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아주는 사람


페이스북으로 일본 반한시위 옆에서 프리허그를 하는 여성의 동영상을 봤다. 한복을 입고, 눈을 가린 한국 여성에게 여러 일본인들이 와서 안아주었다. 누군가를 안아준다는 것, 포옹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새삼 깨달았다. 그건 안는다는 행위 자체보다 누군가를 감싸주고 위로해준다는 심리적인 작용이 더 큰 것 같다. 그 영상을 보면서 나를 안아주었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연인이었던 사람들을 빼고 한 명씩 기억을 떠올렸다.


여자 선배


아마 대학 1학년 때였을 것이다. 여성이 남성보다 약 3배 가량 많았던 우리 과의 특성 상 여성 선배들이 많았고, 새내기들 중에서 톡톡 튀었던 나는 선배들의 애정을 많이 받았다. 그 중 4학년 선배 한 명이 유독 내게 잘 해줬다. 자주 만나지는 못 했지만, 만날 때마다 잘 챙겨줬다. 하루는 그 선배를 비롯해 몇몇 선배들과 밤새 술을 마셨다. 그 선배는 그날따라 술을 많이 마시고 취했고, 바로 옆에 앉아 있던 내 어깨를 감싸거나, 내 손을 잡는 등 스킨쉽을 했다. 취하면 그렇게 스킨쉽을 하는 것이 술 버릇이었을까? 어느 학회실에서 초저녁에 시작된 술자리는 새벽까지 끝날 줄을 몰랐고, 예비역 남자 선배들이 계속 술을 사다 날랐다. 점점 더 그 선배는 취했고, 나중에는 내가 이쁘다고, 귀엽다고 하면서 내 어깨에 얼굴을 대고 꼭 끌어안기도 했고, 내 얼굴을 본인의 가슴에 끌어와 안기도 했다. 


같이 술 마시던 다른 선배들이 뭐하는 거냐고, 막 뭐라고 해도 그 사람은 개의치 않았다. 계속 내 머리를 쓰다듬거나, 가끔 내 어깨에 얼굴을 기대거나, 또 끌어안곤 했다.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싫지 않았다. 오히려 그때 여러 사정으로 힘든 일이 많았는데, 그 사람이 그렇게 안아주는 것이 위로가 되었다. 나중에 택시를 타고 어느 선배의 집으로 이동할 때도 내 옆에 앉아 내 팔을 끌어안고 내 어깨에 기대어 있었다. 아침에 해가 뜰 무렵 어느 낯선 방에서 다같이 잠들었고, 아침 늦게 일어나 함께 택시를 타고 돌아와 학교 근처 식당에서 해장국을 먹었다. 그날 이후 그 선배와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저 가끔 마주치면 애정어린 시선으로 반겨주고, 웃어주던 사람이었다.


이성 친구


한때 친했던 여성인 친구도 나를 안아준 적이 있었다. 당시 짝사랑하던 여성과 집안 문제와 운동권 내부의 파벌 문제 등 여러 복합적인 상황 때문에 힘들어 할 때였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학교 안 어딘가를 걷다가 벤치에 앉았는데, 그 친구가 주머니에서 따뜻한 캔 커피 두 개를 꺼내 하나를 내게 건넸다. 커피를 받아 들었는데, 잠시 후 가방에서 화장지를 꺼내더니 내게 줬던 캔을 다시 달라고 했다. "내가 남자친구 외에는 이렇게 잘 챙겨주지 않는데, 고마워 해야 해"라고 하며, 캔 뚜껑 쪽 입이 닿는 부위를 깨끗이 닦아서 다시 돌려줬다. 내가 "영광입니다."라고 웃으며 답하자, "그럼 영광이지. 이 바쁜 내가 특별히 시간 내서 만나준 것도 영광인 줄 알아."라고 했다. 실제로 그 친구는 과외와 학원강사 등으로 무척 바빴다. 그 친구를 처음 만난 것도 같은 학원에서 강사로 지내면서였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자신의 연하의 남친 얘길 한참 들었고, 자연스레 내 얘기를 했다. 여러가지 상황들이 다 어렵고 힘들다는 얘길 했고, 내 뜻대로 잘 되지 않아 많이 답답하다고 했고, 내 의도와는 다르게 자꾸 다른 사람들에게 오해를 사고, 친했던 사람들이 적으로 돌아서서 억울하다는 말도 했다. 말하던 중에 담배를 한 대 피웠다. 내가 담배를 피우자 눈을 찡그리며 싫은 표정을 짓던 친구가 내 깊은 한숨과 그늘진 표정을 보더니 걱정스런 표정으로 바뀌었다. 담배를 끄고, 커피를 다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그가 나를 불러 자기 옆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앉자마자 몸을 돌려 나를 살짝 안더니, 너무 힘들어하지 말라고, 잘 될거라고 위로했다. 그 마음이 참 고마웠다. 


