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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 구글 검색)

 

 11월까지는 늦가을이라고 우길 수(?) 있지만, 12월은 빼도박도 못하는 겨울입니다. 해가 부쩍 짧아지고 스산한 겨울에는 역시 추리/미스테리 소설을 읽기 제격입니다. 때문에 저는 이번에 추리 소설 위주로 골라봤습니다.

 

빅클락

- 케네스 피어링 (지은이) | 이동윤 (옮긴이)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2-11-06 | 원제 The Big Clock (1946년)

 : 사장이 저지른 살인사건의 목격자를 찾도록 지시받은 주인공, 바로 그 자신이 목격자!, 라는 설정만으로도 너무너무 궁금해지는 소설입니다. 이 설정으로 어떻게 이야기가 진행될지 감도 제대로 잡히지 않아요. 목격자를 찾는 건 어렵지 않으나(자신이니까) 순순히 자신이라고 밝히면 자신의 목숨이 위험해지는 이 상황 속에서 전개될 이야기가 굉장히 흥미진진합니다. 11월에 나온 추리/미스테리 소설 중 가장 기대되는 소설 중 하나입니다.

 

붉은 머리 가문의 비극
- 이든 필포츠 (지은이) | 이경아 (옮긴이) | 엘릭시르 | 2012-11-19 | 원제 The Red Redmaynes (1922년)

 : 엘렉시르 미스터리 책장에서 신간이 나왔습니다! 이전에 나온 환상의 여인/가짜경감 듀/어두운 거울 속에 모두 큰 만족도를 줬죠. 이 세 작품만으로도 이 시리즈의 미래를 기대하게 되기 충분했기에 이번 책도 기대하게 되네요. 표지 센스도 멋지고요. 환상의 여인은 워낙 유명하다지만 가짜 경감 듀나 어두운 거울 속에는 이 시리즈를 통해 처음 접해봤는데, 그 두 작품은 최근에 읽어본 어지간한 미스터리 작품들보다 재미있고 완성도 있더군요. 이번에 나온 이 '붉은 머리 가문의 비극' 역시 기대되네요. 특히 사건 그 자체보다 사건에 관련된 인물들에 초점을 뒀다고 하니 더욱요. 미스터리 소설을 읽는 것은 사건 그 자체가 흥미로워서 인 경우도 있지만(이번달 추천작 중 하나인 빅클락이나 유명한 '그리고 아무도 없다'같은 경우처럼요) 이 소설처럼 소설 속에 나오는 인간 군상이 흥미로워서이기도 합니다.(이후 소개할 '광매화'와 '주인님, 나의 주인님'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결국 이렇게 사건도 사건이지만 그 안의 등장인물이 매력적일 때, 그 소설은 시간이 지나도, 트릭을 알아도 오래 오래 손에 들게 되더군요.

 

광매화

- 미치오 슈스케 (지은이) | 한성례 (옮긴이) | 씨엘북스 | 2012-11-15

 : 치매에 걸린 노모를 보살피는 중년 남성, 노숙자를 죽이려는 초등학생 남매. 중요한 무엇인가를 지키려고 사람들은 슬픈 거짓말을 한다.  인간의 연약함과 따스함을 그린 감성 연작 장편소설.(알라딘 책 소개 중)

 

 

 책에 나오는 인물들의 면면만 봐도 벌써 눈이 가는 작품입니다. 특히 '중요한 무언가를 지키기 위한 슬픈 거짓말'이라는 문구에 절로 시선이 머무네요. 대개 이런 추리/미스터리 소설 속에 나오는 인간의 모습들은 추악합니다. 어둡고, 음습하고, 사악하고, 비열하고, 눈을 돌리고 싶어지는 모습들이 대부분이죠. 하지만 그럼에도 자꾸 이런 이야기를 읽는 것은 '소설'이라는 장치를 통해서 '안전하게' 그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욕망' 때문이 아닐까요. 자신을 더 잘 알고 싶은 욕망, 자신의 어둠을 직시하고, 그 안에서 희망을 찾고자 하는 바람의 모습 같은 것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그 욕망에 가장 부합하는 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인간의 비틀린 모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없이 따스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주인님, 나의 주인님

- 전아리 (지은이) | 은행나무 | 2012-11-08

 : 소설은 사진이라기보다는 그림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을 거의 그대로 보여주는 사진과 달리 그림은 분명 같은 대상을 묘사하더라도 작가에 따라 부드럽게 바뀌기도 하고 보다 날카롭게 바뀌기도 합니다. 같은 나무를 그리더라도 부드러운 빛을 그려내는 인상파와 날카로운 선과 색으로 표현되는 추상화가 같지 않은 것처럼요.

