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뽕과 소주의 힘
김종광 지음 / 이가서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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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광의 작품이라고는 「낙서문학사 창시자편」밖에 읽지 못했는데, 사실 그 작품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형식이 신선했었다. 가볍게 술술 읽히면서도 묵직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가장 21세기다운 문학, 곧 낙서문학을 창시한 유사풀이란 인물들 둘러싼 인물들의 인터뷰로 채워진 작품이다. 문학권력에 대한 야유와 조롱이 한껏 버무려진 그런 소설이었다. 그 작품은 읽으면서 고개를 주억거리고 무릎을 치게 만드는 작품이 아니라, 읽고나서 공감할 수 있게 만들게 했던 것이다.

짬뽕과 소주의 힘? 짬뽕의 힘이라는 건지, 소주의 힘이라는 건지, 아니면 짬뽕과 소주의 합해진 힘이라는 건지 불분명했다. 여하튼 짬뽕과 소주, 둘 다 먹고 나면 속이 뜨끈해진다. 열기가 확확 올라온다. 얼굴이 불그죽죽 달아오른다. 그리고 개운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석연찮게 찝찝한 기분이 든다. 그래서 인가? 나는 짬뽕보다는 짜장면(자장면이라고는 죽어도 안 나온다.)을, 소주보다는 막걸리나 맥주를 찾게 된다. 짜장면이야 원체 맛 나는 거니 그렇고, 가난한 자취생이어서 밤을 새고 마실 때는 안주도 마땅찮은 소주로 한다. 별 쓸데없는 말을 다 하는---.

맛은 다 날아가 버리고 오로지 매운 기운만 남게 되는 것이 짬뽕과 소주인 듯싶다. 그래서 소주와 짬뽕의 힘은 가벼움의 힘이란 말의 다름이 아닐 터이다. 다 날아가 그 실체는 안 보이는데, 엄연히 화끈거리는 기운으로 남아서 힘을 발휘해 낸다. 대체 그것들의 힘은?

이 작품집에 나와 있는 인물들은 우리 시대의 전형적인 인물상이이라고 말하긴 어려울 듯 하다. 그러면서도 매우 다양하다. 공통되게도 어쩌면 이리도 지질이 궁상을 떨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은지---. 별로 웃기지도 않을 인물들이 웃기지도 않은 상황을 연출하며 웃게 만든다. 이내 허허로워져버렸다. 무엇보다도 삶에 대한 열정을 이야기 하고 꿈을 말할 것 같은 젊은 축에 낀 인물들도 역시 삶에 찌들어 우는 소리를 해대니 적잖이 마음이 안 좋았다. 또한 느닷없고 갑작스럽고 대책 없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나를 황당하고 어이없고 낯설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작가의 말장난 같은 이야기에 가만히 빠져들 만한 몰입이나 집중은 되지 않았으니 왜 그랬을까.

너무 너무 가벼운데, 그 가벼움의 실체가 뭘까? 대체 김종광은 뭘 말하고 싶어서 이런 비슷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 하는 질문을 연달아 해대면서도 답을 찾지 못했다. 다만, 지금 내가 느끼는 거 하나는, 작가가 '작가의 눈'으로 좀더 현실에 천착하길 바란다는 거다. 현실에 비껴나 있는, 그러면서도 명백히 존재하는 그들의 삶을 발현해 보여주길. 입담은 충분히 있으니, 무게가 느껴지는 그런 작품을 썼으면 좋겠다는 거다. 희희낙락 읽어내려가도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는, 가슴이 저릿저릿해지는 아픔이나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소설을 말이다. 그러면 그가 추구해마지 않는 그 휘발성의 힘, 가벼움의 실체도 여실히 드러날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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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소설 - 한국소설문학대계 1
이인직 외 지음 / 동아출판사(두산) / 199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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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의 선진국들은 그들 내부의 고유한 문화를 바탕으로 한, 자생적인 힘으로 근대를 일궈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근대를 일궈내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거나, 혹은 그 과정에 있어서 일제의 침략이란 강제성에 의한 근대를 경험해야만 했다. 그렇기에 식민지는 마냥 지워버리고 싶은 상처이거나, 도려내버리고 싶을 만치의 환부였던 것이다. 식민치하 이후, 함석헌 선생의 말마따나 해방은 도둑처럼 찾아왔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는 해방의 주인공에 아닌 것이다.

