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d like to see you naked


지난 주였다. 어느 술자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새벽, 이대로 집에 들어가기 싫고, 술 한 잔 더 마시고픈 생각이 간절한데 같이 마실 사람은 없었다. 물론 집에서 혼자 마실 수도 있겠지만, 그땐 그냥 곁에 있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생각했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만약 받기만 한다면 택시를 타고 달려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느라 전화를 받지 못했고, 나는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 혼자 술을 더 마셨다.


다음날 친구가 전화를 했다. 무슨 일 있냐고 묻길래, "그냥 새벽에 술이 더 먹고 싶었는데, 네 생각이 나서 전화했어. 미안!" 이라고 했는데, 녀석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너 상태가 많이 안 좋구나!" 한다. 뭐 솔직히 상태가 좋은 건 아니어서 그냥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자기가 당분간은 바빠 여유가 없지만, 급한 일이 마무리되면 꼭 얼굴보자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더니 한참후에 뜬금 없이 톡으로 움직이는 사진 파일을 보냈다. 


 

웬 아리따운 여성이 손을 흔드는 장면을 카메라가 돌면서 찍은 장면이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녀석이 "티비 징하게 안 보는군" 이러고는 "설현"이라고 답을 보냈다. 아,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다. 무슨 통신사에서 이 여성의 등신 입간판을 세웠다가 남성들이 가져가버렸다는 말도 들은 기억이 난다.


그리고 또 한참후에 녀석이 톡을 보냈는데, 아 진짜 일하다가 말고 웃겨서 죽는 줄 알았다. "네가 벌거벗은 여성들 사진 좋아하면, 그런 건 잔뜩 보내줄 수 있는데" 이러는 거다.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한참 고민했다. 남자로서 왜 안 좋아하겠는가! 게다가 반드시 필요한 시간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카톡으로 그런 사진들을 잔뜩 보내준다는 건 좀 왠지 그랬다. 뭐 웹을 뒤져보면 그런 사진이야 잔뜩 찾을 수 있지 않은가. 굳이 그런 사진을 저장해두고 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암튼 답을 할 타이밍을 놓치고 그 순간은 지나갔는데, 나중에 몇 시간 후에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다가 갑자기 그 톡이 또 생각났다. 그때 노래 가사가 생각났다. 로렌 크리스티의 <You make me laugh>에 I'd like to see you naked 라는 부분이 생각났다. 근데 검색해도 유튜브에 없네. 이 좋은 노래가 왜 유튜브에 없지? 저작권 때문인가? 암튼 나중에 집에 와서 그 노래를 찾아 들으며 다시 한참 웃었다.


수없이 바람에 흩어진 담배 연기의 결과물


에너지협동조합 연합회에서 조합원들을 위한 교재를 하나 만들자고 뭉쳤던 건 작년이었다. 여러 조합에서 실무자들이 모였는데, 다들 실무자로서의 어려움을 토로하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교재를 만들어야 하는데, 목차를 정해놓고 각자 원하는 부분을 맡아서 쓰기로 했다. 그렇게 글을 모으면 글의 수준이나 톤이 제각각 일 것이기 때문에 내가 교정을 보면서 글을 만지기로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받아본 글은 생각보다 제대로 된 내용을 담고 있지 못했다. 단순히 글의 난이도를 맞추고, 톤을 조절하면 되는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아예 내용 자체가 제대로 갖춰지지 못한 수준이었다. 이건 처음부터 글을 다시 써야하는 수준이었다. 도저히 그럴만한 시간을 내지 못해, 결국 완성된 교재를 만들지 못하고, 미완성의 원고만 남았다.




올해 연합회에서는 10월 22일 토요일 청계 한빛 광장에서 '마스크 퍼레이드'를 기획했다. 미세먼지를 일으키는 석탄화력발전소를 없애고, 지구를 살리는 재생에너지, 햇빛 에너지로 가자는 뜻의 캠페인이다. 이날 사용하기 위한 소책자를 제작하자는 의견이 있었는데, 그 기본을 작년에 만들다 실패한 저 조합원 교재를 하자고 하는거다. 