 아직 읽어보지 않아 뭐라 말할 수 없지만, 책 소개와 서평으로 짐작해 볼 때, 광매화가 인간의 비틀린 모습을 부드러운 빛으로 감싸안아주는 느낌이 드는 책이라면, 이 '주인님, 나의 주인님'은 그런 인간의 본성을 밝아서 더욱 폭력적인 빛 속으로 까발려 놓는 듯한 느낌이 드는 책입니다. 이것 역시 흥미롭지 않나요?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말입니다. 이 책의 부제가 '총천연색 이야기의 아릿한 맛'이죠. 어떤 맛을 보여줄지 벌써부터 궁금해집니다.

 

지옥설계도

- 이인화 (지은이) | 해냄 | 2012-11-12

 : 제목과 작가만으로도 기대가 되는 책입니다. 가상과 현실의 조화를 그려냈다고 하는 이 소설은 무엇보다 소설을 읽는 재마 하나만큼은 절대 보장해 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소설을 읽는 것은 여러 목적이 있겠습니다마는, 무엇보다 그것이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 아닌가요? 겨울에 딱 어울리는 오락소설이 뭐가 있을까 둘러보다보니 이 책이 눈에 확 들어오더군요. 줄거리 만으로는 자칫 평범한 사건 해결물 같지만, 설정을 보면 이런 설정으로 이야기가 어떻게 될지 흥미진진해집니다. 경험 상으로, 이런 이야기는 대박이거나 혹은 평균 이하거나 둘 중 하나인 경우가 많던데, 이 책은 어느 쪽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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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탄 소년
장 피에르 다르덴 외 감독, 세실 드 프랑스 외 출연 / 아트서비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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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사마다와 그 남자친구를 제외하고서는 불편한 인간들만 화면에 가득하다. 물론, 가장 불편한 인물은 주인공인 시릴이다. 내용은 굉장히 단순하다. 아버지에게 이유도 모르고 버림받고,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시릴과 그 시릴을 보듬어주는 위탁모 사만다의 이야기다. 영화에서 내내 시릴은 문제를 일으키고, 폭력을 행사하고, 타인의 권리를 짓밟는다. 자신이 상처받았다는 그 이유 하나로.

  내가 가장 불편한 것은 시릴이 자신이 행동하는 것이 '나쁜 일'이라는 인식 자체가 없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가장 불행하고, 타인이 자신을 도와야 하는 건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듯 했다.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아빠의 집에 전화를 해야 하고, 자신이 납득할 때까지 아빠의 아파트에 들어가 봐야 하며, 아빠가 정말 자신 몰래 자전거를 팔아버렸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은 생각도 하지 않고, 그 자전거를 가지고 있던 아이가 훔친 거였을 거라는 말을 한다. 호의로 자신을 받아준 위탁모의 가게에서 그러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하는데도 수도물을 계속해서 틀어놓고, 끄려고 하면 소리를 지르고...아니, 애초에 자신의 위탁모가 되어달라는 말 자체도 시릴이 먼저 꺼냈지. 사만다가 애인과 침대에 누워 자는데 몰래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장면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불량배는 뭔데. 사만다의 말은 제대로 들은 적도 없으면서 불량배의 말에는 너무 쉽게 홀랑 넘어가서 거짓말을 하고, 타인을 습격하고, 돈을 털고, 말리는 사만다를 칼로 찌르기까지 하고... 하지만 자신은 늘 피해자지.

