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내 기쁨을 훔쳐갔을까? - 어떤 상황속에서도 기쁨을 유지하는 법
산드라 스틴 지음, 서진희 옮김 / 베드로서원 / 200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요한복음 16:22)

 

성경 말씀에 따르면 기쁨은 본원적으로 크리스천들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기쁨은 그 근원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로 쉽게 양도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자주 기쁨의 자리에 두려움, 걱정, 좌절 등 부정적인 태도들을 가볍게 허용한다. 그 결과,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두려워하고 걱정하며 좌절한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하는 것이 온당한 걸까? 어쩔 수 없는 일일까?

 

하나님은 우리를 기뻐하신 존재로 창조했다.(창세기 1:31) 창조 목적대로라면 우린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늘 기뻐하며 만족스럽게 살게 되어 있었다. 아담의 죄로 인해 우린 기쁨의 원천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짐으로써 더 이상 기쁨을 누릴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그 기쁨을 되찾을 수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기쁨이 다시 우리 것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사단이 주는 부정적인 생각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른다고 했다.(로마서 10:10) 머리 속에 스며든 생각들을 마음에 받아들이면, 즉 입으로 시인하면 그 부분에 사단이 지배권을 행사하게 된다. 우리 몸의 지배권을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죽음으로 되찾아 왔음에도 부정적인 생각에 동의하는 순간 그 효과가 우리에게 미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곧 나의 지배권을 사단에게 양도한 것과 같다. 아담이 다스릴 권세를 사단에게 넘겨주었듯이.

 

이 책은 부정적인 생각과 태도가 지니는 폐해들을 면밀히 관찰하고 있다. 상대방을 가장 잘 아는 방법은 그의 입장에서 그의 말을 들어보는 것이다. 이 점을 저자가 정확히 짚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자신이 명명한 결핍, 파괴된 인간관계, 질투, 배반, 분노 등의 '기쁨탈취자들'을 의인화하고 '기쁨'이 그들을 만나 그들이 자신을 변론하는 내용(인터뷰 중에 자신의 약점을 실토하는 우를 범하기도 하지만)을 인터뷰 형식으로 담았다. 기쁨이 인터뷰어이고 기쁨탈취자가 인터뷰이인 셈이다. 그들의 대담은 시종 인터뷰이의 생각(과 관점, 태도, 주장)을 끌어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런 면에서 동일하게 의인화된 '기쁨'의 인터뷰어역에 후한 점수를 줘도 좋다.

 

다만 아쉬운 점은 기쁨탈취자들의 특성과 영향력을 서술한 내용들이 대부분 익히 알려진 수준 이상을 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두려움이 연상케 하는 일반적인 인상을 기술하는 정도의 내용이라면 사실 그렇게 충격적이지 않다. "나의 고객들은 쓸 만한 정보들을 많이 얻기 원하죠. 그런데 막상 홍수같은 정보는 그들을 더욱 두려움에 빠지게 만들어요. 나는 고객들에게 정보를 받아들인 후 그것을 아주 크게 확대해석하도록 부추기죠."(p113)

 

저자가 본래 의도한 대로 이 책이 기쁨탈취자들을 가려내고 그것들이 침탈하지 못하도록 기쁨을 유지하는 법을 알려줄 요량이라면 기쁨탈취자들이 끼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보다 직접적으로 기록함이 옳았다. 이런 경우 저자의 경험담이라든지 타인의 체험 등이 처방이 될 수 있다. 기쁨탈취자들을 열거하고 그것들을 단순히 정의하는 수준에서 그치면 그것들에 대해 경계의 끈을 바짝 조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아쉬움이 사뭇 커 보인다.

 

물론 그렇더라도 본원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기쁨을 무엇이 빼앗아 가는지 찬찬히 돌아볼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선 상당히 고무적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 그렇지 않더라는 넋두리를 한번쯤 해보셨을 게다. 사실 부질없는 짓임에도 어느 땐 누군가 곁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려줬으면 하고 바라기도 한다. 그 역할을 이 책이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될 일이다. 이 책의 효용가치를 기억을 되풀이하도록 도와주는 몽학선생에 둬도 좋을 것이다.

