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들의 풍경』을 시작하며

   말들은 저마다 자기의 풍경을 갖고 있다. 그 풍경들은 비슷해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 다르다. 그 다음은 이중적이다. 하나의 풍경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고, 풍경들의 모음도 그러하다. 볼 때마다 다른 풍경들은 그것들이 움직이지 않고 붙박이로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야말로 말들이 가지고 있는 은총이다. 말들의 풍경이 자주 변하는 것은 그 풍경 자체에 사람들이 부여한 의미가 중첩되어 있기 때문이며, 동시에 풍경을 보는 사람의 마음이 자꾸 변화하기 때문이다. 풍경은 그것 자체가 마치 기름 물감의 계산적인 덧칠처럼 사람들이 부여하는 의미로 덧칠되며, 그 풍경을 바라다보는 사람의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마치 빛의 움직임에 따라 물의 색깔이 변하듯 변한다. 풍경은 수직적인 의미의 중첩이며, 수평적인 의미의 이동이다. 그 중첩과 이동을 낳는 것은 사람의 욕망이다. 욕망은 언제나 왜곡되게 자신을 표현하며, 그 왜곡을 낳는 것은 억압된 충동이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본능적인 충동이 모든 변화를 낳는다. 본질은 없고, 있는 것은 변화하는 본질이다. 아니 변화가 본질이다. 팽창하고 수축하는 우주가 바로 우주의 본질이듯이. 내 밖의 풍경은 내 충동의 굴절된 모습이며, 그런 의미에서 내 안의 풍경이다. 밖의 풍경은 안의 풍경 없이는 있을 수 없다. 안과 밖은 하나이다.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만물을 낳는다는 말의 참뜻은 바로 그것이다. 그 하나는 어디에 있는가? 그 하나는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질문을 낳는 자리에 있다. 그 자리는 어디에 있는가? 그 자리는 아무 것에도 없다. 있는 것은 없음뿐이다. 그 없음은 있는 없음이다. 그 있는 없음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은 욕망, 아니 충동뿐이다. 욕망은 교활하게 자신을 숨긴다. 욕망은 개인의 탈을 쓰고 나타나, 자기의 흉포성을 개인적 외상으로 바꿔치기한다. 말들의 풍경은 그런 욕망의 노회한 전략의 소산이다. 그것을 제대로 읽으려면, 우리는 거꾸로 들어가야 한다. 개인적 외상을 따지고, 거기에서 개인의 특징을 찾아, 그 개인성을 만든 노회한 욕망을 밝혀내야 한다. 그 욕망은 물론 말들의 풍경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들의 물질성 안에 있다. 아니 말들의 물질성 자체가 바로 욕망이다. 흔적은 남아 있을 것이다. 그 흔적마저 없앤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말들의 검은 구멍은 없다. 아니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은 없다. 있는 것은 흔적들이다. 그 흔적들이 욕망이며, 충동이다. 그 흔적들 때문에 나는 있으며, 나는 없다. 나는 없는 있음이며, 있는 없음이다. 김지하의 움직이는 무야말로 바로 그것의 다른 말이다. 나는 나이기 때문에 너와 달라여 하고, 나는 내가 아니기 때문에 너와 같아야 한다. 나는 너와 같이 싸우고 사랑하지만 네가 아니고, 너는 나와 같이 싸우고 사랑하지만 내가 아니다. 너와 나는, 무서운 일지만, 흔적들이다. 욕망만이 웃는다. 불쌍한 개인성이며, 너는 네가 너를 강력하게 주장할 때, 네가 아니다. 

