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체험 - 그 이론과 실제
로버트 하이들러 지음, 크리스 차 옮김 / WLI Korea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평양 대부흥 100 주년을 맞아 어느 때보다 성령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는 요즘, 그런 관심에 부응하듯 성령을 다룬 다양한 책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다. 긍정적인 현상이라면 그 수만큼 독자들의 다층적인 정보욕구를 충족해 줄 수 있다는 것인데, 그 책들이 당초 의도했던 소기의 목적을 거두고 있는지는 아직 미지수다.

 

그것은 은사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이 상대측에 갖고 있던 반목를 상당 부분 벗었다고는 하지만 밑바탕에 흐르는 일말의 경계를 온전히 거둬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그런 반목과 경계가 때만 되면 수면 위로 떠오르는 앙금으로 남게 하지 않으려면 양측 모두 본질적인 문제를 처음부터 다루려는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노력은 그 동안 그들 내부에 쌓아왔던 견고한 진, 곧 '나만이 옳다'고 하는 순혈주의를 극복하려는 데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로버트 하이들러의 『성령체험』은 그런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책으로서 손색이 없다. 저자는 이 책에서 각 장의 초두에 성령에 관한 체험적 사실을 기술함으로써 주의를 환기시키고 곧이어 성경적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그것이 분명한 토대 위에 세워진 것임을 밝히고 있다. 성령에 관해 균형 잡힌 시각을 얻으려는 독자라면 이 책을 통해 충분히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이 성령의 이론과 체험의 어느 한편으로 기울기 쉬운 일종의 쏠림현상을 막아주고 있기 때문이다.

 

책의 구성은 성령의 의미와 본질을 시작으로 성령사역을 위한 기초적인 조건, 방언과 신유의 은사 순에 따라 촘촘하다. 그렇다고 이 책이 성령에 관한 모든 사항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다고 착각해서는 곤란하다. 그 점은 저자도 경계하고 있는 바다. 성령에 관해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가 그의 피조물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극히 초보적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해야 옳다. 중요한 것은 지식의 정도가 아니라 성령에 대한 민감도 일 것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믿음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 책이 일반에 여전히 퍼져있는 성령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와 근거 없는 환상을 불식시켜 줄 것으로 기대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늘의 언어 - 하늘문을 여는 열쇠
김우현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200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늘의 언어』는 성령님이 부어주시는 방언의 능력과 비밀의 준령을 미지의 땅을 밟는 구도자의 진지한 걸음과 환희에 찬 시선으로 힘차게 넘나들며 꼼꼼히 탐침(探針)해 들어간 보기 드문 수작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초대교회의 역사가 마가의 다락방에서 방언을 통해 시작되었듯이 선교 100주년을 맞아 '가장 아름답고 강력한 부흥'을 고대하는 이 땅의 시작 또한 성령의 은사인 방언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음을 실제 그와 그 주변에서 벌어진 일을 통해 생생히 드러내고 있다.
 

책의 전편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저자의 말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방언이란 하나님이 창세로부터 계획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내밀한 언어이자 악한 영의 세력을 파쇄(破碎)하는 강력한 무기"다. 이런 저자의 시각은 방언을 하찮은 것으로 치부하고 그것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크게 의미를 두지 않은 기존 교단의 시각에 정면 배치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방언은 성령의 선물 중 하나일 뿐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인 교계의 풍토를 염두에 두면 저자의 생각은 위험천만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과연 방언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하찮게 취급될 성질의 것일까? 성경연구와 복음전도에 전념하는 지성주의가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다. 지성주의는 성경연구에 관한 한 탁월한 모델을 제시해 왔으며, 선교 단체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쳐왔다. 반면 성령사역은 강조되지 않았다. 그것은 묵시적으로 신비주의의 한 형태로 취급되었다. 사정이 그렇다고 성령사역의 필요성이 감쇄(減殺)될 수는 없었다. 동남아시아와 중동 지역 등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요구되는 곳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었을 뿐 국내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성령사역을 강조하는 은사주의 교단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던 복음주의 교단이 성령 사역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방언 또한 최근에 이르러서야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듯하다. 편견이야말로 파쇄되어야 할 견고한 진일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당신이 뜻하신 목적을 이뤄 가시지만 우리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성경 속에 살아 숨쉬는 성령사역을 도외시하는 동안 하나님 나라의 확장 속도가 더디 이뤄졌을지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는 내내 성찰과 회개와 경계로 삼아야 할 것이다.

