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니까 스스로 말해요 1
오선화 글, 연주 그림 / 주니어아가페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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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받는 것과 주는 것 모두 필요해요. :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니까〉, 〈내가 안녕하세요 말하니까〉, 〈내가 고맙다고 말하니까〉

 

 

우리가 어린아이들에게 기대하는 건 단 하나. 그들이 건강하고 밝게 자라주기를 바라는 그것이다. 그런데 세상이 참 많이도 바뀌어 이젠 그것들에 앞서 아이들이 어서 자라 좋은 자리를 차지하길 바라는 마음이 더 큰 듯보이기도 하다. 유감스럽게도 그런 부모의 명시적이거나 묵시적인 압력에 아이들이 꽃다운 나이에 생을 마감하는 소식이 심심치 않게 들려오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임에도 누구 하나 나서서 그런 부조리한 세상을 만든 제도를 뜯어고치려 하지 않는다. 그러느라 그 고통은 모두 아이들 몫으로 남는다. 받은 사랑을 나눠주며 살아야 할 아이들이 정작 사랑을 받지 못하는 세상에 필요한 것은 과거나 지금이나 오직 하나, '무한한 사랑' 뿐이다. 사랑을 가득 품은 아이가 남 또한 사랑할 수 있겠기에 어릴적부터 사랑은 아이들에 넘치도록 부어져야 함은 당연하고 옳다.

 

 

이 책,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니까〉와 〈내가 안녕하세요 말하니까〉, 〈내가 고맙다고 말하니까〉는 아이들이 받은 사랑이 어떻게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지 세심하게 아름답게 들려주고 있다. 받는 사랑이 좋은 줄은 누구나 알지만 '받기만 하는 사랑'이 '주는 사랑'에서 얻는 만족과 행복의 크기에 비할 바 아님을 잘 모르는 세상에 귀한 경구가 되고 있기도 하다. 부모는 아이들에게 사랑을 주는 데 힘을 쏟는 한편 받은 사랑을 아이들이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또한 가르쳐야 한다. 그럼으로써 세상이 더불어 사는 곳임을 일깨워야 한다.

 

 

성경은 "네 몸과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명제는 누구나 아는 바와 같다. 하지만 이 구절의 방점이 "네 몸과 같이"에 있다는 건 잘 모르는 것 같다. "네 몸과 같이"는 이웃 사랑의 시초와 기준을 제시한다. 곧 자기를 사랑할 줄 알아야 비로소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난 여태 자기사랑이 적은 사람이 이웃을 넓게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자기 존재의 근원에 밝은 사람이 그 근원에 따라 남을 오롯이 사랑할 수 있는 법이지 않은가. 여기서 그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입히셨다. 그래서 우린 어느 때든지 그 힘으로 나와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잠시 죄로 그 힘을 잃었다해서 그 근원적인 창조성이 꺾이지 않는 것 또한 근원이 내게서 비롯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힘써 사랑할 일이다.

 

 

이 책의 아이처럼 먼저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건네고, 앞서 "고맙습니다" 하고 감사를 표할 일이다. 사랑한다는 따뜻한 말 한마디를 서둘러 전하기도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작은 표현이 세상을 보다 풍요롭게 만들 것은 자명하다. 우리가 한결같이 사랑을 받고 싶어하듯이 이 세상이야말로 참으로 갈급하게 사랑을 얻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디서도 사랑을 주지 않으니 흉악한 사건사고와 비정한 배반의 시대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저자가 아이의 입을 빌려 하고 싶은 이야기 또한 그런 것이리라 믿는다. 혼돈의 세상에 빛을 비추어 서로 사랑하며 사는 낙원. 그런 이상을 한낱 꿈으로 격하시키지 말라. 진리와 사랑이 강같이 흐르는 하나님 나라는 진리와 사랑으로 띠를 두른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곳에 임하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 나라가 오늘 이곳에 임하기도 하고 이미 임해 있기도 하다. 하나님 나라가 죽어서 가는 곳이라는 인식은 지극히 단편적이다. 

 

 

  

 

 

「내가 "사랑해!"한다고 말하니까, 친구가 환하게 웃어요. 내가 "사랑해요!" 말하니까, 할머니의 쭈글쭈글한 주름살이 쫙 펴져요. 내가 "사랑해!" 말하니까,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흔들. 토끼는 좋아서 헤벌쭉 웃고 거북이는 신이 나서 달리기를 해요. 내가 "사랑해!" 말하니까, 나무가 무럭무럭 자라나고 풀잎이 살랑살랑 춤을 춰요. 내가 "사랑해!" 말하니까, 나비가 나풀나풀 날갯짓하고 물고기는 뻐끔뻐끔 노래해요. ....... 내가 "사랑해요!" 말하니까, 하나님은 "나도 널 아주 많이 사랑한단다." 말씀해 주셨어요.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니까, 온 세상이 다 웃어요.」 -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니까〉중에서

 

 

사랑의 표현 하나로 곁에 있던 친구와 할머니 표정이 바뀌고 멀리 있던 동식물과 조류가 행복에 겨워하는 모습은 우리가 에덴동산에서 누렸을 모습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랑의 말과 같은 축복은 주변 곳곳으로 퍼지는 속성이 있다. 그래서 언제든 우리가 축복의 통로로 사용되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복의 근원되신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로 사용되는 일만큼 기대감 넘치는 일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우리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자기가 받은 사랑을 나눌 줄 알 때 어린아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통로로 사용되는 놀라운 은혜 가운데 거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쌓여 그가 세상에 사는 동안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데 참여하는 또 다른 복을 얻게 되니 더더욱 좋은 일이다. 

