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알고싶다 1049화 "살수차 9호의 미스터리 - 백남기 농민 사망사건의 진실"
https://www.youtube.com/watch?v=H9bBShHJ6Nw
백남기 어르신께서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진실을 다룬 '그것이 알고 싶다 1049화'를 봤다. 보면서 만약 그렇게 쓰러져 다시 의식을 차리지 못한 게 나였다면 어땠을까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그날 그 자리에 있었다. 물대포에 온 몸이 다 젖었고, 경찰들과 몸싸움을 하느라 손과 팔에 크고 작은 상처를 입었을 뿐이지만, 나도 그 분처럼 밧줄을 당겼고, 목소리를 높여 차벽이라는 불법을 저지른 경찰에 항의했다. 운이 나빴다면, 만약 내가 좀 더 앞 쪽에서 밧줄을 당겼다면, 물대포를 쏘는 경찰의 눈에 띌만한 행동을 저질렀다면 나역시 그런 처지에 놓였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과거에는 그렇게 공권력의 폭력에 당했던 적이 많았다.
2008년 촛불집회
2008년 촛불집회 때는 거의 매일 광화문과 종로 일대에서 밤을 새고, 곧바로 출근해서 책상에 엎드려 잠시 눈을 붙였다가 일을 하고, 저녁이 되면 다시 거리로 나왔다. 당시 애들 엄마는 반은 농담으로 이런 약속을 했다. "당신이 열심히 해서 이명박이 물러나면, 둘째를 가지겠다." 꼭 그 말 때문은 아니지만, 그땐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생각으로 계속 거리에 머물렀다. 당시는 운동 단체를 그만두고 출판사에 일할 때였지만, 나는 여전히 활동가라고 여겼고, 거리에서 함께 하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여겼다.
종로에서 경찰들과 충돌이 벌어졌던 어느 날, 누군가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나섰다가 팔에 작은 방패를 달고 있는 일선에서 경찰들을 지휘하는, 좀 가벼운 방어구를 착용한 경찰이 자신의 팔에 매달린 작은 방패를 휘둘러 내 배를 가격했다. 맞자마자 휘청 뒤로 쓰러졌지만, 뒤쪽에 많은 시민들이 붙잡아줘서 다행히 넘어지지는 않았다. 나를 가격한 그 경찰은 곧바로 내 오른쪽 어깨를 쥐고 나를 끌어내려고 했고, 그 행동을 본 뒤쪽 경찰들이 달려들어 내 오른팔과 다리를 잡으려 했다. 뒤쪽 시민들이 내 허리를 감싸고 내 왼팔을 잡아줘서 끌려가진 않았다. 내가 구하려 했던 분도 다행히 끌려가지 않았다. 긴장을 해서 그 당시엔 몰랐지만, 위험한 상황이 끝나고 나서 보니 배가 무척 아팠다. 나중에 옷을 들어 살펴보니 배에 크게 피멍이 들어 있었다. 그 타원형의 방패가 날카롭지는 않았기 때문에 살이 찢어지지는 않았다.
그 날은 주말이었기 때문에 저녁 늦게 정리 집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고, 다음날 아침 배가 당기고 아파서 일어날 수 없었다. 당시 3살이었던 큰 아이가 배를 감싸고 괴로워하던 내게 다가왔다. 아이는 옷을 들춰 검붉은 피멍이 들어있는 내 배에 입을 갖다대고 "아빠, 아파? 여기? 호 해줄게. 호~ 호~" 불어줬다. 그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집회에서 내가 다치면 아이를 돌봐줄 수 없겠구나. 아이에게 이런 미친 세상을 물려주기 싫어서 거리에서 더 열심히 싸웠던 것인데, 그러다 내가 잘 못 되면 더이상 내가 아이를 지켜주지 못 할 수도 있겠구나. 입으로 호호 불어주던 아이를 보며 괜히 눈물이 났다.
2008년 기륭전자 농성장
기륭전자 농성장에 되도록 자주 함께 하려고 노력했다. 아이를 돌봐야 하는 주말이면, 아이를 데리고 가기도 했다. 그날은 10월 20일이었다. 그날은 아내가 일주일동안 독일 출장을 갔다가 돌아온 날이었다. 나는 혼자 아이를 돌보며 일주일을 보냈다. 아침이면 아이를 깨워 밥을 먹이고, 준비물을 챙겨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고, 퇴근하고 아이를 데려와 저녁을 먹이고,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울고 보채는 아이를 달래며 놀아주다고 재우는 날들이었다. 그렇게 홀로 아이와 지냈기 때문에 무척 피곤한 상태였고, 또 일주일 만에 아내를 다시 만날 예정인 월요일이었다.
하지만 기륭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연락이 계속 왔다. 피곤했고, 아내와 함께 저녁을 먹고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모른척 할 수 없어서 기륭으로 달려갔다. 기륭전자 앞 골목은 수 백명의 경찰들로 꽉 차 있었다. 마치 바퀴벌레 때처럼 시커먼 경찰들이 소수의 노동자들과 그 노동자들을 지지하는 시민들을 포위하고 있었다. 그리고 파란 옷을 입은 용역 깡패들이 들이닥쳤다. 경찰은 시민들의 통행을 원천 봉쇄했던 것과는 달리 용역깡패들에게 길을 터주었고, 그들은 요란하게 들어와 거칠게 욕설을 퍼붓고 폭력을 휘둘렀다. 여성들을 위협하고 남성들을 직접 가격했다.
