워하며 살고 있다. 사실 아주 오래전에 이미 어머니를 길에서 못 알아보고 지나쳤고, 여동생은 버스 안에서 마주쳤으나 못 알아보고 웬 낯익은 여성이 있네 라고 생각했었다. 가족들을 못 알아볼 정도니 다른 사람들은 말해 뭐 할까.


최근 어느 모임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 그 중 한 여성이 유독 낯이 익다고 느꼈다. 이건 아마 틀림없을 것이다. 분명 나와 제법 인연을 맺고 있는 분일텐데, 내가 지금 기억을 전혀 못 하고 있다는 것. 그때부터 내 머리는 저 분이 누구인지 기억해내기 위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모임 진행자가 말하는 내용은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누굴까?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는 이름. 분명 과거 어느 기억 속에서 본 얼굴이 었을텐데, 그게 어떤 장면인지를 떠올리면 단서가 될 수 있을텐데. 아무리 애를 써도 떠올릴 수 없었다.


한참 후에 서로 의견을 주고 받는 와중에 그 여성 분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나를 향해 '동기' 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아! 그래. 과거에 일했던 환경단체에서 함께 신입활동가 교육을 받았던 동기였다. 우리는 교육 기수로 11기였다. 전국에서 50명이 넘는 인원이 모였었다. 아마 55명쯤이었던 것 같다. 출신지역도, 연령대도 다양했다. 당시 10대 후반의 막내부터 40대 후반의 큰형님까지 서로 간의 나이 차도 컸다. 각자의 배경도 다양했다. 전체 평균을 내면 그 여성 활동가와 내가 딱 중간 정도인 20대 후반이었다. 사실 나는 40대 형님들, 30대 후반 형님들과 친하게 지내느라 20대 여성 동기들과는 친하게 지낼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동갑이었던 여성들 몇 명을 제외하면 다른 여성 동기들은 잘 기억나지도 않았다. 암튼 그 '동기' 라는 단어 덕분에 이름은 아직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분명히 기억해냈다.


중간에 쉬는 시간에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정말 오랜만이야. 못 알아봐서 미안!" 어색한 표정으로 말을 걸었는데, 그는 밝게 웃으며 "오랜만이예요. 이상하게 다른 동기들은 만날 기회가 없는데, 쌤은 그래도 가끔 보게 되네요. 신기해요." 아, 그 말은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아주 오래 전 동기 모임이 마지막이 아니라 그 이후로도 가끔 봤었다는 이야기인데. 허! 왜 나는 전혀 기억을 못 하는 것일까? 그는 거기서도 봤었고, 저기서도 봤었고 이러면서 나와 만났었던 장소를 언급했다. 그리고 내가 자주 가는 우리 동네 거점 공간의 이름을 말하며 최근에 봤다는 말투로 말을 했다. 아! 하마터면 이게 십 몇년 만이지? 하고 물어볼 뻔했는데, 내가 미처 그 말을 하기 전에 그가 먼저 말을 해줘서 다행이었다. 앞서 언급한 함께 교육을 받았던 시기는 이미 20년도 더 전이었다. 마지막 동기 모임은 아마도 18년 전? 그 정도였을 것이다.


암튼 그렇게 막 반갑다고 한참 떠들던 와중에 한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 친구, 전혀 나이든 티가 나지 않았다. 그 시절의 그 얼굴이 그대로 보였다. 아무리 동안이라도 벌써 20년이 넘게 지났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나는 이렇게나 확 늙어버렸는데. 서로 최근에 만났거나 온라인 상으로라도 소통하는 동기들 이름과 근황을 말하다가 우리 진짜 더 늙기 전에 소식이 닿는 사람들만이라도 동기 모음 한 번 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 얘기는 몇 년 전에 다른 동기들을 만났을 때에도 늘 나왔던 이야기들이었다. 그때와 그~때에도 꼭 그러자고 했었지. 그리고 잊어버리기 전에 우리는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그때 깨달았다. 아, 나 정말 이 친구를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만난 적이 있긴 하구나. 내 폰이 이미 그의 이름이 저장되어 있었다. 번호가 다른 것으로 보아 최근에 저장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오래된 일도 아닌 것 같았다. 그러자 한 가지 뻔한 모습이 머리 속에 떠올라 또 부끄러워졌다. 정확히 언제였을지 모르겠지만, 그와 만났었던 그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의 내가 그때에도 똑같이 엄청 오랜만인 것처럼 말을 걸었다가 저기서도 봤었고, 거기서도 봤었고 이런 반응과 마주했을 것이다.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아! 정말!