 

저자는 성령에 붙들린 이후로 그분께 절대 순종하기로 결심하고 나서 깨닫게 된 방언의 의미는 '영이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는 은혜의 통로'라고 하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것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린도전서 2:7)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로새서 1:27)

 

하나님이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듯이 하찮게 취급된 방언을 통해 크고 비밀한 일을 이뤄 가고 계시며, 앞으로도 계속 이뤄 가실 것임을 본 저자는 방언에 관한 성경말씀을 두루 꺼내 그 말씀들이 오늘날 어떤 모양으로 해석되고 실제화 되었는지를 '바로 그 방언'을 통해 변화되고 영적으로 성장해 간 사람들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소설처럼 빠르게 읽히는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방언의 은사에 대해 열망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방언이 하나님 나라를 여는 구체적인 통로임을 확연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역설은 일견 이치에 닿지 않는 듯하지만 곱씹어 보면 놀라울 정도의 함의를 담고 있는 논증을 일컫는 말입니다. 역사는 실제 일어난 사실의 기록이므로 이와 같은 역설이 자리 잡을 여지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역사를 통해 배운다는 것은 똑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의지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얘기도 심심치 않게 들리고 있습니다. 어느 면에서 틀리지 않은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만 가지고는 조금 밋밋합니다. 누구나 다 인정하는 말이지만 그래도 조금은 다른 시각과 시선으로 대상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최근 발간된 역사소설이 주는 무게감이 녹록치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 소설이 센세이셔널하다거나 획기적이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뭐 이리 박진감이 없어’, 하는 맥 빠진 소리부터 나올 소지가 큰 소설입니다. 주제 또한 썩 내키지 않습니다. 패배한 역사보다는 성공한 역사에 열광하는 대중의 심리를 단박에 저버린 소설이기에 그렇습니다.

이 소설은 잘 아시는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병자호란이 우리에게 뼈아픈 전쟁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소재로 소설을 쓸 요량이라면 그 와중에 분연히 떨쳐 일어나 국가와 민족을 위해 초개와 같이 산화한 의병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았다면 얘기하고도 좀 낫고 모르긴 해도 민족적 자긍심도 생겼을 겁니다. 그런데 소설은 마치 작심한 듯 남한산성에서의 항거와 삼전도의 굴욕을 중심 테마로 하고 있습니다. 읽기도 전에 뻔하다고 생각할만한 소재입니다. 굳이 왜 굴욕적인 역사를 들춰내려하는지 모르겠다는 볼멘 독자의 소리가 공개적으로 들릴 만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읽어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 소설엔 다른 무엇인가가 있다는 얘기를 합니다. 전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얘기에 이렇게 조응하고 싶습니다. 실패한 역사 속에 기어코 감추지 못한 깊은 생채기가 되살아나는 아픔이 살을 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역사 또한 우리 선조가 살아낸 역사의 한 부분이므로 사실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뭐 그런 것입니다. 이런 말이야 제가 생각하기에도 상식선에서 벗어나지 않은 뻔한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런 뻔한 말 속에 미처 곱씹지 못한 진리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자의 소설은 역사소설이라면 이 정도는 갖춰야 한다는 일반의 시각, 곧 큰 스케일에서 오는 웅장함과 도도히 흐르는 대하 앞에 선 인간의 깊은 탄식과 숙연함, 각양각색 독특한 캐릭터를 지닌 인물의 생멸이 가져다주는 긴박감과 그들 사이의 일진일퇴의 공방이 초래하는 박진감 등등을 이 소설은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심인물이라고 해봐야 김상헌을 필두로 한 주전파 몇몇과 주화파의 거두 최명길과 주변인물들이 전부일 정도로 옹색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렇다고 스토리가 탁월하냐 하면, 저자에게 조금은 미안한 말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스토리의 흐름은 전체적으로 앉았다 섰다를 반복하고, 인물들의 성격은 다면적이지 못합니다. 그렇다보니 딱히 이 소설은 그래 이것이다 할 정도로 무언가 독자의 심중을 콱 박는 결정적인 무기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많은 독자들이 이 소설에 환호하는 것일까요? 개인적으론 독자들의 열광이 이 소설의 미덕과 연결되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실패한 역사를 정면에서 응시하는 건조한 눈. 전 이 소살의 탁월한 가치를 이 부분에서 발견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예를 들었듯이 역사소설이 갖춰야할 미덕을 전혀 갖추지 못한 소설이 오늘 놀라울 정도로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이야말로 이 소설의 역설입니다. 그런 역설은 이 소설이 통상적인 역사소설과 다른 데서 기인하고 있습니다. 독자로 하여금 다른 시각을 열어놓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흡인력을 지니고 있다는 말과 통할 것입니다.