 

 

하나님의 복은 오묘해서 나눌수록 커지는 진리를 오롯이 돋을새김하고 있는 이 책이 아이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더불어 이 책이 아이들과 함께 읽는 어른들의 심성을 하나님께로 고정하는 데 놀랍게 쓰이기를 바란다. 그것이 이 책이 오늘날 세상에 퍼진 '받는 사랑'에 일침을 가하며 오히려 '주는 사랑'이 나와 이웃, 그리고 더 나아가 민족과 나라을 얼마나 아름답게 만드는지에 관한 꿈을 꾸도록 이끄는 방향타 구실을 하도록 만들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사랑의 의미를 크고 넓게 깨닫고 실천하기를 바라는 이 땅의 부모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저자의 입말과 정겨운 일러스트레이트가 읽지 않고 보지 않아도 사랑의 의미를 저절로 깨닫게 하는 묘한 구석이 있다. 작은 판형으로 구성되어 유아들이 갖고 놀기에도(?) 좋다. 무엇보다 따뜻한 글과 색감에서 우러나오는 친밀감이 이 책의 장점인데, 읽어가다 보면 무한히 빠져들게 되니 주의할 것. 자칫 찌개 끓는 줄도, 곁에 있던 아이가 행복감에 젖어 곤히 잠든 줄도 모를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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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공주에게 죽음을 스토리콜렉터 2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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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재밌다, 이 소설! 시간이 아깝지 않은 소설, 〈백설공주에게 죽음을〉

 

일어날 법한 이야기 또는 언젠가 한번쯤 벌어졌을 이야기, 독자들은 그런 이야기를 현실로 불러와 그 이야기에 놀랍도록 현장감을 부여한 소설에 끌린다. 이름을 대면 알만한 추리작가들은 소설을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내 주변, 더 가깝게는 이웃에서 벌어진 이야기로 꾸민 사람들이다. 모르긴 해도 작가가 그의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 소설 속 사건이 나 또는 가족 누군가에게 일어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불안감을 넣어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꾸민 이야기인 추리소설의 생명력은 꾸민 이야기라는 인상을 최소화하는 데 있음이 주지의 사실이다. 작가는 거기서 더 나가 앞서 언급한 일어날 법한 이야기의 범주에 자신의 소설을 끌어다 놓고자 애쓴다. 작가는 예의 돌발적 상황 전개와 정교하게 얽힌 복선, 예측불허의 심리묘사, 마지막 순간까지 행방이 묘연한 범인의 존재 등의 장치를 통해 작가적 상상력을 무한 증폭시키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 작가의 노력이 한편의 잘 짜인 추리소설로 독자에게 선보이는 것. 문단뿐 아니라 독자에게도 행복한 일임에 틀림없다.

 

난 스스럼없이 그 반열에 최근 베스트셀러 상위 목록에 이름을 등재하면서 폭발적 인기를 모으고 있는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을 올려놓고자 한다. 단지 그 소설이 베스트셀러라서가 아니다.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은 앞서 표현한 독자들을 끌어당기는 일어날 법한 이야기의 요소들을 모두 갖춰 놓았다고 봤기 때문이다. 한 마을에서 오래 전에 일어난 살인사건의 실체를 파헤친 그 소설은 살인사건에 얽힌 인물들의 그로테스크한 불안과 불안을 덮으려는 또 다른 음모, 그리고 음모 이면에 똬리를 튼 마을 전체의 공동정범의식 등을 신랄하게 드러내면서 독자를 그날의 사건 현장으로 데려간다. 현장을 지켜보던 독자는 순간 자신이 수사요원에게 동질감을 크게 느끼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수사요원을 따라 사건을 재구성하고 그에 앞서 조각난 단서를 이리저리 조합해 장차 벌어질 일을 예측하느라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은 다음 수순.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시종 소설은 엄지와 검지를 가만두지 않았다. 책장은 쉴 새 없이 넘겨졌고 봄볕에 나가놀 생각에 이리저리 들썩이는 엉덩이를 한사코 의자에 붙들어 놨다. 하지만 그게 다 라면 그냥 그랬을 것이다. 만약 그게 전부였다면 작가와 간격을 적절히 유지하고 걸으면서 그의 상상력에 박수를 보내는 동시에 씽긋 웃어주는 센스를 적잖이 발휘했을 터였다.

 

가상현실과 현실 사이의 적절한 간격은 그렇지 않아도 매일 쏟아져 나오는 사건사고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안도감을 주었을 테니 여타 추리소설이 그 간격을 메우지 않는다고 뭐라 할 일은 아니다. 다만 여기서 얘기하고 싶은 것은 그와 같은 간격이 추리소설의 맛이라고 내 나름대로 정한 ‘뒷목을 타고 끊임없이 흐르는 긴장감’에 어깃장을 놓더라는 그간의 감상이다. 그래서 언제고 한 번 마치 장자처럼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모르겠다던 장자처럼 ‘이게 소설인지 현실인지’ 모를 모호한 경계 속으로 빠져들고 싶었다. 과연 이 소설은 간단히 그 경계를 허물더니 미처 준비되지 못한 독자를 그 중심에 밀어 넣어 버렸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서야 거기서 빠져나왔으니 달리 할 말도 없다.

