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내 남은 생의 첫날 -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문인 101인의 가상유언장
도종환.황금찬 외 지음 / KD Books(케이디북스)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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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문인 101인의 가상 유언장이라는 부제를 단 『오늘은 내 남은 생의 첫날』은 제호(題號)만으로도 남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도종환, 공선옥, 피천득, 이해인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작가들이 아들과 딸에게, 친구에게, 그리고 자기에게 쓴 유언장을 어느 누구라고 소홀히 읽을 수 있을까.

떠나는 이가 남은 이들에게 마지막 남기는 말은 허투루 듣지 않는 법이다. 마지막으로 입을 떼는 이의 말의 무게가 남다르기에 누가 그 말을 하든 듣는 이는 귀를 세우고 가슴을 여는 것이다. 일점일획도 놓침 없이 가슴 안에 받아 적으려는 순간, 그 순간은 열정이 가파르게 상승하는 마지막 순간일 것이다.

여태 유언을 하는 자리에 간 적이 없어 비록 상상 속에 머무르는 장면이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 난 마치 그 자리에 내가 서 있는 것 같은 착각 속에 한참을 머무르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했다.

난 마지막 말을 준비하며 살고 있는가? 그만큼 분초를 아끼며 치열하게 살고 있는가? 그런 생각이 목구멍을 타고 따갑게 넘어가는 순간 난 섣불리 책장을 넘길 수 없었다. 시종 둔중한 무게로 가슴팍을 강하게 짓눌렀던 이 책을 평소처럼 읽으라고 권하기가 불편하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그런 불편이야말로 나를 정화하는 고도의 연금술일 것이며 느슨한 나를 돌려세우는 결정적 기폭제가 될 것이다. 그런 이유로 다시 한 번 찬찬히 읽으라고 권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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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행
오세영 지음 / 예담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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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화성 행차를 둘러싸고 개혁 세력과 수구세력의 일대 격전이 벌어진다. 벽파의 거두 김종수 대감과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 대비를 뒷배경으로 심환지가 나서고 시파에선 채제공의 신임을 두텁게 받고 있는 정약용이 버티고 섰다. 그 틈을 타 옥포 선생 문인방은 백성이 주인 되는 새 세상을 꿈꾸며 동조자를 끌어 모은다.

일촉즉발의 위기감. 어느 편도 장담할 수 없다. 을묘년(1795) 2월 9일 원행을 시작으로 생사를 겨냥한 화살은 누구의 목을 꿰뚫을지 장담할 수 없다.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선 그들의 수 싸움이 치열하다.

과연 오세영 답다. 정조시대가 지닌 역사적 무게를 원행이라는 사실적 소재 안에 집어넣고 묵직하게 전개되는 스토리, 정립한 세력간 힘의 각축장을 박진감 있게 그려낸 나는 듯한 필치와 교과서 속에 잠자고 있던 인물들을 불러내 그들의 거친 숨소리를 마치 곁에서 듣는 듯한 착각을 시종 불러내는 생생한 인물묘사 등 어느 것 하나 그 답지 않은 것이 없다. 역사추리소설 장르에서 두드러진 족적을 남긴 저자의 환향(還鄕)은 그래서 더없이 반갑다.

최근 들어 특히 역사를 소재로 한 무겁지 않은 역사책과 역시 작가적 상상이 마음껏 나래를 펼친 소설 등 역사 관련 서적들이 연이어 출간되고 있다. 아울러 그런 책들의 공로로 역사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 또한 상당 부분 달라졌다. 과거와 같이 고리타분하다는 인상을 역사에 갖다놓기가 어색할 만큼 바뀌었다. 그런 현실을 타고 역사추리소설 분야가 새로운 소설 장르로 각광 아닌 각광을 받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일시적인 현상으로 그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작가들의 치열한 역사의식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철저한 고증을 밑바탕으로 한 순도 높은 역사적 안목이 필요하다. 그래야 이야기를 박진감 넘치게 끌고 갈 수 있다.

역사 소설이라는 게 역사 자체의 무게감에 우선 눌리다보면 역사수업처럼 사변으로 흐르기 쉽고, 이야기에 치중하다보면 흥미 위주로 옮겨가기가 용이하다는 걸 이젠 웬만한 독자라면 어렵지 않게 간파한다. 그런 독자를 앞에 두고 얼렁뚱땅 시작과 마무리를 해보려 한들 먹힐 리 없다.