                                                                               1989년

                                                                                김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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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에는 강의가 없다. 전공만 줄기차게 듣는 지라 그렇다. 금요일부터 토요일, 그리고 일요일까지 황금 연휴인 거다. 그런데 오늘 보강이 있어서 어색하게 학교에 나갔다. 1,2교시라 졸면서 수업을 겨우 들었다. 수업 마치고 과사무실에 조교 선생님께 갔다. 실은 복사할 게 있어서 간만에 조교선생님도 보고 여하튼 겸사겸사 간 거였다. 친구가 복사를 대신 해준다길래, 그 녀석에게 맡기고서, 난 선생님과 한참 이번 선거 얘기만 했다. 복사할 분량이 꽤 있어서 한참 걸렸다.  

곧 학과 친구 녀석이 들어왔다. 1학년 때는 인사만 하는 정도였는데, 지금은 부쩍 친해진 느낌이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거는 아니었다. 그 녀석이 판소리 문학론, 그 강의 자료를 애들에게 첨부파일로 보내주면서, 간단하게 애들에게 메일을 썼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앞으로 먹고 살거 걱정한다는 얘기였다. 가족들의 냉대를 넘어선 무관심에도 꿋꿋하리라는 서글픈 다짐을 하기도 했었다. 특정한 누군가가 아닌, 두리뭉실하게 같이 수업 듣는 사람들에게 보낸 거지만, 내 마음을 움직이는 뭔가가 있었다. 그런 고민을 지나온, 어쩌면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하는 나여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기에. 이런 얘기만 나오면 늘 변함없이 하는 말이 있다. 빛나는 시기가 지금이라는 것, 힘들게 생활한 만큼 분명 얻는 게 있을 거라는 것 등 등. 뻔한 얘기지만 이런 말들을 들었을 때 날 가슴 뛰게 만들 만한 감격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얘기를 쉴새 없이 메일에 적었던 거다. 그리고 뜻하지 않게 그 녀석이 답신을 보내왔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의 사소하지만 의미있는 메일질이 시작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우스운 건, 글로는 별 얘기를 다 하는데, 따로 만나서 밥도 먹고 얘기하는 일이 거의 없다는 거다. 예전처럼 얼굴을 봐도 식상한 인사말과 함께 몇마디 붙일 뿐이다.

어떻든 그 녀석이 체했단다. 어제 저녁에 먹은 만두가 소화가 안 된 것 같다고 했다. 나는 기꺼이 손가락을 따주겠다고 했다. 본 건 있어서 쉬울 것 같았다. 실은 한번도 남의 손에 바늘을 댄 적이 없다. 하다못해 내가 내 손가락을 찔러 본 적도 없었다. 그래도 여러번 해봤다고 말하면서 녀석의 손을 움켜 쥐었다. 조교 선생님과 옆에 있던 근로학생의 말을 들어가면서 바늘로 콕, 찔렀다. 맞다. 나 긴장 많이 했었다. 녀석은 겁이 많은지, 아니면 나를 못 미더워한 건지 벌벌 떨고 있었더랬다. 힘껏 찔렀는데 피가 안 나왔다. 녀석은 놀랐는지 얼굴이 시뻘개졌다. 다시 한번 시도하려는데, 기겁을 한 녀석이 됐다고 단호히 말했다. 슬슬 오기가 작동한 나는 손을 잡아 빼듯이 해서 다른 손 엄지 손가락을 또 찔렀다. 그 순간에는 일말의 미안함같은 건 없었다. 검은 피가 나와야하는데 안 나와서 살짝 흥분했었나보다. 당연한 것, 상식적인 경우를 벗어나는 데 사람들은 공포에 가까운 불안함을 느낀다고 한 말이 딱 나에게 적용되는 일이었다. 