어쩔수 없이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고, 용역 깡패들에게 맞서야 했다. 여기저기서 여성들의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고, 욕설이 난무했다. 경찰들에게 고립되어 한참을 힘을 쓰다보니 어느새 산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시계줄이 끊어져 시계가 깨졌고, 손은 온통 상처 투성이었다. 나는 건물 3층 높이로 아시바를 쌓아 올린 골리앗과 함께 고립되어 있었다. 그 위에는 김소연 분회장과 당시 민노당 서울시당 위원장이었던 이상규 씨가 올라가 있었다. 용역들은 밑에서 그 골리앗을 발로 차거나 흔들며 위협하곤 했고, 나는 그 짓을 못 하게 막느라 계속 충돌이 일어났다.
경찰들은 대부분의 시민들을 밖으로 밀어냈고, 골리앗 근처에는 소수의 시민들만이 남아서 저항하고 있었다. 깡패들은 그 주위를 둘러싸고 사람들을 위협했다. 그 소수의 시민들 중에 송경동 시인과 르포작가 박수정 선배가 있었다. 부부였던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라도 거길 빠져 나가야 했다. 혹시 둘 다 연행이 된다면 아이를 돌볼 사람이 없으니 말이다. 경동 선배는 잠시 소강상태에 빠져 경찰의 포위망이 잠시 느슨해진 틈을 타 박수정 선배를 포위망 밖으로 보냈다.
잠시 조용하다가 다시 깡패들의 폭력이 심해졌다. 회사 입구에서 대기중이던 수십명의 구사대(사측의 편에 선 노동자들)가 몰려 나왔다. 곧이어 무차별 폭력이 이어졌다. 나 역시 주먹과 발길질에 맞아야 했다. 한때 패싸움을 좀 해봤기 때문에 일대 다수 싸움에도 주눅이 들지 않는다 생각했는데, 이건 뭐 워낙 상대가 안 되는 경우라 나도 두려웠다. 다행히 적당히 피하고, 뒤로 빠지며 맞섰기 때문에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골리앗 근처에서 점점 뒤로 밀려날 수 밖에 없었고, 고립되어 있던 소수의 시민들은 여기저기 뿔뿌리 흩어졌다. 밖에선 점점 소식을 듣고 몰려온 시민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경찰 수백명이 기륭 전자 입구를 굳건히 막고 있었다. 그들이 경찰과 힘겨루기를 이어가는 동안 안에서는 계속 깡패들의 폭력이 이어졌다. 어쩌다보니 곁에 문동만 시인이 있었다. 키가 크고 덩치가 있는 선배는 많이 지쳐 있었다. 깡패들 힘이 장난이 아니라고 말했다. 힘으로는 도저히 맞설 수 없었다. 나는 속으로 쪽수가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맞서 볼텐데 라는 생각을 해봤지만, 한번 잘못되면 크게 다칠 수 있기 때문에 섣불리 반격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한 시민이 깡패들에게 심하게 맞아 안경이 깨지고, 옷이 찢어지고, 피투성이가 되었다. 경찰들은 그 장면을 웃으며 쳐다보고 있었다. 나와 문동만 선배는 그쪽으로 달려가 경찰들에게 항의를 했다. 그 장면을 찍기 위해 칼라티비 여기자가 다가왔다. 깡패들은 성적 모욕이 포함된 욕설로 여기자를 모욕했다. 여성 용역들이 다가와 여기자를 막아섰다. 남성 용역들은 마스크조차 안 쓴 녀석들이 제법 있었지만, 소수의 여성 용역깡패들은 그래도 마스크를 꼭 쓰고 있었다.
우리 뒤쪽에 함께 고립되어 있던 민노당 학생위원회 소속의 여학생이 두 명 있었는데, 덩치 큰 용역이 그들에게 성적 모욕을 담아 시비를 걸고 있었다. 문동만 선배와 내가 나서려했더니 근처에 있던 용역들이 위협적인 몸짓으로 막아서며 눈을 부라렸다.
머리 위로 비행기가 지나갔다.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 갱스터스 파라다이스 라는 노래가 생각났다. 경찰들이 시민들을 몰아낸, 수 백명의 경찰이 울타리가 된 이 안쪽 공간은 용역깡패들과 구사대들의 천국이었다.
경찰들의 울타리 안에 갇힌 지 4시간이 가까이 지났다. 우린 지쳐 있었다. 배가 고프기도 했다. 밖에서 안으로 진출하려고 계속 몸싸움을 이어가던 시민들은 오히려 경찰에게 밀려났다. 약 50미터 가량 울타리가 넓어졌다.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용역들이 심심했는지 또 간헐적으로 시비를 걸면서 폭력을 휘둘렀다.