그렇더라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근대를 살펴보는 일은 실로 중요하다. 현재는 근대의 연장선상에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현실의 전근대성과 추구해야할 근대성이 뒤섞여 있던 혼란스러운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은 마찬가지의 혼란스런 현실에서 살아가고 있다. 인류가, 문명이란 이름으로 저질러온 추악한 해악들을 반성하고 회의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여전히 유효한 역사라는 이름으로써. 또한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양상이 모여있는 시대가 근대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어떤 가치가 전도되고 착오된 된 것인지 밝혀내는 것이 중요하다. 근대는 우리의 문제점과 가능성이 담겨져있는 시대였으므로.

마찬가지로, 근대 지식인들의 내면풍경을 파악하는 일은, 곧 근대를 되짚어보는 일이기에 의미 있다고 할 수 있다. 지식인으로서 전통성과 근대성이 혼재한 시대를 민감하게 반응하며 대응해온 문인들은 많은 것을 일깨워줄 것이기에 그러하다. 이 시기를 돌이켜보는 것은 현재 우리가 사는 시대를 확인하는 행위이며, 역사를 재해석하는 작업인 셈이다.

근대, 지식인들의 현실인식과 역사의식, 대응태도 등의 내면풍경은 어떠했을까? 근대에 글쓰기를 한 주체들, 그러니까 근대문학을 논하는 데 있어서, 결코 빠뜨릴 수 없는 대표적인 문인인 이인직, 이해조, 안국선, 신채호의 작품들이 이 책에 있다. 신소설이 유치하다고 하지만, 나름대로 재미도 있다. 현대문학과 비교해가면서 읽는 것도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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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전문학전집 12:춘향전 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원 한국고전문학전집 12
설성경 / 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원 / 199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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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벤야민은 비평이란 말과 해설이란 말을 구분했다. ‘비평은 어떤 예술작품의 진리내용을 찾는 것이고, 해설은 그것의 사실내용을 찾는 것이다.’라고. 대상 작품의 표면에 드러난 어구 등을 풀이해서 사실적인 정황을 말하는 것이 해설이다. 비평이라 함은 그 속에 은연중에 숨겨져 있는 것을 밝혀 진리를 구현해내는 작업인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살펴보면, 한 작품 에는 표면적인 사실과, 그 안에 은폐되어 있는 진리가 있게 마련이다.

「춘향전」은 조선후기의 지배계층의 억압과 수탈에 대해 말한다. 당시의 법제적으로 보면 변사또가 기생 월매의 딸인 춘향에게 수청을 들라고 하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 그렇지만 법을 떠나, 도덕적으로 인간적으로 살펴보면 그것은 추악한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법적으로는 기생이지만 심정적으로는 충분히 어느 여염집 아씨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광한루에서 춘향에게 반한 이몽룡에게 통인은 춘향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제 어미는 기생이오나 춘향이는 도도하며 기생구실 마다하고 백화초엽에 글자도 생각하고, 여공 재질이며 문장을 겸하여 여염집 처자와 다름이 없나이다.”라고. 실지로 변사또만 인정하려하지 않지, 남원 고을의 민중들은 춘향이를 이몽룡의 아내로서 이미 인정하고 있다. 아래 인용문은 변사또가 기생점고를 할 때, 춘향이의 이름은 왜 없냐는 말에 수노가 대답하는 내용이다.