그렇게해서 피를 봤다. 녀석의 손가락을 꾹꾹 눌러서 짜내니까 몽글 한 방울 맺혔다. 검붉은 피는 아니었다. 그냥 붉기만 한 피였다. 어떻든 그때의 쾌감이란. 녀석의 피를 보기 전에는 단순히 호기심으로 해보면서 남의 살을 찌르는 데 대한 무서움과 녀석이 몸이 안 좋다는 말에 걱정하던 마음이 말끔히 사라졌었다. 피를 본 나는 기세당당하게 친구가 해준 복사물을 들고 나왔다. 그때의 성취감(?)이란 이루말할 수 없다. 밥을 먹고 오후에 도서관을 얼쩡 거리는데 녀석을 봤다. "이제 속이 괜찮지?"하고 물었는데 녀석은 여전히 속이 안 좋다고 했다. 분명히 피를 봤는데 왜 그러지? 나는 차라리 소화제를 얻어다 주는 게 더 현명했던 건가? 지금 녀석한테 문자질로 이제 좀 어떤지 물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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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창작 수첩

   예를 들어서, 이런 방법이 있다. 어리석을 정도로 고집이 세고 자기 중심적이고 타협이나 화해를 싫어하고 자신과 가까운 사람에게 특히 냉정하고 자신은 아프거나 빚을 지거나 남의 도움을 빌려야 할 정도로 곤란에 처하는 일은 영영 이제 없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으며 종교나 도덕이나 사랑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것에 관심이 희박하고 앞으로 나가는 것에 대한 욕망이 강한 사람. 생물학적으로 성별은 female이고 나이는 삼십삼 세. 독신. 건강상태 양호. 중산층 출신이나 노동 의지와 독립심이 특이할 정도로 상당히 강하다. 어떤 점에서는 과격하기조차 하다. 이런 인물을 설정한다. 이 설정은 임의이고 독립적인 것이므로 동시대의 한국 여성을 대표하는 성격이 있다거나 아니면 그 반대이거나 옹호해야 할 입장에 있다거나 아니면 그 반대이거나 하는 문제와는 물론 직접 관련이 없다. 그렇게 시작한다.

 

   작가의 생각

  비록 나 자신 결혼이나 가족제도나 남녀관계에 대해 어떤 특정한 견해를 갖고 있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의 삶에는 관심이 없고, 참견할 생각도 없다. 나는 구둘이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것을 갖고 그들은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것을 갖는다. 전적으로는 아닐지라도 그것은 사생활의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저마다 이런 '다른 점'들을 가지고 사생활을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 '다른 점'을 가지고 있는 유경이 다수를 대변하는지 아니면 특이한 소수인지 나는아직 그것을 판단하지 못한다. 나는 사람들과 사생활에 대해서 개인적인 대화를 깊이 나누어본 적이 없고 또한 신문이나 집지나 방송 매체들에서 등장ㅇ하는 사람들의 삶이 어느 부분에서는 사실(혹 존재한다면)과 많이 다르며 가치관과 견해의 문제에서는 상당히 미묘하거나 모호해질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어느 경우에는 왜곡되고 정반대의 의미로 해석되기도 하는 것이 보통이다.

 

   BGM

   대개 음악을 틀어놓고 작업을 한다. 오디오와 텔레비전을 동시에 틀어놓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 텔레비전의 소리를 없앤다. 단, 공중파 방송은 보지 않는다. 화면을 보기 위해서나 음악을 듣기 위해서는 아니다. 아무것도 없다면 어쩐지 불안하다. 내 경험에 의하면 클래식 음악은 야외에 나갔을 때 차 안에서 들으면 좋으며 마리아 칼라스는 아침에 들었고 작업할 때는 힙합이 최고였고 보통 운전할 때는 헤비매탈의 풀 볼륨,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앉아 있을 때는 (대부분의 경우가 그랬지만) Estatic Fear같은 것을 들었고 생각이 앞으로 나가지 않을 때는 무한급수와 확률 분포 같은 문제를 풀었다. 수학 문제를 풀고 있으면 인생의 추상저인 문제들을 논리적으로 해석하게 된다. 생각이란 무엇인가를 하는 것을 비로소 알개 되는 것이다. 알파벳 a로 시작하는 백 개의 단어를 써본다든지 주기율표를 완벽하게 암기한다든지 하는 것보다 나에게 더 좋은 방법이었다. 비가 올 때는 동물원에 갔다. 밤에는 어쩔 수 없이 뉴에이지를 들었다. 전화 통화를 하면서 작업하는 경우도 많았다.

