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지난 토요일 아이들과 불광천을 걸었다. 햇빛도 쬐고, 꽃도 보고, 애들과 장난도 치고, 수다도 떨고, 철봉에 매달려 운동도 했다. 오랜만에 야외에서 아이들과 신간을 보낼 수 있어서 행복했다. 그런데 한참 걷다가 완전 기분을 망치는 일이 생겼다. 안철수 후보 선거운동 차량이 다리 중간에 주차하고 불광천을 즐기는 시민들을 향해 마이크로 큰 소리를 내고 있었다. 뭔가 떠들어대는데 그 소리가 멀리까지 퍼져서 무척 시끄러웠다. 듣기 싫은 목소리, 듣기 싫은 말투, 내용은 하나도 없고 그저 안철수 이름만 반복하는 상투적인 유세였다. 무척 거슬렸지만 그저 꾹 참고 걷고 있는데, 아이들이 바로 불평하기 시작했다.
"산책하는데, 이렇게 시끄럽게 하면 어떡하냐?", "왜 하필 불광천에서 난리냐?", "소중한 불광천을 돌려달라!", "행복한 휴일 보내라면서 자기가 우리 행복한 휴일을 망치고 있는 것도 모르다니 바보인가보다"
큰 아이가 불평하는건 당연하다 싶었는데, 작은 아이도 또박또박 불만을 제기하는 걸 보니 신기하고도 대견했다. 특히 불광천에서 이렇게 시끄럽게 하면 오히려 피해를 주는 거라는 내용의 불만이 작은 아이의 입에서 나와서 어느새 아이가 많이 자랐구나 싶었다.
다리 중간에 저렇게 차를 대놓고 선거유세를 하는 건 불법이 아닌가? 선거운동 차량이라 괜찮은 건가? 지나는 행인들이 소음에 대해 뭐라고 한 마디씩 하는 듯 했다. 마이크를 쥔 이가 연설을 하다가 간혹 작게 "죄송합니다"라고 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열심히 안철수 후보를 찬양하던 아저씨가 녹색이 자연의 색이니, 녹색을 찍어달라고 했다. 확 열이 올랐다. 남의 당 색깔을 맘대로 쓰면서 자연의 색 운운하다니! 그들이 단 하나라도 자연을 위하는 제대로 된 정책을 내놓았다면 이렇게 우습지는 않았을 지도 모른다.
게다가 안철수 후보 선거 벽보를 보는 순간, 이건 혹시 우리 벽보를 보고 베낀거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3년 전 갑자기 다니던 출판사에서 해고당하고, 곧바로 결합해서 활동했던 선본에서 많은 고심 끝에 만들었던 벽보와 무척 유사한 컨셉이었다. 천편일률적인 선거벽보 디자인을 벗어나 확 눈에 띄는 벽보를 만들어 지역에서 꽤 인정받았던 벽보였다.
당시 벽보 이미지를 찾아보려고 했는데, 자료를 백업 받아두었던 외장하드를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 나만 그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지역 당원 중에 한 명이 나와 같은 생각으로 안철수 선본이 우리 벽보를 베낀 거 같다고 당시 공보물 표지 이미지를 페이스북에 올렸다.(위 사진은 그 당원이 올려준 선거공보물 표지) 그 글을 많은 동네 주민들이 공감하고, 댓글도 달아주었는데, 같은 생각을 했다는 분들이 꽤 있었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또 베꼈다고 해도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저 내 보기에 기본이 되지 못한 후보가 비슷한 컨셉을 써서 기분이 나쁠 뿐이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당 색깔까지 비슷해서 더 기분이 나쁠 뿐이다. 국민의당과 안철수 선본은 명심하시길. 초록색은 녹색당이 2011년 가을 발기인대회를 할 당시부터 사용한 당 색깔이며, 양손을 치켜든 벽보 컨셉은 2014년 선거에서 녹색당 선본에서 먼저 사용했음을.