 

책은 기쁨탈취자들 외에 '기쁨보호자들'을 소개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기쁨보호자들은 기쁨탈취자들과 달리 기쁨을 고양하고 기쁨에 조력하는 역할을 한다. 그들은 축하, 격려, 긍정적인 태도, 사랑, 희망, 용기, 평화 등으로 밝은 이미지를 갖고 있다. 기쁨이 당신의 삶에서 항상적으로 유지되기를 바란다면 우선 기쁨이 원천이 어디서 비롯되는지 분명히 깨닫고 기쁨보호자들을 자주 생각하고 말로 선포함으로써 그것들을 불러들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럴 때 기쁨을 빼앗으려고 기회를 엿보는 기쁨탈취자들의 책략은 책략으로 그칠 것이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한 베드로에게 앉은뱅이가 걷는 기적적인 역사가 일어났듯이 우리 또한 자주 입으로 긍정적인 말을 선포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에 기록된 긍정의 말들은 그런 의미에서 적절하다.

 

● "오늘 나는 기쁜 마음으로 미소를 지으면서 잠자리에서 일어날 것이다."
●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며 목적의식을 분명히 할 것이다."
● "나는 장애물을 이겨낼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내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극복할 것이다."
● "나는 나의 자존감을 깎아내리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섬길 수 있다."
● "나는 내 자신을 믿으며, 내가 더 많이 웃게 될 것과 끝을 잘 마무리 할 것이라고 믿는다."
● "나는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과 하나님 안에서 내 기쁨이 참되고 완전한 것임을 믿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완득이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해괴한 녀석이 나타났다!! 틈만 나면 교회에서 제 선생 죽여달라고 기도하는 녀석, 아비 키 작다고 놀리는 녀석에게 '선빵'부터 날리고 보는 손 빠른 녀석!!! 녀석에 대한 시중의 평가,  '종잡을 수 없는 놈.'

 

가족은? 술집에서 작은 키에 중절모를 쓴 채 손님과 춤을 추던 아비는 여자가 엉덩이를 툭툭 친 대가(?)로 돈을 받았다. 나무랄 데 없는 춤이라도 작은 키가 핸디캡이었다. 허우대가 멀쩡한 삼촌은 아비에게 배워 제법 화려한 춤 솜씨로 좌중을 휘어잡았다. '어버버' 투의 말 본새로 손님 '필'을 확 깨게 하는 포스만 없었다면 그 둘의 콤비는 손님을 배꼽 잡게 하는 데서 감탄사를 연발하게 하는 데까지 두루 먹혔을 것이다.

 

공부하곤 담쌓은 아들, 완득이와 좀 다른 아버지, 강렬한 말 본새를 자랑하는 삼촌 등 주인공 가족의 캐릭터는 평범 그 이상이다. 이 책은 이들 가족의 '일상 다반사'다. 중심구도는 완득이의 생활에 맞춰져 있지만 완득이와 얽힌 다양한 군상들의 독특한 캐릭터가 깨소금냄새를 솔솔 풍기며 독자의 코를 비롯한 감각 전부를 가만 놔두지 않는다. 

 