자학과 피학이 뒤엉켜 모멸감이 극에 달한다고 느끼는 순간 그 자학과 피학이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자각의 과정이었다고 하는 묘한 인식적 전환을 가져다주고 있습니다. 한순간도 돌아보고 싶지 않다고 도리개질을 해도 심중엔 그래도 한번쯤이야 돌아봐도 괜찮겠지 하는 독자의 복합적 심리를 교묘히 파고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관음증과도 같습니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 소설이 훔쳐보기가 주는 짜릿한 감흥을 불러일으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이 궁극적으로 이 책이 여타 소설과 다른 맛을 내고 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다른 한편에선 일종의 지적 탐험을 제공해 준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바삐 살다보면 평소 잘 보이지 않던 것들을 한 치 건너서 볼 수 있는 기회, 사실 많지 않습니다. 선선한 가을날, 이 소설을 통해 우리가 미처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과,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을 훔쳐보는 짜릿한 별맛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댓글(0) 먼댓글(1)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김훈이 "남한산성"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from 風林火山 : 승부사의 이야기 2007-11-05 02:15 
    남한산성 - 김훈 지음/학고재 2007년 10월 31일 읽은 책이다. 올해 내가 읽을 책목록으로 11월에 읽으려고 했던 책이었다. 재미가 있어서 빨리 읽게 되어 11월이 아닌 10월에 다 보게 되었다. 총평 김훈이라는 작가의 기존 저서에서 흐르는 공통적인 면을 생각한다면 다분히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매우 냉정한 어조로 상황을 그려나가고 있다. 소설이기에 작가의 상상력이 개입이 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읽었음에도 주전파..
 
 
 
고맙습니다 성령님
손기철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200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길 때마다 전전긍긍하면서 한가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까닭 없는 불안이 신앙과 양립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의문은,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라는 분명한 말씀 앞에 불안한 감정이야 복잡한 세상에 사는 이상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불가피한 감정이 아니겠느냐는 항변이 사실은 근거가 박약한 자기 암시나 어설픈 위로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자각에서 비롯하고 있었습니다.

 

성령님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크게 증폭된 건 지난 해 말입니다. 그해 7월, 오랄 로버츠의 『내 안에 역동적으로 역사 하시는 성령님』을 시작으로 연말에 신디 제이콥스의 『초자연적 삶을 살라』, 라인 하르트 본케의 『부흥, 성령의 역사』, 백복님 사모의 『내게 불같이 임한 성령님』, 조이 도우슨의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불』, 김우현 감독의 『부흥의 여정』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올해 초 베니 힌의 『성령님의 기름부으심』을 연이어 읽게 되었습니다. 이들 책들은 하나같이 영적 통찰력으로 가득했습니다. 당연한 결과지만, 개인적으로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2% 부족한 무엇인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채워지지 않던 허전함이 이 책, 『고맙습니다, 성령님』을 만나고서야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책은 평신도로 치유사역에 헌신하고 있는 손기철 장로가 썼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그가 만난 성령님을 생동감 있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 책의 미덕은, 그렇습니다, 전후 과정이 가감 없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각 패러그래프의 시작과 끝에 삽입된 성경말씀이 교계에 떠도는 성령님에 관한 잘못된 통념을 바로잡아 주고 있습니다. 통념은 통념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통념은 성경 속에 분명히 기록된 성령님을 제한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삼위일체의 한 격이신 성령님을 마치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아래에 있는 분으로 오해하는 것으로 변질되기도 합니다.