둘
엊그제는 새벽에 미군과 경찰이 기습적으로 사드 장비를 반입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니 대통령이 탄핵당하고, 대선을 치루기 전인 대행체제에서 기습적 사드 배치라니!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짓인가? 게다가 연로한 어르신들과 원불교 성직자들이 대부분인 소수의 항의를 8천여명의 병력으로 제압했다. 그 과정에서 경찰은 많은 주민들에게 부상을 입혔으며, 주민들의 차량을 파손했다. 이것만으로도 하루종일 화가 났는데, 나중에 페이스북에서 본 사진 때문에 거의 미칠 뻔 했다. 항의하며 울부짓는 어르신들을 비웃으며 영상을 찍고 있는 미군 얼굴 때문이었다. 그들에게는 미개한 식민지 원주민들이 떼를 쓰는 것으로 보이는 걸까? 뭐 이 나라가 미국의 식민지라는 건 법적 사실을 아닐지 몰라도 현실적으로는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러니 대통령도 없는 이 시국에 기습적으로 작전을 펼치고도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겠지.
녹색당에서 낸 규탄 성명을 보니 지난 20일 해당 부지를 주한미군에 공여했다는데, 그걸 결정한 주체는 또 누군가? 게다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장비를 반입하다니! 아직 설계도 다 끝나지 않았고, 환경영향평가도 이뤄지지 않았다는데, 주민 동의도 없이 불법적으로 장비를 들이다니! 이게 나라인가? 이 꼴을 보려고 추운 겨울날 거리에서 촛불을 들었던가?
새벽 기습 작전 소식을 듣고 바로 떠오른 것은 2006년 5월 4일 새벽 5시에 있었던 '여명의 황새울 작전'이었다. 이날 동원된 인원은 경찰 110개 중대 1만1500명, 수도군단·700특공연대 2개 연대 2800여 명, 용역업체 직원 600명이었다. 당시 군인들의 진압 장면은 80년 광주항쟁을 다시 보는 것처럼 무지비하고 잔인했다. 역시 페이스북에는 그날 대추리 진압 장면들이 줄줄이 올라왔다. 역시 그날을 떠올렸던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셋
나는 집에 티비가 없고, 보면 왠지 열만 받을 것 같아서 단 한번도 대선 후보 토론회를 본 적이 없다. 엊그제 저녁 토론회에서 '성소수자' 차별과 관련해 문재인 후보가 잘못된 발언을 했나보다. 소성리 사드 배치 문제로 가득했던 내 타임라인이 갑자기 성소수자 이슈로 싹 바뀌었다.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바쁜 일정을 마치고 잠시 쉬면서 열었던 페이스북에서 활동가들의 연행 소식을 보았다. 문재인 후보의 발언은 분명 문제가 있었고, 그 발언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국민으로서 대선후보에게 할 수 있는 당연한 권리이다. 그런데 연행이라니!
더 황당한 일은 문재인 후보를 감싸고 도는 사람들의 태도다. 잘못을 잘못이라고 깨닫지 못하고, 무분별하게 그 사람을 옹호하는 것은 올바른 지지자의 태도가 아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소위 '빠'라고 부른다. 박근혜를 옹호하기 위해 태극기 집회를 열었던 분별없는 사람들과 지금 문재인을 지지한다는 사람들의 행동은 과연 얼마나 다를까?
어제 녹색당사는 하루종일 문재인 지지자들의 항의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서도 더불어민주당 당원들이나 문재인 지지자들이 온갖 입에 담을 수 없는 표현을 써가며 성소수자 활동가들과 녹색당을 비난했다. 비판이 아니라 비난이었다. 합리적인 판단에서 나온 의사 표현이 아닌 자신이 믿고 있는 후보에 대한 감정에 휘둘린 비난이었다.
충격적이었던 것은 평소 좋아했던 혹은 공감하는 의견을 많이 냈던 몇몇 오피니언 리더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태도였다. 그들은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문재인 후보가 잘못된 표현을 한 것은 맞지만, 실제로 그런 사람은 아니다." 혹은 "홍준표에게 말려서 그렇게 되었을 뿐, 진심이 아니었을 것이다." 등의 의견을 냈다.
어쩌다 읽은 댓글을 보고 또 충격을 받았다. "왜 홍준표에게는 항의하지 않고, 문재인만 문제삼냐?"는 얘기였다. '돼지발정제'로 강간을 모의했다는 홍준표와 문재인을 같은 급으로 취급하라는 건가? 홍준표 후보에게(후보라고 붙이고 싶지도 않지만) 항의를 하지 않은 게 아니다. 녹색당은 그 인간 같지도 않은 이에게는 아예 후보 사퇴를 하라고 입장을 표명했다.
