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좀비라는 단어 떠올리면 나는 게임이나 영화에서 특유의 느린 걸음으로 다가오는 징그럽고 무서운 살아있는 시체보다 크랜베리스(The Cranberries)라는 아일랜드 록밴드가 먼저 생각난다. 언젠가 드라마 주제곡으로 유명해졌던 [Ode to my family]라는 곡을 부르는 돌로레스 오리어던(Dolores O'Riordan)을 티비 화면으로 보면서 그녀에게 푹 빠져들었던 이후로 나는 제법 오랫동안 크랜베리스의 팬이었다. 독특한 창법과 사회비판적인 메세지를 담은 [Zombie] 라는 곡을 오랫동안 좋아했다.
뜬금없이 좀비 얘기로 글을 시작한 것은 지금 내 상태가 그에 가깝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시체! 이틀 연속 밤새 술을 마시고, 곧바로 출근했더니, 몸은 사무실에 앉아 있으나, 정신은 몸을 반쯤 떠나있고, 팔 다리가 흐느적거리고,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는 게 화장실이라도 다녀오려고 일어나서 걸으면 그 모습이 영락없는 좀비다!
어제 밤 늦게 회의를 마친 시점의 나는 전날 밤을 새웠으니 뒷풀이에 잠깐 들렀다가 곧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으며, 오늘은 온갖 유혹에도 불구하고 단호히 일어서리라 마음 먹었다. 12시가 가까운 시점이었고, 택시비도 없었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한 잔, 두 잔 술이 들어가다보면, 나도 모르게 조금만 더 있다가 갈까? 조금만! 으로 생각이 바뀐다.
어제는 특히 꼭 풀어야할 이야기가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풀긴 풀었으나,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밤을 꼬박 새워 이야기가 정리가 되었으나, 나는 너무 지쳐있었다. 아침 6시 술냄새를 풀풀 풍기며 지하철을 타면서 유난히 길고 힘들 것으로 예상되는 하루를 머리속으로 그려봤다. 아! 정말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
쓸데없는 이야기
어느 알라딘 서재의 글을 읽다가 문득 '사랑'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한때 많이 고민했던 것이고, 지금도 역시 그 고민은 이어지고 있다. 사랑이란 감정과 좋아한다는 감정은 다른 것인가? 다르다면 얼마나 어떻게 다른 걸까?
관계에 대한 고민이 많은 시기이다. 우정. 호감. 이끌림. 사랑. 남녀를 불문하고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감정을 갖고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현 관계에서 한발 물러서서 바라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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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열심히 읽고 고민했던 책이다.
지금은 무슨 내용이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책장 어딘가 구석에 꽂혀 있을텐데,
시간 날때 한번 찾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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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새'에 촛점을 맞추지 않고,
'부부'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부럽다!
'새'를 인연으로 만나 결혼하고,
매일 함께 새를 보러다니고,
다친 새를 돌보고,
희귀 새를 연구하는 삶이란
얼마나 멋질까!
꽤 오랫동안 '사랑'이란 감정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살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지금 내게 사랑이란 '착각'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이 보고싶은 면만 바라보았던 착각.
더불어 좋아한다는 감정, 역시 착각이 아닐까 싶다. 내가 어떤 이유로 누군가를 좋아한다면 그는 내 착각 속에서만 그런 면을 가진 사람이 아닐까 싶다.
글쎄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역사상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을 꼽으라면,
바로 스콧 니어링과 헬렌 니어링을 꼽아도 되지 않을까?
이 분들의 삶의 태도, 즉 사람과 자연을 대하는 태도를 닮고 싶지만, 역시 나는 부족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다.
더 내려놓고, 더 버리고, 더 누그려뜨려야 하는데,
나는 늘 욕심과 욕망에 휩싸여 매 순간을 보내는 듯 하다.
모르겠다. 고민을 거듭해도 답은 없다.
애초에 답은 없는 거다!
이 의미 없는 페이퍼를 그냥 지울까? 올릴까?
잠시 고민하다가 크랜베리스에 대한 추억 때문에 올린다.
왜 이러냐고? 난 지금 좀비다! 그게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