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는 눈물을 흘린다
공지영 지음 / 창비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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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청준, 조세희,김원일 등과 더불어 공지영을 통해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맛보았고 이로써 문학을 공부하겠다고 마음 먹었기 때문에, 그녀의 작품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내려지든 간에 내게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그런데 무작정 좋아서 읽었던 그녀의 이번 그녀의 두 번째 작품집을 읽고서는 달라진 공지영 덕에 기분 좋게 책장을 덮을 수 있었다.

그녀의 이전 작품 <인간에 대한 예의>,<더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그리고, 그들의 아름다운 시작>,<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등어>,<착한 여자>등에서 보여지는 대단한 이상적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인물들을 더없는 긍정적인 인물로 그리며 그들을 애뜻하게 생각하며 그리워 했다면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에서는 그런 삶을 추구하는 데서 벗어난다.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 이전의 작품들에서는 결단코 그릇된 광기에 직접 맞서 겨루는 사람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쏟았기에 반면,그 주변부의 우리네의 소소한 삶을 일구어 나가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무관심했을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지 않게만 보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결코 이런 식의 삶의 해석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을 테다. 과연 무엇이 더 소중하냐고 경중을 따지자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주인공들을 통해 나타내려한 것마저 왜곡되어 보여 주는 데 문제가 있었던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들은 추악하고 저열한 상황을 벗어나려한 인물들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신념어린 이상에 열성을 다하는 이들을 바라보는 독자는 너무나 재미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는 이상적이기는 하나 현실적이지는 않다. 우리네의 삶마저 왜곡한다. 이들을 통해 짧은 재미를 줄 수는 있을 지는 몰라도 삶과 사람, 사회 등에 진지하고 깊이있는 해석을 내리는 힘들다.

이제서야 공지영이 달라졌다. 앞서 말했던 작품 성향에서 이상적인 삶에 대한 환멸과 비애를 느끼며, 주위에 있는 지금 현실을 바탕으로 한 인물 군상에 눈을 돌린다. 이는 모스크바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는 아픈 성찰을 통한 결과물이다. 아무 것도 없었기에, 아무 일도 변한 것이 없기에 환멸과 비애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며 이러한 감정들을 통해 자기 바로 옆에 있었지만 관심 두지 않았기에 지나쳤던 사람들과 상황들에 눈을 돌릴 수 있었을 테다.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의 단편 중에서 '고독', '길', '조용한 나날', '모스크바에는 아무도 없다'등의 작품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글을 시작하기 전에 말했다시피 나는 공지영을 좋아한다. 그리고 그녀의 작품도 좋아한다. 어떤 것이든 왜냐고 묻길 좋아하고그런만큼 내가 느낀 감정에 이유를 붙이는 걸 좋아하는 나지만 맹목적이라 할만큼 그녀와 그녀 작품을 좋아하는 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똑 부러지게, 분명하게 말하기 힘들다. 아마 이 일은 꽤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내가 풀어야 할 숙제일 테다. 내가 그녀의 이번 작품에 대해서 구체적인 얘기를 하지 않은 것은 독자들이 직접 읽어보고 직접 느껴 보았으면 하는 이유에서다. 좋아하는 걸 표현하는 나의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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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원성 글.그림 / 이레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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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소리에 귀기우려 본 적 있는가. 풍경 소리를 들으며 자기도 모르게 스르륵 잠든 적 있는가.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서 마음의 위안을 받은 적이 있는가. 어떤 방법을 통해서건 마음이 가벼워지면 마음의 불평, 염려, 걱정들을 저 산 너머로 던져 놓게 된다. 저열하고 추악한 속된 것을 뛰어 넘을 수 있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 천근처럼 무거웠던 짐을 내려놓은 것보다 편안하고 가벼워지는 것이다.

그런 마음은 원성 스님의 <풍경>을 통해서도 가능하다면 정말 좋은 책 아닌가. '풍경'에 실린 시와 그림은 눈으로 읽고 보지 않고 마음으로 읽고 본다면, 너무나 편안해질 테다. 마음으로 느끼게 하는 것은 바로 '풍경'에 실린 시와 그림들로 가능하게 한다.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린 원성 스님의 마음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풍경>에 있는 시 중 처음으로 나오는 시는 '출가'인데, 사실 이 시를 읽으면서 눈물이 흘렀다. 아들을 출가 시키려는 어미의 마음과 스님이 되려는 아들의 마음을 어렴풋 느꼈기 때문이라고 하면 거짓말이 될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 마음을 어슴푸레하게 느꼈다. 아무리 욕심에 찌들어 있는 속세라 할지라도 그 세상 속에서 사람들과 부딪히며 행복이든 절망이든 느끼면서 사는 것이 오히려 더 낫다고 생각하는 내게는 그의 어머니와 아들이 대수롭지 않고 예사롭게 보였다.