  나는 개인의 잘못을 했을 때, 그 원인을 환경에서 찾는 것은 굉장히 비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할렘가, 이혼 가정, 폭력적인 부모님, 알콜중독, 마약중독, 어린시절의 상처. 이런 것은 하나의 영향이 될 수는 있어도, 결국 그 책임을 지는 건 개인이다. 그것이 영향을 줄 수는 있어도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다 가정 탓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고, 잘못한 일이 있다면 결국 그 책임은 자신이 져야 하는 것이다. 정말 인간이 환경적 자극에 의해서 반응하는 기계적인 존재라면, 같은 환경에서 그렇지 않게 행동하는 사람들은 그럼 뭐가 되는 건데.(물론, 반대로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예를 들면서 힘든 사람의 어깨에 짐을 얹어 주는 것이 정당화 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 역시 비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시릴의 어떠한 폭력적인 행동도 '어린아이의 무지함'이나 '상처받은 아이의 반응'으로 정당화 될 수는 없다. 난 오히려 스크린의 구석에서 지나가듯 등장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더 눈이 갔다. 보육원에서 (분명 시릴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더한 아픔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꿋꿋하게 지내고 있는 아이들이나 성실하게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나....그런 사람들에게.

  아마 마지막 장면이 없었다면 난 이 영화가 참 쓰레기같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자신이 야구방망이로 머리를 때려 기절시킨 가게 주인은 시릴을 용서했지만, 그 아들은 그렇지 못했다. 주유소에서 우연히 시릴을 발견한 그 아들이 시릴을 쫓아와서 욕을 하고, 발길질을 하고, 주먹을 휘둘렀을 때, 시릴은 끝까지 맞서기를 거부했다. 반격하지 않고, 조용히 도망을 갔다. 심지어 아들이 던진 돌에 맞아 나무에서 떨어져 죽을 뻔했을때도, 시릴은 그 흙투성이가 된 몸을 일으켜 그들을 떠나갔다. 난 그 모습을 보고서야 시릴에게 정말 희망이 있겠구나, 생각했다. 사만다와의 소풍장면에서 시릴이 마음을 여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이나, 합의서를 작성하는 장소에서 가게 아저씨에게 '미안합니다'라고 말하는 것. 그것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피크닉을 가서 웃고, 샌드위치를 먹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에는 아무런 대가를 지불할 필요가 없다. 어린아이가 거짓말을 못한다는 말은 개소리라는 건 조금만 아이들을 관찰해봐도 알 수 있는 일이지. 위기를 모면하고, 대가를 치르지 않기 위해서라면, 아무리 어린 아이라도 최선을 다해 거짓말을 하고, 기꺼이 타인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 그러나 시릴은 자신이 행한 폭력의 결과가 똑같은 폭력으로 돌아오는 상황에서, 그것을 묵묵히 감내했다. 그리고 나는 그 장면에서야 시릴이 정말로 변했다는 것을 느꼈다. 그제서야 정말 사만다와의 일상을 지키고 싶다는 시릴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고, 분명히 자신이 한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용서와 죄의 댓가의 면제는 같은 말이 아니다. 용서받았다고 해서 내 잘못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빈다는 행위는 자신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상대방의 마음과 상처가 낫기를 원하는 행위이지, 결코 자신의 댓가를 없애달라고 청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마지막 장면을 통해 시릴의 삶에 한 줄이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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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통각하
배명훈 지음, 이강훈 그림 / 북하우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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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5년간 참 많이도 참았다!" / "그간 끊임없이 영감을 준 '나의 뮤즈', 각하를 위한 연작소설' / "지난 5년간 쉴 새 없이 영감을 선샇나 총통각하, '그분'에게 이 책을 던진다!"
-- 책의 앞뒤에 써 있는 문구들이다. 이 문구들을 출판사 측에서 선전과 이슈를 위해 삽입한 것인지 배명훈 작가가 직접 선정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책을 다 읽고는 저 문구들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생각했다. 이 책은 우리가 아는 그 가카(MB)'만'을 위한 책은 아니다. 정확히는 이 세상을 지배하고자 하는, 그래서 지금 우리 사회를 틀어쥐고 있는 사람들 전반을 위한 책이라고 생각했다.