이제 수십 년은 족히 지났을 어린 시절, 야트막한 산 밑 키 작은 동네에 수십 채가 모여 밥짓는 냄새를 담장 안팎으로 주고받으며 정겹게 살았다. 찬바람에 콧물 날리는 것도 잊은 채 낮과 밤을 구별 못하고 사는 아이들의 소리가 골목마다 넘쳐흐르고 멋모르고 지나가던 사람들의 발채를 움찔하게 만든 제법 큰 개들의 짖는 소리가 정겨웠던 그곳. 철마다 떡볶이, 국화빵, 호떡 냄새가 가실 날 없던 그 동네에도 완득이가 있었을 터. 오늘 이 소설의 주인공, 완득이는 그 시절 아이들의 또 다른 이름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좀 유별난 아이이긴 해도 악의 없는 말투와 상대를 봐가며 고개를 숙이고 쳐드는 품새며 욱하는 성질머리 등 꼬집어보면 누구에게 있는 성격이 완득에겐 조금 도드라져 보일 뿐 그의 일상은 독자들의 기억 속에 고스란히 드리워진 시절의 자신 또는 가까운 친구, 어디선가 들어본 어떤 아이의 일상과 다르지 않다. 일상을 파고드는 완득이의 일탈이 눈살 찌푸리지 않게 그려진 이유는 그런 탄탄한 배경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울타리라고 불러도 좋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순응과 일탈 사이를 오가는 요즘 아이들의 일상이 그와 같지 않을 수 없으며 오랜 시간을 지나온 중년의 삶이 또한 그와 다르지 않을 터였다. 아이의 순응과 일탈이 가족과 학교 사이에 그 경계를 두고 있다면 중년의 그 경계가 직장과 지나온 삶에 대한 회한이라는 형식만 다를 뿐 두르고 있는 울타리라는 성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런 탓에 이 소설이 더욱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추억되는지 모를 일이다.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해 들어가는 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여타 작품과 달리 이 소설은 팩트가 살아있는 허구라는 독특한 이미지를 내장하고 그것을 누구에게나 있을 어린 시절의 추억과 연동시킴으로써 독자가 자신을 주인공과 동시적인 존재 또는 주인공의 눈을 가진 가상의 존재로 설정하는 데 거리낌없게 만들어주고 있다. 독자의 강박적이지 않은 위치 설정, 보다 정확히 말하면 자발적인 감정이입의 소설독법은 대상에 대한 몰입을 극한으로 몰고 가 주인공의 일거수일투족과 내뱉는 말투에 '키득키득', '컥컥' 하는 기묘한 웃음소리를 동반케 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따라서 옆에 누가 있는지 우선 살필 일이다.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직장 상사거나 나이 많은 사람이거나 아주 어린아이라면 잠시 책을 덮고 속으로 음미하길 권한다.

 

이쯤에서 담임 똥주 이야기를 해야겠다. 완득이는 어찌됐건 자칭 조폭 선생인 똥주를 만나면서 인생이 바뀌기 시작했다. 때만 되면 교회에 가서 똥주 죽기를 기도했던 완득이조차 똥주의 사랑스런(?) 행동에 차츰 마음을 열기 시작했던 것. 사랑스런 행동이라고 해야 그 또한 좌충우돌이라 '같은 과' 완득이에게도 썩 마음 드는 구석은 아니었다. 짧게 요약하면 이렇다.

 

완득이 아버지가 재개발 물결에 나가던 술집에서 본의 아니게 쫓겨나 전국 행상을 할 요량으로 똥차를 한 대 샀다. 어느 날 그렇지 않아도 밤마다 똥주가 옥상에서 완득이를 소리쳐 부르는 통에 성질이 날대로 난 앞집아저씨가 차체에 '씨불놈'이라 써놓았고 그걸 본 완득이가 아저씨 면상에 주먹을 날렸다. 경찰서에 끌려간 장본인들 사이에서 똥주가 멋지게(?) 중재를 섰다. 하여 서로 애초 없던 일이 됐다. 그 때부터 조금씩 마음을 열었던 걸까? 베트남 어머니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려준 것도 똥주. 심부름을 시키면서 굳이 가는 곳에 어머니가 있다는 말을 뱉은 똥주를 용서한 걸 보면 완득이와 똥주의 밀월 관계가 바야흐로 시작되려는지도.....

 