근본 기생의 딸이옵고 덕성과 미색이 장한 고로 권문 세족 양반네의 일등 재주꾼 한량들과 내려오신 수령마다 구경코자 간청하되, 춘향모녀 불청키로 양반상하물론하고 한 가족같은 소인들도 십년 한 번 대면하되 언어수작 없삽더니, 하늘이 정하신 연분인지 구관사또 자제 이도련님과 백년기약 맺사옵고, 도련님 가실 때에 장가든 후에 데려가며 당부하고 춘향이도 그리 알고 수절하고 있사옵니다. (「열녀춘향수절가」, 『춘향전』, 129쪽)

모두들 인정하는 춘향과 이몽룡의 관계에 변사또는 우월한 신분적 지위를 내세우며 춘향을 탐하는 것은, 전혀 인간적이지 않다. 때문에 춘향이는 이몽룡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춘향이가 모진 고초를 겪으면서도 끝내 정절을 지켜내는 것이다. 조선사회에서의 유교적인 덕목 ‘열녀불경이부절’을 받드는 것으로 읽힌다. 그래서 춘향이의 모습을 통해 정절의식을 본받으라고 말한다.

하지만, 내용을 찬찬히 살펴들어 가보면, 단순히 정절의식을 강조하는 데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봉건 지배층인 변사또의 수청에 저항하는 것은, 이몽룡의 구제로 인한 신분 상승 의지를 은연중 내비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을 토대로, 신분을 뛰어넘으려는 강렬한 욕구를 엿볼 수 있다. 봉건지배계층의 강압적인 횡포에는 맞서면서 정절을 근거로, 신분 해방을 주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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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문학동네 시집 58
강연호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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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가 의미를 만든다. 시를 포함한 모든 글쓰기는 차이의 기록이다. 하지만 차이란 말 그대로 차이일 뿐 정본이 아니다. 탁자 위의 물방울이 마른 흔적을 통해, 여기 물방울이 있었다고 기록할 수는 있겠지만, 물방울을 돌이키지는 못한다. 글쓰기는 말하자면 돌이킬 수 없는 물방울 같은, 좌절된 열망의 흔적이다. 나는 그 흔적의 글쓰기를 통해, 지금은 없는, 그대를 기록한다. 아니 그대의 흔적을 기록한다. 그 차이가 의미를 만든다.'로 시작하는 서문을 읽고서 깜짝 놀랐다.

얼마 전에 나는 늘, 한 작품을 볼 때 남들과 같이밖에 볼줄 모르겠다고 선생님께 칭얼댔는데, 그 선생님께선 이와 비슷한 말을 해주셨다.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 글의 생명이라고. 그리고 덧붙이셨다. '하지만 차이란 기상천외의 어떤 것도, 그렇다고 신기한 어떤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다. 남은 스치고 지난 것을 집요하게 파고가는 것, 그것이 결국은 사소하지만 큰 차이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 한다. 뭔가 이렇게 이야기하고 말기엔 좀더 중요한 의미가 담긴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 혹은 회의, 혹은 관심이 인식의 출발점이다.'라고. 얼마만큼은 자신감이 생겼다. 집요하게 파고드는 거, 의구심 갖는 거, 회의해 보는 거, 관심 갖는 거, 이런 것은 자신있기에.

그리고 시인 강연호는 그 차이를 만들줄 알더라. 그리고 그가 쓴 시를 보니 그 차이를 만드는 그간의 과정이 선명하게 눈에 보였다. 삶과 사람과 사물을 응시하는 눈의 치열함과 간절함과 애절함 따위들이. 결코 쉽게 쓰여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시들이 빨리 읽지 못하게 한다. 한 구절 한 구절 되내이며 읽어본다. 그가 바라보는 대상은 명징하기보다 차고, 그래서 시리다. 딱히 어느 한구절 인용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잘못 짚어낼까, 그래서 시인에게 누가될까 저어해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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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 문학.판 시 1
최승호 지음 / 열림원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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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을 읽고 가장 먼저 드는 감정은 바로 아뜩함이다. 시인의 눈에 비친 사물은 이제야 제 빛을 발산하고, 또 다른 의미로 해석되어 지나니---. '이런 글을, 글을 쓰는구나. 쓸 수 있구나. 어면히 나와 동시대인인데---.'하고 혼잣말로 내뱉고 나면 한동안 망연해진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알았다. 내가 글을 쓰고 싶어한다는 것을. 어쭙잖은 글 말고 글다운 글을. 그래서인지 가슴을 찡하게 울려대는 글을 보면 내가 가지지 못한 재능을 가진 작가에게 경외감을 느낌과 동시에 말도 안되는 질투심을 느낀다. 내 것이 아님이 분명한데 자꾸만 욕심을 내서 스스로 같잖은 인간이 되게 만들어 버리는 질투심.

