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일, 잘하는 일, 좋아하는 일, 해야하는 일


요즘 계속 일에 집중을 잘 하지 못하고 있다. 거의 장점이 없는 인간이지만, 그래도 자신있게 장점이라 내세울 수 있는게 그나마 집중력이었다. 문서 작업을 하거나, 회의에 참여하거나, 강의를 할 때도 내 장점은 집중하는 것이다. 회의에 집중하니, 남들이 잘 보지 못하는 것들을 찾거나, 흐름을 잘 짚는 편이다. 나중에 회의를 복기하면서 회의록을 작성할 때에도 집중했던 만큼 거의 대부분의 발언들과 핵심 내용을 떠올릴 수 있다. 강의를 할 때도 듣는 이들이 내가 집중하는 만큼 열심히 들어주는 편이다. 한번 내 강의를 들었던 이들이 다시 나를 찾는 이유도 집중력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데 일에 집중을 못하겠다. 정말 너무너무너무너무 하기가 싫다! 벌써 며칠째 서너가지 일을 미루고 미루고 또 미루고 있다. 어제 만난 친한 후배가 곧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했다. 사실 그가 그만둘 생각이라는 말을 벌써 몇 달전부터 해왔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사장이 도무지 같이 일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에 나도 동의했다. 그가 회사를 옮기는 걸 벌써 여러번 보았다. 능력이 있으니 그리 힘들지 않게 새 직장을 구할 수 있으리라. 다만 오래 일할 수 있는 괜찮은 직장을 만나지 못하고 자꾸 그만두게 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런 직장이 과연 있나? 간혹 있더라도 얼마나 될까? 거의 없을 것 같다. 

그가 이제는 말할 때가 되었다고 퇴사를 선언하는 걸 보면서 부러웠다. 나도 하루에도 몇 번씩 이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다음 무슨 일을 할 것인가에서부터 바로 생각이 막힌다. 아이들 양육비와 내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는 무조건 직업이 필요하다. 아이들이 자랄 때까지 앞으로 최소 10년 정도는 돈 버는 삶을 지속해야 한다. 그 이후에는 내 생활비 정도는 일터로 출근하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마련할 수 있을 듯 하다. 적게 벌고 적게 쓰는 삶을 살면 되니까. 지금 이 일터도 현재 조건에서는 나쁘지 않다. 처음에는 활동비가 터무니없이 적었지만, 최저임금 상승과 함께 올라서 이 정도 받으면 괜찮다 싶다. 주위 여러 사람들에게 인정도 받고 있고, 당장은 내가 그만두고 싶어도 나를 대신할만큼 이 일에 익숙한 사람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하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멍하니 책상 앞에 앉아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뭘까 생각을 해본다. 그러다 익숙한 일과 잘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과 해야하는 일에 대해 생각이 이어진다. 선택을 해야 한다면 나는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살고 싶지만, 현실은 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 다음 선택은? 잘하는 일이어야 할까? 아니면 익숙한 일? 내가 잘하는 일은 과연 뭘까? 익숙한 일은? 막상 냉정하게 따져보면 잘 모르겠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번호 붙여 말하기


회의에서 발언할 때나 강의할 때 번호를 붙여가며 말하는 편이다. 이건 총 3가지인데, 첫째는 어쩌구 저쩌구, 둘째는 어쩌구 저쩌구 이런 식이다. 이렇게 말하면 좋은 점이 3가지 있다.

 

우선 듣는이가 내가 말하려는 핵심에 좀 더 집중할 수 있다. 번호 다음에 오는 핵심 내용을 잘 듣고, 이어지는 설명은 꼭 듣지 않아도 된다. 둘째로 내 말이 언제 끝날지 예상할 수 있다. 언제 끝날지 모를 말을 듣는 것보다 여기까지 말하면 끝이겠구나 생각하면서 듣는 일이 훨씬 쉽고 잘 들린다. 처음부터 몇 가지를 말할지 정해줬기 때문에 듣는 이들도 예상하고 들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잠시 흐름을 놓쳤다가도 숫자를 들으면 다시 듣기에 집중할 수도 있다. 듣기는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상대방의 말에 무조건 계속 집중하기란 쉽지 않다. 흐름을 놓치기도 하는데, 다시 집중할 어떤 계기를 만들어주는 것이 좋은데, 번호를 붙여주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금요일은 무척 더운 날이었다. 저녁에 작은 아이를 만나 손을 잡고 걸으면서 아이에게 "오늘 무지 더웠지?" 하고 물었다. 아이의 답은 "어, 근데 아빠. 나는 별로 안 더웠어. 왜 그런지 알아? 이유가 2개 있어" 였다. 그리고 아이는 "첫째는 학교와 피아노 학원에서 에어컨을 틀어줘서야. 피아노 학원에서는 에어컨을 너무 빵빵하게 틀어서 오히려 추웠어." 라고 말한 후 잠시 기다렸다가 "두번째 이유는 학교와 피아노 학원 그리고 학원에서 집까지의 거리가 가까워서 더위를 느낄만큼 밖에 있지 않아서야." 라고 말했다.


아이의 말을 들으며 2가지를 떠올렸다. 우선 아이도 나처럼 번호를 붙여서 말하는 구나. 평소에 많은 회의에 참여하면서 안타까운 점은 자신의 의견을 잘 전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고, 그들이 말을 하다가 자꾸 엉뚱한 주제로 빠지거나, 배경 설명만 하다가 정작 해야할 말은 잊어버리고 마는 등의 경우를 의외로 자주 본다. 그럴 때 좋은 방법 중 하나가 번호 붙여 말하기라고 생각한다. 아이는 벌써 저런 방법을 터득해서 구사하는 구나 싶었다. 두번째는 아이는 저렇게 말하는 법을 어디서 배웠을까? 분명 학교에서 가르쳤을 것 같지는 않은데. 아니 누군가에게 배웠다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익숙해진 것이 아닐까. 아이에게 영향을 미친 그 누군가가 어쩌면 나일수도 있고, 애들 엄마일 수도 있겠다.


