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력증


가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어도 일에 집중이 안 되고, 머리가 전혀 돌아가지 않는 날이 있다.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면 분명 또 문제가 생길 것이 뻔한데, 지금 빨리 일을 해야하는데, 도저히 머리가 안 돌아간다. 그냥 멍하니 시간만 보내는 날. 그런 날이면 밥 먹는 것도 귀찮고, 움직이는 것도 귀찮고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진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그냥 누워서 눈을 질끈 감아버린다. 숨도 안 쉴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내가 뭐라고 이렇게 산소를 허비하고 살아야 하는 건지 싶다. 머리 속으로는 자꾸 처리해야 할 일들의 목록이 떠오르고, 어떤 일은 어떻게 저떻게 처리하고, 또 어떤 일은 누구와 논의하고, 또 다른 일은 누구에게 자료를 요청해서 먼저 검토해야 하고 등등 나도 모르게 일들을 처리하는 절차들이 바쁘게 돌아간다. 아까 책상 앞에 앉아 있을 때는 전혀 움직이지 않던 머리가 누우니 다시 움직인다. 이건 뭐 청개구리도 아니고.


부상과 회복


한창 열심히 하던 운동을 한동안 쉬었다. 여름에 너무 더웠기 때문이고, 날이 조금 선선해진 이후로는 그냥 몸을 움직이기가 싫어졌기 때문이었다. 예전이었다면 근손실이 두려웠을텐데, 이미 오랫동안 운동을 쉬어 근육이 다 사라진 이후라서 더 두려울 것도 없었다. 이렇게 운동을 안 하면서도 마음이 편할 수 있다니. 이건 좀 좋은 건가 라고 생각을 해봤다. 운동은 안 했지만, 먹는 양이 줄어든 덕분에 운동 열심히 하던 시절보다 복근은 더 선명해졌다. 이것도 좋은 건지 어떤지 모르겠다. 다만 이젠 예전처럼 샤워할 때 내 몸을 보면서 예쁘다는 생각을 할 수는 없게 되었다. 너무 마른 몸. 근육이 없는 내 몸은 낯설다. 다시 운동한다고 예전처럼 근육을 만들 수 있을까? 어쩌면 이젠 너무 늦어버린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샌드백을 산 후로 한동안 재밌게 두들기며 지냈는데, 그것도 다 한 때였다. 뭔가 계기가 없으면 내 방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운동기구들을 계속 방치하게 될 것 같다.


지난 주에는 운동을 좀 해볼까 하다가 부상을 당했다. 운동을 하다가 다친 것은 아니었다. 그날따라 아침부터 발목이 좀 아팠다. 가끔 이유도 없이 내 몸 여기저기 관절이 아픈 증상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어떤 날엔 무릎, 어떤 날엔 손목, 어떤 날엔 어깨였는데, 그날은 발목이었다. 근데 하필 그날 외부 일정이 두 개나 있었고, 걸어다녀야 하는 거리가 꽤 되는 상황이었다. 절뚝 절뚝 아픈 발목 때문에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프다고 빠질 수 있는 일정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하루종일 걸어다니며 일정을 모두 소화했다. 하필 그날 저녁에 애들을 만나는 날이라 또 밤 늦게까지 밖에 있었다. 자정이 다 되어서야 한쪽 발을 질질 끌면서 경사가 급한 골목길을 걸어 오르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퉁퉁 부어버린 발목을 발견했다. 일어서는 것 조차 힘들었다. 화장실을 갈 때에도 엉금엉금 기어서 이동하고, 뭔가를 짚고 의지해야만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몇 해 전 친한 친구가 일본에서 사다 준 동전 모양 파스를 찾아서 발목 여기저기 붙였다. 3일을 꼼짝도 안 하고 방 안에만 머물렀다. 움직이지 않으니 배도 별로 고프지 않아서 하루 한 번 간단히만 먹었다. 일어설 수 없으니 뭔가 만들어 먹지도 못하고 그냥 조리하지 않고 먹을 수 있는 걸로 먹었다. 삼일이 지나자 붓기가 좀 빠졌고,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절뚝 절뚝 걸을 수 있었다. 처음 발목이 아팠던 날 수준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다시 무리하면 또 같은 일을 반복하게 될 것 같아서 그대로 이틀을 더 방 안에만 머물렀다. 회복에 총 5일이 걸린 셈이다.