난치병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정말 좋아하는 편이다. 자주 만나는 사람들은 자주 만나도 좋고, 가끔 보는 사람들은 가끔 보기에 더욱 더 좋다. 우연히 마주치는 인연은 그래서 더 특별해서 또 좋다. 이렇게 사람을 좋아하지만, 나는 또 그 만큼 혼자 조용히 지내는 시간도 좋아한다. 요즘 어딜가나 MBTI 이야기가 늘 나온다.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I' 와 'E' 중에 뭐냐고 물으며 헷갈린다고 말을 하는데, 나를 그렇게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아는 분들은 대체로 'E' 라고 생각한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세상에 어느 누가 딱 잘라서 내향형이고, 한치의 의심의 여지도 없이 외향형이고 그러겠는가? 그저 성향을 나타내는 지표 중 하나라고 이해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최근 여행을 가서는 'T' 와 'F' 를 두고 말들이 많이 나왔다. 6명이 1박 2일로 놀러간 자리에서 나를 포함해 4명이 T 라고 했고, 나머지 2명이 F 라고 했다. 그때부터 무슨 말을 할 때마다 무슨 유행어처럼 "너 T야?" 라고 정색하며 말하곤 했다. 그러면서 F 두 사람은 서로를 위로하는 제스처를 취하며 소수자의 비애를 느끼는 듯 연기했다. 예전에 한 때는 J 와 P 를 두고도 말들이 많았던 것 같고, N 과 S 를 두고도 어떤 유행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요즘은 T 에게로 화살이 가해지는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정확한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F 는 감성형으로 공감을 잘 하는 편이고, T 는 논리형이라 공감보다는 먼저 따지고 들어가는 편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나는 어려서부터 남들을 잘 이해하지 못했고, 공감하지도 못했다. 나는 늘 스스로를 특이한 아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나만 혼자 동떨어진 생각과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여겼다. 특히 학생운동을 하던 시절의 내가 그런 경향이 강했다. 잘난 것 하나 없는 주제에 내가 무척 잘난 놈이라 느끼며 나는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들을 고려하는 편이라고 자만하곤 했다. 공감 이라는 단어는 내게는 없는 것과 다름 없는 단어였다.


나이가 들면서 성향도 조금씩 바뀌고 성격도 좀 바뀌었다. 그리고 부산에서 부산 사투리 주로 쓰던 젊은 시절의 나와 지금 사투리 억양이 별로 남지 않은 (그렇다고 서울말이나 표준어를 잘 쓴다는 것도 아니지만) 지금 나이 든 나는 성격이 많이 달라졌음을 느낀다. 그럼에도 늘 고민이고 잘 되지 않는 것은 남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공감하는 것이다. 이거 참 쉽지 않다. 난치병이다.


10년 전의 강의


오늘 페이스북이 10년 전의 내가 쓴 짧은 글을 보여줬다. 그날 나는 녹색당에서 주최한 정희진 선생님 강의를 들으러 갔었다. 강의 장소는 환경재단 레이첼 카슨 홀이었다. 이날 나는 아이들을 돌보는 날이어서 퇴근하고 아직 어렸던 당시의 아이들을 데리고 간단히 뭔가를 먹인 후에 강의 장소로 데려갔다. 레이첼 카슨 홀은 이미 서 있을 자리도 없을 정도로 꽉 차 있었고, 아이들이 머물 장소가 없었다. 복도는 추웠고 다른 대기 장소는 전혀 없었다. 경비 아저씨가 머무는 아주 좁은 공간에 난로와 티비가 있었는데, 여기에 여분의 의자가 하나 있었다. 나는 경비 아저씨께 아이들이 여기 빈 의자에 앉아서 기다릴 수 있을지 여쭤봤고, 아저씨께서는 흔쾌히 허락하셨다. 아이들은 간이 의자 하나에 불편하게 끼어 앉아 난로의 온기를 쬐며 티비에 빠져들었다. 덕분에 나는 레이첼 카슨 홀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 간신히 서 있을 공간을 조금 확보하고 강의를 들었다.