출판사 후배


마지막으로 다녔던 출판사에 제일 늦게 들어온 여성은 나이에 비해 경험이 부족했다. 출판쪽 경험은 전혀 없었다. 나머지 직원들은 잡지쪽 일을 중심으로 했고, 나와 그 친구가 주로 단행본 일을 했다. 사장님이 모르는 건 모두 나한테 물어보라고 했고, 나는 늘 그렇듯 그 친구가 잘 적응하길 바라며, 하나씩 차근차근 알려줬다. 자세히 설명해주고, 어려운 점은 특별히 주의하라고 알려주고, 작은 실수들은 괜찮다고, 다들 그렇게 시작한다고 격려해줬다. 이 친구가 어느 순간부터 나를 좀 다르게 대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밥을 먹으러 걷다보면 나에게 바짝 붙어서 걸으며 말을 걸었고, 좀 지나치게 붙어서 그의 팔이나 가슴이 내 팔에 닿기도 했다. 뭔가 질문하려고 내 자리로 올 때도 너무 가까이 붙어서 좀 이상하다 싶었다.


아침까지 술을 마시고 바로 출근했던 날이었다. 점심 때 사장님이 맛있는 내장탕 집을 가자고 해서 다 같이 차로 이동했다. 평소 조수석은 내가 앉는 자리였다. 뒷좌석 세 명이 끼어 앉아야 하는데, 상대적으로 넓고 편한 자리를 직급으로나 나이로나 사장님 다음이었던 내가 앉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날은 내 몸에서 워낙 술냄새, 담배냄새가 심하게 났고, 사장님 옆 자리에 앉으면 뭔가 잔소리를 들어야 할 것 같아서 일부러 뒷 자리에 앉으며, 후배 기자를 앞 자리로 보냈다. 뒤의 세 자리 중에서 이 친구가 제일 불편한 중간 자리에 앉았고, 자연스레 내 옆이 되었는데, 나에게서 술냄새, 담배냄새가 장난이 아니라고 웃으며 말했다. 난 미안하다고 말하고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는데, 이 친구가 '정겨운 냄새'라는 표현을 썼다.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줄 몰랐다. 얘기를 다 듣고, 아직 술이 덜 깬 머리로 한참을 생각해서야 이해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술과 담배를 즐기셨고, 늘 아버지에게서 술냄새와 담배냄새가 많이 났다고 했다. 자신은 어려서부터 익숙하기에 그 냄새가 싫지 않았고, 돌아가시고 나서는 그 냄새가 그립다고 했다. 그런데 오랜만에 나에게서 그 냄새를 맡아서 아버지 생각이 났다고 했다.


어느날 영업 일로 누군가를 만나 술을 한 잔 하고, 늦은 시간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버스정류장에 멈춰선 버스 앞쪽 창문이 열리더니, 이 친구가 거의 창 밖으로 몸을 내밀듯이 하면서 큰 소리로 "팀장님!"하고 불렀다. 양 팔을 크게 흔들며 어찌나 반갑게 웃던지. 나는 그 반응에 깜짝 놀라기도 했고, 주위의 시선이 좀 부끄럽기도 했다. 어색하게 손을 들어 흔들어줬다. 우리집 방향으로 가는 버스가 아니어서 타지 않았고, 버스는 곧 출발했고, 그 친구는 여전히 웃으며 내게 양 팔을 흔들고 있었다. 술을 한 잔 더 먹고 싶었는데, 이 친구가 이토록 반가워하니 한 잔 하자고 전화를 했다. 조금 늦은 시간이었지만, 좋다고 했고, 그 친구의 집과 우리집 중간쯤의 먹자골목에서 만났다.


좀 힘든 시기였다. 책이 팔리지 않아 영업 이익이 예상만큼 잘 나오지 않았고, 편집 작업 중인 책도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애들엄마와 오랜 불화로 인해 서로 감정이 많이 상해 있는 상태였고, 이 어정쩡한 상태가 답답해서 웬만하면 집에 일찍 들어가기 싫어 늘 늦게까지 술을 마시거나 야근을 했던 때였다. 내 힘든 상황을 한참 떠들고, 그 친구의 어려운 점을 들어주면서 늦게까지 술을 더 마셨다. 술집을 나와 헤어질 때, 이 친구가 정색하면서 "팀장님"이라고 불렀다. 약간 취해서 대답은 않고, 그저 눈을 쳐다보았는데, 갑자기 나를 껴안았다. "힘내세요. 늘 그렇듯 잘 해내시리라 믿어요." 라고 했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고 떨어지더니 씩씩한 걸음걸이로 택시를 잡으러 갔다. 조금 놀랐지만, 그 걸음걸이를 보면서 웃음이 나왔다.