갇힌 지 5시간이 지나, 밤 열시 반쯤 방송3사 카메라가 등장했다. 방송사의 값비싼 조명이 마치 대낮처럼 주위를 비췄다. 갑자기 구사대들이 종이박스로 얼굴을 가린 채 몰려오더니 방송 카메라를 종이 박스로 가려버렸다. 그 순간 일사분란하게 용역 깡패들이 현장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마치 선수 교체를 하듯 경찰들이 용역이 빠진 자리로 몰려 들어왔다. 약 5시간 동안 갇힌 채 당해야만 했던 무차별 적인 폭력이 드디어 사라졌다. 하지만 그 후로도 경찰과의 대치는 계속 되었다.
2006년 한미FTA 반대 집회
여름 한창 집회를 이어갔던 시기에는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범국본 농성장을 지키기도 하고, 사무실에서 쪽잠을 자기도 했다. 아직 아이가 어렸기 때문에 당시 아내는 홀로 아이를 돌보느라 고생이 많았고, 불만이 많았겠지만, 그래도 늘 몸 조심하라고 염려해주고, 응원해줬다.
그날 시위대 본대는 종로쪽에서 광화문으로 진출하다가 차벽에 길이 막혀 골목으로 뿔뿔이 흩어져 각자 길을 찾고 있었다. 나는 광화문 앞 문화예술인 100시간 문화행동을 진행하느라 텐트를 지키고 있었다. 그 텐트에는 값비싼 음향 및 영상 장비들이 많았다. 100시간 릴레이 문화행동은 누구 아이디어였을까? 밤엔 보는 사람도 없는데, 난 밤새 프로그램을 진행해야 했다. 잠도 못 자고 멍한 상태로 텐트를 지키던 나는 온통 차벽으로 둘러쌓인 도로를 보며, 차라리 시위대 본대와 함께 있으면 좋았겠다. 이건 너무 심심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함께 있던 선배는 진정하고 잠이나 자라고 했지만, 나는 몸은 피곤해도 정신은 맑아 피가 끓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한 무리의 시위대가 종로구청 방향 골목에서 뛰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마침 내가 있던 곳의 차벽에는 사람이 옆으로 게걸음을 걸으면 지나갈 수 있을만한 틈이 있었다. 나는 그들을 큰 소리로 불러 그 차벽의 틈으로 안내했다. 그들은 차벽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갑자기 저 쪽에서 시커멓게 경찰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나는 서두르라고 빨리 뛰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때 차에서 자고 있던 운전병이 운전석에 앉아 차를 움직여 그 좁은 틈을 메우려고 했다. 누군가가 막 그 틈으로 들어선 순간이었다. 우린 소리를 지르며 발로 문을 차고, 깃대로 창문을 쳤다. 사람이 지나가고 나서 움직이라고, 사람을 죽일 거냐고 소리를 질렀다.
그 와중에 멀리서 달려온 경찰들이 가까워졌다. 그들이 들고 있는 방패를 보는 순간 두려워졌다. 한 해 전 농민 두 분이 저 방패날에 맞아 돌아가셨다. 나는 사람들에게 반대 방향으로 도망치라고 소리를 질렀다. 우왕좌왕 하던 차에 한 여성이 넘어졌다. 나는 얼른 그를 일으키려 했지만, 여성은 바로 서지 못했다. 뒤에서 수십명의 경찰이 방패를 위협적으로 휘두르며 다가 오고 있었다. 다행히 여성의 비명을 들은 사람 두어명이 뒤돌아 와서 여성을 양쪽에서 부축하고 뛰었다. 나도 일어서서 뛰려는 순간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감각이 들었다. 머리 위로 방패가 지나갔던 것일까? 순간적으로 몸을 굴렸고, 용수철처럼 뛰어나갔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아이가 방긋 웃는 모습이 머릿속을 스쳤다. 바로 앞에서 여성을 부축한 일행은 속력을 내지 못해 뒤쳐졌다. 난 뛰다가 그들을 두고 갈 수 없어서 뒤돌아섰다. 경찰들은 이제 대열을 정비하고 열을 지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오랜 경험으로 곧 저들이 각자 달려나와 방패나 곤봉을 휘두를 거라는 걸 알았다. 몸이 떨렸다. 뇌가 경고를 보냈다. 도망가야 한다고. 당장 뛰어야 한다고. 아니나다를까 누군가의 명령에 일제히 경찰들이 달려들었다. 젠장! 뒤를 보니 그래도 여성을 부축한 일행이 조금 속력을 내서 가고 있었다. 뒷걸음질을 치다가 방향을 바꿔 전속력으로 달렸다. 하지만 금방 그 여성의 일행을 만났다. 난 소리를 질렀다. 뛰어요! 여성을 부축했던 둘 중 하나가 바로 뒤까지 쫓아온 경찰을 보더니 빠르게 여성을 업었다. 그들은 조금 더 빠른 속력으로 달렸다. 나도 속도를 맞춰 달렸으나, 경찰은 금방 우리 뒤를 잡았다. 젠장! 지금은 싸워야 한다고 본능이 말하는 것 같았다. 바로 뒤에서 섬뜩한 느낌이 드는 순간 몸을 돌려 방패를 발로 찼다. 균형을 잃어 넘어질 뻔 했으나, 다시 몸을 돌려 달리는데, 목덜미에 큰 충격이 왔다. 쓰러졌고, 본능적으로 두 팔로 얼굴과 머리를 감싸고 웅크렸다. 발길질이 사정없이 몸으로 쏟아졌다. 다행히 방패로 찍는 놈은 없었다. 대신 무자비한 발길질이 몇 분이나 이어졌다. 대부분은 다시 추격에 합류했고, 한 녀석이 내 목덜미를 잡아 끌었다. 온 몸이 힘이 하나도 없었다. 팔과 다리가 다 마비된 느낌. 질질 끌려가면서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 그 와중에 여성을 들춰업은 일행은 어찌되었을까 궁금했다. 얼마가지 못해 금방 잡혔을텐데. 녀석은 한참을 날 끌고 가서 전봇대 쪽으로 날 내동뎅이쳤다. 그리고 시위대와 경찰들이 사라진 방향을 보며 서 있었다.