강의는 무척 흥미롭고 또 신선했다. 그날 따라 나도 아이들도 몸 상태가 썩 좋지 않고, 무척 피곤한 상태였는데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집중해서 강의를 들었다. 그러나 한참 시간이 지나 아이들이 어쩌고 있는지 걱정이 될 무렵, 마침 작은 아이가 나를 찾는 걸 느꼈다. 상황을 보아하니 경비 아저씨께서 잠시 자리를 비우신 틈을 타서 아저씨께서 앉아 계시던 간이 의자 마저 아이들이 점령해 티비에 열중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작은 아이는 배가 고프고 졸리다고 나를 찾았던 것. 아무리 좋은 강의라도 배고픈 아이들을 외면하고 들을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하고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식당을 찾아 나왔다.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멀게만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녹색당 행사에 아이들을 데려갔을 때마다 아이들은 피곤해하며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잠들었다. 나는 내려야 할 전철 역에서 양 팔에 하나씩 잠든 아이들을 안아 올려 내리곤 했다. 아이들의 가방들과 내 가방들도 당연히 챙겨야 했고, 아이들이 입은 두터운 잠바들과 내 잠바들이 한 쪽 팔에 하나씩 아이들을 동시에 안아 올리기 어려게 만들었지만, 어떻게든 힘으로 극복해야 했다.


제일 큰 난관은 개찰구를 지날 때에다. 교통카드를 찍어야 나갈 수 있는데, 양 팔에 하나씩 아이들을 안은 처지라 카드를 찍을 손이 없었다. 처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아주 난감했는데, 그때 옆을 지나던 어떤 여성 분이 도와주겠다고 하여 잠바 주머니에 든 카드를 찍어달라고 부탁드렸었다. 그 다음부터는 개찰구까지 와서 도와주실 여성 분을 스캔하기 시작해 조심스럽게 부탁을 드리곤 했다. 아이들은 계단을 올라 역 밖으로 완전히 나서서야 찬 바람에 잠이 깨기도 하지만, 설잠에서 깬 탓에 더 짜증을 부리기도 했다. 작은 아이는 대게 더 내 품으로 파고 들었지만, 큰 아이는 그래도 맏이라고 내려서 걷곤 했다. 본인도 아직 어린데 그래도 언니라고 아빠를 배려한 것이다. 그때 역시 맏이였던 입장에서 내 마음이 참 아팠다. 본인도 어리광 부리고 싶고 더 안겨 있고 싶었을텐데. 짜증 하나 없이 투정 하나 없이 묵묵히 내 손을 붙잡고 걸었던 아이였다.


그랬다. 10년 전 그날 강의도 인상 깊었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훨씬 더 나의 뇌리에 깊이 남아 있었다. 그날 내 품을 파고들며 칭얼대던 작은 아이의 온기와 말없이 내 손을 잡고 걷던 큰 아이의 손길이 지금도 느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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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2-28 01: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면인식장애(안면실인증)가 있다는 사람 가끔 있기도 하더군요 그런 사람 소설에도 나와요 그 소설을 쓴 작가가 그렇기도 하다고 합니다 그 작가도 엄마를 못 알아 본 적 있답니다 그래도 자주 만나는 분은 괜찮은 듯도 하네요 자주 어울리는 사람...

여기 알라딘 서재에서는 사람을 못 알아볼 일이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얼굴을 보고 만나는 게 아니어서 다행이네요 그런 거 다른 사람한테 말해두면 이해해주지 않을까 싶습니다

따님이 많이 커서 어릴 때 일을 생각하기도 하시는군요 페이스북이 십년 전에 쓴 짧은 글을 알려줬다 해도... 시간이 지나서 누군가의 마음을 알게 되는 일도 있겠습니다

이월 이틀 남았네요 감은빛 님 남은 이월 잘 보내시고 삼월 잘 맞이하세요 삼일절...