후배 활동가

 

활동하는 공간이 달랐으니 자주 마주치는 건 아니었고, 가끔 만나는 여성 활동가였다. 몇 번 마주치는 동안 인사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나중에 어느 토론회에서 정식으로 인사를 건넸는데, 웃으며 "저는 선배님 잘 알아요."라고 했다. 나는 이름도 알지 못해서 좀 당황스러웠다. 시간이 흐르며 또 몇 번을 마주쳤고, 한 두 번 술자리도 가졌다. 그때까지 그 친구는 그냥 가끔 마주치는 후배 활동가 외에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어느 날 사람들이 아주 많은 술자리에서 그가 여러 테이블을 옮겨 다니며 술을 마시는 장면을 봤다. 우리 테이블은 다들 좀 재미없는 사람들과 재미없는 얘기들만 있어서 혼자 딴 생각에 빠져 술을 홀짝였다. 재미없는 술자리는 질색이라 차라리 집 근처에서 다른 후배를 불러내 술을 마셔야지 생각했다. 일어설 타이밍을 찾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 친구가 내 옆에 앉았다. 이미 많이 마신듯 살짝 취한 느낌이었다. 내게 술을 권해서 잔을 부딪혔다. 술을 마시고, 내게 이런저런 얘기들을 물어왔다. 개인적으로 얘기를 나눈 기억이 거의 없는데, 생각보다 나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다. 몇 번인가 잔을 더 부딪히고 웃으며 술잔을 비웠고, 여러 얘기들을 더 나눴다. 갑자기 담배를 달라고 했고,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또 뭔가 떠들며 담배를 피웠고, 담배를 끄고 돌아설 무렵 갑자기 이 친구가 나를 껴안았다. 그리고는 두 팔로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당시 처해있던 복잡한 상황들 때문에 지쳐 있었는데, 그 포옹과 토닥토닥이 나를 위로해주는 느낌이었다. 자리로 돌아가자마자 그는 술잔을 들고 또 다른 테이블로 옮겨가며,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나중에 보니 또 다른 사람들과도 그렇게 껴안고 토닥토닥을 해주고 있었다. 저건 동지로서의 교감의 포옹일까, 아니면 취해서 그런걸까? 그와 술을 자주 먹지 않았고, 취한 걸 처음 보는 터라 알 수 없었다.


후회


누구나 실패를 겪고 또 실수를 한다. 나는 지나치게 많은 실수를 하고, 그로 인해 무언가를 망치며 살았다. 후회하고 또 후회해도 시간을 돌릴 수 없기에, 이미 엎지른 물을 담을 수는 없다. 할수만 있다면 그 많은 실수들을 바로 잡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모두 내 잘못이고, 내 책임이다.


아직 어렸을 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내가 유난히 운이 나쁜거라고, 유독 나에게만 그렇게 나쁜 상황이 닥치는 거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니 그렇지 않았다. 그 상황을 만든 것이 나였거나, 그 나쁜 상황으로 빠져 들어간 것이 나였다. 그리고 나쁜 선택을 한 것도 나였고, 실수를 저지른 것도 나였다. 다른 누구의 잘못이 아닌 내 잘못이었다. 


엊그제 함께 술을 마셨던 후배가 그랬다. "형, 왜 그렇게 살아요?" 모르겠다. 아니 내가 그렇게 생겨먹은 놈이라서 그런 거겠지. 나약하고, 겁이 많고,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쉽게 감정에 휘둘리고, 스스로를 잘 조절하지 못하는 인간이라서 그렇겠지. 잘못을 저질렀으면 그로 인해 교훈을 얻고 고쳐야 할텐데, 후회하고 반성은 하지만, 정작 바로 잡지 못하고 반복적으로 실수를 저지른다.


사람을 잃고, 적을 만들고, 그런 상황이 반복되면 후회를 하면서도 결국 나는 이것 밖에 안 되는 놈이야 라고 생각한다. 이제 부터라도 그러지 말아야겠다. 후회와 반성에서 그치지 않고, 이제라도 그 잘못이 반복되지 않도록 나를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조금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아프고 힘들지만 그 감정에 머물지 않고 극복해 나가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그것이 내 잘못으로 상처입은 사람들에게 사죄하고 책임지는 자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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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6-11-25 0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이렇게 마음을 열어 자신을 내보이는 글! 나도 덩달아 같은 제목으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감은빛 2016-11-28 02:07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께서 쓴 같은 제목의 글을 읽어보고 싶어요.
좋다고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samadhi(眞我) 2016-11-25 2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존경하는 사람에게 먼저 가 앵깁니다. 제일 처음은 신영복 선생님이었고요. 김용택 시인, 금난새씨, 백경우씨(이매방류 살품이품 전수자)... 김용택 시인 빼고는 세 분 다 얼마나 당황해하시고 부끄러워하시는지... 세 분 모두 제 남자입니다 ㅋㅋㅋㅋ

감은빛 2016-11-28 02:08   좋아요 0 | URL
그 네 분이 모두 부럽네요.
저도 언젠가 유명해지면, 진아님의 포옹을 받을 수 있는 건가요? ^^

samadhi(眞我) 2016-11-28 04:49   좋아요 1 | URL
세 분은 강연회였고 한 분은 공연 때 뵈었으니 언젠가 강연을 해주시거나
우리춤을 아주 잘 추시면 제가 먼저 ˝ 선생님 한번 안아봐도 되요?˝ 묻고서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덥썩 안아버릴 거예요. ㅋㅋㅋ 그분들이 좋아서 제가 헤벌쭉해져 그러는 것이라... 제가 안아드려봐야 퐁신퐁신 따끈따끈하지도 않고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