이전에 김영하씨의 팟캐스트를 들을 때 정이현씨의 '삼풍백화점'을 언급하며, 이것이 소설이 하는 역할이라는 말을 했었다. 정확히 뭐라고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기억하는 바에 따르면, 소설은 기사나 역사의 기록과는 다르게 삶을 재구성하여 그 의미를 오히려 명확히 느끼게 해 주는 역할을 한다. 소설가든 시인이든 예술가든, 이렇게 세상의 의미를 재조립하여, 오히려 둘러가는 듯 해 보이면서도 더없이 그 의미를 아프게 느끼게 해 주는 글을 읽을 때면, 나는 바로 이것이 동시대의 작가를 읽는 이유가 아닐까 생가하게 된다.

  고전은 시간을 초월한 단단한 보석같은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시간은 누구보다 냉혹한 심판자라 불과 1년 전에 세상을 떠들석하게 했던 사건이 지금은 기억되지 않는 경우는 아주 흔하다. 하물며 글임에야. 수십년, 수백년의 시간을 넘어 현재까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는 고전을 보다 보면, 처음에는 비록 그 장벽이 높게 느껴질지라도 왜 고전이 고전인지 깊이 깨달을 수 있다. 취향에 상관없이 고전을 읽으면 왜 이것이 고전인지, 왜 이것이 현재까지 살아남았는지 절로 알 수 있는 것이다. 그에 비해 현대의 문학, 하루에도 수십권씩 쏟아져나오고 있는 책을 잡으면 그 중 대부분은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거나 시간이 아까운 글인 경우가 (고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다. 그러나 현대의 문학은 또한 고전이 절대 줄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이를 비유해보자면, 고전이 이미 회사의 쓴맛 단맛을 볼대로 다 본 사람의 촌철살인같은 충고에 가깝고, 동시대의 문학은 비록 조금 서툴지라도 나와 비슷한 시기에 입사해서 누구보다 지금 내가 힘든 점을 공감하고 아파하는 동기와의 술자리 같다고나 할까. 때문에 종종 동시대의 작가를 읽는 것은 그 문장이 조금 서툴고 그 이야기의 진행이 조금 덜 매끄러울 지라도 보다 날카롭게 내 마음을 파고들곤 한다. 김영하의 '퀴즈쇼'에 나오는 위로가 100년 후의 후손들에게는 공감가지 않을지 몰라도 지금 현재 취업난과 암울한 미래에 좌절한 2-30대에게 위안을 주는 것처럼, 그리고 김애란의 '비행운'에 우리가 보다 아파하는 것처럼. 정이현의 '삼풍백화점'이 혹여 시간을 지나고 살아남아 우리의 아이들이 읽을지라도, 그 아이들은 그 사건을 뉴스에서 보고, 그 시간을 함께 살아낸 우리처럼 공감하지 못할 것처럼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록 저 위에 이 소설이 가카만을 위한 소설은 아니라 했지만, 이 연작 소설의 첫 이야기인 '바이센테니얼 채슬러'가 5년 전, 선거 직후에 쓰여지기 시작했고, 이 소설집이 대선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지금 출판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의미를 지닌다. 음식에도 순이 있듯, 책에도 순이 있다. 그리고 이 책의 순은 바로 지금이 아닐까. 괜한 염려겠지만, 이 책을 정치적인 색안경을 끼지 않고 찬찬히 보길 권하고 싶다. 정치적인 색만으로 이 책을 보기에는 이 책의 이야기들이 아깝기 때문이다. 특히 '새벽의 습격'이나 'Charge!', '혁명이 끝났다고?'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띵, 한 여운을 받았던 것은 '고양이와 소와 용의 나라로부터'라는 이야기이다. 엉뚱한 이야기들을 계속해서 늘어놓는 것 같은 앞 부분의 이야기가 결말에서 큰 의미를 가지고 다가오는 것을 봤을 때, 나는 이 작가의 앞으로를 더욱 기대해봐도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 이야기에 대한 감상을 길게 풀어놓고 싶기도 하지만, 책의 이야기들이 직접 이야기할 수 있도록 나는 여기서 말을 줄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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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거울 속에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헬렌 맥클로이 지음, 권영주 옮김 / 엘릭시르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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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거울 속에
- 헬렌 맥클로이 (지은이) | 권영주 (옮긴이) | 엘릭시르(출판)

: 이번에 나온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은 사람의 구매욕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다. 깔끔하게 뽑힌 디자인과 미니북 증정이라는 덕후의 마음을 자극하는 이벤트, 그리고 책 선정까지. 시리즈 1권인 '환상의여인'이야 워낙 유명한 이야기라 오히려 별 감흥이 없었다만, 미리 구입한 '가짜 경감 듀'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기에 뒤늦게 이 책, '어두운 거울 속에'를 10월 책 구입 리스트에 올려뒀고, 책이 오자마자 가장 먼저 이 책을 손에 들었다.

