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찬
교정지를 들고 동네 선배인 디자이너를 찾아갔다. 교정사항이 그리 많지 않았다. 오탈자와 띄어쓰기 수정이 대부분이었고, 글 내용을 고치는 건 거의 없었다. 디자인을 앉히기 전에 초벌 교정을 꼼꼼하게 봤기 때문이다. 이번 교정도 정말 꼼꼼하게 봤다. 다른 일도 많았고, 무척 시간에 쫓겼지만, 사소한 띄어쓰기 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신경을 많이 썼다.
교정지에 별 다른 특이 사항은 없고, 특정 문단이 정렬이 좀 다른 부분과 목차부분 글자 구성에 대해 말씀 드렸고, 최종교정 일정을 조율했다. 디자이너가 주말 작업해서 일요일에 디자인 파일을 보내주시기로 했다. 나는 월요일 아침 출근길에 교정지를 받아서 대조교정과 최종교정을 마치고 월요일 오전 중에 인쇄를 마치는 것을 목표로 정했다. 이번 교정지 전달이 예정보다 하루가 늦었던 점을 사과 드렸는데, 디자이너가 아니라고, 괜찮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깔끔하게 잘 정리해서 주시니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하고 작업하면 처음부터 원고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다가 중간에 원고 갈아엎는 경우도 많고, 작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고 했다. 내 경우에는 항상 처음 받는 원고부터 틀이 잘 잡혀 있어서 작업하기 편하다고 했다.
칭찬을 받아서 기분이 좋았다. 이번주 내내 우울하고 힘들었는데, 어제는 예상치 못한 연락을 받았던 것과 칭찬을 받아서 기분이 좀 나아졌다. 출판사에 있을때 교정을 정식으로 제대로 배운 건 아니지만, 그래도 기본은 제대로 익혔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그거다. 초벌 교정을 최대한 꼼꼼하게 잘 봐서 넘겨야 후반 작업이 편하다는 거다. 초벌 교정을 제대로 못 보고 엉망인 원고를 넘겨 놓으면, 나중에 원고 갈아엎어야 하고, 교정지가 시뻘겋게 딸기밭이 된다. 그러면 나도 피곤하고 힘들고, 디자이너도 힘들다.
내 원칙은 초벌교정에서 문장은 되도록 거의 손을 보고 넘기는 거다. 오탈자와 띄어쓰기는 2교나 3교에서도 충분히 잡아낼 수 있지만, 그때 문장을 손 보려면 진짜 머리가 아프다. 이번에는 초벌 교정에서 고생을 많이 했지만, 덕분에 후반 작업에선 문장을 손 댈 부분이 거의 없다. 물론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 처음 받은 원고 상태가 워낙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리 손을 대도 내가 원하는 수준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이번 작업은 23명에게 28개의 글(내 글 포함)을 받았는데, 진짜 글의 형식도 제멋대로고, 톤도 하나도 안 맞았다. 최소한의 통일성을 갖추기 위해 미리 정해진 틀을 주고, 글을 받았건만, 친절하게 이렇게 이렇게 써 주세요 라고 샘플 원고까지 보내줬건만, 돌아온 글 중에 그나마 어느정도 수준을 맞춘 글은 3분의 1도 되지 못했다. 나머지 3분의 2의 글은 죄다 고쳐써야 했다. 글이 아니라해도 본문에 기본적인 정보와 주제가 잘 들어가 있으면 그걸 바탕으로 글을 고칠 수 있는데, 이건 도통 정보도 없고, 주제도 없는 글은 어떻게 손을 대야 할 지 난감했다. 친한 사람 몇 명에게는 차라리 기본 자료를 달라고, 내가 그 자료들을 살펴보고 쓰겠다고 했지만,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였다. 