최승호의 시는 [전집]밖에 알지 못했다. '놀라워라 조개는 오직 조개껍질만을 남겼다'([전집] 전문) 이 시를 정효구의 <시읽는 기쁨>이란 책에서 본 듯. 생각했다. 이 사람, 멋질 것 같아. 꼭 시를 찾아 읽어봐야지, 하고. 그리고 집어든 시집이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였다. (작가가 글을 쓴 순서대로 읽지 않은 게 내 독서 버릇 중의 하나이다. 닥치는 대로 읽는 편이라.)

'뙤약볕 내리쬐는 부도밭에서/금갈색 도마뱀을 만난다/나를 무슨 괴물체처럼/이상한 눈으로 갸웃거리며 쳐다보는/한 마리,/굽어보는 나도 한마리,/([도마뱀] 중)은 장경린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서 바퀴벌레의 눈으로는 화자는 단 '한 폭의 인물화'라고 말하는 부분과 자연스게 겹쳐졌다. 이렇듯 아무 것도 아닌 나이다. 다만 우리가 인정하지 않았을 뿐. 그리고 '적멸은 지금 적멸궁뿐만 아니라/멸치 대가리와 말라빠진 똥 속에도 있을 것이다'([멸치와 고행자] 중)에서 처럼 아무 것도 아닌 것만은 아니다. 부정을 위한 부정이 아니라 긍정을 전제로 부정임이 내비춰진다. 덧붙이지면 아래와 같은 예로써.

현재는 오물덩어리의 세상이다. '가난한 피는 여전히 가난하고 궁핍에서 죽음에 이르는 길에 너절하게 불어나는 물건들이 있다는 것', '위대한 수줍음'은 사라지고 '뻔뻔스러움'이 '비닐과 가래침과 광고들'러 넘쳐난다. 도처에. 이러한 세상에 둔하고 어리석게 살고 싶은 꿈은 바로 '눈송이들로 우물을 메우는 즐거움'을 맛보는 바보성인이 되고싶은 시인의 꿈이다. 우라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아주지 못하고 빗보게 된다. 무지의 소산이 아니라 어쩌면 너무 손익계산을 어서 하고 약삭빨라야만 인정 받고 살아가지는 세상이라 그런 듯하다.

그렇지만 시인은 말한다. '나는 구름 숭배자는 아니다/내 가계엔 구름 숭배자가 없다/하지만 할아버지가 구름 아래 방황하다가 돌아가셨고/할머니는 구름들의 변화 속에 뭉개졌으며 어머니는/먹구름을 이고 힘들게 걷는 동안 늙으셨다//흰 머리칼과 들국화 위에 내리던 서리/지난해보다 더 이마를 찌는 여름이 오고/뭉쳐졌다 흩어지는 업의 덩치와 무게르르 알지 못한 채/나는 뭉게 걸음을 보고 걸어간다//보석으로 결정도지 않는 고통의 어느 변두리에서/올해도 이슬 머금은 꽃들이 피었다 진다/매미 울음이 뚝 그치면/다시 구름 높은 가을이 오리라'라고. 긍정을 전제로한 부정, 또렷이 드러나지 않는가. 시인이 왜 시인일 수밖에 없는지 아렴풋 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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