(*스포일러 있음)

  줄거리는 이렇다. 이야기는 포스티나 크레일이라는 미술 선생님이 일방적인 해고 통보를 받으며 시작된다. 당황한 포스티나 선생님은 동료 교사인 기젤라에게 억울함을 호소하게 되고, 그 사정을 딱하게 여긴 기젤라 선생님이 정신과 의사인 남자친구 배질 윌링에게 이 이야기를 한다. 그 이야기에 호기심을 느낀 배질이 사건에 뛰어들게 되면서 오히려 사건은 점점 커지고 그 동안 가려져 있던 사실들이 하나 둘 드러나게 되면서, 오히려 사건은 점점 미궁으로 빠지게 된다.

  표지에는 이 책이 정통추리와 심리 스릴러의 만남이라고 써 있다. 정말 이 책의 전개방식은 읽는 사람을 쉬지 않고 끌어들인다. 그리 두껍지 않은 소설인데도 26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고, 각 챕터마다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거나 새로운 단서가 밝혀진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이 이야기 속 사건이 얼마나 빨리 진행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배질 윌링은 처음에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이 사건에 뛰어들게 된다. 단순히 여자친구의 직장에서 일어난 부당 해고 사건이라 생각했고, 다만 그 사건 뒤에 어떠한 악의가 있다고 보고, 혹시나 그 악의가 자신의 여자친구를 해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서 사건에 뛰어들에 되는데, 그러다가 이내 믿기 어려운 사실을 알게 된다. 포스티나 선생님이 해고된 것은, 그녀가 학교에 온 뒤로 그녀의 도플갱어가 학교에 출몰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그녀의 도플갱어를 봤다는 목격자들이 나오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그 도플갱어에 살해당한 사람이 나오기까지 하면서 사건은 점점 커지게 된다. 이 유령(도플갱어) 이야기는 작품 전체에 으스스한 기운을 드리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기괴하거나 음습하지는 않다. 초자연적인 것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사건을 과학/이성의 힘으로 파헤치고자 하는 배질 윌링의 노력은 작품의 중심을 단단히 잡아준다. 배질 윌링을 따라가다보면 어느 새 이야기를 읽어나가는 나 자신도 그 뒤에 숨은 어떤 '음모'의 냄새를 맡을 수 있고, 설명 불가능하다고만 보이던 사건들의 진상을 흘깃, 엿볼 수 있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사실 이 책의 백미는 그 결말에 있다. 추리소설에서 오픈 엔딩은 있기 어렵지만, 이 책은 바로 그 오픈 엔딩 형식을 띄고 있다. 사건은 끝났지만, 결말은 나지 않는다. 아주 유력한 용의자와의 1:1 상황에서 배질은 차분히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용의자는 그에 반박한다. 배질은 사건을 설명할 수 있는 논리와 정황증거는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설명일 뿐,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 용의자는 일부 인정을 하지만, 배질의 설명에의 헛점을 날카롭게 파고들어 반박한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마침 딱 맞게 포스티나가 교장선생님을 지나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거나 아무리 수면제를 쓴다고 해도 그 약에 대한 반응은 개인마다 천차만별인데 그렇게 딱 맞춰서 도플갱어 행세를 할 수 있을까?  책에서는 누구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이 나오지 않는다. 신기하게도 이 책에서 가장 오싹한 장면은 바로 이 마지막 결말부이며, 추리소설에서 치명적일 수 있는 그 추리의 헛점은 그대로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장치가 된다.(이건 정말 읽어보면 안다는 말로 밖에는 설명이 안 된다.) 이 책을 끝까지 읽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책 표지에 적힌 제목, '어두운 거울 속에'를 보면 알 수 없는 한기가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기분이 든다.