 

수년 전 독일작가의 소설 한편을 읽은 적이 있다. 장 그루니에의 인간체취에 대한 병적인 집착을 그린 그 소설은 동명의 영화, 〈향수〉로 재탄생돼 시중에 향수 바람을 몰고 왔다. 지금도 꾸준히 팔리고 있는 그 소설은 독일작가의 역랑을 알린 서곡이 되었고, 나와 같은 잠재적인 독자를 양산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반가웠다. 그 반가움이란 작가가 독일인이라는 훌쩍 넘고 있었다. 독일 추리소설이 세계에 독보적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는 팩 표지 소개를 통해 새삼 탄탄한 문학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실 〈향수〉를 읽을 때만해도 고색창연한 독일 문학의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대중성과는 벽을 쌓았을 거라는 편견 또한 견고했다. 〈향수〉가 그와 같은 편견을 허물긴 했지만 〈향수〉야말로 ‘소가 뒷걸음치다 뭣 밞은 격’이라고 단정할 뿐이었다. 어쩌다 혜성같이 나타난 소설 한편.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거나 없을 소설의 영역에 〈향수〉를 놓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와 같이 천석고황처럼 굳은 이미지를 결정적으로 허문 것이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이다.

 

누군 추리소설이 문학의 본류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소설이 문학성을 전취하든 대중성을 획득하든 그것이 무슨 대수랴! 읽히지 않는 소설이란 허울 좋은 훈장일 뿐인 걸. 고작 몇 날 꺼내놓고 어루만지며 과거를 회상하는 정도의 훈장 나부랭이라면 그것 갖다 뭐에 쓸까? 대중이 좋아한다고 모두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대중 하나 만족시키지 못하는 자기 위안적, 자기 만족적 문학성은 잠시 뒤로 밀쳐둬도 나쁘지 않을 일이다. 이렇게 말한다고 수백 년 동안 독자의 심금을 울린 명작을 도매금으로 넘긴다고 단정하지 말기를. 문학이든 예술이든 급을 나눠야 직성이 풀리는 문단 내부의 카르텔을 겨냥한 것이라는 것쯤 알아주실 거라 믿는다.

 

아무튼 이 소설 독자를 빨아들이는 흡입력에 별 다섯 개를 줘도 아깝지 않다. 모처럼 짬을 내 창덕궁에 들른 지난 6일, 이 소설을 손에서 놓지 못해 1시부터 4시까지 황금시간대 전부를 차압당했으니 더 덧붙일 말이 없다. 봄볕에 한껏 몸을 띄워보자던 당초 계획이 하릴없이 무산된 것은 물론 점심을 챙겨먹지 않은 것조차 깨닫지 못한 채 그날 5시를 넘겨서야 저녁인 줄 알고 수저를 들었다. 이 정도면 흡입력의 강도를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지 않을까? 백 마디 말보다 “무척 재밌다”는 말 한 마디가 더 낫기는 하겠다. 재밌다. 그것도 무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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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의 배에서 꼬르륵꼬르륵 - 기도이야기 성경창작동화 5
오선화 지음, 김은혜 그림 / 강같은평화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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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동화의 새 모델을 세워가다 : 〈에스더의 배에서 꼬르륵꼬르륵〉, 〈모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동화가 어린이의 전유물이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어른들은 소설을 읽고 청소년은 주로 위인전을 손에 들던 때입니다. 취학 전 아동과 초등학생은 동화와 만화책을 주로 읽었죠. 초등학생들은 한글을 깨치자마자 동네 만화방으로 달려가기 바빴습니다. 다들 그랬던 건 아니고 제 경험에 빗대면 그렇다는 겁니다. 당신 전 친구 집에서 유행하던 월간 소년중앙을 보고 그 애를 줄곧 찾게 되었는데, 제가 함께 놀지는 않고 만화만 보는 게 괘씸했는지 그 친구, 다음 날부터 대문 출입을 금하더군요. 만화 맛이 옴팍 든 전 안달이 났더랬습니다. 달리 방법이 뭐 있었겠습니까? 몰래 몰래 만화방을 들락거릴 밖에요.

 

하루는 유달리 어두웠던 만화방에서 신나게 만화를 보고 뒷맛을 다시며 만화방을 나오는데, 어두운 데서 나왔으니 얼마나 눈이 부셨겠습니까? 말해 뭐 하겠어요. 눈을 사정없이 비벼댔지요. 아마도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나 봅니다. 고작 수 분 내였겠지만 초등학교 2학년 쯤 됐으니 그 때로 따지만 수분이 아니라 한 수십 분은 됐던 거 같습니다. 떡 하니 어머니가 제 앞을 버티고 섰는데 눈앞이 노랗게 되고 말았죠. 황급히 시장을 보고 돌아오던 어머니가 만화방 앞에서 눈을 부비고 있는 절 보고 기겁하셨던 겁니다. 말하나 마나 전 혼쭐이 크게 났고 다시는 만화방에 얼씬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서야 어머니의 분에서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한 일주일이 지났나, 아마 그랬을 겁니다.

 

위인전과 동화 전질이 집에 배달되었습니다. 보자마자 화들짝 놀란 전 웬 떡이냐는 생각에 전집을 닥치는 대로 읽었습니다. 아마도 저를 혼낸 날,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말씀드렸겠죠. 저렇게 만화방에 다니다 얘 버린다고 말이죠. 한참 뜸을 들인 아버지가 그러면 동화책을 사주자고 했을 테고요. 다음 날 일찍 일을 마친 아버지가 책방에 들르셨던 겝니다. 동화책을 주문하는 참에 위인전도 그 위에 얹자고 하셨을 테고요. 그렇게 전 때 아닌 전집의 주인이 됐습니다. 기억을 되돌아보면 전집을 다 읽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학교를 파하고 돌아온 날 전집을 보고 무한히 기뻤던 마음과 그날 저녁 아버지가 흐뭇하게 제 얼굴을 바라보시던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책 읽는 습관을 형성하게 된 계기도 전집을 통해서였습니다.