일단 꼭 들어가야 할 내용은 저 교재의 목차에 들어가 있겠지만, 문제는 저 교재에는 그 내용이 충실히 담겨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다시 저 교재를 완성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어쨌거나 내가 쓸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는 계속 바빴다. 달리 방법이 없었으니 쓰겠다고 했지만, 시간 여유를 달라고 했다.


그리고 마감에 닥쳐서야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도저히 교재를 완성할만한 시간은 나지 않았고, 그 교재에서 다시 내용을 발췌해서 소책자를 만드는 건 시간낭비였다. 처음부터 소책자 원고를 다시 썼다. 소책자니까 아주 대중적으로 쉽게 써야 했다. 나는 우리 큰 아이에게 설명한다고 생각하고 글을 썼다. 되도록 쉬운 단어와 표현을 쓰려고 애썼고, 많은 정보를 담기보다는 어떤 느낌인지 깨닫기만 해도 좋다는 기분으로 썼다. 어떤 내용은 쉽게 쓰는게 거의 불가능하기도 했고, 되도록 글을 간결하게 담아야 하는데, 내용이 많아서 자꾸 길어지는 부분도 있었다.


글이 막힐 때마다 옥상에 올라가 담배를 태웠다. 최근에는 평소에 거의 담배를 피우지 않아서 한 일주일 안 피다가 술 마실 때 몇 개비 피우고, 또 며칠동안 한 개비도 안 피우고 이런 패턴으로 살았는데, 그날은 진짜 오랜만에 엄청나게 피웠다. 일요일 밤을 꼬박 새고, 월요일 오전엔 회의하고 또 해야할 업무들을 보다가 오후 늦게부터 다시 매달려서 거의 11시가 다 되어서야 원고를 마쳤다. 잠을 자지 못했기 때문에 머리가 멍했다. 담배를 피우고 내려와 교정을 다시 보고 원고를 넘겼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소주를 한 병 반 마시고 잤다.


화요일 연합회 처장님에게 연락이 왔다. 고생 많았다고, 바쁜데 애 많이 썼다고 했다. 사실 미리 써서 줬어야 했는데, 내가 계속 미룬 탓에 전체적으로 빠듯한 일정이 되어버려서 나도 면목이 없던 참이었다. 지난 주에 담당자는 "오늘도 안 주면 울어버릴 거예요." 라고 협박까지 했으나 그로부터 4일이나 더 지나서 원고를 넘겼으니 말이다. 소책자 제작을 위한 실무 회의를 하려고 처장님과 담당자와 디자이너가 모였으나, 원고가 거의 완벽해서 회의할 필요가 없었다고 말을 했다. 그 말을 들으니 그제서야 조금 내가 고생을 하긴 좀 했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글을 쓰느라 내가 태운 그 수많은 담배가 헛되지 않았구나 생각이 들었다. 비록 연기가 되어 바람에 흩어졌으나, 그 성과로 원고가 남았으니 말이다.


다시 쓰고 싶다. 소설


아주 오랫만에 원고 칭찬을 받았더니, 기분이 좀 우쭐해졌다. 낮에 멀리 다녀올 일이 있어서 지하철을 오래 타고 다녀왔다. 음악을 듣으면서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이나 트위터를 돌아다녔다. 출판사에 다닐 때 인연을 맺었던 후배 하나가 최근 출판사를 그만뒀다는 소식을 접했는데, 오늘 보니 소설을 써서 응모했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작가 지망생이 되려고 나선 것이다. 그의 선택이 부러웠다. 응원해주고 싶었다. 나도 20대 때는 골방에 틀어박혀서 소설쓰느라 시간을 참 많이 보냈다. 나에게 이제 그 꿈은 사라진 걸까? 지금 내가 일을 그만두고 여기저기 걸쳐놓은 온갖 활동들을 다 정리하고 소설 쓰겠다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과연 얼마나 시간이 걸려야 제대로 글을 쓸 수 있을까? 궁극적인 목표인 등단을 할 수나 있을까? 잘 모르겠다.