암튼 조리있게 말을 잘 하는 아이를 보면서 대견하고 기특하다 여겼다. 물론 내 딸이니까 그런 별 것 아닌 일이 대단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도 충분히 잘 하지만, 나중에 아이가 자신의 의견을 잘 전달할 줄 아는 사람이 되리라 확신할 수 있겠다.


기후 위기, 멸종 저항, 폭염, 그레타 툰베리


해마다 기후변화로 인한 이상기후 현상이 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예전에 강의자료를 만들기 위해 해외 문서들을 중심으로 찾아보니 정말 2000년대 초반부터 단 한 해도 빠지지 않고 폭염과 한파, 가뭄과 홍수 등의 이상 기후가 일어나고 있었다. 작년의 폭염에 이어 우리나라도 지금 다시 폭염이 기승이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렵에는 45도가 넘는 폭염이 이어지고 있고, 인도는 이미 50도가 넘었다고 한다. 알래스카에서는 폭염으로 빙하가 녹아 홍수가 일어났고, 산불이 일어났다. 멕시코 과달라하라 시에서는 한 여름에 우박이 1.5미터나 쌓일 정도로 내렸다.


영국에서는 이러한 현 상황을 "기후 위기"로 정의하고, 인류 멸종에 대한 저항을 시작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생겼다. 그레타 툰베리라는 스웨덴의 청소년은 등교를 거부하고 각국 정부가 이 위기를 극복할 방안을 만들어야 한다며 기후 환경 소송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청소년들이 그레타의 운동에 발맞춰 청소년 기후 환경 소송을 준비중이다.


작년 늦여름 북극의 영구동토층에서 관측이래 한 번도 녹지 않았던 '최후의 빙하'가 녹기 시작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학자들은 이미 기후변화의 속도가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빨라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국면에 도달했다는 진단을 내리기도 했다. 


파국이 뻔히 눈에 보이는데도, 우리나라 정부는 여름철 전기 요금을 내려주겠다는 황당한 발표를 했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표를 모으기 위한 정책이라는 게 너무나도 눈에 뻔히 보인다. 세계적으로 우리나라만큼 전기요금이 저렴한 나라는 없다. 한국전력 경영 연구원이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전기요금은 저렴하기도 하지만, 원료비 외에 송전과 배전 비용이 거의 책정되어 있지 않다. 상식적이지 않고 불합리하게 저렴한 가격이다. 


기후 위기를 조금이라도 늦추려면 다양하고 체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언제까지 핵발전과 화력발전에 기대어 에너지를 펑펑 쓸 수는 없다. 표를 모으기 위해 여름에 한시적으로 요금을 낮춰주는 정책 따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온실가스를 줄이고 미세먼지를 줄이기 위한 정책이 필요하다.


정책 결정론자들은 이제는 온대기후라고 말할 수 없는, 아열대 기후로 바뀌어가고 있는 현실을 못 느끼나? 인류 문명이 태풍 앞의 작은 불씨처럼 위태로운 현실이 안 보이나? 만약 청소년들이 정부를 상대로 기후 소송을 걸면 우리나라 정부는 무조건 유죄를 받게 될 것이다. 제발 정신 좀 차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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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9 0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19 16: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9-07-09 0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감은빛 님의 강의를 들어본 적이 없지만, 감은빛 님과 완전한 대척점에서 강의를 하시는 분이 정희진 선생님이겠구나 생각했어요. 저는 이 분 강의 듣는 거 진짜 엄청 좋아하는데, 이 분의 경우 얘기하다가 엄청 삼천포로 빠지시거든요. 의식의 흐름대로 얘기하셔서 너무 제 스타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다가 물론 다시 요점으로 돌아오긴 하세요. 그런데 저는 그 의식의 흐름대로 쭉쭉 나아가는 게 너무 좋더라고요! 거기에서도 뭔가가 막 쏟아져 나와서. 물론 워낙 많은 걸 알고 계신 분이셔서 그렇겠지만요.

제가 정희진 쌤 좋아하는 건 아마 저도 그런 타입이기 때문인것 같아요.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쓰고 의식의 흐름대로 말을 해서, 감은빛 님이 말씀하신 번호붙이기... 는 제 인생에 없네요. 어쩔 ㅋㅋㅋㅋㅋㅋㅋㅋ그러고보니 여태 한 번도 글을 쓸 때도 그렇고 말을 할 때도 첫째는, 둘째는.. 한 적이 없는 것 같아요. 하하하하하하ㅏㅎ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어쩐지 웃김)

감은빛 2019-07-19 16:15   좋아요 0 | URL
저도 정희진 쌤 강의를 무척 좋아해요.
그리고 다락방님 말씀에 완전 동의해서 고개를 끄덕이며 댓글을 읽었습니다.
다락방님이 말씀하셨듯이 내용이 산으로 강으로 바다로 막 가다가,
어느 순간 딱 원래 흐름으로 돌아오더라구요.
이것도 다 엄청난 내공이 아닌가 싶습니다.

번호 붙여 글을 쓰거나 말하는 것이 꼭 좋다는 건 아닌데,
최소한 흐름을 놓치지 않게 하는 하나의 장치라고 생각합니다.

학교 강의에서는 짧은 시간안에 한정된 내용을 다 설명해야 해서,
시간에 쫓기다보니 자주 그러지만,
시민들에게 강의할 때는 늘 그러지는 않습니다.
조금 돌아가더라도 하고 싶은 이야기를 편하게 할 때도 있어요.

말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