 

동화는 상상의 날개를 마음껏 펼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 또래 아이들이 다 그렇듯이 아이들이 꾸는 꿈이란 게 대부분 실현불가능한 것이었지만 그 꿈이 성장하는 데 날개를 달아주었던 것만은 부정하지 못할 겁니다. 전 동화를 통해 사고를 넓게 키울 수 있었습니다. 아마 그때쯤이었을 겁니다. 먼저 교회를 나가셨던 어머니의 권유로 교회란 델 처음 가게 되었죠. 선뜻 이해되지 않는 노래였지만 동요 비슷한 찬송을 부르는 게 좋았고, 예쁜 여자 선생님도 좋았습니다. 선생님이 들려주던 이야기도 동화처럼 들린 건 또 다른 소득이었습니다. 그런데 딱 한 가지가 아쉽더군요.

 

당시 책방이 어딨는지, 그곳에서 책을 어떻게 사는지 몰랐기도 했지만 성경이야기가 동화로 묶여 나오지 않은 데 적잖이 실망했던 거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라고 성경동화가 없지 않았을 텐데, 어린 전 그냥 없다고 믿었던 거지요. 그렇게 전 일주일에 한 번 찾아오는 선생님의 동화시간을 무척 기다리게 됐습니다. 하지만 20분이 채 되지 않은 동화시간이 성이 차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기대감이 출중했던 터라 견딜 만했습니다. 그런데 한두 번 듣다보니 선생님의 레퍼토리가 몇 가지 주제에 한정되는 걸 알아차리게 되더란 말입니다. 식상해진 전 급기야 단물 다 빼먹은 벌처럼 그곳을 빠져나오게 됐습니다. 그 후로 중학교 1학년이 될 때까지 교회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기대감을 충족해줄 동화가 있었더라면 상황이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중학생이 될 때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줄곧 교회에 붙어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호기심을 지속적으로 충족시켜줄 그 ‘무엇’입니다. 어린 아이들이니 그 무엇은 동화가 차지하는 게 좋겠지요. 부모 마음 또한 제 아이들이 먹는 거나 놀러 다니는 게 아닌 책이 훨씬 나을 법도 하고요. 동화가 주는 유익이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데 필요한 사회성을 높이는 것도 좋고, 꿈을 키워가는 데 도움이 되는 것 모두 좋습니다. 하지만 그것들보다 더 중요한 게 사람의 본질인 영을 살찌우는 데 동화의 역할이 적지 않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성경동화는 아이가 자라는 동안 신앙에 뼈대를 세우고 신앙의 길로 성큼성큼 걸어갈 몸을 형성하는 데 더없이 필요한 수단입니다. 우리가 간과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말의 힘입니다. 글은 활자화된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활자를 읽는 동안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빠르고 쉽게 글 속의 말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갑니다. 곧 믿게 된다는 거지요. 믿음이 들음에서 난다고 한 성경 말씀을 보면 눈과 입으로 보고 들은 동화가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을 겁니다. 말씀에서 떠나지 않는 아이들의 모습을 기대한다면 아이들 눈높이에 맞춘 성경동화를 읽게 해주는 게 좋습니다. 더욱이 신앙 안에서 자라길 소망하는 부모라면 아이가 일찍부터 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눈뜨는 것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겠지요. 그런 때 성경동화가 아이들에게 친절한 길라잡이 되어 줄 거라고 믿습니다.

 

먼저 소개해 드릴 〈에스더의 배에서 꼬르륵꼬르륵〉은 제목만큼이나 참 흥미롭습니다. 〈에스더의 배에서 꼬르륵꼬르륵〉은 이스라엘의 존망이 걸린 문제를 슬기롭게 헤쳐나간 에스더의 신앙과 삶을 엮고 있습니다. 에스더 시기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 있었습니다. 당시 바빌론 2인자였던 하만은 이스라엘 백성을 쓸어버릴 계략을 세우고 착착 그 일정을 진행해나갑니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에스더의 오빠 모르드개가 동생이자 왕비인 에스더를 찾아오고 에스더는 왕에게 직접 이스라엘을 구해 달라고 간청하기로 합니다. 에스더는 꾀를 내 파티를 벌이고 그 자리에서 왕에게 하만의 계략을 폭로해버립니다.

 

전체 스토리는 위와 같이 간단히 요약할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갈 대목이 적지 않습니다. 우선 에스더는 왕비라는 지위를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왕비는 왕의 지근거리에서 왕에게 간청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입니다. 지위를 이용하면 얼마든지 하만을 내칠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에스더는 그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하만의 계략이 권력을 다투는 투쟁이 아니라 영적 싸움임을 알았던 에스더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 후 응답을 받고서야 비로소 왕에게 나아가 청이 있음을 아룁니다.

 

지위가 높을수록 권한은 더 많이 생깁니다. 굳이 다른 힘을 빌릴 것 없이 소유한 지위만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습니다. 지위를 무분별하게 사용하면 제 몸을 상하게 하는 일 또한 심심치 않게 일어납니다. 성경엔 그 지위를 현명하게 사용해 크게 칭찬받은 인물이 있습니다. 하인의 병을 고쳐달라고 예수 그리스도께 청한 백부장이 그 주인공입니다. 권한이 미치는 힘을 잘 알았던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한이 자기 권한에 비할 바 아님을 꿰뚫었습니다. “직접 병석에 오시지 않아도 이 자리에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 에스더 또한 왕비라는 지위가 도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높은 경륜과 능력을 간구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구한(믿은) 대로 얻습니다.