이 외에도 독특한 캐럭터를 지닌 인물들이 많다. '밤마다 쌍욕을 해대며 똥주와 싸우는 옆집 아저씨', '잊을만하면 등장해서 완득이를 자매님이라고 부르는 핫산', '똘아이계의 본좌 혁주', '전교 1, 2등을 다투는 모범생이면서도 완득이에게 관심을 갖는 윤하' 등등 그들이 발산하는 매력이 소설을 더욱 소설답게 한다. 그만큼 작가가 인물들을 잘 살렸다는 의미겠다. 더구나 이들은 중심인물이 아니면서 좀체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는 인물들로 각인된다. 단역들이 대부분 주인공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드는 지원 역할을 부여받고 있는 것과 달리 소설 속 단역들은 하나같이 하나의 완성된 이미지를 갖고 근거리에서 중심인물과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며 스토리를 전체적으로 밀도 있게 잡아주고 있다. 주인공의 원심력과 단역들의 구심력이 적절한 조화 속에 균형을 이루는 소설 미학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작가의 인물론을 들어보자. "완득이와 똥주는 남 보기에는 싸움도 잘 하고 자신감이 충만해 보이지만, 사실 그들의 자신감은 불완전한 거예요. 누군가 정곡을 콕 찌르면 곧 무너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자신감인데, 이 자신감 마저 없으면 하루하루 버티기가 힘들어 이를 앙다물고 살았던 거죠. 완득이와 똥주는 그림퍼즐 같은 관계예요. 나한테 없지만, 너한테 있는 조각이 맞물려 전체 그림이 완성되니까요. 어쩌면 지금 우리들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며 만들어낸 인물들입니다." "......간혹 독특한 행동이나 말투를 가진 분들을 보면 메모를 해둡니다. 간단한 그림과 함께 그들이 입었던 옷이나 들고 있는 물건 같은 것들을 기록해요. 이건 그저 제 습관이었는데,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실제의 인물 두 명의 캐릭터를 섞어 작품 속에서 하나의 인물로 만들어내기도 하지요."(이상 큰따옴표 부분은 창비의 작가 김려령 인터뷰, 〈반짝반짝 빛나는 열정의 청춘을 위하여〉에서 인용)

 

생활주변에서 손쉽게 만나는 사람들의 행동과 말투를 놓치지 않고 꼼꼼히 기록한 작가의 집요한 열정이 소설 속 인물들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쓰였다는 대목에 이르러 감탄했다. 잠시 눈을 돌리면 지금이라도 어느 곳에서나 마주칠 법한 인물들이라는 공감을 이 소설이 불러내는 이유가 사람에 대한 작가의 따뜻한 시선에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의 말이 여실히 입증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슴 따뜻하고 마음 흥겹게 읽히는 소설의 탄생을 축하한다.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아파트가 자기 안에서 사는 사람들에 대해 관찰한다는 설정'이 중심 테마로 그려질 그의 차기작을 서둘러 기대한다. 입심으로 독자를 사로잡는 작가의 등장은 설레기 마련이다. 대표적 이야기꾼인 성석제가 제자리를 찾아 돌아올 준비를 하고 있는 마당에 김려령이라는 준비된 작가를 만나고 보니 가슴이 한참을 두근거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뜻길돈 - 윤태익 위기극복 콘서트
윤태익 지음 / 지식노마드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마음 먹기에 달렸다."

 

다는 아니겠지만 대부분의 자기계발서가 하고 싶은 말이 이 말 아닐까 싶습니다. 경영학 박사이자 인하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로 재직 중인 저자의 책 또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르다면 어색한 책제목을 달고 있다는 정도입니다. "뜻을 세우고 길을 찾으면 돈이 따라온다."는 저자의 평소 지론을, 각 어구 첫 글자를 따서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뜻길돈〉이 그것입니다.

 

제목만 봐선 언뜻 투자 지침서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책엔 돈 얘기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면 성공한다'는 식의 하나마나한 이야기, 바른 생활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여타 투자 지침서에 질린 독자들, 특히 신물 날 정도로 돈, 돈 하며 목청을 높인 책들에서 맡지 못한 사람 냄새를 맡을 것 같아 이 책을 선택을 선택한 독자라면 이내 어이없어 할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경제 탓에 허리띠를 졸라매고도 모자라 근근히 입에 풀칠하고 사는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돈을 눈에 잘 띄는 표지에 언급하고도 돈에 관한 내용을 빼먹은 것을 저자의 단순한 실수라고 해야할지 아니면 호기심을 부추기기 위해 출판사가 자의적으로 책 제목을 선정적으로 만든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뜻을 세우는' 것의 중요성을 나무랄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시중에 넘쳐나는 투자 지침서에 호된 신고식을 치른 서민들의 애끓는 가슴을 달래 줄 요량이었든지 돈보다는 사람이 먼저라는 생각으로 용기를 북돋을만한 이야기를 담아야겠다는 선의에서든 책은 우선 진정성을 담아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처음이 책 제목으로 시선을 끌려는 얄팍한 상술을 버리는 데서 시작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나치게 호된 대접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마키아벨리즘이 경멸적인 시선을 받는 것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믿음 때문일 것입니다. 속과 달리 겉만 번지르르한 그릇에 담긴 내용물은 제대로 평가받을 수 없습니다. 더욱이 다른 것과 차별성이 두드러지지 않는 내용물이라면 다신 그릇을 보고 선택하지는 않겠지요.