희선

잉크냄새 2024-02-28 17: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질병은 대부분의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바쁘고 긴박할수록 드라마는 더 궁금하고 더 재미있고 와우나 디아블로는 던전을 꼭 돌아야 직성이 풀리지요.

페크pek0501 2024-03-27 15: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랑 똑같아서 웃음이 났네요. 제가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해요. 두세 번쯤 본 얼굴을 기억하는 게 어렵더라고요. 그런데 남들은 제가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저를 알아 보고 인사를 해서 놀라곤 해요. 제가 두뇌가 나쁜 건가, 했는데 감은빛 님의 글을 읽으니 위로가 되네요.ㅋㅋ
 

켈로이드


며칠 전에 북플에서 '지난 오늘' 글들을 읽다가 5년 전쯤인가 켈로이드로 고생했던 시기에 쓴 글을 읽었다. 그때 그 글에도 강조해서 썼었지만, 나는 어려서부터 온 몸 여기저기에 흉터가 정말 많은 편인데, 켈로이드라는 단어 자체를 그 당시에 처음 들었다. 그러니 당시 처음 방문했던 무척 불친절한 의사가 말한 것처럼 내가 켈로이드 체질일 리는 없었다. 다행히 두 번째 찾아간 우리 동네 의료협동조합 주치의가 자세히 설명해주셔서 무릎 같은 관절 부위나 상처가 무척 크고 넓은 경우에는 그럴 수도 있다는 점을 이해했었다. 


그때 처음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았던 경험을 쓴 글에 댓글이 많이 달렸었다. 켈로이드가 잘 낫지 않고,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은 후에 조금 크기가 줄어들고 낫는 듯 하다가도 안 맞으면 다시 심해지기도 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켈로이드 때문에 긴 시간 고통받고 있다는 등의 댓글들이 있었다. 또 스테로이드 주사 외에 연고 형태의 바르는 약에 대한 정보를 주신 분도 계셨다. 그 댓글들 덕분에 나는 켈로이드라는 생소한 현상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두번째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으러 가서는 연고를 처방해달라는 요청도 할 수 있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스테로이드 주사를 약 8개월 동안 네번인가 다섯번인가 맞았다. 처방받은 연고는 1개 구매해서 딱 마지막 주사 맞을 때 즈음에 다 썼다. 그 연고의 덕분에 주사 맞는 주기가 길었음에도 빠른 속도로 흉터 크기가 줄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말 다행히도 내 켈로이드 흉터는 빠른 시간 안에 완치되었다. 이후로 다시 흉터가 커지거나 부풀어 오르지 않았다. 지금 보면 이젠 이게 켈로이드가 맞았던가 싶을 정도다. 지금은 그냥 웃으며 당시를 떠올릴 수 있지만, 그때 당시엔 좀 많이 힘들었다. 일단 흉터 크기가 무척 컸고, 부풀어 오른 정도도 무척 높아서 바짓단에 닿고 쓸릴 때마다 통증이 컸다. 살면서 무릎, 어깨, 골반 등 관절을 다쳐서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던 시절이 꽤 길었다. 이 당시에도 무릎 상처 때문에 거의 6개월 동안 다리를 절면서 살았는데, 이후에 켈로이드 때문에 다시 1년 가까이를 고통 받았었다.


그때 다친 무릎이 왼쪽이었는데, 오른쪽에 비해 왼쪽 무릎은 정말 흉터가 많다. 그때 상처 이후로도 한번 더 큰 상처를 입었었는데, 이 흉터도 또 켈로이드가 되는 건 아닌가 싶어서 걱정도 많았다. 정말 다행이도 이번에는 켈로이드가 되지는 않았다. 다만 다른 흉터들 보다는 조금 부풀어 오르기는 했는데, 흉터의 크기가 그렇게 넓지는 않아서 켈로이드가 되지는 않았다고 여겼다.