출가를 시키려하고 출가를 하려하는 그 마음들이 도대체 무엇이든 간에-진리를 찾으려 한다는 그런 거룩한 이상을 내보이든 혹은 속세를 떠나고 싶다는 도피고 회피인 결정이든- 쉽지 않은 일이기에 더욱 그럴 테다. 아들을 절에 보낸 어머니는 다시 산 아래로 내려 갔다지만 원성 스님의 다른 책을 통해 어머니 역시 스님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제서야 아들을 출가 시킨 어머니의 마음이 확실히 잡히는 듯 했다. 어머니는 아신 것일 테다. 일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자신을 인내해가며 깨달음을 갈망하 수행자의 삶에서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그 얻음으로 마음은 풍요롭고 평온의 상태로 들어 간다는 것을 말이다.

절에 들어가 첫 삭발을 하는 마음, 어린 동자승이 엄마가 보고 싶어 하는 마음, 울음은 참을 수 있지만 그리움은 참기 힘들다는 마음도 가슴으로 느껴졌다. 꼭 겪어 보아야만 아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렇듯 '풍경'은 우리네의 정서를 슬프도록 아름답게 건드려 준다. 그래서 혼탁하게 물들어 있어 흐리멍덩한 마음을 깨긋히 씻겨 주는 것이다. 잊고 있었던 순수하고 맑았던 상태를 돌이켜 보는 일, 바로 <풍경>을 통해 가능해진다.

내가 잘나서 이만큼이라도 하고 산다고 착각하기 쉬운 이때, 조용히 그렇지만 분명하게 내 가슴을 치는 시 '나를 바라보기'를 인용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우리 모두의 이야기 일테니.

나를 바라보기//알 수 없는 두려움에/나는 언제나 겁이 많다./싸움을 하면 옹졸했고/시샘이 많아 욕심도 많았다./잠이 많아 부지런하지도 않고/기억력이 없어서 공부도 못했다./잘 참지도 못했을뿐더러 마음이 약해 눈물이 많다./누가 내 약점을 알까 봐 위선을 떨었고/잘난 체하려고 가식적이었다./남의 말을 듣기 전에 내 말이 앞섰고/내 생각대로 해 버리는 고집쟁이였다./욕망은 생각에서 지울 수 있지만 외로움은 견딜 수 없었다.//인간이 가질 수 있는 나쁜 것만 모조리 안고 있는/나를 보고, 나를 알고/나를 탄식한다./나를 내보임으로써 집착을 버리고/나를 스스로 변화시키려는 방법을 나는 선택했다.//나약한 인간이라 인정하며/스스로를 기만하며 살고 싶지 않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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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양장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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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으면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면서 삶이 무엇인가를 느끼게 된다. 삶이 오직 즐겁거나 만족스럽지만은 않을 테다. 늘 행복과 기쁨으로 충만하지도 않다. 때로는 힘겹고 아프고 서럽기도 하고 짜증나고 허무해지고 방황할 때도 있을 테다. 이런 때에 차분히 날 돌아보게 만든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으며 삶에 대해 진지한 성찰을 하는 것은 신영복이 감옥 안에서조차도 사유하고 활동하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데 있지 않을까.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의 치열한 고민이 있었다는 점이다. 감옥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단연 폐쇄적이고 고립되어 있어 답답하게만 느껴진다. 과연 교화가 가능하기나 한 곳일까, 하는 의문이 드는 그런 곳. 또한 사회로부터 철저히 유리된 그런 공간으로 받아들여진다. 일상의 생활을 빼앗아버리며 사회와 격리시켜 버리는 것. 결코 정상적 생활의 근거지라 할 수 없는 곳에서의 생활에서, 그 누구도 바라지 않는 곳에서 희망이든 절망이든 용납되지 않을 것 같은 막힌 공간. 그렇지만 감시와 통제가 엄격한 감옥도 사람들과의 관계가 있고 생활이 있다.