역사추리소설 작가가 모두 역사학을 전공할 필요는 없겠지만 적어도 역사를 소설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소양들은 지니고 있어야 할 것이다. 소설 『원행』이 여타 역사추리소설과 다른 위치에 놓여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역사적 사실과 역사적 배경에 충실하려 한 작가적 신념이 작품 속에 충실히 반영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경우를 두고 진중하다고 표현하는 것이리라. 모처럼 만에 기름진 식단을 마주하고 제대로 된 포만감을 느낄 수 있었다. 제아무리 음식 담는 그릇이 좋아봐야 담긴 음식이 입맛을 돋구지 않으면 소용없는 일. 맛깔스런 토종 음식 맛 제대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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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여자 사랑하기
빌헬름 게나찌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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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의 문제에 직면한 주인공을 통해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하는 소설, 『두 여자 사랑하기』는 제목만으로도 충분히 도발적이다.

 

주인공의 입장에 서면 두 여자 모두를 기필코 사랑하리라는 강한 의지가 엿보이고 타자의 입장에 서면 그것은 여지없이 두 여자를 사랑하는 부도덕한 한 인간을 떠올리게 한다.

 

가슴 따뜻하고 편안하지만 고상한 것과는 일정부분 거리를 두고 있는 잔드라와 지적이고 예술감각마저 뛰어나지만 전혀 가정적이지 못한 유디트 사이에서 종말론자인 주인공, 나는 어느 순간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하는 문제에 직면한다.

 

하지만 어느 한쪽을 선택하기에는 그들 모두 서로 채워줘야 할 부분을 반씩 나눠 갖고 있는 터라 생각만큼 쉽지 않다. 추억 속에 생생히 깃들어 있는 잔드라와 유디트의 이미지를 핀셋으로 하나씩 집어내 선택지에 올려놓고 가감해보지만 얼마 해보지도 않고 제자리다. 더 큰 문제는 과연 내가 누구를 선택할만한 의지를 갖고 있는지 의심스럽다는 것.

 

등장인물들 또한 의뭉스럽기는 마찬가지. 그들의 직업이란 분노 관리사, 역겨움 전문가, 쇼크 연구소 직원, 주정뱅이 비서 등 하나같이 독특하다. 주인공마저 종말론자인 바에야 달리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규범을 강제하는 사회에 보기 좋게 배설하기로 작정했다면 속내를 가늠할 수 없는 인물들을 내세우는 게 제격이다. 그렇다보니 주인공이 직면한 환경과 그를 둘러싼 인물들 모두 자연스러운 데라곤 눈을 씻고 봐도 없다.

 

뻔한 삼각관계를 중심 테마로 세워 굳이 등장하지 않아도 될 인물들을 무분별하게 배치해 놓은 저자의 의도를 파헤치기란 사실 독자 입장에서 주인공이 가진 선택의 문제만큼이나 쉽지 않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소설적 특성은 독일문학이 저변에 깔고 있는 문제의식과 직접적으로 맞닿아있다. 그래서 이 소설은 같으면서도 다르게 읽힌다.

 

독일문학에서 빈번히 마주하게 되는, 무게감이 탁월한 문체적 특성과 이성적 존재에 대한 높은 분석력이 인간 문제의 심연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한편으로 스토리 전개상 정해진 구도를 밟아나가면 꽉찬 결말이 눈에 보이는데도 굳이 결말 같지 않은 결말로 피날레를 장식하는 묘한 형식은 같다. 하지만 심오한 철학이 깃들었다고 보기에 마뜩치 않은 스토리 구조는 일견 부조리한 사회를 향한 일침과 같기에 형식 파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비틀어보지 않는 한 현실 속에 감추인 본래적 현실을 읽을 수 없다. 아울러 낯설게 보지 않는 한 언제고 보고 싶은 현실과만 마주한다. 다른 현실에 눈을 뜨게 해주는 소설의 미덕을 설명할 필요는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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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기담 - 근대 조선을 뒤흔든 살인 사건과 스캔들
전봉관 지음 / 살림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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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에서 일어난 기이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경성기담』은 이름만큼이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경악할만한 이야기에서 속을 뒤집는 이야기와 허탈한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경성기담의 저자는 버선발을 걷어붙이고 식민지 조선에서 실제 발생한 사건을 잰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추적해간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독자로선 한 눈을 팔다가 저자의 뒷그림자를 놓쳐 허둥댈 때가 있고, 어느 순간엔 둔기로 뒤통수를 맞은 듯 어안이 벙벙해지기도 한다. 게다가 탐정이 된 듯 종횡무진 쏘다니는 저자의 필력에 휘둘리다보니 어느새 내가 그의 조수역을 맡게되더라는 이 말도 안 되는 고백 앞에 어느 누구라고 바보 쳐다보듯 하지 않을 수 있을지, 거 당하는 사람 기분 상당히 묘하다.