 

제한된 머리에서 나오는 지혜와 능력에 한계가 있는 몸에서 나오는 힘을 의지하는 일은 어리석습니다. 그런 지혜와 힘은 상대방도 엄연히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만고만한 지혜와 힘으로는 둘 모두 공멸 또는 둘 중 하나의 신승(辛勝)을 이끌어낼 뿐입니다. 신승의 경우 화근을 남겨놓기 쉽습니다. 하지만 능력이 무한한 하나님은 완전하고도 깨끗한 승리를 보장합니다. 그런 사실을 잘 안 에스더가 줄곧 하나님을 의지한 건 너무도 당연해 보입니다.

 

부단히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일은 어려서부터 다져야할 근간이 되는 덕목입니다. 하나님이 존재와 목적의 근본임을 아는 일부터 사탄을 대적하고 그를 향해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선포하는 일의 시초가 겸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고작 ‘나 하나 살자’고 태어난 인생이 아님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적어도 한두 명, 많게는 수백, 수천의 사람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데 우리가 쓰임을 받는다면 그것보다 귀한 일이 없을 겁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한 에스더에게 배울 교훈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에스더의 배에서 꼬르륵꼬르륵〉에 실린 두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은 너무도 유명해서 달리 설명이 필요 없는 인물입니다. 총리대신이었던 다니엘은 다른 총리대신 2명과 갈등합니다. 갈등의 원인은 그 두 명과 달리 다니엘이 이스라엘 출신이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집요하게 왕을 채근해 왕 외에 다른 신에게 절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공표하게 만듭니다. 그 법은 하루 세 번 예루살렘으로 난 창문 아래서 하루 세 번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다니엘을 제거하기 위한 계략이었습니다. 올가미에 결려든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져지게 됩니다.

 

어느 경우라도 절대 권력을 쥔 왕의 명령을 어기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왕이 곧 법이었던 시대에 백성들은 그 법 아래 머리를 조아리는 게 당연했습니다. 다니엘은 그 보다 높은 법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자신을 총리대신에 올린 분이 하나님이심을 이해했던 다니엘은 세상의 법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결심했던 겁니다.

 

다니엘이나 에스더는 모두 강고한 현실 권력 앞에서 현실을 압도하는 최고의 권력을 보았습니다. 세상이 잠시 악한 영의 손에 있는 듯 보여도 그 실체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결정타를 먹은 허약한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지막 때 예수 그리스도의 발 깔개(발등상)가 될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다니엘과 에스더가 믿은 게 그런 사실입니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여호수아 1:9)

 

〈에스더의 배에서 꼬르륵꼬르륵〉은 믿고 의지할 대상에 대해 명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앙의 대상은 현실 권력이 아닙니다. 현실 권력은 어른 입장에서는 직장 상사, 또는 이해관계자로 나타날 겁니다. 아이들에게 그것은 친구나 선생님이 되겠지요. 그와 같은 권력은 자주 상대방을 압도합니다. 특히 상대방이 권력의 외향에 사로잡힐 때 심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권력 안에 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에스더가 왕비여서 이스라엘이 죽어야한다는 논리가 얼마나 근거박약하며, 다니엘이 총리대신인 것에서 그의 생명이 위태롭게 되었음을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허술합니까? 그럼에도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건 크리스천을 해하려는 악한 영이 존재하고 있음을 방증해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배를 타고 강 건너던 중 폭풍이 일어난 것 또한 같은 맥락입니다. 악한 영은 수시로 크리스천을 넘어뜨리려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와 같이 위협했다면 우리에게는 더욱 그러할 것쯤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십자가와 부활로 악한 영의 세력을 근본적으로 끊은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저자가 줄곧 예수 그리스도, 곧 하나님을 전면 가득 그린 이유도 ‘세상에 있는 이’(사탄)보다 크신 분이 계심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이 책이 자라날 아이들을 먹이는 데 크게 쓰이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의 양식이라고 했습니다. 이 책이 그와 같이 사용돼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선포하는 일에 헌신된 크리스천을 우후죽순처럼 일으켜 세우기를 바랍니다. 더불어 연속 출간을 앞두고 있는 관련 기획물에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이 충만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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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수록 참 좋은 나 - 존 오웬의 영성키워드 24가지
존 오웬 지음, 이설.김성연 옮김 / 강같은평화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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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삭은 맛처럼 깊이 우러나는 영성의 향취 : 존 오웬의 《사랑할수록 참 좋은 나》

“사랑한다”는 말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한 찬사가 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물론 정치적 수사 또는 빈말로 사랑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속에 진실을 담지 않은 말은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말이 감동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고 해도 힘을 북돋아주는 말이 있는 반면 자상처럼 깊은 상처를 입히는 말 또한 있습니다. 같은 말이라도 악감정을 담아 하는 말은 비아냥거림으로 들리고 사랑을 담은 말은 반대로 속 깊은 격려로 들린다는 점에서 말은 단순히 소리전달의 기능만을 담당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분명 귀에 들린 건 말 뿐인데, 그 말에 마음이 담겼는지 인사치레로 한 말인지 등등 누구나 알아챌 수 있는 느낌이 말에 덧붙어 전해진다는 게 새롭습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사람의 능력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에 담긴 느낌, 곧 어감을 짚어내고 말이 지닌 본질적인 뜻을 걸러내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사람이 하는 말의 능력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한때 전 “말이 씨가 된다”는 옛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말은 상대방에게 전달되거나 굳이 전달되지 않더라도 발성이 된 후 사라지는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휘발성이 강한 말과 달리 글은 한번 기록하고 나면 시쳇말로 “빼도 막도 못할” 뿐 아니라 영향력 면에서 말의 그것에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말이 씨가 된다”는 옛말은 “말은 되도록 조심해서 하라”는 뜻을 담은 일종의 수사로 이해했습니다. 몇 년 전 저의 그런 확고부동한 신념이 결정적으로 바뀌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사랑’과 ‘염려’는 양립할 수 없어