 

요즘 한창 재테크에 관심이 많은 아내에게 이 책의 출판 의도가 남다르니 읽어보라고 선뜻 건넨 책임을 통감하고 있습니다. 출판사의 소개글이 선택의 제일 기준은 아니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같은 부류의 책과는 다른 구석이 있지 않겠느냐는 기대에 전적으로 기댄 제 잘못이 우선 지적되어야 하겠지요. 선택은 독자의 몫이니 출판사의 잘못은 나중 문제겠습니다.

 

둘째, 진정성은 내용의 현실성으로 보장되어야 합니다. 경제위기로 일자리가 급격히 줄어들었습니다. 일을 해야 돈을 벌고 돈을 벌어야 생활이 가능한데 그 원천이 상당부분 막혀 버렸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차상위 계층 여러 분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 배가 부르면 남 사정 모른다'는 말이 제 경우에 정확히 들어맞는 통에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화소연할 힘조차 잃은 분들의 고통스런 현실은 별 도움이 안 되는 '서푼짜리 지원'이나 위로랍시고 실제 도움도 되지 않는 '뻔한 말'이 얼마나 배부른 소리인지 알려주기에 부족하지 않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선 이런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말이 일리가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말은 조금 살만할 때나 가능한 말이지 않을까요? 지금은 당장 손에 돈이 쥐어져야 할만큼 어려운 때입니다. 고기를 어떻게 잡아야 한다고 말만 무성히 하지 말고 고기를 잡아주든지 고기 잡는 실제적인 방법을 알려주든지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면에선 직설화법으로 돈 버는 법을 가르쳐주는 투자 지침서가 보다 솔직하다고 해야겠지요.

 

저자의 이력이 책의 완성도를 담보하지 않습니다. 현실성이 떨어진 출판물은 시장에 좌절감이라는 부산물을 쌓을 뿐입니다. 자기계발서의 한계가 다 그렇다고 하면 할말은 없습니다. 이 책은 실제적인 재테크에 대한 도움을 얻으려던 아내의 손에서부터 떨어져 나갔습니다. 제겐 별 의미 없는 책이라는 인상을 부단히 주고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대중 처세어록 - 경박한 세상을 나무라는 매운 가르침 푸르메 어록
정민 지음 / 푸르메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묵은 작가의 다른 책이 나왔다. 인문학 분야에서 잘 나가는 작가로 여러 차례 소개된 바 있는 그는 〈비슷한 것은 가짜다〉, 〈미쳐야 미친다〉 등을 썼다. 그는 조선지식인을 재발견하는 작업을 오래 전부터 해왔다. 단 권으로 〈18세기 조선지식인의 발견〉(2007년)을 썼을 뿐 아니라 〈다산어록청상〉을 연이어 냈다. 이 책, 〈성대중 처세어록〉은 조선 지식인 찾기의 두 번째 책인 셈.