도망치지 못하면 다시 두들겨맞고 닭장차로 옮겨지겠지. 도망치려면 경찰이 저 녀석 하나 밖에 없는 지금 밖에 기회가 없다. 그런데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난 웅크린 채 내동뎅이쳐진 자세 그대로 꼼짝도 않은 채, 녀석의 눈치를 살폈다. 조금씩 손가락이 움직여졌다. 여기저기 아스팔트 바닥에 끌리면서 갈린 피부가 쓰라렸다. 그 고통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순간적으로 몸을 일으켜 달렸다. 아! 그런데 다리가 풀려 있었다. 생각만큼 빨리 달릴 수 없었다. 경찰은 곧 쫓아왔고, 나는 도망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몸을 돌렸다. 녀석은 곤봉을 치켜들고 다가왔고, 나는 조금씩 뒷걸음질을 치면서 가쁜 숨을 내쉬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영화의 슬로모션처럼 왠지 시간이 느리게 가는 느낌이었다. 녀석이 곤봉을 든 오른손을 휘두르는 것이 보였다. 본능적으로 왼팔을 올렸다. 둔한 소리와 함께 뼈에 충격이 왔다. 지금 단 한 순간 밖에 기회가 없었다. 빠르게 오른손을 내질렀다. 녀석의 키가 더 컸기 때문에 오른발에 힘을 주고 살짝 뛰어야 했다. 오른손 주먹에 고통이 느껴졌다. 진압모의 앞쪽 쇠로 된 보호망을 주먹으로 쳤다. 녀석은 내가 반격할 거란 생각을 못 했는지 깜짝 놀라 뒤로 넘어졌다. 왼팔 팔목과 오른손 주먹에서 극심한 고통을 느꼈지만, 그대로 돌려 달렸다.
지하철 역은 모두 경찰들이 막고 있었다. 큰 길쪽으로 달려나가 교보문고 건물로 들어갔다. 서점에 들어서자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빠르게 화장실로 가서 몰골을 살폈다. 옷이 다 갈려서 해지고 찢어져서 그렇지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왼팔은 곤봉에 맞은 부위 뼈가 부풀어 올랐으나, 부러지진 않았고, 주먹 역시 부었으나 그만하면 괜찮다 싶었다. 팔과 다리에 갈린 상처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상처를 물에 씻으려니 쓰라렸다. 이 몰골로 밖에 나가면 금방 다시 잡힐테니 잠시 숨어 있을 생각이었다. 갈아입을 옷이 필요할텐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어차피 다 버린 옷. 화장실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아 벽에 머리를 기댔다. 그제서야 목의 감각이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목 뒷덜미를 맞고 쓰러졌던 사실이 뒤늦게 생각났다. 손을 갖다 대 보려는데 크게 다쳤을까봐 두려운 느낌이 들었다. 만져보니 크게 부어 있었다. 곤봉에 맞았나보다. 방패에 찍혔으면 상처가 나고 피가 흘렀을텐데.
얼마나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직원이 들어와서 나가 달라고 했다. 나는 좀 어이가 없었지만, 따지고 싸울 힘도 없었기 때문에 다리를 절면서 걸어 나갔다. 종로쪽 출구로 나가면서 경찰이 없는지 살폈지만, 다행히 보이지 않았다. 거리에 나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가판대에서 음료수와 담배와 라이터를 산 일이었다. 결혼 전부터 약 3년 이상을 끊었던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는 손이 덜덜 떨렸다. 간신히 연기를 한 모금 마시고 길게 내뿜었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담배 한 대를 천천히 음미하면서 피웠다.