신영복에게 감옥은 어떤 곳인가. 먼저 커다란 벽을 가진 곳이라 한다. 오랜 수감 생활을 한 자들은 꿈에서조차 벽을 경험하는 그런. '마음을 열지 않고, 과거를 말하지 않고, 그리고 입마저 열지 않는, 침묵과 외부와의 거대한 벽이 사람과 사람사이의 쓸쓸히 차단‘한 곳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욕설이 난무하고 ‘여름과 겨울’ 두 계절밖에 없는 곳, ‘특유의 음침한 응달’이 있어 결코 ‘살만한 곳’이 아닌, ‘느슨해져버린 의식과 비어버린 가슴을 느끼게 하는 곳’, 다툼이 많은 곳이다. 교도소의 땅을 마치 영원불임의 황폐한 장소처럼, 정말 생명의 활기라고는 찾을 수 없는, 그의 표현대로라면 ‘좌절과 고뇌로 얼룩져서 화분에 담긴 흙처럼 흙내가 없’는 장소로 인식하기 쉽다. 그 안에서 딱히 즐거울 일이라고는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 흙내를 맡으려는 마음이 닫쳐있고, 맡을 수 없다는 관념이 대단히 크게 박혀서 그렇지 하지 않아서 그렇지 이 상황의 각박함으로 말미암아 흙내가 애초에 없을 것이라 그렇게 부정하려고 했지만 풍겨져 나오고 있지 않았나. 어느 순간 맡게 되는 것이다. 그는 너무 고통스럽고 외로웠을 테지만 이 시간을, 그 외로움과 고통을 호젓한 자기 성장의 시기로 받아 들였다. 어떤 극단적인 슬픔이나 아픔, 고독, 비감 따위만 있을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이를 ‘자기와의 대면의 시간’으로, ‘자기 해방의 시간’으로 갖는다는 것은 얼마든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숱한 이웃과 역사의 애환’을 생각한다. 신영복은 벽에 갇혀있으면서도 참새 소리, 흙내에 감사한다. 사소하지만 대단한 의미가 있는 그런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는 오직 사람에 대한 믿음 하나로 가능했으리라.

신영복은 사람간의 신뢰와 애정을 회복해 연대감을 갖는 일이 필요한 게 아니냐고 그리고 단순히 앎에 그치지 않고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하지 않겠느냐고 낮은 목소리로, 하지만 힘주어 말한다. 그가 극단적인 고통 속에서 사람에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끝내 희망을 버리지 않았기에, 더욱 간절하게 느껴진다. 확실히 자신의 신념에 따른 삶을 살았고 그렇게 살리라 다짐하는 말이기에 대충 흘려들어서는 안 될 말이다. 누가 그랬던가. ‘모든 변혁운동의 뿌리는 그 사회의 모순구조 속에 있다’고. 사회의 모순을 직시하면서도 그냥 돌아가려는 심보는 결코 옳지 않다. 사상만 있고 실천이 결여됐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실천은 과연 자신이 발 딛고 있는 바로 지금의 장소에서 절실하고 필요한 문제라는 생각을 해본다.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으며 그가 벽 속에 갇혀있으면서도 엄정한 자기성찰과 인간에 대한 따스한 눈길을 보냈던 것을 오랫동안 기억하리라. 그리도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좀더 치열하고 적극적으로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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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 사회 귀족의 나라에서 아웃사이더로 살기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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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의 그의 글이 그렇듯, 역시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을 통해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강하게 낸다. 우리 사회의 소수의 기득권 계층이 가진 모순과 불합리가 어떠한 양상으로 포진되어 있으며 이들이 무슨 악영향을 끼치는지를, 그리고 이러한 사회에서 우리는 어떠해야 하느냐고 묻고 같이 해결 방안을 모색하자고, 행동을 하자고 말한다.

역사의 굴곡을 거치면서 대중들을 속이며 이권을 창출한, 소위 말하는 '사회귀족들'은 자신의 삶에 이익이 되면 선이고 옳은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악이고 그른 것이란 지독한 자기 합리화에 빠져 자기반성과 책무의식을 망각하고 현재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안간힘은 계속 되고 있다. ‘힘의 논리’를 내세우며 누구에게도 ‘검증 받거나 견제 당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프랑스 사회에서의 지도층이 자신들의 권리와 의무를 동시에 감당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와 대비하면 부러울 따름이다.