 

(+) 덧 : <가짜 경감 듀>에 이어 이 책을 읽고 나니,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시리즈에 대한 신뢰가 든다. 먼저 선정된 세 권 모두 최근에 나온 어떤 추리소설에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다. 고전임에도 식상하지 않고, 이야기는 매력적이며 탄탄한 진행을 보여준다. 한 번은 우연일 수도 있지만, 두 번, 세 번은 실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엘릭시르의 책 선정은 지금까지 상당히 만족스러워서, 이후 나올 시리즈도 무척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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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행관람차/왕복서간
- 작가 : 미나토 가나에
- 역자 : 김선영
- 출판사 : 비채

: 가끔 궁금한 점이 있다. 한 사람의 예술가에게 자신이 어떤 특정한 작품 하나로 대중들에게 각인된다는 것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라디오헤드가 아무리 수많은 명곡을 남겼어도,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라디오헤드의 노래는 Creep이고, 프랭크 와일드혼이 아무리 많은 작품을 쓰더라도 그는 지킬&하이드의 작곡가로 기억에 남을 것이다. 조앤롤링이 아무리 새로운 소설을 쓴다 하더라도 해리포터와 비교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이렇게 예술가 자신이 아무리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발표하더라도 계속해서 비교당하는 것이 다름아닌 자기 자신의 작품일 때, 작가는 그 사실을 어떻게 생각할까. 저주로 받아들일까, 아니면 그나마 그 한 작품이라도 남겨서 다행이라고 생각할까.

미나토 가나에의 데뷔작인 '고백'은 등장할 때부터 센세이션을 일으킨 소설이었다. '우리 반에 내 딸을 죽인 사람이 있습니다'라는 선생님의 고백으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는 그 사건 자체로도 흥미롭지만, 등장인물 각자의 관점에서 서술되는 이야기들을 접할수록 다가오는 사건의 무게와 깊이에 저릿할 정도의 서늘함을 느끼게 되는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그 가차없는 결말은 한편으로는 섬찟하고 또 한편으로는 통쾌하기도 한 기분이라 이 작품을 접하고 나서 나 역시 한동안 만나는 사람마다 이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했더랬다.

이 정도 작품 쯤 되면 독자가 다음 작품을 볼 때 전작을 의식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이후 미나토 가나에의 소설이라면 모두 다 읽어봤지만, 사실 모두 '고백'만 못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처음에는 신선하게 느껴졌던 교차 서술은 '이 작가는 이렇게밖에 못 쓰나?'라는 생각까지 들게 했으며, '소녀'를 읽었을 때에는 작위적인 설정과 결말에 실망하기까지 했었다. 원체 필력이 있는 작가다보니 흡입력은 평균 이상이었지만, 살인사건으로 시작하여 그 사건을 둘러싼 교차서술로 이어지며 밝혀지는 진실이라는 틀은 슬슬 식상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별 기대없이 집어든 야행관람차에서 나는 다시 한 번 미나토 가나에를 보게 되었고, 이것은 가장 최근작인 '왕복서간'을 읽으면서 확신으로 바뀌었다. 이 작가는 어떤 한 단계를 넘어 성장했다고.(*국내 출간은 'N을 위하여'가 너 늦게 되었지만, 작품이 쓰여진 순서는 고백-소녀-속죄-N을 위하여-야행관람차-왕복서간 순이다.)

흡입력 있는 문장으로, '읽어볼 만한 추리소설'정도로 넘길 뻔 했던 야행관람차가 이토록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한 장면 때문이었다. 미나토 가나에의 작품에는 어쩐지 제대로 된 인간이 나오지 않는다. 등장인물은 다들 하나씩 어딘가 뒤틀려 있고, 어둠을 가지고 있다. '복수'라는 주제에 대해 생각하게 했던 고백처럼 야행관람차는 '행복'과 '가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모두가 '완전히 행복한 가정은 없다' '어느 가정이나 문제가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자꾸만 주변 사람들의 '겉모습'과 비교하며 자신의 가족은 이래서 문제고 저래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던가. 야행관람차는 행복한 가족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울뿐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미 문제가 곪을 대로 곪아 밖으로 터져나오고 있는 아야카네 가족(엔도 가족), 이에 대비되는 완벽한 가정의 모습을 보여주는 다카하시 가족과 이 두 가족을 지켜보는 고지마 사토코 할머니의 이야기들을 들으며 나는 서로 다른 이유로 고통받는 각 캐릭터들의 모습에 서로 다른 이유로 치를 떨었다.

