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핵 폭발 뒤 최후의 아이들 ㅣ 청소년문학 보물창고 2
구드룬 파우제방 지음, 함미라 옮김, 최혜란 그림 / 보물창고 / 2006년 6월
평점 :
품절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모르지만, 핵은 폭발했고, 사람들은 고통을 겪는다. 이 책은 핵이 폭발한 이후 4년 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한 아이의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사실 그렇게 특별할 게 없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이게 청소년 도서용으로 나왔다는 게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 책은 청소년 권장 도서가 될 만한 것 같기도 하다. 이 책을 제대로 읽었다면, 그들은 나름대로 무언가를 느낄 수
있을테니까.
내가 이 책을 집어 든 것은 이런 책이라면 술술 읽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아, 정확히는 맞긴 맞았다. 이 책은 일단 잡으면 그 자리에서 마지막까지 볼 수 있을 정도로 쉽게 읽힌다. 요즘 확연히
짧아진 내 집중력으로도 가능할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여운은 길어서 며칠이 지나도록 책 생각이 났다. 특히 마지막 장면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아, 이렇게 글로 그 감정을 갈무리하고자 한다.
사실 이 이야기 자체는 특별할 게 없다. 묵시록적 디스토피아를 이야기하는
작품은 영화고 만화고 소설이고 넘쳐난다. 이미 나도 몇 차례나 그런 이야기들을 봤고. 그런 이야기들은 언제나 어느 정도의 재미를 보장해 주기는
하지만, 대부분 뻔한 쪽으로 흘러간다. 극악해진 생존환경, 서바이벌 게임, 그리고 인간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 대부분 이런 때 인간성은
바닥을 드러내고, 추악한 모습이 드러나는 식의 묘사가 이어진다. 뭐, 작가에 따라서는 이런 악조건 속에서 피어나는 인간애라거나 사랑, 다시
움트는 생명 등을 통해 희망을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미리 말하건데, 이 이야기 속에서 희망을 보려고 하는 사람은 일찌감치 이 책을
덮기를 바란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핵겨울만큼이나 차가운 현실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하는 화자가 어린 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이나 그 현실은 차갑게 다가온다. 아무래도 작가는 이런 희망이라거나 따스한 이야기가 마음에 안 들었음이
틀림없다.
원인은 모르지만, 핵이 폭발했다. 아무래도 4년이나 원조도, 구호의 손길도 오지 않은 걸 보면 핵 전쟁이 일어났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막상 그렇게 핵이 떨어진 이후 그 지역에서 생존한 사람들에게 중요한 건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느냐가 아니라, 그런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처음에는 생존 그 자체에 기뻐하던 사람들은 이내 생존의 막막함을 느끼게 된다. 전쟁이나 쓰나미같은
극단적인 상화잉 발생했을 때 살아남는 것과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는 것, 어떤 것이 더 나은 것일까? 때로는 그 재해 앞에서 가장 먼저 희생된
사람들이 가장 나은 게 아닐까? 그러면 적어도 그 이후 끔찍한 광경을 보지 않아도 되고, 죽음보다 더할지도 모르는 생을 이어가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극한 상황이 되면 가장 먼저 희생되는 것은 약한 자들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빨리 그 사실에 익숙해진다. 처음에는
헌신적으로 남을 돕던 사람들도 이내 자신을 챙기게 되고, 시체며 달린 팔다리에 구역질을 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시체 치우는 사람이 올 때까지
시체와 함께 살아가는 것에 무덤덤해진다. 처음에는 아이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던 주인공의 어머니도 자신의 가족을 잃고, 점점 더 어려운 상황이 되자
아이들에게 눈을 돌려버린다. 식량을 훔치는 어린 아이를 때려죽였다고 자랑하며, 다른 아이도 죽이겠다고 공언하는 사람이 나오는 사람이다.