2004년 평택 미군기지 유치 공청회
농민회 형들과 평택에 몇 안되는 단체 활동가들이 모두 잔뜩 긴장한 채로 공청회장 여기저기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 공청회가 무산되도록 막는 것이 우리의 임무였다. 공청회가 시작되자 계획대로 한 명씩 나서서 이 공청회의 부당함을 알리고 무효라고, 불법 공청회를 중단하라고 소리를 질렀다. 사회자가 처음 한 동안은 그 발언을 무시하고 진행하려고 했으나, 계속 소란을 일으키니 결국 무대 양쪽에서 버티고 있던 경찰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저 새끼 끌어내!" 경찰들이 우루루 몰려들고, 발언을 하던 자와 실랑이가 벌어졌다. 주위 주민들은 그 사람이 끌려가지 못하도록 함께 저항했으나, 경찰의 완력에 결국 그는 끌려갔다. 그냥 끌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도록 주먹으로 배를 치거나 발로 정강이를 걷어찼다. 다시 사회자가 진행하려 하자 또 반대편에서 다른 사람이 항의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잠시도 기다리지 않고 또 명령을 내렸다. 그 사람 역시 얼마 버티지 못하고 끌려 나갔다.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우린 숫자가 적었다. 이렇게 빨리 끌려나가버리면 이 공청회를 무산시키기 어려울텐데. 차라리 처음부터 한데 뭉쳐서 저항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나 둘 셋 그렇게 계속 활동가들이 끌려나갔다. 사회자가 다시 공청회 순서를 진행시키려는 걸 보면서 일어나서 살피니 우리측 활동가들이 이제 진짜 몇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누군가 나서겠지. 아니 조금 진행되는 걸 보다가 다시 나서는 게 낫겠지. 이 공청회장에 누군가는 마지막까지 남아 있어야 한다. 사회자가 본격적인 진행을 하려는 순간 앞쪽에서 누군가가 또 나섰다. 경찰들이 좌우 양쪽 뒤편에 몰려 있느라 그는 조금 시간을 끌 수 있었다.
그때 선배 활동가 한 명이 날 불렀다. 이제 정말 몇 남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그 전략을 쓸 수 없었다. 남은 사람들은 뭉쳐서 함께 저항하고 버텨야 했다. 모여보니 고작 4명이었다. 그런데 그때까지 소극적으로 행동했던 할머니들이 우리 앞을 막아섰다. 우리가 다 딸려나가면 끝장이라는 걸 그 분들도 깨달은 것이다.
이제 공청회장은 전쟁터처럼 변했다. 경찰들은 사방에서 우릴 에워싸고 끌어내려 했고, 할머니들은 비명을 지르거나, 호통을 쳤고, 우린 큰 소리로 이 공청회의 부당함을 큰 소리로 꾸짖었다. 한동안 이어지던 소동이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섰다. 경찰들이 잠시 물러섰고, 우리도 숨을 헐떡이며 조금 휴식을 취했다. 사회자가 경찰 간부를 부르더니 귓속말을 했다. 한참 후에 네 곳의 출입구에서 경찰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처음엔 그래도 체면을 생각해서 전경을 투입하진 않고, 평택 경찰서 사복 형사들을 배치했던 것인데, 이젠 눈치볼 것도 없이 그냥 전경들을 불러들인 것이다.
형사들의 태도도 달라졌다. 그 전까지 감정이 실려있지 않았는데, 이젠 우릴 노려보며 이죽거리는 표정일 지었다. 사회자가 다시 순서를 진행하길래, 내가 큰 소리로 발언을 시작했다. 왜 이 공청회가 불법인지를 크게 외쳤다. 덩치가 큰 형사가 달려들어 내 팔을 낚아채려 했다. 본능적으로 피했지만, 그는 이죽거리는 표정으로 다시 달려들었다. 할머니들이 내 앞을 막아서려 했으나, 그는 더 빨랐다. 오른 팔목을 붙잡혔고, 강한 힘으로 날 끌었다. 뒤에 있던 할머니들이 일제히 내 허리를 끌어안고 매달렸다. 주위에 있던 다른 형사가 내 옷을 붙들었고, 곧 옷이 찢어졌다. 전경들이 달려와 다시 우리를 포위했다. 그러고보니 어느새 다른 형들은 다 붙들려가고 나 혼자 남았다. 미군기지를 찬성하는 주민들(주로 유흥업에 종사하는 상인들)이 우리에게 삿대질을 하며 욕을 퍼부었다. 특히 나에게 어린 놈의 새끼가 어디서 버릇없게 나서냐고 윽박질렀다.
웬만하면 욕을 하지 않으려고 참고 있었다. 진행을 방해하는 발언도 계속 경어체를 유지하고, 논리를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런데 옷이 찢어지고, 다들 끌려나간 걸 깨닫은 후로는 눈이 돌아갔다고 표현해야 하나, 안전핀이 풀린 느낌. 나는 욕을 하기 시작했다. 찬성측 주민들에게, 형사들에게, 사회자에게 그야말로 미친 듯이 욕을 퍼부었다. 할머니들이 마치 계란의 흰자처럼 나를 둥글게 둘러싸고 보호해주고 있었기에 팔을 잡히거나, 옷을 잡혀도 끌려가지 않고 버틸수 있었다.
사회자는 내가 혼자 남았다고 그냥 강행하려고 했다. 마이크를 잡고 말을 하기 시작했는데, 나는 목이 찢어져러 악을 쓰며 진행을 막았다. 찬성측 주민들의 욕설이 다시 나를 향했다. 목소리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곧 목이 쉬어버릴 것 같았다. 내가 끌려가는 게 먼저일까, 아니면 목이 쉬어버려 더이상 목소리를 내지 못해 행사를 저지하지 못하게 될까?