저자와 독자 사이의 관계를 사단내기로 작정한 모양이 아니고서야 이 책, 이럴 수 없다. 괘씸하다는 생각이 설핏 들다가도 이내 그 놈의 읽는 재미에 그마저도 사그라드는, 망할 놈의 심사를 탓해 무엇하랴. 그냥 하자는 대로 내버려 둘 밖에.

하여 빠르게 반절을 읽고 그보다 한 발 더 빠르게 책장을 덮었다. 꼴깍 넘어가는 죽음을 앞두고 넘어가려는 숨 한 번 대차게 참으면 죽음이 사라지기도 하는 듯 지가 무슨 메치니코프라고 생명 연장의 꿈을 꿀려는 모양이다. 그런다고 다음 장의 뿌리깊은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보냐.

독특한 소재가 주는 기이한 매력을 이 책에서 만날 수 없다면 어디서도 그런 맛, 보지 못할 게 뻔하다. 첫 장부터 숨가쁘게 넘어가는 ‘머리 잘린 유아’ 사건을 보고 어떻게 그런 일이 각박하기로 치자면 단연 순위를 다툴 현대가 아니라 순박함이 철철 넘칠 그 시대에 일어날 수 있었을까 하고 상념에 젖어들면 다음 번 사건에선 퍼뜩 놀라 자빠질 테니 극히 조심하길.

안동 가와카미 순사 사건. 살해범으로 몰린 조선 청년 다섯 명이 애꿎은 고초를 당하고 보상은커녕 집에 돌아갈 차비마저 없이 감방을 나서야 했던 비루한 인생살이를 가슴 아프게 쳐다보아야 한다. 식민지 시대를 살아 간 그 시대 조선인들이 일본인들 눈에 찢기고 밟히는 버러지 같았으리라는 건 배워 알았지만 이건 너무했다 싶다.

다음 장, 부산 마리아 참살 사건에 이르러선 그저 망연자실. 허망해진 눈을 떨굴 밖에 딴 도리가 없다. 조선 여인이 하녀로 나서 열심히 일한 죄밖에 더 있을 라고 주인 여자에게 난도질을 당하고만 현실 앞에 달리 무슨 말을 하랴. 그저 그 시대 조선인은 죽지 못해 살았다 할 밖에.

자라며 알음알음 들어온 백백교 사건은 예나 지금이나 사교 집단의 발흥이 어떤 결과를 빚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더 얘기하고 싶지 않으니 다음으로 넘어가자. 자그마치 확인된 살인만 314건이다.

민족 대표 33인 중에 하나인 박희도 교장이 '키스 내기 화투'를 핑계로 여 제자의 정조를 유린한 사건을 좇다보면 참담한 심정이 기어코 멍울지고 만다. 게다가 그가 친일에 앞장 선 인물이라니. 민초들은 마지못해 비루한 생을 이어갔다지만 입을 것 다 해 입고 먹을 것 가리지 않고 다 먹은 사회 지도층 인사들은 어찌 그리도 잘난 행실을 해댔는지 그저 앞에서 귓방망이라도 치고 싶었던 심정이 나만은 아니었을 터. 지금도 여전히 어쩔 수 없었던 친일이었다고 강변하는 이들을 보면 그것도 뚫린 입이라고 단박에 꿰매주고 싶을 뿐이다.

이 책엔 이것들 말고도 말많고 탈 많은 사건들이 참 많이도 들어 있다. 채무왕 윤택영 후작의 부채 수난기, 이화여전 안기영 교수의 애정 도피 행각, 조선의 ‘노라’ 박인덕 이혼 사건 등 이름만 들어도 별 희한한 사건들, 많기도 참 많았다.