인간성이라는 게 정말 존재한다면, 그 인간성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던 것은 도리어 어린 아이들이었다. 불구가 되고, 팔다리가 잘려나가도,
아이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더 어리고 더 힘든 아이들을 돌보고, 그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 자신들을 지켜나갔다. 가장 마지막까지 사람들을
돌본 것도 불과 12살이던 주인공이었다. 이런 세상에서, 아이들은 순식간에 어른이 되어버린다.
희망 없는 세상이다. 주인공과 그
가족만이라도 어떻게든 살아남기를 바라는 독자의 바람도 우습다는 듯, 불행은 주인공 가족에게도 공평하게 찾아온다. 처음에는 주인공의 누나가,
동생이, 엄마가 차례차례 죽어간다. 이런 세상에서 잉태된 아이는 얼굴이 없고, 아버지는 그 생명을 조용히 죽음 속에 묻는다. 그들은 눈 속에서
피어난 파란 싹을 보며 희망을 갖지만, 이내 그 싹이 누렇게 시들어 버린 것을 보게 된다. 4년이 흐른 뒤, 질서가 찾아오지만, 죽음이 떠나간
것은 아니다. 다만 속도를 늦춘 것 뿐이다. 아이들은 태어나지만, 그보다 많은 수가 죽어나간다. 그나마 태어난 아이들도 정상인 아이들은 거의
없다. 살아서 태어난 아기들조차 기형아이거나 장님이거나 농아거나 저능아다.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아이들이다. 그런 아이들이나마 살아남기 위해
전력을 다하지만 결국에는 죽고 말 것임을 모두가 안다. 이대로라면 모두가 죽게 되는 것도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주인공은 담담하게 말한다. 마치
'오늘은 비가 오네요'라고 말하듯, 그렇게 담담하게. 마지막이 되면, 작가는 주인공의 목숨 역시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점점 더 많은
수의 머리카락이 빗에 딸려나온다. 주인공의 누나가 죽기 전 그랬듯이 말이다. 죽음이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피할 수 없다는 것에
익숙해진다.
이제 학교에는 40명의 아이들이 있다. 연말까지는 학생 수가
37명쯤으로 줄어들 것 같다. 세 명의 아이들에게서 다시 원자병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중략)... 그리고 세 번째는 베르벨이다. 크라머
아줌마가 죽은 뒤 데려와 지금은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우리 집 꼬마 베르벨, 이제 그 아이가 우리와 함께 산 지도 2년이 되었다. 지금 우리는
그 아이와 함께 지내는 것에 너무도 익숙하다. 아주 힘든 이별이 될 것 같다.
곧 한 학급이 문을 닫는다. - pp.
217-218.
이 희망 없는 세계에 희망이 있다면, 그래도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주인공의 마지막 말 때문일 것이다. 모두가 희망을 버린 세상에서, 학교가 세워지고, 어른들은 자신의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고마워하며 식량을
나눠준다. 처음에는 어른이 가르치던 학교는 아이들이 선생이 되어 더 어린 아이들을 가르친다.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결국 세상이 멸망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아이들은 아이들을 가르친다.
나는 가르치는 게
좋다. 선생님이 되기엔 아직 어린 나이이고, 가르치는 것도 배우지 못했지만 말이다. (중략) 나는 아이들에게 반드시 가르쳐 주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읽고, 쓰고, 계산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너희들은 빼앗거나, 도둑질하거나, 죽이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너희들은 다시 서로 존중하는 법을 배우고, 도움이 필요한 곳에는 도움을 줄 줄 알아야 한다. 너희들은 서로 대화하는 법을 배워 당장 치고 박고
싸우기보다는, 어려움을 해결할 방법을 함께 어울려 찾아 내야 한다. 너희들은 서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너희들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 너희들의
세상은 평화로운 세상이 되어야 한다. 비록 그 세상이 오래 가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왜냐하면 너희들은 쉐렌보른에 남은 최후의
아이들이니까. -pp.218-219.
이 말이
책을 덮고도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