이 사진에 나온 이들은 모두 인권변호사라는 공통점이 있다. 문재인 후보는 인권변호사 출신이라는 사실을 매우 중요한 이력으로 내세우고 있고, 그를 향해 무지개 깃발을 들고 가는 장서연 변호사는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에서 활동하는 인권변호사다. 그는 다음 순간 경호인력들에게 저지당했고, 이후 연행되었다. 두 사람은 인권변호사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한 명은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동성애에 반대한다고 발언했고, 또 한 사람은 그 발언에 항의하고 사과를 받기 위해 행동했다가 연행당했다.
인권 활동가들이 문재인 후보의 멱살을 잡았다는 가짜 뉴스가 지지자들 사이에서 퍼지고 있다는데, 우리가 이명박과 박근혜와 싸우며 그들이 끊임없이 유포했던 가짜 뉴스들 때문에 어이가 없었다는 기억을 떠올릴 수 있길 바란다.
누구도 존재를 반대할 수 없다. 이미 존재하는 동성애를 반대한다니! 또 성소수자 차별에는 반대한다면서 동성혼 합법화에는 반대한다니! 설마 이게 모순이라는 걸 모르는 건가? 변호사 출신 유력 대선후보가 저 단순한 모순도 인지하지 못하는 건가?
넷
이번 대선에는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다. 국민들의 힘으로 대통령을 탄핵했건만, 특정 정당과 특정 후보가 어부지리로 당선될 확률이 높은 이런 선거는 재미가 없다. 여전히 원내에 진입하지 못한 정당은 전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선거이고, 원내에 진입했지만, 의석이 많지 않은 소수 정당도 차별받는 선거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특정 정당과 특정 후보의 당선이 유력한 만큼 이번 선거에서는 소위 말하는 '사표 심리'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뿐이다.
많은 이들이 후보들을 평하고, 정책을 논했지만, 내 기준에는 그닥 와닿는 이야기가 없었다. 뭔가 말을 더 보내는 것은 내 입만 아플 뿐, 현재의 이 답답한 시국을 바꾸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저 위에 쓴 것처럼 안철수 후보의 벽보에 대해서만 개인적인 푸념을 늘어놓았을 뿐, 선거가 끝날 때까지 특정 후보에 대한 지지도 하지 않고, 반대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기습적인 불법 사드 배치와 돼지발정제 강간모의와 동성애 반대 발언과 활동가 연행 사건으로 마음이 바뀌었다. 진심을 다해 이 국면에 대해 고민하고 제대로 된 대책을 내놓지 못한다면 대통령 자격이 없음을 지적해야겠다.
마치 특정 후보가 당선되면 우리가 바라는 세상이 열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최소한 이명박과 박근혜의 시대와는 다를 거라고 말한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나는 본다. 아마 다르긴 하겠지. 하지만 근본적으로 달라질까? 노무현 정권이 친 삼성 정권이었고, 이라크 파병을 강행했고(그 과정에서 김선일씨의 죽음을 방조했고), 새만금 갯벌과 금정산, 천성산을 파괴했고, 핵폐기장을 짓겠다고 부안을 무법천지로 만들었고, 한미FTA를 추진해 광우병 쇠고기를 수입했고(그 과정에서 국민적 반대운동을 무력 진압했고, 허세욱 열사가 분신하게 만들었고), 농민대회에서 전용철, 홍덕표 두 농민을 살해했고, 평택에 미군기지를 짓겠다고 저 위에 언급한 여명의 황새울 작전을 펼쳤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섯
내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김용민이라는 사람이다. 아래와 같은 글을 남겼다. 그가 오래전 막말 방송을 했음이 밝혀졌을 때, 이미 인권의식과 성평등 의식이 없으며, 그저 말로만 진보를 내세울 뿐인 정치인이라고 여겼는데, 아래 글을 보니 그 스스로가 본인이 말하는 입진보임을 깨닫지 못하는 구나. 그것 밖에 안되는 인간이구나 싶다.
혹시 나를 입진보라고 부르고 싶다면 그건 그 사람의 자유겠지만, 내가 지난 십수년간 여러 투쟁현장에서 함께 싸웠음을, 입만 열면 수구 꼴통 세력을 비판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참고하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