 

2004년 〈미쳐야 미친다〉을 출간한 후 한국경제와 인터뷰에서 "이들 조선지식인들의 인간적인 면이란 현대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나?"는 질문에 그는 "그들은 벽(癖)에 들린 사람들이다. 그러나 가난이나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주인되는 삶을 살다 갔다. 그 인간다움은 삶에 대한 통찰력을 일깨워주고 있다. 책에는 김득신이라는 조선중기 시인이 나온다. 그는 본래 아둔한 사람이다. 그러나 수많은 책을 수천번, 수만번씩 읽고 외웠다. 사기의 백이전은 10만번 넘게 읽었을 정도다. 잠자는 시간을 빼고 한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결국 그는 한 시대를 풍미한 시인으로 우뚝 선다. 노력하고 미치면 안 되는 게 없다는 것을 그 어렵던 시대의 조선지식인을 통해 체득할 수 있다. 자신의 노둔함을 탓하지 않고 오로지 노력으로 삶을 일궈낸 그의 인간다움에서 현대인들을 반추해볼 필요가 있지 않겠나."고 답했다. 그가 조선 지식인들을 재조명하는 이유다.

 

쉽게 얻으려 하고 얻은 것을 좀체 내주려하지 않는 현대인들에게 들려줄 말을 그가 조선 지식인의 입을 통해 대리 발설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다만 전작인 〈다산어록청상〉의 다산과 달리 성대중은 알려진 인물이 아니라는 정도뿐이다. 저자의 의도가 '온고지신에 기반한 성찰'이라면 조선시대의 지식인 반열에 든 사람은 누구든지 그에게 간택될 확률이 높은 법일 게다. 성대중도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 조금 다르다면 이번엔 처세에 관한 글을 묶었다는 데 있다.

 

처세서에 대한 어감이나 인상이 좋지 않았던지 요즘엔 주로 실용서로 불린다. 여태 실용서에 대한 인식은 썩 좋지 않다. 당연한 말을 당연하게 적어놓고 당연하게 판다는 것이 주 이유다. 과거에 요즘 말하는 처세서가 있었을까 싶지만 과거라고 사람 사는 모양이 크게 다르진 않았으리라는 추측이 맞다면 그 시절이라고 처세에 관한 책들이 없진 않았을 것이다. 주로 몸가짐에 초점을 맞춘 것이 지금과 다르다면 다를 터.

 

하지만 성대중 처세어록은 몸가짐에 한정하지 않았다. 저자가 10개의 주제어를 택해 선별 작업을 하고 그것들을 모아 책으로 엮은 후 제목을 〈성대중 처세어록〉으로 했을 뿐 이 책의 원전은 10편의 중국고사에 평론을 덧붙인 취언과 댓구로 이루어진 120여 항의 격언을 모아놓은 질언, 100여 편의 국내 야담을 모은 성언으로 이뤄진 청성잡기(靑城雜記)다. 성대중은 서얼이라는 신분적 한계를 갖고 있었지만 영조의 탕평책에 힘입어 청직(淸職)에 임명 된 후 박제가, 박지원, 유득공 등과 교유했다고 전해진다.

 

당대는 북학파가 이용후생의 실천정신을 주도적 기치로 내세운 때였다. 당시(18세기) 조선은 존화양이라는 명분에 쌓여 있었다. 알려진 대로 성리학이 그 토대였다. 하지만 18세기 성리학은 성리학 본연의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내성적(內省的) 측면을 유지한 채 실천철학적인 측면은 배제되어 있었다. 북학파는 정덕(正德) 이후에 이용후생이 있다는 성리학적 입장에 정면으로 맞섰다. 명분론에 앞서 청나라의 문물과 학술을 배워야 살 수 있다는 북학파의 주장은 주목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당시로선 소수파에 지나지 않았던 터라 그들의 실험은 실험으로 그치고 말았다. (앞서 청성잡기의 구성내용과 성대중의 교유 부분, 성리학의 토대 부분은 두산백과사전에서 인용하고 간략하게 정리했음을 밝힌다)

 

그들의 정신만이라도 계승되었으면 좋으련만 조선은 그렇지 못했다. 영조시대에 만개한 그들의 학문적 성취가 사회 전반으로 파고들지 못했다는 점에서 당시 사상계와 정치계에 만연한 천석고황과 같은 성채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성대중이 자신의 호에서 지켜내고 싶었던 것이 '노쇠하지 않는 푸른 성채(靑城)'였다는 점에서 그가 떠 안았을지 모를 시대적 모순이 아프게 전해져 온다.