굳이 저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가 그 시대에 주목하는 것은, 엄밀히 말해 그 시대의 생활상에 주목하는 것은 그 시대가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웅적인 삶이 아니더라도, 하물며 버러지 같은 인생을 그것도 비루하게 살아간 민초들의 고단한 삶에서조차 배울 것이 분명히 있음을 더불어 알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이들 각각의 사건을 대하면서 사건을 사건 그대로만 바라 볼 수 없었던 이유다.

한 시대가 다른 시대에게 전하려는 일깨움의 소리를 간직하는 한 이 책의 가치는 빛을 잃지 않을 것이다. 색다른 세계로 기꺼이 당신을 초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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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왜곡의 역사 - 누가, 왜 성경을 왜곡했는가
바트 D. 에르만 지음, 민경식 옮김 / 청림출판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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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에 앞서 시대 배경에 관한 두 가지 정도의 사전 지식이 필요하다. 하나는 초기 기독교사에서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책을 읽지 못했다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하지 훨씬 전이었으므로 책을 여러 권 내기 위해서는 일일이 베껴야 했다는 것이다.

낭독자와 필사자가 필요한 시기였다는 얘기. 필사자와의 관계에서 낭독자는 만들어진 책을 읽어주는 역할 이상을 요구받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지만 필사자의 경우엔 조금 달랐다.

기독교가 급속히 확산되면서 성경에 대한 요구가 커졌던 건 당연한 일. 따라서 시장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필사자들은 쉴새없이 책을 베끼고 또 베껴야했다. 하지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수요에 산술급수적으로 대응하는 구조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이 심화되자 전문적인 능력을 갖추지 못한 수많은 필사자들이 시장에 흘러 들어왔다. 당시로선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것이 성경 왜곡의 빌미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원문을 옮겨 적다보면 아무래도 실수가 있게 마련이다. 그것은 필사 전문가조차 피해갈 수 없는 과제였다. 그런데 경험이 전무한 초기 기독교인들이 필사자로 나서면서부터 의도하지 않은 문제가 발생했다. 유사한 단어가 원문의 본래 단어를 대체하고 비슷한 구문은 동일한 구문인 줄 알고 아예 빼버렸던 것. 그러다 보니 원문과 사뭇 다른 사본들이 활개를 쳤다. 여기에 사본을 제대로 베끼지 못한 사본을 원문 삼아 필사한 또 다른 사본들이 유통되는 등 부정확한 사본이 확대 재생산되었다. 후대 사본 중에는 앞선 사본의 오류를 잡으려고 구문의 위치를 바꾼다든지, 잘못된 단어를 교정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과적으로 부정확한 필사를 부추기고 말았다. 

오류가 반복되는 악순환의 연결고리를 끊어야 했다. 관심은 원문을 찾는 데로 모아졌다. 그리고 그것마저 여의치 않자 원독법 탐구라는 본문 비평의 방법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시대 상황을 고려한 내외적 판단 잣대를 가지고 성경에 나타난 단어 또는 구문 상 오류를 원문에 가깝도록 유추 해석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원문이 없는 상태에서는 이마저도 또 다른 해석상 오류를 남길 개연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오늘날 성경이란 이런 저런 오류가 집적된 불완전한 책이란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과연 믿을 만한 책인지에 대해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듯 불완전한 성경을 정경으로 믿고 있는 크리스천들을 한심하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존 밀이 3만 군데가 넘는 오류를 찾아냈다는 부분에 이르러선 성경의 가치를 송두리째 부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냈다고 큰소리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 3만개 이상의 오류가 있다해서 그것에 비할 때 정확한 구문이 수천 또는 수십만 배에 달할 성경 전체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리고 그 오류가 대부분 구문과 단어에 해당하는 한 본래 성경이 맥락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간단히 부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부터 단견이 아닐까? 그것은 특정상황을 일반화하려는 심리학적 오류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오류는 수정하라고 있는 것이지 그 오류가 속한 전체를 간단없이 부정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의 가치 또한 ‘그러니까 성경은 없어져야 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원문에 가깝게 복원하려는 노력을 통해 성경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에 귀 기울일 수 있어야 한다는 대중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데 있다.

원문을 찾으려는 노력과 원독법을 동원해 성경을 해석하려는 시도 모두 성경을 보다 올바르게 이해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을 이 땅의 크리스천에게 먼저 권한다. 아울러 기독교에 비판적인 이들에게도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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