그래도 조금만 더 버티면 되지 않을까 생각할 때쯤 전경들이 할머니들을 먼저 끌어내기 시작했다. 할머니들의 비명소리와 호통소리가 넓은 실내에 울렸다. 곧이어 맨처음 이죽거리는 표정으로 날 노렸던 형사가 웃으며 내 팔을 낚아챘다. 난 힘을 주고 버텼지만, 곧 옆에서 다른 형사가 내 머리를 감싸 헤드락을 거는 자세로 날 쓰러트렸다. 안경이 벗겨져 땅에 떨어졌고, 다른 형사가 그 안경을 밟았다. 씨발! 있는 힘껏 욕을 하며 내 머리를 감싼 팔을 풀고 그 녀석을 밀쳤다. 주먹을 날리고 싶었으나, 형사를 패고나면 쉽게 풀려나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녀석들은 곧바로 주먹으로 내 배와 가슴을 쳤다. 배를 움켜쥐고 앞으로 고꾸라지는 자세가 되자 뒤에 있던 녀석이 내 발을 걸면서 바닥으로 쓰러뜨렸다. 그리고 밟기 시작했다. 얼마나 밟혔을까? 웅크린 자세로 몸이 덜덜 떨렸다. 형사들이 물러나고 전경들이 달려들어 내 사지를 번쩍 들고 끌고 나갔다. 마지막으로 힘을 짜내어 사회자에게 욕을 퍼부었다.
전경들은 나를 닭장차에 태웠고, 거기엔 두들겨 맞아 상처 투성이인 형들이 타고 있었다. 우리가 다 들려나와 버려서 결국 공청회는 찬성측 주민들의 일방적인 호응으로 진행되었고, 행사를 무사히 치룬 경찰들은 친절하게 우리를 풀어줬다. 그 이죽거리는 표정의 형사 새끼를 죽여버리고 싶어서 미칠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담배를 잘근잘근 씹는 것으로 참아야 했다.
2003년 새만금 제4공구
환경단체들의 계속된 반발 때문에 시공사는 공사를 앞당기기 위해 전국의 모든 덤프트럭을 모아, 밤낮없이 바위와 흙은 바다에 퍼부었다. 바위와 자갈과 흙만으로 바닷물을 막은, 물막이 공사가 막 끝난 4공구에 전국에서 환경 활동가 80여 명이 모였다. 작은 읍내인 부안에 너무 많은 외부인이 한번에 몰려들면 저쪽에서 미리 눈치챌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는 부안 외곽에서 해가 떨어질 때까지 대기하다가 밤 늦게 조용히 부안성당으로 합류했다. 그곳에서 비상식량으로 쵸코바 서너개를 받고, 비옷을 걸치고 대기했다. 어선을 서너척을 얻어타고 4공구에 기습 침투한 이들은 아마 60여 명쯤 되었으려나.
비가 내렸고, 잠을 자지 못해 피곤했지만, 우리는 가지고 온 곡괭이와 삽을 이용해 물막이가 끝난 임시 방조제를 허물어 바닷물을 다시 유통시켰다. 포클레인의 삽질 몇 번이면 간단히 끝날 일이었을지 몰라도 우린 몇 시간 동안 삽질과 곡괭이질을 하느라 무척 힘들었다.
고된 노동의 결과로 해수유통의 기쁨과 함께 아침을 맞았으나, 시공사 측의 신고로 경찰들이 개미떼처럼 몰려왔다. 경찰은 방패를 앞세워 우리를 위협했고, 우리는 물과 장비를 제일 가운데 두고, 그 바깥에 여성 활동가들을 놓고, 제일 바깥에 남성 활동가들이 서로 깎지를 끼고 스크럼을 짰다. 경찰들은 동그란 모양의 우리를 밖에서 완전히 에워싸고 대치했다. 비와 땀에 젖은 몸, 고된 노동으로 지친 몸이었다.
경찰들이 방패로 우리를 밀고 들어왔을 때, 좀 이상했다. 어, 이거 밀면 어쩌라는 거지? 하나씩 끌어낼 줄 알았는데, 왜 밀지? 밀면 안쪽에 있는 여성활동가들이 다칠텐데. 우리보다 훨씬 수가 많은 경찰은 방패로 밀고 빙글빙글 돌면서 대열을 흩어놓으려 했다. 밀고 밀리는 상황. 억지로 짜낸 힘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데, 저쪽에서 포클레인이 나타났다. 우리가 경찰들의 벽 안에 갇혀 있는 동안, 포클레인은 우리가 허물어서 해수를 유통시켰던 틈을 다시 메우기 시작했다. 우린 소리를 지르며 포클레인을 막으러 가려고 했다. 하지만 경찰 병력은 두텁게 우릴 에워싸고 있었고, 도저히 뚫을 수 없었다. 허무하게 삽질 몇 번에 바닷물은 다시 막혔다.
해가 점점 높아질 즈음, 군산환경연합에서 배를 타고 물과 빵을 갖고 왔다. 정말 배가 고팠다. 잠시 쉬면서 빵 좀 먹고 다시 하면 안될까? 생각할 즈음에 갑자기 여러 척의 배를 타고 새추협(새만금 추진 위원회) 편영수와 깡패들이 나타났다. 그러자 우리를 고립시키고 있던 경찰들이 갑자기 빠져나갔다. 새추협과 깡패들은 배에서 물대포를 쏘기 시작했다. 바닷물이었다. 짠 바닷물이 얼굴이 때리면 눈이 따가워서 도저히 눈을 뜰 수 없었다. 그때 깡패들이 달려들어 밖에 있는 남성 활동가들부터 끌어내서 패기 시작했다.