지금도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라서 여전히 살짝 절뚝거리며 걷는다. 오랜만에 회의에서 만난 사람들이 다들 걱정의 말씀들을 전해왔다. "왜 이렇게 살이 많이 빠졌냐?", "다리는 또 왜 그러냐?" 나는 참 사람들에게 걱정만 끼치는 존재인 것 같다.


가을 하늘


아픈 발목으로 무리하게 움직여서 발목 관절이 완전히 망가져버린 그날, 하늘이 정말 그림처럼 멋졌다. 좁고 위험한 사다리를 통해서만 올라갈 수 있는 어느 건물 옥상에 올라가서 하늘을 봤다. 안 그대로 발목이 아파서 안 올라갈까 생각도 했는데, 꼭 내 눈으로 점검해야 하는 것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위험을 감수하고 올라갔다. 일을 마치고 하늘을 보는데, 멋진 하늘이 마치 보상처럼 느껴졌다. 그래. 이 하늘을 보려고 내가 이 발목으로도 여길 올라왔나보다.


아주 어린 시절 어느 날이 떠올랐다. 미술학원을 잠시 다녔을 때였으니까 아마 국민학교 저학년이었을 것이다. 문득 하늘을 봤는데, 너무 멋졌다. 꼭 그림으로 그려놓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스케치북을 펼쳐들고 그리기 시작했는데, 내 재주로는 도저히 저 멋진 하늘을 표현할 수 없어서 그게 너무 너무 안타까웠다. 


이번에도 하늘을 보며 그림을 그려보면 좋겠다고 생각이 들었지만, 오래 전 그날 내 그림 실력을 깨달았기 때문에 시도는 안 했다. 그저 휴대폰을 꺼내 들고 사진을 찍었다. 오래 전 그날에는 휴대폰이란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지만, 이젠 화질이 좋은 폰으로 사진을 찍어놓고 언제든 볼 수 있다.


그날 저녁 아이들과 저녁을 먹는데, 큰 아이가 하늘이 너무 예뻤다고 자신이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아이가 찍은 사진은 내가 찍은 것 보다 더 멋졌다. 이 멋진 가을 하늘을 볼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인간은 참 이해할 수 없는 존재다. 그날은 발목이 완전히 망가진 날이었고 절뚝거리며 여기저기 옮겨 다니느라 참 힘든 날이었는데, 지금 돌아보면 그 힘들었던 기억과 통증보다 잠시 보았던 그 하늘이 먼저 떠오른다. 안전 난간도 없었던 그 옥상에서 하늘로 뛰어들고 싶은 기분을 간신히 참아야했던 그 기억이 말이다. 



책상 앞에 앉았으면 일을 해야 하는데, 일은 안 하고 이렇게 알라딘에 들어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일은 내일 해야겠다. 오늘은 그냥 돌아가서 쉬어야지. 뭔가 계기를 만들어야겠다. 무기력증을 극복하고 다시 일과 운동에 빠져들 수 있는 계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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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09-16 23: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40여일전에 다친 발목이 신경 쓰이는지라 감은빛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짐작을 해봅니다. 푸욱 쉬시고 무기력을 날려보내시길 기원합니다

붕붕툐툐 2021-09-17 0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흐음~ 발목은 잘 낫고 있나요? 발목 다치면 진짜 불편하잖아요~ 그런데 아름다운 하늘 본 걸 더 기억하시다니! 저도 하늘이 너무 예쁜날엔 내가 지구인이어서 참 행복하다 생각해요! 오늘 도서관에 신청한 책‘사랑하고 있기 때문에‘가 왔다고 해서 빌려왔어요~ 비록 빌리긴 했지만 도서관에 신청했으니 잘 한 거죠?ㅎㅎ인생은 그래프처럼 오르락 내리락이 있잖아요~ 애쓰지 않아도 어느날 운동 뽐뿌가 올 거예요! 지금은 무기력한 현재를 즐겨도 괜찮아요~ 그럴 때도 있는 거죠~😉

희선 2021-09-21 02: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발목이 아프신데도 여기저기 다니셨군요 며칠 쉬셔서 나았다고 해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아픈 것보다 예쁜 하늘 보신 게 더 기억에 남으시는군요 하늘이 예뻐서 카메라에 담아도 눈으로 보는 것과 똑같이 담을 수 없어 아쉽습니다 본래 자연을 그대로 담을 수 없겠지요

감은빛 님 명절 연휴 이틀 남았지만, 남은 날 편안하게 보내세요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