 

〈성대중의 처세어록〉을 읽는 내내 그런 비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성대중의 전언은 때론 푸른 바다보다 깊고 청명한 하늘보다 높았지만 곧 비 뿌릴 하늘처럼 흐릿하고 어두워 보였다. 시대적 한계 내에 존재하는 지식인의 괴로움을 반영하는 듯 그의 글은 힘과 함께 현실 감내와 같은 저린 구석이 있다. 그렇다고 시대가 정신마저 묶어 둘 수는 없었을 터. 그의 정신이 이렇게 글로 남아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묵직한 깨달음을 던져주고 있다.

 

몸이 스러진다고 정신마저 흩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그를 통해 보아야 한다. 정신을 값싸게 취급하는 현대인들에게 올곧게 살다간 그가 경종을 울리고 있다. 우리 사회의 문제가 어디 경제적 문제에 한정되랴. 정신이 살아야 물질도 제 위치를 찾는 법이다. 천민 자본주의의 폐해가 횡행하는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그의 가르침이 매섭게 몰아치길 기대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춤추면 코끼리도 춤춘다 - 당신을 부자로 만드는 강력한 힘
이서윤 지음 / 이다미디어 / 200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경제위기 직전과 직후 줄곧 낮아지는 추세이기는 하지만 부자가 되는 방법을 소개한 책이 홍수처럼 쏟아진 때가 있었다. 당시 자금 흐름은 낮은 금리수준과 소폭상승과 급락 기조를 이어가는 주식가격 등 금융시장과 주식시장이 보여준 추세를 따라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들 고 있었다.

 

양도소득세와 종합부동산세가 투기자금의 유입을 차단하는 기제로 작동하기를 바랐지만 정부의 기대와 달리 부동산 시장은 매수자 시장 중심으로 활황세를 유지했다. 부동산 가격은 하루가 다르게 급등한 반면 청약과 부금 등을 부으며 주택을 구입할 꿈에 부푼 서민들의 꿈은 현실 저편으로 빠르게 사라져 갔다.

 

예상과 달리 종합부동산세의 납세자 수가 30만 명(국세청 발표자료에 따르면 2007년 종부세 총 납세인원은 50만 5천명으로 2006년 대비 48% 증가)을 돌파하자 서민들은 정부 정책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취득세 및 등록세의 세율을 낮춰 구입비용은 최소화하고 고율의 양도소득세는 현행을 유지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양도차익을 노리려는 투기세력을 부동산 시장에서 몰아내겠다는 정부의 의지는, 서민들은 치솟는 부동산 가격 부담이라는 진입 장벽에 막혀 시장에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 매몰되고, 양도 차익을 노리려는 투기세력은 최소한의 구입 또는 관망세로 돌아섬으로써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했다.

 

IMF 학습으로 정부가 금융감독원을 동원한 시장조절 기도에 은행권이 꿈쩍 않고 대출금리 인하에 미진하게 반응하는 전례 없는 일이 반복된 것이 오히려 부동산 시장의 과잉 투자를 막는 기제로 작동한 것은 다행이라고 하겠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도 부동산 구입은 계속되었다. 부동산 시장의 거품이 붕괴될 조짐이 있다는 진단과 아직 고점(高點)은 멀다는 예측이 팽팽한 가운데 부동산 가격은 상승폭은 둔화되었지만 상승세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부동산 관련 서적의 시장 수요도 만만치 않게 형성된 상태였다. 전례 없이 많은 수의 관련 서적이 쏟아져 나왔다. 예전과 달라진 점은 인터넷 카페를 통해 이름을 날린 블로거들이 시장에 가세하면서 전례 없이 실전 투자 붐이 일었던 것. 종자돈을 만드는 법에서부터 그 종자돈을 굴리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실전 위주의 서적 출판은 부동산 시장을 더욱 달구었다.

 

'실전에서부터 실전까지' 라는 출판 모토는 당시 법칙과도 같았다. 그런 경향은 확실히 눈에 띄는, 결국 검증 가능하고 실현가능성이 높다는 현실성을 반영하고 있었다. 달리 보면 보다 과학적인 접근방식으로 신뢰를 얻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경제위기 이후 부동산 시장이 급격히 냉각된 상태라고 해도 시장의 요구는 '검증가능성과 실현가능성이 높은' 부동산 투자 지침서의 출간 흐름이라는 구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검증가능하지 않고 실현가능성 또한 의심스러운 기법에 의지하고 있어 의아스러움을 던지고 있다.