새삼스레 지금 켈로이드 얘기를 하는 것은 3년 반 전에 당한 교통사고로 인해 내 옆구리에 남은 큰 수술자국 흉터들 때문이다. 언젠가 같이 목욕탕에 갔던 후배가 이 흉터를 보고 "형, 어릴 때 패싸움 하던 시절에 칼 맞은 자국이예요?" 라고 물었었다. 한때 좀 어두운 삶을 살았던 시절에 칼을 휘두르는 상대에 맞서 싸움질을 한 적은 있었으나 정말 다행스럽게도 칼을 맞은 적은 없었다. 그래서 칼을 맞은 흉터가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내 옆구리에 남은 수술자국은 길고 흉측하다. 게다가 꽤 오랜 기간동안 이 흉터도 조금 부풀어 있었다. 몸을 씻을 때마다 오돌도돌하게 부풀어 오른 흉터가 만져져서 빠르게 씻던 손길을 잠시 멈추고 다시 조심스레 손을 움직이곤 한다.


그렇게 씻을 때마다 신경 쓰이던 이 흉터들을 최근에 샤워하면서 다시 자세히 살펴보았다. 부풀어 올라있던 흉터들이 많이 작아지고 많이 낮아졌다. 켈로이드라고 할 정도로 부풀지는 않았었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일 정도이긴 했는데, 이제는 예전처럼 신경쓰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나는 켈로이드 체질은 아닌 것 같다. 다행이다.


히라가나


요즘 영어와 일본어 익히는 일에 재미를 붙였다. 이런저런 다양한 언어들을 조금씩 손 댔다가 멈추기를 벌써 수년째 하고 있는데, 그 기간동안 그닥 외국어 실력이 늘지는 않았다. 사실 뭐 처음부터 외국어를 잘 하고 싶어서 손을 댄 것도 아니고 그저 재미로 조금씩 들여다보다 그만뒀다 했던 일이라 그냥 재밌게 잘 놀았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조금 욕심이 생겼다. 영어는 확실히 예전에 비해 실력이 줄었다고 느껴서 다시 좀 꾸준히 접할 기회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해왔고, 기존 사용하던 여러 앱들에 더해 최근에 다른 앱 하나를 더 깔았다. 확실히 사람은 새로운 자극이 들어오면 재미를 더 느낀다. 이 새로 깐 앱이 구성 면에서는 좀 아쉬움이 있지만, 재미는 있었다. 그리고 기존 쓰던 다른 앱들도 다시 손을 대다보니 새로운 활력을 느꼈다.


일본어는 딱 계기가 된 일이 있었다. 일본 어느 대학의 환경대학원 학생들이 나를 인터뷰하러 찾아왔던 일이었다. 통역을 해주신 한국인 교수님께서 워낙 잘 해주셔서 당시 나는 영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우리 말로만 말을 했었다. 다만 그 대학원 학생 중에 이스라엘과 인도에서 온 학생들이 소수 있었는데, 그들은 영어로 소통했기 때문에 나는 스스로 영어를 알아듣기 위해 좀 집중을 하긴 했었다. 그리고 인터뷰를 마친 후에 나에게 제일 먼저 연락을 했었던 학생과 잠시 대화를 나눴는데, 그때 나는 주로 영어로 말을 하다가 문득 일본어로 한 마디라도 말을 걸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런데. 그런데. 정말 단 한 단어도 생각이 안 나는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하얗게 변한 느낌이었다. 나와 대화했던 학생을 포함해 그날 방문했던 학생들 10명은 일부러 내게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등등 인사말을 우리말로 했었다. 그래서 나도 헤어지기 전에 인사만이라도 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그마저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게 말 한마디도 못 해보고 헤어진 그들은 나중에 인스타그램과 이메일 등으로 다시 연락을 해오며 다음에 꼭 기회를 만들어서 오겠다고 했다. 이번에는 인터뷰가 아니라 강의를 들으러 오겠다고 했다.