당시 전 현실과 신앙 양면에서 도전받고 있었습니다. 현실적인 문제 앞에서 크게 불안해하는 제 모습을 보면서 지난날 거듭 닥친 문제에 대한 반응의 양태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불안과 안도감의 반복. 누구나 일상생활에서 똑같이 겪는 지극히 정상적인 순환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었지만 보다 본질적인 문제에 접근하고 있던 전 신앙이 불안과 양립할 수 있지 않으리라는 당시로선 막연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던 문제를 안고 신앙서적을 붙들던 전 그 서적에 쓰인 다음의 구절과 해석에 오롯이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해 불안, 염려 등등의 부정적인 단어는 결코 하나님과 양립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 또한 그런 말의 영향력에 사로잡힐 이유가 없다는 데 반응함으로써 예기치 않았던 신앙의 다음 세계로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립보서4:6)” 

말의 능력에 관한 책을 찾아 읽던 전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내게 영향을 미치기 위한 결정적인 수단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핵심 구절은 “이것이(하나님 말씀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를 윤택하게 하리라(잠언3:8)”와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마태복음8:13)”였습니다. 더불어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로마서10:17)”는 구절을 통해 믿음의 원천을 새롭게 조명하게 되었습니다. 

나부터 사랑하기

이후 제 삶은 획기적으로 바뀌어갔습니다. 상황과 문제를 향한 선포와 사람과 앞에 대한 축복, 과거 무지해서 지지른 나와 가정을 향한 저주의 해체 등의 선언을 통해 악한 영이 뿌렸거나 뿌릴 만한 것에 대적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곤 차츰, 하지만 빠르게 불안과 염려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과거에 저지른 잘못에서 비롯된 자책과 죄책, 남과 비교하여 끝없이 안으로 침잠하는 열등감, 낮은 자존감을 지니고 있는 한 우린 결코 자신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또한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남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제대로 읽으려면 뒷부분을 먼저 읽어야합니다. “네 몸을 사랑하듯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읽어야한다는 겁니다. 선후를 따지는 게 적절치 않지만 자기사랑을 먼저 하는 건 이기적이라는 편견을 우선 벗어야 자기사랑의 본질적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두말할 것 없이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십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기를 바라십니다. 하지만 그런 바람과 달리 우린 자신을 함부로 놀립니다. 실제 요 며칠 자신이 벌인 행동을 돌아보면 과연 나를 사랑해서 한 행동인지 의구심이 들 일이 적지 않을 겁니다. 자기사랑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에 동의하실 분도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정말 자신을 깊이, 또 자주 사랑한다면 이 책의 제목처럼 “사랑할수록 참 좋은 나”라는 고백이 흘러나와야 마땅하지 않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우린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 참 인색합니다. 뿌리깊이 박힌 유교적 습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 책의 저자 존 오웬은 우리를 자기 사랑의 실체와 본질로 거듭 불러내 그 길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24개의 장으로 구성된 책은 각각 별개의 소제목을 달고 있지만 사랑이라는 핵심적인 키워드에 수렴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랑에 관한 총합, 결정체로 평가되는 고린도전서 13장과 비견될만합니다. 

하나님의 먼저 한 사랑

추천사를 쓴 문효식 목사는 존 오웬을 “17세기 영국이 낳은 당대 최고의 신학자로서 그는 성도의 삶을 강조하고, 성령론을 실제적으로 매우 중요시 한 사람이다. 그는 탁월한 영성의 소유자로, 청교도가 그러했듯이 영적인 감정과 정서를 중요시했다. 신앙생활에서경험을 강조했으며, 이를 통해 확신과 안정감을 갖게 된다고 말한 사람이다. 그를 가리켜 제임스 패커는 ‘성경적 신앙이 하나님 중심 사상이라는 것을 자신에게 가르쳐 준 사람이 오웬’이라고 회고한 적이 있다”고 썼습니다. 지금까지 “최후의 청교도 신학자”로 추앙받고 있는 존 오웬은 “종교개혁 이후 오늘날까지 가장 심오한 신학서적의 저술가”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시한 저자가 사귐과 친밀함을 책의 첫머리에 둔 이유는 당연하고도 의미심장합니다. 영성의 출발이 창조주 하나님이시자 사랑의 하나님에서 비롯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를 지으시고 보시기에 너무 좋았더라고 기쁨에 겨워 목이 멨을 하나님과 사랑하시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을 묵상할 때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너무도 명확해지지 않겠습니까.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이사야42:3)”라고 고백한 이사야의 예처럼 우린 본질적으로 상해서 버려져야할 갈대이자 기름이 없어 꺼질 날만 기다리는 등불이었음에도 하나님은 우릴 그렇게 상실한 마음대로 두시지 않았습니다. 저자는 전편에 걸쳐 그와 같은 하나님의 한없는 자비와 사랑을 활자와 행간에 가득 담아 넘치도록 쏟아놓고 있습니다. 