 

저자는 일찍이 할머니의 영향으로 주역 공부에 빠졌다고 했다. 그 시절에도 사주와 관상을 보고 길흉화복을 점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니 확인 여부를 떠나 놀랍다. 그가 이 책을 대학을 졸업하고 석사논문을 남겨둔 상태에서 썼단다. 학문과 실제는 별개의 것일 수 있다. 과학적 판단과 지식을 필요로 하는 경영학을 전공하고 과학과는 정반대의 입장에 선 사주와 관상에 기댄 그의 선택은 극히 주관적인 선택으로 왈가왈부할 사항이 아니지만 그가 이와 같은 책을 냈을 때는 다르다.

 

저자의 주장처럼 사람의 일이란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사람 나고 돈 났다'는 말과 달리 사람 보다 돈을 우선하는 우리 사회의 그릇된 풍토에 일침을 가하려는 저자의, '사람이 우선'이라는 말에 공감이 간다. 하지만 사람이 주체가 되어 스스로 결정하는 투자 방식이라는 화두를 그가 던져 놓고 다른 한편으로 운명론에 빠진 것은 논리모순이다.

 

부자 운을 타고나도 A가 A의 방식으로 부를 획득하면 B는 A가 아닌 B의 방식에 따라 부를 얻지 않을 수 없다는 저자의 코칭은 맞춤식 처방이라는 합리의 외피를 입고 있지만 반대로 그 처방 이면에 숨은 독설, 곧 부자 운을 타고나지 않은 사람은 부자 될 마음조차 품지 말라는 무언의 압력이 내재되어 있어 사람에 의해 좌우되는 부의 이상에 대한 그의 관점을 무색케 한다.

 

부자 될 사람, 권력을 가질 사람, 학자가 될 사람 등 타고난 바탕이 있다면 무엇 때문에 힘써 살아야 하는지 그 의문에 그가 답해야 할 것이다. 이는 변화가능성에 대한 결정권을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운명에 맡기는 것이어서 그의 주장과 형용모순을 낳고 있다는 점을 그가 아는지 모르겠다.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이 책의 여러 곳을 뒤적여보았다. 유감스럽게도 "당신은 원래 부자로 태어났"으며 "운은 움직이는 과학"이라는 앞 뒤 띠지에 적힌 말의 선정성 외에 달리 찾은 게 없었다. '경영학과 행정학의 전문지식을 활용하면서 운명학의 과학화를 시도하는 신세대 운테크 컨설턴트'로 소개된 그가 대중적 설득력이 약한 운명론에 기댔다는 비판을 가리기 위해 경영학과 행정학을 들러리로 세운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때마다 재현되는 아파트 청약 붐과 돈이 된다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주식투자 등 부에 대한 사회적 광기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실제로 돈을 거머쥐는 사람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대다수 사람들은 재무상태를 벗어난 무리한 투자로 극심한 후유증에 시달리는 것이 현실이다.

 

부의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부를 얻을 수 없다는 인식이 널리 퍼진 것도 우려되는 부분이다. '한방'에 대한 기대가 클수록 자신의 재정형편을 고려한 합리적인 투자와 기업의 장래성과 발전가능성에 투자하는 미래가치형 투자가 사라지기 마련이다. 소문과 감에 따라 투자를 결정하고 결과를 운명에 맡기는 한 얻을 것이 별로 없다.

 

더욱이 책임 있는 지식인이 그렇지 않아도 운명주의적인 투자를 마다하지 않는 시장에 위험신호를 알리는 경광등이 되지 못하고 그것을 부추기는 주장을 펼치는 것은 백번 양보해도 옳지 않다. 저자의 집필 의도가 비록 부에 대한 서민의 좌절감을 일으켜 세우고 부에 대한 세간의 인식을 바꿔보려는 뜻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이와 같은 책의 출판은 자제할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