수염을 길렀던 선배는 수염을 잡힌 채 끌려가서 구타당하고, 머리를 길렀던 선배는 머리채를 잡혀 끌려갔다. 바닷물이 눈에 들어가 눈을 뜨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누군가 내 멱살을 쥐고 번쩍 들어올렸다. 본능적으로 자세를 낮추며 버텼는데, 그 녀석은 주먹으로 배를 쳤다. 자세가 무너져 앞으로 숙였는데, 목 뒷덜미를 잡혀 질질 끌리다가 앞으로 던져졌다. 얼굴이 흙 바닥에 쳐박혔고, 혀로 흙맛이 느껴졌다. 밣힐 줄 알았는데, 그 녀석은 나를 끌어낸 후에 내 뒤에 있던 다른 남성 활동가를 끌어내려 했다. 정신이 번쩍 들어서 달려들어 녀석의 허리를 붙들고 끌어냈다. 녀석은 예상치 못한 내 행동에 당황해 끌려 나왔지만, 곧 나를 향하 주먹을 휘둘렀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같이 싸워야 하나? 같이 주먹질을 해도 되나? 이거 정당방위 아닌가? 녀석은 나를 밀쳐 쓰러뜨리고, 또다시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다른 사람을 끌어내 바닥에 쓰러뜨렸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나오고, 물대포가 귀를 때리고, 세상이 빙빙 도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녀석들이 가운데 있던 식수와 빵을 다 뺏어가서 바닷물에 던지는 모습을 허무하게 바라봐야 했다. 아, 배가 고팠는데, 저 빵을 한 입라도 먹었다면 그래도 힘을 좀 더 써볼텐데. 화가 났다. 편영수는 메가폰을 잡고 계속 우리를 욕하며 빨리 물러가라고 협박했다. 경찰은 저만치 물러나서 그들이 우리에게 퍼붓는 폭력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모여 아까와 동일한 대형으로 스크럼을 짰다. 무슨 일이 있어도 손을 놓치지 말라고 서로 격려하며, 할 수 있다고 소리를 냈다. 잠시 소강상태가 끝나자 그들은 다시 바닷물을 퍼부었다. 밤새 비를 맞고, 땀에 젖은 옷이 그나마 아침 햇살에 말라가던 중이었는데, 물대포 때문에 다시 젖었다. 놈들은 우리에게 뺏어간 플라스틱 생수병을 던지기도 했다. 안쪽에 있던 여성 활동가가 머리를 맞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우린 욕을 내뱉으며 사람이 다쳤다고, 병원에 데려가야 한다고 소리를 질렀다. 쓰러진 아이는 교육기수로 동기였고, 나와 동갑이었다. 너무 화가 났다.
놈들은 우리가 그러거나 말거나 다시 공격을 해왔다. 이번에 나에게 덤빈 놈은 덩치가 작았는데, 내 머리칼을 쥐고 끌어내려 하길래, 스크럼을 풀고 발로 차 버렸다. 다행히 이 놈들이 급하게 오느라 사람을 많이 데려오지 못했나보다. 숫자는 우리가 훨씬 더 많았다.
아침에 갑자기 시공사로부터 연락을 받았겠지. 웬 놈들이 방조제에 들어와 바닷물을 다시 유통시키고 있다고. 그래서 부랴부랴 사람을 끌어모았지만, 충분히 모으지 못했겠지. 게다가 일부는 깡패였겠지만, 일부는 그냥 찬성측 주민이었다. 만약 맞서 싸워도 되는 거라면, 스크럼을 짤 일이 아니라 그냥 하나씩 패버리면 될 것 같았다. 게다가 난 동기가 쓰러져서 무척 화가 나 있었다. 발길질에 맞고 물러났던 녀석이 다시 덤비려하자 확 주먹이 나가려고 했는데, 옆에 있던 선배 활동가가 내 팔을 잡고 말렸다. 그 와중에 다른 사람들은 끌려가서 맞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했다.
또 다시 녀석들이 잠시 물러났다. 경찰들은 여전히 강 건너 불 구경을 하고 있었다. 얼마나 더 이렇게 맞고 있어야 하는 걸까? 녀석들이 들이닥쳤다가 물러나길 반복하는 동안 또 한 명의 여성 활동가가 실신하듯 쓰러졌다. 나중에 해경의 배가 한 척 나타나 그 두 사람을 태워 나갔다. 나머지 사람들은 여전히 바다 한 가운데 좁은 흙 방조제 위에 남겨졌다. 점점 해는 높아졌다.
젖은 옷을 벗어버리고 씻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어렵게 들어온 이곳에서 쉽게 나갈 수는 없었다. 우린 여기서 며칠을 버티고 버텨서 결국 새만금 사업을 막아낼 작정이었다. 이미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고가 들어가 문재인 민정수석이 이곳을 향해 출발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편영수는 계속 외부세력은 물러가라고 떠들어댔다.