아는 선배는 내가 글을 다시 써야 하니 기본 정보들을 있는대로 다 보내달라고 했더니,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상처 받았다고 했다. 아, 그럼 처음부터 좀 제대로 써주시던가. 그 사람이 쓴 글 두 개를 다시 고쳐 쓰느라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데. 게다가 제일 중요한 글 세 개를 쓰기로 한, 믿었던 후배에게 진짜 배신감을 느꼈다. 제일 늦게 원고를 받은 데다 글 세 개가 죄다 형식도 안 맞고, 내용도 실망스러웠다. 맨 처음과 맨 마지막에 들어갈 제일 중요한 글인데, 내용조차 충실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대로 실을 수가 없어서, 이 세 개의 글은 내가 완전히 처음부터 새로 썼다. 아, 나는 책임편집을 맡아 교정교열을 보는 사람이지, 이 많은 분량의 글을 내가 다 새로 쓰고, 고쳐 써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
물론 맡기 전에 당연히 예상했다. 일정도 촉박하고, 당연히 원고의 수준이란 게 그럴 거라고 예상했다. 그럼에도 또 눈높이는 높아서 성과물은 잘 나오길 기대할 것도 알고 있었다. 동네에서 이런 작업을 한 두번 맡다 보니 이제 이 정도는 그냥 예상할 수 있다. 그래도 이런 작업을 하다보니 조금씩 편집 일에 자신감이 생기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맡았던 단행본 작업은 친한 선배 출판사에서 외주로 일을 받았던 건데, 내가 생각해도 정말 엉망이었다. 일정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고, 기본이어야 할 교정 작업도 제대로 못 해낸 것 같다. 그때 자심감과 자존감을 많이 잃었다. 어쩌면 지금이 차근차근 이 편집이라는 작업을 배워가는 단계일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지금처럼 소책자나 보고서 같은 류의 작업으로 내공을 쌓았다면 단행본 외주 작업에서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제대로 배우지도 않고 단행본 교정으로 시작했기에 너무 힘들고 벅찼다. 하나 변명은 맡았던 단행본들이 대부분 번역서였는데, 번역자 대부분이 첫 단행본 작업이라 원고 수준이 형편없었다는 거다. 사실관계가 잘못된 경우도 많았고, 고유명사를 엉뚱하게 번역해 놓기도 했고, 어떤 부분은 아예 번역을 안 하고 원서 그대로 남겨놓은 부분도 있었다. 어쩌라고? 편집자가 번역도 해야 하나? 글은 거의 전체가 비문에, 번역투여서 문장은 완전히 다 고쳐 써야 했고, 이게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아먹을 수가 없어서 원서를 펼쳐놓고 내가 새로 번역하는 기분으로 작업을 한 적도 있었다.
제일 편했던 건, 책 작업을 여러번 해본 국내 저자와 일하는 거다. ㄱ만 말해줘도 ㅎ까지 다 알아듣는다.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내 경우 국내 저자와의 작업은 대부분 큰 어려움이 없었다.
이번 작업의 디자이너인 동네 선배와는 벌써 몇 번의 작업을 함께 했는데, 그래서 서로 믿음이 있는 것 같다. 아니 적어도 나는 믿음이 있다. 그분도 어제의 칭찬을 보면 나에게 믿음이 있는 것 같다. 이런 관계 좋다. 하나 하나 일일이 지적하고, 설명하지 않아도, 말 안 해도 다 알아서 해주는 거. 이런 건 기본이야 라고 생각하는 건 알아서 다 해주는 거. 다만 출판사에 있을 당시에 나랑 작업했던 디자이너들이 워낙 손이 빠른 사람들이라 그 분량이 많은 단행본도 며칠 되지 않아 뚝딱 작업했던 기억에 이 정도 보고서야 금방 하시겠지 생각하고 일정을 잡으면 항상 그보다는 더 걸리더라. 이건 내가 기억해두고, 만약 다음에 또 작업을 하게 되면 그걸 감안해서 일정을 짜야 할 거다.