다시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내가 쓴 글들을 하나씩 떠올려 봤다. 함량 미달의 글들. 골방에 처박혀 담배 연기에 찌든 머리를 아무리 굴려봐도 글은 잘 나아지지 않았다. 늘 일정 수준에서 머물렀다. 그러다 문득 오래전 동아리 소식지에 실으라고 써준 단편소설 생각이 났다. 그 글은 고등학생 때 만났던 여학생과 있었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조금 각색해서 쓴 글이었다. 친하게 지냈던 후배가 동아리 회장을 맡을 때 뭐라도 힘이 되어주고 싶어서 소설을 써서 소식지 원고로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군대 입대일이 그리 많이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물론 그 전에 얼개는 구상해놓은 글이긴 했다. 대부분 내가 실제로 겪었던 일을 각색하는 거라, 크게 어려움도 없었다. 그냥 자연스럽게 술술 써내려갈 수 있었다. 당시에는 우리집에 아직 컴퓨터가 없어서 나는 공책에 삐뚤빼뚤 손 글씨로 원고를 썼다. 엄청난 악필이지만, 그래도 누군가 알아볼 수 는 있을 정도로 쓰느라 좀 힘들긴 했다. 하지만 그 글을 타이핑 할 후배 녀석도 어지간히 악필이라 알아보리라 예상했다. 입대 전날 원고를 완성해 입대하는 날 부산역으로 마중나온 후배에게 그 원고를 안겨주고 나는 강원도 최전방으로 떠났다.


시간이 한 1년 반쯤 지나서 휴가를 나왔다가 동아리 후배들을 만났다. 바로 한 해 후배들이 한 두명 있었지만, 대부분은 내가 입대하고 나서 입학한 후배들이라 난 얼굴도 모르는 이들이었다. 그런데 내가 인사를 하자 여학생 두 명이 "어머!"하고 깜짝 놀라며 서로 쳐다보며 눈빛을 교환하더라. 난 조금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그냥 넘어갔다. 나중에 술자리에서 그 두 명이 나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둘 중 하나가 물었다. "선배님, 혹시 입대하기 전에 소설 써서 소식지 원고로 주고 가셨어요?" 나도 깜짝 놀랐다. 그 후배가 회장 직에 부담을 느껴 뭐하나 제대로 한 것도 없이 시간만 보내고, 그 소식지는 내지 못했다고 들었다. 내가 악필로 쓴 원고는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몰랐다. 그냥 그 녀석이 갖고 있겠지 생각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 두 여학생은 자신들이 작년에 1학년때 회장이 시켜서 내 소설 원고를 타이핑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 글이 정말 재미있었다고, 마치 유명한 연애소설을 읽는 것 같았다고, 어떤 어떤 장면은 무척 로맨틱해서 타이핑을 하다말고 한참을 글에 빠져들어 읽었다고 했다. "선배님, 어쩜 그렇게 글을 잘 쓰세요? 멋져요!" 이렇게 칭찬을 받으니 난 정말 어쩔줄을 몰랐다.


자, 나는 휴가나온 군인이었다. 군대라는 여성이 단 한 명도 없는 조직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다가 잠시 나온 사람이다. 게다가 최전방이라 여성 뿐 아니라 그냥 사회인도 거의 보지 못했다. 나는 마치 감옥에 갇혀 있던 사람처럼 평범한 사회와는 격리된 생활을 했다. 내가 아무리 유쾌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길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해도, 그때는 막 사람들 많은 자리에서 대화하고 그런게 무척 어색할 때였다. 어여쁜 여자 후배들 앞에서 완전 수줍어서 제대로 얼굴도 못 쳐다보고, 말도 잘 못하고 그런 때였다.(지금 생각하면 내가 그랬다는 것이 별로 믿기지 않지만) 그때 난 완전 소심하고 쑥맥에 말주변도 하나도 없었다.


내 첫사랑이라고 표현해도 되려나? 그 전에 만났던 여학생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진심으로 좋아했다는 기준으론 첫사랑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싶은데, 그런데 그럼 그 전에 진심으로 짝사랑했던 건 또 뭐지? 아! 그건 이뤄지지 못했으니 첫사랑이 될 순 없는 건가? 모르겠다. 그냥 첫사랑이라고 해두자. 그 기억을 바탕으로 쓴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다며, 내 양쪽에서 완전 나를 띄워주는 후배들과 앉아 있는 그 순간에 나는 마치 구름 위에 떠있는 것처럼 기분이 좋았지만, 수줍어서 제대로 표현도 못하고 술만 들이키고 있었다. 만약 평소의 나였다면 둘 중 좀 더 적극적인 아이에게 바로 작업이 들어갔겠지만, 그때는 그냥 그렇게 아무일도 없이 끝났다.