 

한가지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저 또한 그렇게 배웠습니다만, 복음주의 교단에 속한 신자의 경우 마가의 다락방에 있었던 성령체험을 일회적인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성령님이 주시는 은사 중 하나인 방언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골이 깊어지면 은연 중에 그것을 하찮은 것, 또는 굳이 받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단정해 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방언이 주는 유익이 상당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렇게 치부할 일이 아니란 걸 알게 됩니다.

 

방언은 영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시간을 넘겨 기도를 해도 언제 그렇게 됐나 싶을 정도로 깊은 교제 가운데 들어간다고 합니다. 저도 아직 그 맛을 몰라 남의 말하듯 하고 있지만 그래도 예전과 달리 방언에 대한 소원이 강하게 생긴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어떤 형태로든 잘못된 시각은 교정되어야 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것이 영적인 차원의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단순하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실제적이라고 믿는 우리가 어느 기록은 일회적인 것, 또는 단순히 배우는 선에서 그치는 과거사로 단정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하늘의 일을 송두리째 아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 우리는 저자의 삶에 역동적으로 역사하시는 성령님과 가까이 마주하게 됩니다. 그것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성경말씀, 특히 성령님에 관한 구절이 불현듯 뒷덜미를 채는 경이로움에 사로잡힌 결과일 것입니다. 참 신기한 일입니다. 성령님에 관한 내용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합없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었는데 보지 못했다니 신기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이 보내신 분입니다. 그가 하시는 일은 우리로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고 생각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이 변화산 상에서 하늘로 올라갈 때는 제자들이 따라 갈 수 없었지만 보혜사 성령님이 예수님을 대신해 우리 가운데 오신 후로 언제나 주님과 동행하는 길이 열렸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고 했습니다.

 

티브이 코미디 프로그램 중에 이런 코너가 있습니다. 그 코너는 한 선생님과 세 학생의 대화가 주요 테마를 이루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한 학생을 유독 험하게 다루는 장면에서 한 학생이 불쑥 끼여드는 장면이 나옵니다. 순간 아무도 그를 주목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마치 그가 없기라도 하듯 버젓이 다음 대사를 이어갑니다. 우린 그 장면을 보면서 그 학생의 고통스런 심중을 헤아려 봅니다. 우리의 행위가 그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안팎에 계신 성령님을 우리가 그렇게 무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이 그가 지난해에 펴낸 『치유와 권능』의 후속작이라는 것을 최근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치유와 권능』은 『고맙습니다, 성령님』에 비하면 다분히 학술적입니다. 과연 이런 책이 전에 있었나 싶을 정도로 성령님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어느 책을 먼저 읽든 상관이야 없겠지만 개인적으론 『치유와 권능』을 통해 성령님에 대한 성경적 관점을 확실히 하고 『고맙습니다, 성령님』을 읽는 것이 보다 효과적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성령님을 깊이 만나고자 열망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하겠습니다. 성령님은 인격적이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초청하지 않으면 오시지 않습니다. 동행을 원하지 않으면 가까이 다가오시지 않습니다.

 

저자는 성령님을 애인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관계를 친밀하게 맺고 있다는 것입니다.그런 친밀감에서 오는 진한 사랑 때문일 것입니다. 어느 누구든 이 책을 읽으면 성령님이 얼마나 아름답고 좋은 분인지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거룩한 열정
존 비비어 지음, 윤종석 옮김 / 두란노 / 2003년 10월
평점 :
품절



오래 전 리뷰를 통해 의미를 되새겼던 책을 다시 꺼내놓고 읽은 건 최근 겪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다. 늦게 포도원을 찾아든 품꾼에게도 동일한 삯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새삼 가슴을 복받치게 했다. 방언의 은사가 덤으로 주어졌고, 그 과정에서 제사보다 순종이 낫다는 말씀의 의미를 비로소 깨닫게 됐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을 향한 열정 가운데로 들어가는 문이 열렸다. 그 여정에 존 비비어의 『거룩한 열정』이 또 다른 깨달음을 주지 않을까 싶은 기대감이 일었던 것이다. 
 

