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일

그냥 탄핵 선고 기념일이라고 하기는 좀 재미없고, 뭔가 그럴듯한 이름의 기념일로 정해두고 싶은데, 아직은 마땅한 이름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작년 12월 3일 비상 계엄이라는 어이없는 일을 겪고, 111일만에 드디어 상식이 통하는 세상으로 돌아온 기분이다. 그간 너무 말도 안되는 상황들이 벌어져서 내가 지금 정상적으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맞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 이거 가상현실이거나, 매트릭스 속 세상인 거 아니지? 지금 나 긴 악몽을 꾸고 있는 거 아니지? 그런데 너무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 시간이 길어지다보니 정말 내가 현실이 아닌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렇게 계속 현실을 부정하다보면, 결국 현실과 환각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저번에 소개했던 누명을 쓴 무기수 김신혜 씨가 결국 현실과 환각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 것은 부정하고 싶은 현실에 아주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제 저녁에 조합원들과 쓰담걷기(쓰레기 담으며 걷기, 플로깅 혹은 줍깅이라고도 부름)를 하고 간단하게 비건 와인과 비건 안주를 나눠먹으며 한동안 대화를 나눴다. 다들 바라는 것은 하나였다. 제발 만장일치로 탄핵 인용 선고가 나오기를. 얼른 우리의 소중한 일상을 되찾을 수 있기를. 내란성 우울증과 내란성 불면증을 끝내기 위해 꼭 필요한 선결조건이다. 그래도 같이 이런 이야기를 나눌수 있는 사람들이 근처에 있어서 너무 좋았다. 그리고 쓰담걷기의 효능도 있었다. 윤석열을 얼른 치워버리는 기분으로 쓰레기를 주워 담았는데 이거 생각보다 효과가 좋았다. 담배꽁초가 정말 많이 버려진 나무 정자 근처를 긴 시간 치웠는데, 그 지저분하고 어지럽던 공간이 말끔하게 치워진 모습을 보는 것이 꽤 기분이 좋았다. 오타니는 쓰레기를 줍는 작은 선행으로 자신에게 운을 모은다고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열심히 쓰레기를 치운 만큼의 운이 모여서, 긴 시간 수많은 시민들이 거리에서 외치고, 응원봉을 흔든만큼의 정의가 작동해서 결국은 내란 수괴를 파면하리라 믿으며 헤어졌다. 너무 피곤해서 집에와서는 씻지도 않고 잠들었고, 아침에 깨서 몇 개 방송사의 아침 뉴스들을 찾아들으면 선고 시간을 기다렸다.

드디어 11시 22분. 주문을 낭독하는 소리를 들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게 정상이지. 이것이 상식이지. 전세계가 다 지켜본 범죄를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지.

점심을 먹고 책을 좀 읽으려다가 왠지 기분이 아니어서 대충 씻고 산책을 나섰다. 모처럼 쉬는 날이라 잠이라도 더 자고 싶었는데, 잠도 오지 않았다.

오후가 되어 여기저기서 연락이 왔다. 오늘이 오늘이니 얼굴을 봐야하지 않겠냐고. 그래. 일단은 오늘을 즐기자. 그 뒤에 올 상황이 훨씬 더 두렵기는 하지만. 지금 거기까지 생각하기에는 너무 머리가 아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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