곰삭은 맛처럼 깊이 우러나는 영성의 향취

그 시대에도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었나 봅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내 영혼이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찾게 된다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부류는 “무작정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무조건 사랑해야 한다고 여겼으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지 확인하고 나서 사랑해야 한다”고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녔던 것도 같습니다. 존 오웬은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는 요한일서 4장 10-11 말씀을 들어 답하고 있습니다. 

이웃 사랑의 출발이 자기사랑이라면 자기사랑의 근원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실 뿐 아니라 얼마나 끔찍이 사랑하시는지 아는 데 있습니다. 일단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는 등 능력을 행하고 돌아와 자랑했을 때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그 상황과 관련한 구체적인 정황을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않지만 사랑으로 행하지 않는 능력의 위험성을 경고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우린 의미심장한 선언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고린도전서13:2)”

영성의 본질 또한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사랑이 생수의 강처럼 흐르는 영성, 자신이 통로가 되어 사랑을 흘려보내는 영성. 그와 같은 영성이 이 책을 이 시대의 아포리즘과 성경 옆에 함께 두고 오래도록 읽힐 신앙지침서로 만들고 있습니다. 시대가 바뀌었다고 본질마저 바뀌지는 않습니다. 300년을 훌쩍 넘긴 시간을 타고 흐르는 신앙고백이 이물감이 전혀 들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가 지극히 속물화된 시대에 사랑이 곧 하나님이심을 또렷이 드러낸 이 책을 통해 자기사랑과 이웃사랑의 참의미가 되새김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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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하는 CEO - 성공한 CEO 12명의 기도응답, 함께하시는 하나님 이야기
박찬호.구자천 지음 / 강같은평화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그들의 성공엔 이유가 있다. 성공하려면 새벽을 깨워라!!

《새벽기도 하는 CEO》- 성공한 CEO 12명의 기도응답, 함께 하시는 하나님 이야기

 

간절해질 때가 있다.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일 앞에서, 개선의 여지가 없을 것 같은 인간관계에서, 그리고 전망이 신통치 않은 계획에 이르기까지

어느 특정 시점에서 간혹 맞부딪히거나 어느 경우엔 이상하리만치 자주 맞닥뜨리는 문제에 냉담하게 반응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간절함을 불러낸 원인이 일생을 좌우할 정도의 문제라면 어느 누구라도 답을 구하는 데 간절해지지 않을 턱이 없다.

그렇듯 민감한 문제 또는 중차대한 문제를 ‘나 몰라라’ 할 사람이 거의 없을 거라는 전제에서 수순은 해결책을 찾는 데 모아지게 마련이다.

금전이든 사람이든 개인이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을 모두 동원해서라도 문제를 해결하려는 건 인지상정이다.




문제는 사실 개인이 동원가능한 자원이 그리 많지 않다는 데 있다.

비록 동원 가능하더라도 그 자원들이 현재 닥친 문제엔 그리 소용없는 경우가 적지 않기도 하다.

현재 수준에서 고민에 휩싸인 문제란 그동안 해결되지 않고 근근이 넘겨진 문제들이 집합을 이뤄 큰 덩어리로 변한 예가

상당부분을 차지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동원 가능한 자원은 결국 과거에나 통한 방법이지

현재의 문제 앞에선 속수무책인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어느 누구도 문제없이 인생을 헤쳐가기란 불가능하다.

유한한 생명을 가진 존재이면서 앞날을 알 수 없는 존재인 인간은 태생적으로 불완전하다.

따라서 그와 같은 사람의 의사결정과 그에 따른 선택이 완벽하기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아무리 올바르고 좋은 선택을 했다 해도 개인이 축적한 지식과 경험의 한계 내에서 나온 선택이라는 점에서

그 선택이란 늘 최상이나 최선, 최고는 아니다.

다만 개인이 선택한 것에 만족감을 높이려는 자위차원에서 바른 선택 또는 좋은 선택이었다고 믿는 것뿐이다.




한번 뿐인 인생에서 여러 가지 선택을 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이

오늘 어디를 가고 누구를 만나야 하나 하는 정도의 일상적인 선택 외에 어떤 인물이 되고, 어떤 사업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선택을

섣불리 판단하고 그 판단에 의존해 장래 일을 결행할 정도로 자신에게 야박하지는 않을 거라 믿는다.

개인의 선택이 애초 불완전한 존재라는 한계 위에 지은 신뢰할 수 없는 선택이라면

보다 나은 존재를 탐구하고 그 존재에게 나의 일을 묻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마치 우리가 스승이나 부모에게 그와 같은 문제의 해결책을 구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들도 불완전한 존재라는 한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새벽기도 하는 CEO》는 각 분야에서 기도로 일가를 이룬 인물 12명을 소개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들이다.

문제 앞에서 두려워하며 장래 일을 걱정하고 뒤처지지 않기 위해 부심하는 것 또한 우리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와 다른 게 꼭 하나있다.




그들은 출발선에서, 때론 실패의 자리에서 ‘불완전한 나’라는 존재가 아니라 완전하신 하나님을 구하고 그분의 뜻에 자신을 맡겼다.

이들 12명의 이야기를 찬찬히 읽으면 그들이 한결같이 증언하는,

당신에게 부르짖을 때까지 오래 참고 기다리시고 부르짖음을 하나도 빠짐없이 들으실 뿐 아니라

궁극적인 해결로 인도해 가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맡김’의 결과임을 저절로 알게 된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도중에 있는 독자나 완독한 독자라면 “어디 나도 한번?” 하는 엉덩이 들썩거림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다.