평화로운 아침
오랜만에 맞는 평화로운 아침이다. 새벽에 눈을 떠 쌀을 씻어서 불려놓고, 세탁기를 돌리고, 잠든 아이들 사이에 누워 하나씩 껴안아주고 잠시 누워있다가 일어나 이 글을 쓴다. 지옥 같은 한 주가 이제 거의 끝나간다. 오늘도 낮에 아이들을 데리고 사무실에 나가 일을 좀 마무리짓고, 집회를 다녀올 예정이지만, 내일은 아이들과 멀리 어디 행사를 다녀와야 할 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이 평화로운 아침을 보내고 있으니 벌써 지옥 같은 한 주가 끝난 기분이다.
이번 주는 진짜 일이 많았다. 극도의 스트레스로 잠도 계속 못 자고, 입맛도 없었다. 잠은 잘 자면 4시간. 것도 피곤에 지쳐 거의 쓰러지듯 뻗었던 거였다. 그제는 단 한 순간도 졸지 않고 완전히 밤을 샜는데, 어제 밤 10시까지 회의가 있었다. 38시간 이상을 거의 쉬지 못하고 일에 매달려 있었다. 목요일과 금요일에 마감을 쳐야 할 일이 4개였다. 그 중 하나는 결국 끝내지 못해 오늘 사무실에 나가서 마무리 할 예정이다. 그래도 도저히 혼자 해내지 못할 것 같은 일정을 어떻게든 꾸역꾸역 해냈다. 이틀을 사무실에서 밤을 새긴 했지만, 그래도 해냈다.
스트레스
점점 욕구를 느끼지 못하는 몸이 되고 있는 느낌이다. 입맛이 없어서 밥을 안 먹어도 배가 고프지 않다. 진짜 하루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는데, 배가 고프지 않다. 그저 속이 좀 허하고, 힘이 좀 없는 느낌. 일을 집중해서 하기 위해 억지로 식당에 가서 음식을 시켜 먹는다. 맛있다는 느낌은 하나도 없다. 그저 자동차가 달리기 위해 연료가 필요하듯이 몸을 움직이고 일을 하기 위해 음식을 넣는 느낌이다. 술도 마찬가지다. 5일동안 3일 술을 마셨는데, 술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 아니라, 연락이 와서 사람을 만났고, 참석해야 할 자리라서 가서 술을 마셨다.
담배도 그렇다. 담배를 그 어느 시기보다 많이 피웠지만, 피우면서도 계속 생각했다. 이거 맛도 없는 담배 따위 왜 피고 있나 계속 생각했지만, 문서 작업을 하거나, 교정 작업을 하다보면 담배를 피울 수 밖에 없다. 그거라도 피우지 않으면 도저히 그 스트레스를 견딜수가 없다. 날씨가 추워져서 옥상에 올라가서 담배를 피우고 나면 몸이 덜덜 떨리지만, 아무리 추워도 담배를 피워야 이 지옥 같은 일정을 견딜 수 있었다. 이러고나면 이제 담배를 좀 줄이겠지.
이건 아마 일시적인 현상일 것이다. 입맛이 없는 것도, 술이 별로 땡기지 않는 것도, 담배가 맛이 없는 것도. 다시 음식을 많이 먹고, 술을 많이 마시고, 담배가 땡기게 되겠지. 그냥 이런 때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 어제 저녁에는 좀 짜증이 났다. 아이들을 데리고 회의를 갈 수 밖에 없어서 함께 갔는데, 회의가 너무 길어서 앉아 있는게 짜증났다. 원래는 송년모임이라고 들었기에 아이들을 데려가도 괜찮겠지 생각했던 건데, 오히려 평소보다 회의가 더 길었다. 문제는 막판에 회의를 끝내야 할 타이밍에 누구 한 사람이 들어와서 다시 또 얘기가 길어진 거였다. 아이들은 지루해하고, 나도 38시간 이상 한 숨도 자지 못해 피곤했고, 집중력의 한계가 다 되었는데, 자꾸 얘기가 길어지니 짜증이 났다. 아, 난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글을 쓰고 있는데, 작은 아이가 깨어나 무릎 위에 올라온다. 슬슬 밥을 하고 빨래를 널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