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그런 이야기


언제였던가, 아직 한참 더웠던 어느 날 동네 합창단 형들과 술을 마셨다. 형들은 동네 어느 허름한 라이브카페로 날 데려갔다. 그 자리엔 합창단에 아직 들어가지 않은 사람이 둘이었다. 나와 또 한 사람. 그는 노래방에 가면 밤새 마이크를 놓지 않는 사람, 노래를 제법 잘 하는 사람이었다. 아니 누구나 인정할만큼 노래를 잘 하는 사람이었다. 형들은 그 전부터 우리 둘에게 합창단에 들어올 것을 권했다. 난 우선 노래를 그리 잘 하지 못하고, 합창을 연습하는데 투자할 시간이 없었으며, 연령대가 높은 그 합창단에 들어가 막내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은 나보다 어린 30대 남성과 여성이 있지만, 불과 몇 달 전만해도 그렇지 않았다.


암튼 형들은 라이브 카페에서 우리 둘의 노래 실력을 시험해보고, 합격하면 들어오라고 했다. 그게 시험이던 아니던, 분위기에 취해 우린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멋지게 잘하는 그는 김광석의 노래를 불렀던 것 같다. 그리고 합창단 사람들도 노래를 불렀다. 유일하게 나보다 어린 30대 친구는 이적의 <하늘을 달리다>를 불렀던가? 엄청난 가창력이었다. 남자가 들어도 반할 것 같은 목소리에 고음도 어마어마했다. 형들도 좋은 노래들을 잔뜩 불렀다. 시간이 많이 지나, 이젠 그게 어떤 노래들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도 분위기에 못 이겨 노래를 불렀다. 뭘 불러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다. 18번이라 부를 만큼, 노래방을 갈 때마다 부르는 곡이 두세곡 가량 있는데, 왠지 그날 따라 자신이 없었다. 다들 노래를 잘 하는 사람들이니, 나도 잘 부르고 싶었다. 그리고 남들처럼 돋보이는 곡을 부르고 싶었다. 그런데 딱 이거다 싶은 노래가 없었다. 내가 잘 부를 수 있으면서, 남들이 듣기에 좋은 곡.


빨리 곡을 고르라고 독촉이 올 무렵, 오래전 가끔 불렀던 곡, 이 분위기를 이어가면서도 나쁘지 않게 부를 자신이 있는 곡이 떠올랐다. 이승환의 <그냥 그런 이야기>였다.




카스트라토? 카운터테너?


우리 팀이 한창 무대를 독점하고 난 후, 아저씨들이 몇 명 들어왔다. 그들은 우리 뒤를 이어 무대를 장악했다. 드럼과 기타와 베이스를 연주하면서, 돌아가며 노래를 불렀다. 그 중 한 아저씨가 생글생글 웃으며 마이크를 잡았다. 짧은 스포츠 머리에 허름한 청바지를 입었다. 이건 편견일지 모르지만 어디 막노동이라도 하다가 온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야말로 깜짝 놀라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는 가성으로 블론디의 <마리아>를 불렀는데, 그 깨끗한 고음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어떻게 저 아저씨가 저런 미성의 고음을 낼 수 있을까? 게다가 그는 전혀 힘을 들이지 않고, 아주 쉽게 고음을 냈다. 마치 장난기 넘치는 표정인 듯 생글생글 웃으며 가성으로 노래를 부르는 그를 보며 우린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가성으로 노래를 부르는 사람 중 최고는 조관우 인 줄만 알았다.




우린 모두 무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노래가 끝났을 때, 노래를 들었던 모든 이들은 기립 박수를 쳤다. 그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앵콜곡을 불렀다. 유감스럽게도 다음 곡이 뭐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여전히 가성으로 높은 음역대의 여성 가수 노래를 불렀다. 두번째 곡을 들으면서 하나 깨달았던 건, 그가 맑고 깨끗한 가성으로 고음을 쉽게 올리지만, 목소리에 힘이 없고, 음을 길게 지속하지는 못하더라는 거였다.


한편 나는 그날 이 노래를 들을 때까지만해도, 이 곡을 [미녀는 괴로워]에서 김아중이 부른 곡으로만 알고 있었다. 즉 블론디의 원곡을 몰랐다. 나중에 김아중의 곡과 블론디의 원곡을 찾아 들으니, 그 아저씨의 노래까지 셋 다 각각의 매력이 있다고 느꼈다. 물론 그래도 가장 좋은 건 블론디의 원곡인 것 같다.


시간이 조금 지나 다시 우리 팀이 무대를 장악했다. 이번엔 모두 팝송을 불렀다. 대부분 올드팝 위주였다. 난 고민을 거듭하다가 마이클 런스 투 락의 <25미니츠>를 골랐지만, 곡을 찾을 수 없어 부르지 못했다. 대학시절 여자 후배를 앉혀두고 기타를 튕기며 불렀던 곡이었지만, 그리고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다시 불렀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언젠가 이 노래로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예전엔 자주 들었던 팝송 가사를 모티브로 단편소설을 써보는 시도를 종종 했다. 테이크 댓의 <백 포 굿>이라던가, 컬러 미 배드의 <와일드 플라워>도 그랬다. 나중에 가장 소설로 옮겨 보고 싶은 노래는 로렌 크리스티의 <바넷사스 파더>였다. 다른 곡은 몰라도 이 노래는 언젠가 꼭 시도해 보고 싶다.



암튼 그날 내가 불렀던 <그냥 그런 이야기>는 합격점을 받았다. 합창단에 꼭 들어오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난 그냥 웃고 말았다. 솔직히 합창이라는 것이 들으면 아름답지만, 내가 그 속에서 노래를 부르기 위해 오랜 시간 연습을 이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생각 났던 건, 잠시 몸 담았던 노래패에서 노래를 배우며 힘들었던 기억이었다. 발음이 좋지 않다고, 발성이 좋지 않다고, 너무 기교를 섞었다며, 음을 끝까지 제대로 내라며, 계속 선배들에게 혼나던 기억 밖에 없었다. 단 한 번 올랐던 무대에서 첫 음을 놓치는 큰 실수를 저질렀고, 그 실수가 계속 남아 그 다음 곡도, 또 그 다음 곡도 계속 실수를 연발했던 최악의 기억까지 떠올랐다.


비록 합창단에 들어갈 생각은 없지만, 어느새 친해진 형들과 맘 편히 술을 마시는 일은 즐겁다. 또 언젠가 그 허름한 라이브 카페에서 노래를 듣고 또 부르며 술잔을 기울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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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9-27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승환 1집 수록곡 중 제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가 `텅빈 마음`입니다. 진짜 서글프거나 가슴이 허한 느낌이 드는 날에 이 노래를 들으면 울컥합니다. ㅠㅠ

감은빛 2016-09-27 13:18   좋아요 0 | URL
<텅빈 마음> 참 좋은 노래죠.
그 노래도 오래전에 기타 치면서 자주 불렀던 곡이예요.

이승환 1집에서 <가을 흔적>과 <눈물로 시를 써도>를 참 좋아했구요.
<좋은 날>도 자주 불렀던 곡이예요.
그 특유의 꺾기 창법을 흉내내면서 불렀던 기억이 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