 

2000년 12월

배수아의 초기작부터 꾸준히 읽어오던 성실한 독자였던 친구는 이 책을 다 읽고 말했다. "배수아!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라고. 그 뒤에 뭐라 뭐라 한 말은 잘 생각나지 않지만, 이 말만은 또렷이 생각났다. 글쎄, 내가 읽은 배수아 작품은 이책이 첫 번째인데 그리 나쁜 인상을 받진 않았다. 다만, 여기 나오는 인물들이 간혹, 도무지 마음에 안 들었다는 것 뿐. 독신생활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렇더라도 서른 셋 먹은 독신 인물들의 행동, 생각 따위는 그다지 탐탁치 않았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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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도 무게가 있습니다
이철수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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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본다. 그린 이가 담고자한 의도나 주제를 벗어나더라도, 내 나름의 느낌을 믿는다. 가끔은 무작스럽고 얼토당토않은 결론으로 치우칠망정 그 느낌을 쉽게 버리진 못한다. 남들과 똑 같이 읽어내는 건 쉽기에,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느냐를 중요하게 생각하기에, 내가 받은 인상과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나의 그것을 설명하려면 나의 감성과 논리는 한없이 모자라고 미숙할 뿐이라서 문제는 문제인 셈.

판화가 이철수에게는 아저씨란 호칭이 너무도 잘 어울릴 듯하다. 이문재의 <내가 만난 시와 시인>를 읽으면서 충북 청주에서 창작 활동을 하고 있는 도종환 시인 얘기를 떠올렸다. 도종환이 이철수더러 칼잡이라고 부르는 격의 없는 터수라고 했고, 그를 욕심이 없고 순박한, 생각이 깊은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나온다.('30초 기억력'인지라 내 기억이 확실하진 않다.) 어찌됐든 도종환과 이철수가 그 지역에서 무슨무슨 장을 맡게 되었는데, 어느 날 느닷없이 이제 그 일을 못한다고 했단다. 이유는 마을 이장을 맡았기 때문이라고 해서.

그래서겠다. 이철수를 만나게 되면 복닥대는 작은 방에서 밤새 겉치레 없이 진솔한 얘기를 나눌 수 있을 것만 같다. 또 판화하면 떠오르는 단순함, 여백, 표현의 절제가 판화가의 이미지와 맞아떨어진다. 판화가 이철수의 사람살이를 통해, '열심히 살아야 할텐데--- 그게 힘드네요.'하는 그의 마음을 통해, 그의 작품을 더더욱 신뢰하게 하고 여기서 사색하게되는 힘을 얻게 된다. 가령 이런 마음들.

마땅히 내 것이란 못된 소유욕으로 꾸역꾸역 욕심을 늘려 가는 사람들, 딱 그 만큼의 반성과 사색이 모자란 사람들, 게으르고 빈둥대고 얻으려고만 하는 사람들, 천박한 이기심으로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들, 같잖은 분별에 싸우기에만 급급한 사람들, 관념에 쌓인 선험적인 판단을 가진 사람들에 낀다는 것을 그토록 싫어했지만 이미 그런 사람들 속에 포함되어있는 나를 돌아본다.