미래는 알 수 없는 일이니, 정말 그들이 다시 올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만약 다시 온다면 그때는 아주 가벼운 대화만이라도 일본어로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아주 가끔 손을 대다가 멈추곤 했던 일본어를 다시 익히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살았던 부산은 일본과 가장 가까운 도시라서 그랬는지 몰라도 다양한 일본 문화를 가장 먼저 접하는 곳이었다. 지인들 중에 일본어를 공부하는 사람도 많았고, 일본어를 제법 잘하는 사람도 많았다. 나는 일부러 일본어를 공부한 적은 없지만, 일본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 드라마 등을 많이 접했기 때문에 자주 쓰는 단어나 표현들은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래서 아마 영어 다음으로 잘 할 수 있는 언어가 일본어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 좀 익혀보려고 마음 먹었던 것이 한 십여년 전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당시에 본격적으로 공부해봐야지 생각했다가 바로 막혔던 지점이 바로 히라가나, 가타가나를 외우는 일이었다. 뭔가 일부러 외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데다가 모양도 익숙하지 않은 이 글자들을 익히는 일이 너무 어렵게 느껴졌다. 그래서 다시 방향을 바꿔 글자는 포기하고 그냥 듣고 알아들을 수 있는 표현이나 단어를 늘리는 것으로 조금씩 하다가 말다가 했었다.


이번에 오랜만에 다시 일본어를 익히면서 히라가나와 가타가나부터 시작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신기하게 이번에는 새로운 글자들을 익히는 일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한번 재미를 느끼면 확실히 속도가 붙는다. 십년이 훌쩍 넘는 기간동안 외우려다 포기하기를 반복했던 히라가나를 단 며칠만에 다 외웠다. 일단 글자를 다 알아보는 단계가 되고 나니 발음으로만 알던 단어들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게 느껴졌다. 와! 이제 정말 번역되지 않은 일본 만화를 읽을 수 있는 건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직 가타가나도 외워야 하고, 무지 어려울 것 같은 한자어도 천천히 익혀야 하겠지만, 한자 위에 가나를 표기한 글이나 만화라면 읽을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무척 기분이 좋아졌다.


어떤 일이든 뭔가 확 바뀌는 계기, 어떤 변곡점 같은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영어는 군대 제대하고 아직 휴학 중이던 시절에 회화학원을 다니며 원어민 선생님 한 명과 친해진 일이 계기가 되어서 확 늘었다. 그때는 미국이나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떠나는 것이 유행이었고, 하다못해 동남아로라도 연수를 다녀오던 시절이었는데, 나는 어학연수는 못 가더라도 회화학원이라도 다녀야지 생각했던 것이 뜻하지 않게 강사랑 친해졌다. 같이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고, 당구를 치러 다니고, 카페에서 수다를 떨거나 같이 장기를 두는 등 어울리다보니 어법에 맞지 않더라도 영어로 떠드는 일에 조금 자신이 생겼고, 그래서 이후로는 주저없이 영어를 말할 수는 있게 되었다. 몰론 여전히 영어를 잘 한다고 말할 정도는 못 되지만.


이번에 히라가나를 익힌 일이 내게는 일본어를 익히는 일에서 변곡점이 되는 사건이라 여긴다. 앞으로 좀 더 재미있게 일본어를 듣고 읽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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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4-02-14 23: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두가지 이상의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분들을 보면 신기해요. 제 경우는 중국어가 늘수록 영어 구사에 문제가 발생하더군요. 중국 생활 초기에는 가끔 만나는 서양인들과 짧은 영어로 소통했었는데 중국어가 늘수록 그들과의 대화에 중국어가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옵니다. 단어 한두마디의 실수가 아니라 전체 문장 자체가 중국어를 기반으로 구성되어버려요. 중국에서의 생활이라는 지리적인 여건이 언어 의식에 영향을 미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I GO TO SCHOOL 이라는 짧은 문장조차 중국말이 먼저 튀어나오는 재미있는 경험이었습니다.

희선 2024-02-15 03: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본말 알아 들은 다음에 글자 공부해도 괜찮지 않나 싶어요 그게 기억에 잘 남기도 하니... 들었던 낱말을 보면 이렇게 쓰는 거구나 하면서... 관심을 가지고 즐겁게 하면 어느새 익히게 되겠습니다

영화회화는 원어민 선생님과 친해져서 여러 말 하시다 잘 하시게 됐군요 다른 나라 말은 문법 같은 거 많이 생각하지 않고 해 보는 게 중요하겠네요


희선

2024-02-15 16:2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