한동안 녀석들도 쉬는 건지 공격이 없었다. 우린 대형을 유지한 채로 앉아서 쉬었다. 밥을 먹으러 가는 건지, 그냥 물러가는 건지 녀석들이 배를 타고 빠져나갔다. 주머니를 뒤져 하나 남은 쵸코바를 꺼냈다. 껍질을 까서 반을 잘라 옆에 있던 형에게 건네고 남은 반 조각을 입에 넣었다. 단 것을 좋아하지 않아, 군대에서도 쵸코파이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건만, 이 반조각 쵸코바는 너무 맛있었다.
그러는 사이 서울 상황실은 청와대와, 이곳 처장단은 현장 경찰 간부와 협상을 벌이는 듯 했다. 경찰은 조용히 물러나기만 하면 아무도 연행하지 않을 테니, 빠져나오라고 요구하는 듯 했다. 우린 지치고 배가 고팠지만, 물러갈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바닷바람이 차가워도 여기서 며칠이라도 버틸 생각이었다.
협상은 결렬되었나보다. 새추협과 깡패들이 물러간 자리에 다시 경찰 병력이 돌아왔다. 다들 지쳐서 서로 기대 앉은 채 쉬다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이젠 진짜 짜낼 힘도 없었는데, 경찰들은 다시 방패를 앞세워 밀고 들어왔다. 밀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다.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치잖아! 밀지 말라고! 바로 앞 얼굴을 가린 철망 속 눈동자를 노려보며 소리를 질렀다. 하긴 그 눈동자가 무슨 잘못이랴! 뒤에서 시킨 놈이 원흉인 것을, 그리고 그 뒤에 있는 경찰 간부와 이익에 눈이 먼 정치인들과 노무현이 잘못이겠지. 거슬러 올라가 같은 노씨인 노태우가 문제의 원흉인 것이지.
경찰들도 밀다가 빠졌다가 밀다가 빠지길 반복했다. 옆에 있던 선배는 그래도 이 동네 전경 애들은 시위를 많이 안 겪어봐서 생각보다 어설프다고 말한다. "왕년에는 이런 놈들 둘 셋은 그냥 갖고 놀았는데 말야!" 힘이 없어서 웃을 힘도 없었다. 싸워도 된다면 진압모 철망을 들어올려 목을 위로 올려버리고, 방패를 확 당기면 그냥 딸려올텐데, 그렇게 하나씩 상대하면 어떨까 생각하다가 숫자가 절대 부족해서 아무래도 안 되겠구나 다시 생각한다. 게다가 저놈들은 점심밥도 먹었는데, 우린 굶어서 힘을 쓸 수 없잖아.
경찰이 빠지고 다시 협상 타임이 되었나보다. 우린 바닥에 널부러져 최대한 에너지를 아꼈다. 정확한 시간은 기억나지 않지만, 오후 늦은 시각, 현장 지도부(사무처장과 간부들)는 철수를 결정했다. 나를 비롯한 몇몇 활동가들은 반발했다. 우리가 여기에 어떻게 들어왔는데, 그럴 수는 없다고. 지금 나가면 이 미친 고생이 모두 헛 짓이 되어 버린다! 물론 현실적으로 다들 지쳐있고, 더 버티기 어려운 사람들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이럴 수는 없었다.
서울 상황실과 현장 지도부가 왜 그런 결정을 내려야만 했는지 구체적인 정황은 아직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그 결정을 내린 선배들을 원망한다. 경찰들은 길을 열어줬고, 우린 지친 다리를 질질 끌며 걸어서 바다 한 가운데에서 방조제를 걸어나가야 했다. 거리가 얼마라고 했던가? 얼마나 걸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원망하는 마음과 어서 씻고 싶은 마음과 뭐라도 먹고 싶은 마음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리는 걷는 게 아니라 억지로 질질 끌면서 움직였던 것 같다.
그래도 젊었던 나는 제일 먼저 방조제에서 나왔는데, 문정현 신부님께서 짚차를 몰고 와서 기다리고 계셨다. 뭐라고 하셨던가? 고생했다고 어서 타라고 했던가? 조수석에 오르니 신부님께서 담배와 라이타를 건넸다. 떨리는 손으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아, 담배가 이렇게 꿀 맛이었구나. 차를 타고 돌아간 부안성당에는 김밥 상자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제일 먼저 도착했던 나는 다른 사람들이 차례로 돌아올 때까지 김밥을 몇 인분을 먹었는지 모른다. 7인분? 10인분? 아마 지금까지 평생 먹었던 것 중에 가장 많이 먹었던 날이 아니었을까?
또 언젠가
겪었던 굵직한 사건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례들만 끄집어 냈다. 이 외에도 현장에서 국가 폭력에 당한 일은 수없이 많다. 그리고 앞으로도 또 많을 거다. 국가 권력의 폭력은 사라지지 않을테고, 나는 저항해야만 하니 맞아야 하는 일은 끊임없이 이어지겠지. 그래도 운 좋게 살아남아야 한다.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끝까지 살아남아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야 겠다. 그래야 아빠로써 부끄럽지 않을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