12명을 다루느라 각각의 인물에게 할애된 지면이 많지 않아

문제에 직면하고 그걸 해결해가는 과정의 세밀한 터치(언급) 등과 같은 심층적인 부분에서 취약점이 있지만

애초 이 책의 기획이 인물들이 체험한 일련의 신앙적 사실관계를 널리 알림으로써

독자들에게 바른 신앙의 패턴과 실제적인 신앙의 힘을 집중적으로 전하고 싶었던 데 있었을 거라는 점에서 납득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다.




특히 길고 복잡한 내용에 생래적인 거부감을 보이는 세대의 특성을 배려하여

간략하지만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내용은 빠짐없이 간추려 기록한 데서

앞선 취약점 보다 현 세대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더 도드라져 보인다.

소통의 부재가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상황에서 세대와 소통하고 세대의 중심에 이르고자하는 사명감으로

다방면에서 중층적인 시도를 보이는 출판사에 격려와 지지를 보내는 것이 보다 적절할 것이다.




새벽기도를 통해 거대한 사회적 신앙적 진보를 이룬 12명을 연한 파스텔톤으로 조명하고 있는 책은

기독언론매체 데스크로 일하고 있는 크리스천 문학상 수상에 빛나는 박찬호와

기독교 연합신문과 월간 신앙세계에서 잔뼈가 굵은 기자 출신의 구자천의 합작품으로 이들 공저자의 이력이 짙게 배어있다.

9~10장으로 제한된 지면에 인물들의 이력과 고투를 전부 담아내기란 사실 어렵다.

더욱이 결정적인 부분을 잡아 호소력 짙은 내용으로 재구성하는 데는 배 이상의 노력을 들여야 한다.

‘새벽기도’라는 테마에 맞춰 관련 인물들을 발굴하기가 쉽지 않았으리라는 점도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인터뷰어의 입장에서 해당 인물들을 사전 답사 형식으로 간추려 냈다 해도

실제 그들을 만나 삶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는 일도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을 터다.

책에 실린 인물은 12명이지만 실제 인터뷰한 인물은 그 이상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지면을 좀 더 할애해야할 정도로 ‘맡김’과 ‘인도하심’이 분명한 인물의 이야기를 축약하는 일도 쉽지 않았을 것이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모든 예상 가능한 제약을 뛰어넘어 ‘새벽기도’라는 형식으로 인물들을 재구성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알맞게 녹여내 독자들이 읽기 좋게 한상 잘 차려준 공저자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마음은 있지만 실행하기가 쉽지 않은 새벽기도에 대해, 적어도 기도에 관한 한 마치 빚진 것처럼 살고 있는 이 땅의 적잖은 크리스천들에게

이 책이 작지만 소중한 발걸음을 디딜 용기를 주고 있다는 점에서 박수 또한 쳐주고 싶다.




‘기도는 호흡’이라는 말과 ‘바빠서 기도한다’는 역설은 들어서 잘 알고 있지만 살다 보니 잊고 지내기 십상이었던 크리스천들에게,

그리고 지지부진한 기도생활에서 탈출할 기회만을 엿보다 세월을 좀 먹어온 크리스천들에게 적잖은 도전이 될 것이다.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는 것, 특히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야할 책임을 진 크리스천들이 흔쾌히 따를 모범이 생각보다 많지 않은 게 현실이다.

다른 사람의 성공은 늘 그들이 ‘특별했기에 가능’했다는 특정 자질론에 길들여진 우리 지각에 충격을 던질 만큼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은 다채롭다.

만발한 개성으로 톡톡 튀기도 하고 어느 경우엔 지나치게 진중하다.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저돌적이기도 하다.




로고스 필름의 이장수 대표와 법무법인 민우의 문흥수 대표, 선린병원 이건오 의료원장, (주)모라비안프라트룸 김영수 대표,

대성닷컴 김정주 대표, 샘 안양병원 박상은 원장, (주)시네마 오병이어 김수형 대표, 서울 신학대학교 목창균 총장,

대의그룹 채의숭 회장, 대암클리닉 이병욱원장, 가화의료재단 전덕기 이사장,

참소망교회 담임이자 기독교화해중재위원회 오준수 중앙위원은 어디하나 닮은 구석이라곤 없다.




그럼에도 이들은 영화계, 의료계, 재계, 출판계에 두루 포진하여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둔 뜻을 이 땅에 선언하고 전파하는’ 데 혼신의 힘을 쏟았다.

이 시각에도 힘차게 그 일을 해내고 있다.

그들의 고백은 하나같이 “나를 만드신 이가 하나님이시며, 이곳가운데 인도하신 이도 하나님이시라”는 분명한 소명의식에 기초하고 있다.

사업과 영화제작, 변호, 의료 등의 달란트를 살려 하나님 나라 확장에 전력하는 그들의 신실한 모습이 큰 울림이 되는 건 당연한 일.




사회와 직장에서 하나님을 드러내고 그분을 영접하는 영혼을 얻는 데 대한 ‘거룩한 부담감’을 가진 이 땅의 크리스천들에게

그들은 전범이자 모범적인 길이 되기에 필요충분하다.

소명과 헌신의 쌍두마차가 견인하는 한

그들을 이어 조만간 그들을 좇아 같은 길을 가고자 결단한 크리스천들이 쓸

《새벽기도 하는 CEO 2》에 대한 기대를 아울러 가질 수 있게 됐다면 지나친 헌사일까?




크리스천으로서의 정체성을 살리고자 하는 직장 내 크리스천들과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데 각자의 재능을 드릴 꿈에 부푼 크리스천들,

닥친 현실적 고난과 장래에 대한 고민으로 밤을 지새울 이 땅의 청년들,

인생 후반전을 계획하고 있는 중장년들에게 이 책을 두루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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