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탄 소년
장 피에르 다르덴 외 감독, 세실 드 프랑스 외 출연 / 아트서비스 / 2012년 5월
평점 :
품절


 :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사마다와 그 남자친구를 제외하고서는 불편한 인간들만 화면에 가득하다. 물론, 가장 불편한 인물은 주인공인 시릴이다. 내용은 굉장히 단순하다. 아버지에게 이유도 모르고 버림받고,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시릴과 그 시릴을 보듬어주는 위탁모 사만다의 이야기다. 영화에서 내내 시릴은 문제를 일으키고, 폭력을 행사하고, 타인의 권리를 짓밟는다. 자신이 상처받았다는 그 이유 하나로.

  내가 가장 불편한 것은 시릴이 자신이 행동하는 것이 '나쁜 일'이라는 인식 자체가 없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가장 불행하고, 타인이 자신을 도와야 하는 건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듯 했다.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아빠의 집에 전화를 해야 하고, 자신이 납득할 때까지 아빠의 아파트에 들어가 봐야 하며, 아빠가 정말 자신 몰래 자전거를 팔아버렸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은 생각도 하지 않고, 그 자전거를 가지고 있던 아이가 훔친 거였을 거라는 말을 한다. 호의로 자신을 받아준 위탁모의 가게에서 그러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하는데도 수도물을 계속해서 틀어놓고, 끄려고 하면 소리를 지르고...아니, 애초에 자신의 위탁모가 되어달라는 말 자체도 시릴이 먼저 꺼냈지. 사만다가 애인과 침대에 누워 자는데 몰래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장면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불량배는 뭔데. 사만다의 말은 제대로 들은 적도 없으면서 불량배의 말에는 너무 쉽게 홀랑 넘어가서 거짓말을 하고, 타인을 습격하고, 돈을 털고, 말리는 사만다를 칼로 찌르기까지 하고... 하지만 자신은 늘 피해자지.

  나는 개인의 잘못을 했을 때, 그 원인을 환경에서 찾는 것은 굉장히 비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할렘가, 이혼 가정, 폭력적인 부모님, 알콜중독, 마약중독, 어린시절의 상처. 이런 것은 하나의 영향이 될 수는 있어도, 결국 그 책임을 지는 건 개인이다. 그것이 영향을 줄 수는 있어도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다 가정 탓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고, 잘못한 일이 있다면 결국 그 책임은 자신이 져야 하는 것이다. 정말 인간이 환경적 자극에 의해서 반응하는 기계적인 존재라면, 같은 환경에서 그렇지 않게 행동하는 사람들은 그럼 뭐가 되는 건데.(물론, 반대로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예를 들면서 힘든 사람의 어깨에 짐을 얹어 주는 것이 정당화 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 역시 비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시릴의 어떠한 폭력적인 행동도 '어린아이의 무지함'이나 '상처받은 아이의 반응'으로 정당화 될 수는 없다. 난 오히려 스크린의 구석에서 지나가듯 등장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더 눈이 갔다. 보육원에서 (분명 시릴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더한 아픔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꿋꿋하게 지내고 있는 아이들이나 성실하게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나....그런 사람들에게.

  아마 마지막 장면이 없었다면 난 이 영화가 참 쓰레기같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자신이 야구방망이로 머리를 때려 기절시킨 가게 주인은 시릴을 용서했지만, 그 아들은 그렇지 못했다. 주유소에서 우연히 시릴을 발견한 그 아들이 시릴을 쫓아와서 욕을 하고, 발길질을 하고, 주먹을 휘둘렀을 때, 시릴은 끝까지 맞서기를 거부했다. 반격하지 않고, 조용히 도망을 갔다. 심지어 아들이 던진 돌에 맞아 나무에서 떨어져 죽을 뻔했을때도, 시릴은 그 흙투성이가 된 몸을 일으켜 그들을 떠나갔다. 난 그 모습을 보고서야 시릴에게 정말 희망이 있겠구나, 생각했다. 사만다와의 소풍장면에서 시릴이 마음을 여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이나, 합의서를 작성하는 장소에서 가게 아저씨에게 '미안합니다'라고 말하는 것. 그것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피크닉을 가서 웃고, 샌드위치를 먹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에는 아무런 대가를 지불할 필요가 없다. 어린아이가 거짓말을 못한다는 말은 개소리라는 건 조금만 아이들을 관찰해봐도 알 수 있는 일이지. 위기를 모면하고, 대가를 치르지 않기 위해서라면, 아무리 어린 아이라도 최선을 다해 거짓말을 하고, 기꺼이 타인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 그러나 시릴은 자신이 행한 폭력의 결과가 똑같은 폭력으로 돌아오는 상황에서, 그것을 묵묵히 감내했다. 그리고 나는 그 장면에서야 시릴이 정말로 변했다는 것을 느꼈다. 그제서야 정말 사만다와의 일상을 지키고 싶다는 시릴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고, 분명히 자신이 한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용서와 죄의 댓가의 면제는 같은 말이 아니다. 용서받았다고 해서 내 잘못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빈다는 행위는 자신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상대방의 마음과 상처가 낫기를 원하는 행위이지, 결코 자신의 댓가를 없애달라고 청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마지막 장면을 통해 시릴의 삶에 한 줄이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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