결국 홍세화가 원하는 우리 사회는 사회정의와 연대 정신, 평등사상이 있는 공화국으로의 우리 사회를 추구한다. (비단 그만이 원하는 사회만이 아닐 테다.) 이는 사회의 ‘진보, 연대’와 직결된다. 대단히 이상적이다. 하지만 꿈꾸지 않고서 도대체 이 세상을 견뎌낼 수 있을까. 또한 단정적으로 현실 불가능한 한낱 이상이라고만 생각하고 말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현실의 제반 문제들에 사회 구성원이 관심을 기울려 문제에 대해 진지한 고민과 토론의 과정을 거쳐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오늘날은 자본주의가 극도로 발단된 사회이며 신자유주의 시대가 아닌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사물들이 상품으로 내던져지는, 그래서 개성이나 인격이 결코 중시되지 못하는, 환경이 병드는 그런 사회가 우리 사회 아닌가. 이처럼 뚜렷이 보이는 모순이 당장 내게 해를 입하는 내 일이 아니라는 식으로 지켜보기만 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되지 않나. 우리는 모두 이 땅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누구나 다 겪는, 결코 누구든 비껴갈 수 없는 절박함을 상기해야 하지 않나.

비록 자신의 힘이 실로 미약해 보일지라도 소소한 일들부터 변화시키려는 시도를 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지금 발 딛고 있는 이 순간이며, 이 때가 가장 좋은 시기인 듯싶다. 나와 의견이 다른 한 개인을 대화와 토론의 과정을 거쳐 설득시켜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 할 때, 사회는 그렇게 조금 조금씩 변화하리라 나는 확신한다. (이러한 확신이 없다면 삶에 무슨 가치를 찾을 수 있겠는가.) 따라서 ‘진보를 말하며 진보로 살아가기, 연대를 말하며 연대를 살아가기’는 나 혼자 잘나서 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먼저 실천하는 삶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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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 청목 스테디북스 42
이광수 지음 / 청목(청목사)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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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근대장편소설이라는 '무정' 이 작품을 중학생 읽고는 그저그렇다고 생각했다. 아니, 오히려 화가 났었다. 이따위 작품이 어째 그리 중요하다고 말들 하는가, 하는. 가령, 가장 눈에 거슬리는 것은 (꽤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형식과 선형과 영채의 삼각관계의 전반부에서 느닷없이(정말 느닷없다!) 민족 계몽을 외치는 부분은 실로 황당하고 어이없었다. 전반부의 삼각관계에서는 개인의 주체성, 자유의지를 주장하다가 삼량진 홍수를 계기로 형식은 시대의 교사이자 영채, 선형의 교사가 되어 민족을 깨우쳐야 한다고 민족을 외쳐대니 얼마나 모순적인가.가이 이럴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 뿐만이 아니라, 고대소설에서 많이 나타나는 우연, 예를 들어 영채가 기생이 되는 계기가 영채가 도움을 받는 집의 부인과 딸이 모두 기생이었다는 데서나, 영채와 병욱과 선형과 형식이 동시에 만나는 마지막 부분의 우연이 그러하고 영채와 병욱의 기차안에서 만남에서 버젓이 있던 병욱의 동생이 그뒤 병욱의 집에서 모습조차 나타나지 않는 장면, 형식이 기생과의 관계를 오해받으면서 그렇게 사랑하고 아끼던 자신의 제자들이건만 단한마디의 변명도 없이 학교를 떠나는 점 등도 부자연스럽다. 전근대의 봉건적 관습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형식이 영채의 정절에 매여있는 점은 화가나기는 했지만 오히려 인물이 평면적으로 그리지지 않고 다채롭게 느껴져 괜찮았다.

그런데 결정적인 것은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일제 통치 초인데,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통치 하에 억압받고 수탈받는 궁핍한 모습을 그리지 않고 '나날이 아름다워지는' 조선으로 설정한 데 작가의 한계랄지, 근대만을 모방하려했던 시대의 한계가 느껴진다. '무정' 정도면 나도 소설가가 될 수 있겠다는 이상한 생각까지 들었던 터라 이런 작품을 중요하다고 한다는 데 강한 의구심이 들었었다. 그러다 국문학을 전공하는 학생으로 '무정'을 다시 읽게 되었다. 다시 읽으면서, '무정'을 배우면서 왜 '무정'이 중요한 작품인지는 알게 되었다.

이유는 이러하다. 우리 근대문학의 장을 열었다고 평가되는 무정은 정말 혁신적이다. 요지만 간추려 말하면 우선 문체가 그러하고 주인공이 고아인점(이는 주변부에서 이상으로 설정한 중심부로 나아가고자 하는 인물 형식을 빌어, 우리의 근대 추구를 읽을 수 있다.)이 그러하다. '무정' 읽기는 곧, 우리 근대문학의 장을 읽는 것과 동시에 우리 근대를 읽어내는 하나의 장치로 해석되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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