더디 가더라도 바르게 가려는 사람들, 바지런히 자기 몫을 행하는 사람들, '단순한 사람'들, 일상적인 삶에 의미를 찾는 '한없는 자유'를 가진 사람들, 소나무 껍질의 더뎅이같이 상처의 흔적을 가지고 현재를 이겨내는 진솔한 사람들, '우리가 사는 시절의 모순과 질곡'을 깨뜨리는 지극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 이 사람들 속에서 나를 끊임없이 저저이 살펴보고 고운 마음으로 온전한 삶을 살길,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럴 수 있길 진정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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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 예술가의 초상
에밀 졸라 지음, 권유현 옮김 / 일빛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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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졸라의 <작품>을 읽기 전, 그리고 작품을 읽으면서 나는 감정의 극과 극을 달리고 있었다. 문학을 학부생 때뿐만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여일하게 하고 싶은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그래도 될까, 하는 고민 탓이었다. 휴학을 하겠다는 친구들, 그리고 전과를 한다는 친구들을 보면서 어쩔 수 없이 든 생각이었다. 어떻든 쉽게 결론나지 않을 답을 내리는 과정인 이즈음, 나는 사소한 일에 의기소침해지거나 자신감을 잃어버리는 절망감과 우울함을, 혹은 역시나 사소한 일에 우쭐하며 자만심을 갖게 되는 그런 우스운 극과 극의 감정들을 경험하고 있었던 거다.

그야말로 예술가와 시대와의 불화가 내용인 이 <작품>의 끝장을 덮고서 나는 어떤 새로운 힘을 느낀 것도 같다. 작중인물 클로드의 자살이라는 비극적인 결말을 보고나서 나는 찹찹하기만 했던 건 아니다. 그의 예술에의 몰입과 몰두, 즉 그 열정을 보면서 돌연 심기일전하고자 하는 다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습관처럼 마음을 다잡을 때마다, 벌이는 책장 정리를 감행했다. 정리하고 해봤자 책들을 다시 새롭게 나열하는 수준이지만 말이다. 책꽂이 정리 중 책 사이에 끼여 있던, 언젠가 내가 썼던 A4 두 장 분량의 '자기소개서'를 발견했다. 거기에 이런 부분이 있었다.

'---내가 공부하는 문학이, 도대체 사회의 주변부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그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에 대해 참으로 고민이 많았습니다. 작품을 쓰는 이들이나 문학을 연구, 비평하는 이들이 지구상에 굶주려 있는 아이에게 당장 빵 한 조각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군가 문학은 지금 우리 주위에 굶주려 있는 것을 알려 줄 수 있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문학이 광속도의 이 시대에 소외되어있는 계층에 관심을 두고 있음을 생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온통 방황하며 혼란스러워할 때, 가슴에 울림을 주며 방향을 일깨워준 것도 바로 문학 작품임을 기억해 냈습니다. 문학은 인간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그야말로 총체적인 '인간학'이므로 말입니다. 게오르그 루카치의 말마따나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가 끝난 다음 시민사회의 구현과 함께 생겨난 것이 소설이므로, 소설이 바로 곧 인류사가 아니겠느냐는 말을 납득하고 난 후부터는 더욱이 소설이란 장르를 마음에 품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제야 문학을 공부하겠다는 제 자신이 자랑스럽고 대견하고 기특하게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소 장황했다. 그렇지만 이게 국문학을 전공하고자 하는 나의 꾸밈없는 진솔한 심정이 아니었나 싶다. 마냥 설쳐대는 건방이 될지언정, 혹은 멋모르고 나대는 치기가 될지언정 적어도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게 내게는 중요했다. 이 마음이 갈팡질팡하는 내게 어떤 확신과 열정을 안겨다 줄 것이기에 말이다.

<작품> 속 클로드가 살롱전에 출품한 작품이 비평가들과 대중에게 인정을 받지 못해 전전긍긍하거나 혹은 그들을 비난해도, 괴팍한 성미를 드러내고 가장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해도, 자신의 능력에 대해 회의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음에도 나에게는 너무나 매력적이다. 그를 알아주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그의 예술가 친구들처럼 울컥하며 분노했고, 한 아내의 남편으로 한 아이의 아버지로 충실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그를 감히 이해하고 용서했다. 나는 어쩌면 대세에 비껴나길 바라는 내가, 세상에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을 나의 모습을 시리게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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