존 비비어는 '의도'와 '욕심'을 구별해내고 있다. 아무리 선한 의도(또는 의지)가 있다해도 욕심을 버리지 않으면 바라는 만큼의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의 핵심이다. 담배를 끊지 못하는 목사가 있었다. 담배를 끊기 위해 그런 자신을 회중 앞에서 고백하고, 수없이 기도하던 그였지만 정작 같은 문제가 있던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로 끊을 수 있었던 담배를 끊지 못하는 것에 분개했단다. 그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네가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제서야 비로소 말만하고 끊을 욕심은 없었던 자신의 문제를 깨닫고 그후로 다신 담배를 피지 않았다는 것이다. 
 

교회에 갈 때마다, 또한 어떤 문제에 봉착할 때마다 내 안에선 기도해야 한다는 생각이 동시적으로 일어난다. 여기까진 좋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런 생각만으로 하루가 가고 일주일이 가고, 몇 달이 가버린다. 의지는 있지만 그 의지가 실행으로 옮겨지지 않는 건 저자의 말대로 욕심 때문이다. 편하게, 물론 그것이 편한 것이 아니라는 게 나중에 밝혀지지만, 앉아서 신앙서적을 읽는다든지, 교제하고 만다든지 하는 일견 크리스천적인 행위로 마감하는 것 등등의 유사 신앙 행위를 버리지 않는 데서 하나님의 은혜는 설자리를 잃고 만다.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 죄인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무작정 피동적으로 받아야 하는 입장에만 서 있는 것은 아니다. 모세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 오르기 위해선 옷을 빠는 성결이 있어야 했다. 성결은 이스라엘 시대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크리스천에게 주어진 의무인 것이다. 누가 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것이야말로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고 하면서 정작 자신이 마땅히 해야할 의무를 방기할 수 있는 차원의 것도 아니다. 
 

믿음이 물론 중요하지만 그에 따르는 합당한 행위 또한 필요함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씀과 행위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말씀은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외적으로 표현되지 않는 믿음의 허구성을 돌아보면 양자 사이의 균형이 왜 필요한지 보다 분명해진다. 믿음은 이웃 사랑이라는 실천으로, 또한 동역이라는 실제로 바뀌어야 한다.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은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느냐는 성경 말씀은 그런 경우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열정은 '연단된 금'과 '옳은 행실을 나타내는 흰옷', '그분의 눈으로 보게 하는 안약'을 사는 데서 출발한다. 모두 성결한 삶을 위한 필수 도구이다. 그것들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결한 동역자를 찾으신다. 불완전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동역자가 될 수 있을까 싶지만 하나님 편에선 그게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으며,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죽으셨으며, 멀리는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를 위해 손수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구애하듯이 우리를 찾으신다.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가 안다면 우리도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하고자 열망함이 마땅하잖을까. 
 

성결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최소한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 보이기를 원해도 그렇게 할 수 없는 건 전적으로 우리 속에 있는 작고 큰 죄 때문이다. 하나님이 미워하시고 또한 우리가 벗고자 원하는 그 죄악에서 벗어나려는 부단한 믿음의 경주가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이 책은 우리가 안다고 믿으면서도 실제 영적인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부분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일러주고 있다. 더불어 하나님을 향한 열정에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적절하게 드러내 보이는 통찰력으로 번득인다. 이에 못지 않게 '믿음'과 '행위'라는 균형추를 어느 한쪽, 특히 믿음으로만 옮겨 놓고 있던 신앙적 오류를 바로잡아주는 탁월한 미덕을 갖추고 있다. 

 
-『거룩한 열정』(존 비비어, 두란노, 2006)
- 책 이미지는 인터넷 서점 「예스24」에서 가져왔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