그때 들었던 칭찬과 찬사가 평생 들었던 어떤 칭찬보다 더 좋았던 것 같다. 그건 어쩌면 기억의 왜곡일 수 있겠으나, 내겐 그렇게 느껴졌다. 둘은 그저 휴가를 나왔다는 시꺼먼 빡빡머리 군인 아저씨가 그런 글을 썼다고 하니 신기해서 막 그렇게 칭찬하고 질문을 했던 것이겠지만, 게다가 나름 동아리 선배라고 하니 막 치켜세워 준 것이겠지만, 나는 그런 칭찬을 받아본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진짜 좋았다.


나중에 후배에게 그 원고를 돌려받았다. 제대하고 나서 한참 후였다. 그 글을 내가 다시 타이핑해서 파일로 만들어서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 아까 11시 반쯤 애들을 재우면서 함께 잠들었다가 다시 깬 후 잠이 안 와서 그 글을 읽어봤다. 아! 진짜 묘사도 허술하고, 대사도 하나같이 오글거리고 기본이 안 된 글이더라. 다만 구성과 서술은 어느정도 수준은 되어 있더라. 다시 읽으며, '그래. 저때 저런 일이 있었지. 그땐 그런 일이 있었고. 어! 저때 진짜 힘들었는데' 옛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다가가면서 가슴이 답답했다. 과연 입대 직전의 나는 저 마지막을 어떻게 썼던가? 생각보다 맥 없이 끝나더라. 그 아이들 이런 허접한 글을 읽고 그렇게 나를 추켜 세웠단 말이지? 그거 그냥 예의상 칭찬하다가 조금 분위기가 올라 더 칭찬도 하고 질문도 했는데, 그렇게 진심은 아니었던 거 아닐까? 모르겠다. 


출판사를 그만두고 소설 원고 하나를 응모했다는 후배의 글을 보고, 내가 썼던 소설을 다시 읽어보고, 그 소설에 대한 칭찬이 진심이 아니었던 건 아닐까 의심하기 까지 참 나란 인간 어쩔수 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가서 담배나 한 대 피우고 자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아이들 데리러 출발하기 전에 담배를 사무실에 놓고 왔음을 떠올린다. 편의점까지 사러 가기는 너무 귀찮다. 그냥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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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12 09: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12 1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6-10-12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 서재에 오면 항상 누군가 맨 위에 비밀댓글을 달아두시더라고요 ㅎㅎㅎㅎㅎ 오늘도 그러네요 ㅎㅎㅎ)

소설 쓰기, 응원합니다.

저 역시 어제, 소설을 써보자고 결심했거든요. 어제 만나게 된다면 `저 소설 쓸거에요!`라고 말하려고 했었어요. ㅎㅎ
어제는 막 자신감과 의욕에 차서 소설을 쓰리라, 쓰겠다, 쓸것이다, 했는데 얼마 안가 다시 자신감이 떨어졌어요. 그래서 지금은 어쩌나... 생각중인데, 일단 출판이야 어떻든 써보긴 하자, 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소설 쓰세요. 우리 소설로 경쟁합시다!!

감은빛 2016-10-12 11:32   좋아요 0 | URL
아, 그 말씀을 하시니, 실제로 최근엔 그랬네요. ^^

저도 아까 다락방님이 이 댓글 달았던 시점에 다락방님 서재에 댓글 달고 있었는데,
우린 같은 시간에 서로 댓글을 달던 중이었군요.

소설을 쓰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니 쉽지 않은 작업이 될 거예요.
현실을 최대한 잘 반영하기 위해서는 발로 뛰면서 취재도 다녀야 하구요.

당장 출판을 걱정하기 보다는 제대로 된 작품을 쓸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이 가장 큰 장애 요인인 것 같아요.

다락방님과의 경쟁은 자신 없어요!
그냥 동지로서 함께 도움을 주고 받으며 성장해요!

다락방 2016-10-12 15:11   좋아요 0 | URL
동지는 무슨...

다 적이닷!!!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