결말은 충격적이었다. 자신의 손으로 그렇게 그리워하고 집착하던 어머니를 살해하게 만든 고백의 결말을 보며 나는 이 작가는 도대체 인간에 대해 얼마나 실망하고 인간의 어두움에 얼마나 깊이 들어갔으면 이런 결말을 쓸 수 있었나 생각했었다. 오히려 깔끔하고 완벽한 복수이기에 더욱 서늘한 복수가 아니었던가. 야행관람차의 결말은 이런 결말과 완전히 반대의 지점에 서 있다. 아야카의 지나친 히스테리에 그만 폭발하고 만 마유미(엄마)는 아야카의 입에 흙을 쳐 넣으며 아야카를 질식시켜 죽이려고 한다. 아야카가 바닥에 질질 구토를 해도, 숨이 얕아져가도 이미 눈이 뒤집혀버린 마유미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모든 사건이 끝나게 되고 엉망진창이 된 거실에 아야카와 엄마, 아빠가 힘없이 줄지어 앉아 있다. 바닥에는 흙과 깨진 유리 파편이 널려 있고, 아야카가 죽을 뻔하며 왈칵왈칵 쏱아낸 구토물 때문에 공기 중에는 시큼한 냄새가 떠돌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 자리에 앉아 생각한다. 내일이면 또 이 집으로 돌아올 것이고, 또 함께할 것이라고. 그것이 가족이라고. -- 이 장면을 보는데 정말 가슴에서 무언가가 툭, 하고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아, 그렇구나. 아야카는 왜 마유미가 그렇게까지 눈이 뒤집혔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엄마가 왜 어떤 이유로 자신에게 그렇게 했는지, 그 동안 엄마 나름대로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는 죽을 때까지 알지 못하겠지. 아마 엄마도 딸이 얼마나 많은 압박을 받고 있었으며, 히스테리를 부리는데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지. 아버지는 자신의 행동이 가족의 문제를 얼마나 크게 키웠는지 여전히 모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함께 살아갈 것이다. 이전보다는 조금 나아진 모습으로.

이 작은 한 장면에서는 나는 작가의 변화를 보았고, 작가의 성장을 보았다. 일종의 가치관의 변화라고 할 만한 무엇을 보았다. 그리고 어쩌면 '고백'에 가장 심하게 매여 있었던 것은 작가 자신이 아니었나 생각도 들었다. 전작들이 독기가 가득했다면, 그래서 도리어 인간의 다른 면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착시 효과를 줬다면, 야행관람차부터는 보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는 느낌이 들었고, 이 변화는 왕복서간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이상하게도 기교 없이 내려놓고 부른 가수의 잔잔한 노래에 마음이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 든다고나 해야 할까. 그래서 분명 콕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 작품이 정말 좋구나, 라고 생각하게 된다고나 할까. 아, 그래. 야행관람차 이전까지의 작품들이 자신의 어둠에 파묻힌 인간이 내지르는 비명같은 작품이었다면, 야행관람차에서 드디어 그 인간은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보고, 그렇게 만신창이인 채로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왕복서간에서 드디어 타인을 향한 위로의 말을, 자신의 아품과 같은 아품을 가진 사람들을 향해 말을 거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그간의 작품들이 '독백', 즉 철저히 '자기 중심의 발화'고, 그것의 종착지가 수신자가 있는 '편지글'의 형식이란느 점에서도 이런 느낌을 받은 게 아닐까. 눈을 닫고 귀를 막고 자신의 말을 외치던 사람이 이제 누군가를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게 과연 지나친 비약인 걸까.

여전히 미나토 가나에는 '고백'의 작가다. 그러나 이 작가와 동시대를 살아가며 작가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는 것도 하나의 큰 인연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녀의 지금까지의 노력과, 변해갈 앞날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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