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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수록 참 좋은 나 - 존 오웬의 영성키워드 24가지
존 오웬 지음, 이설.김성연 옮김 / 강같은평화 / 2010년 10월
평점 :
곰삭은 맛처럼 깊이 우러나는 영성의 향취 : 존 오웬의 《사랑할수록 참 좋은 나》
“사랑한다”는 말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한 찬사가 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물론 정치적 수사 또는 빈말로 사랑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속에 진실을 담지 않은 말은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말이 감동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고 해도 힘을 북돋아주는 말이 있는 반면 자상처럼 깊은 상처를 입히는 말 또한 있습니다. 같은 말이라도 악감정을 담아 하는 말은 비아냥거림으로 들리고 사랑을 담은 말은 반대로 속 깊은 격려로 들린다는 점에서 말은 단순히 소리전달의 기능만을 담당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분명 귀에 들린 건 말 뿐인데, 그 말에 마음이 담겼는지 인사치레로 한 말인지 등등 누구나 알아챌 수 있는 느낌이 말에 덧붙어 전해진다는 게 새롭습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사람의 능력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에 담긴 느낌, 곧 어감을 짚어내고 말이 지닌 본질적인 뜻을 걸러내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사람이 하는 말의 능력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한때 전 “말이 씨가 된다”는 옛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말은 상대방에게 전달되거나 굳이 전달되지 않더라도 발성이 된 후 사라지는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휘발성이 강한 말과 달리 글은 한번 기록하고 나면 시쳇말로 “빼도 막도 못할” 뿐 아니라 영향력 면에서 말의 그것에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말이 씨가 된다”는 옛말은 “말은 되도록 조심해서 하라”는 뜻을 담은 일종의 수사로 이해했습니다. 몇 년 전 저의 그런 확고부동한 신념이 결정적으로 바뀌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사랑’과 ‘염려’는 양립할 수 없어
당시 전 현실과 신앙 양면에서 도전받고 있었습니다. 현실적인 문제 앞에서 크게 불안해하는 제 모습을 보면서 지난날 거듭 닥친 문제에 대한 반응의 양태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불안과 안도감의 반복. 누구나 일상생활에서 똑같이 겪는 지극히 정상적인 순환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었지만 보다 본질적인 문제에 접근하고 있던 전 신앙이 불안과 양립할 수 있지 않으리라는 당시로선 막연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던 문제를 안고 신앙서적을 붙들던 전 그 서적에 쓰인 다음의 구절과 해석에 오롯이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해 불안, 염려 등등의 부정적인 단어는 결코 하나님과 양립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 또한 그런 말의 영향력에 사로잡힐 이유가 없다는 데 반응함으로써 예기치 않았던 신앙의 다음 세계로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립보서4:6)”
말의 능력에 관한 책을 찾아 읽던 전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내게 영향을 미치기 위한 결정적인 수단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핵심 구절은 “이것이(하나님 말씀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를 윤택하게 하리라(잠언3:8)”와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마태복음8:13)”였습니다. 더불어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로마서10:17)”는 구절을 통해 믿음의 원천을 새롭게 조명하게 되었습니다.
나부터 사랑하기
이후 제 삶은 획기적으로 바뀌어갔습니다. 상황과 문제를 향한 선포와 사람과 앞에 대한 축복, 과거 무지해서 지지른 나와 가정을 향한 저주의 해체 등의 선언을 통해 악한 영이 뿌렸거나 뿌릴 만한 것에 대적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곤 차츰, 하지만 빠르게 불안과 염려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과거에 저지른 잘못에서 비롯된 자책과 죄책, 남과 비교하여 끝없이 안으로 침잠하는 열등감, 낮은 자존감을 지니고 있는 한 우린 결코 자신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또한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남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제대로 읽으려면 뒷부분을 먼저 읽어야합니다. “네 몸을 사랑하듯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읽어야한다는 겁니다. 선후를 따지는 게 적절치 않지만 자기사랑을 먼저 하는 건 이기적이라는 편견을 우선 벗어야 자기사랑의 본질적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두말할 것 없이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십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기를 바라십니다. 하지만 그런 바람과 달리 우린 자신을 함부로 놀립니다. 실제 요 며칠 자신이 벌인 행동을 돌아보면 과연 나를 사랑해서 한 행동인지 의구심이 들 일이 적지 않을 겁니다. 자기사랑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에 동의하실 분도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정말 자신을 깊이, 또 자주 사랑한다면 이 책의 제목처럼 “사랑할수록 참 좋은 나”라는 고백이 흘러나와야 마땅하지 않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우린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 참 인색합니다. 뿌리깊이 박힌 유교적 습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 책의 저자 존 오웬은 우리를 자기 사랑의 실체와 본질로 거듭 불러내 그 길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24개의 장으로 구성된 책은 각각 별개의 소제목을 달고 있지만 사랑이라는 핵심적인 키워드에 수렴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랑에 관한 총합, 결정체로 평가되는 고린도전서 13장과 비견될만합니다.
하나님의 먼저 한 사랑
추천사를 쓴 문효식 목사는 존 오웬을 “17세기 영국이 낳은 당대 최고의 신학자로서 그는 성도의 삶을 강조하고, 성령론을 실제적으로 매우 중요시 한 사람이다. 그는 탁월한 영성의 소유자로, 청교도가 그러했듯이 영적인 감정과 정서를 중요시했다. 신앙생활에서경험을 강조했으며, 이를 통해 확신과 안정감을 갖게 된다고 말한 사람이다. 그를 가리켜 제임스 패커는 ‘성경적 신앙이 하나님 중심 사상이라는 것을 자신에게 가르쳐 준 사람이 오웬’이라고 회고한 적이 있다”고 썼습니다. 지금까지 “최후의 청교도 신학자”로 추앙받고 있는 존 오웬은 “종교개혁 이후 오늘날까지 가장 심오한 신학서적의 저술가”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시한 저자가 사귐과 친밀함을 책의 첫머리에 둔 이유는 당연하고도 의미심장합니다. 영성의 출발이 창조주 하나님이시자 사랑의 하나님에서 비롯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를 지으시고 보시기에 너무 좋았더라고 기쁨에 겨워 목이 멨을 하나님과 사랑하시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을 묵상할 때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너무도 명확해지지 않겠습니까.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이사야42:3)”라고 고백한 이사야의 예처럼 우린 본질적으로 상해서 버려져야할 갈대이자 기름이 없어 꺼질 날만 기다리는 등불이었음에도 하나님은 우릴 그렇게 상실한 마음대로 두시지 않았습니다. 저자는 전편에 걸쳐 그와 같은 하나님의 한없는 자비와 사랑을 활자와 행간에 가득 담아 넘치도록 쏟아놓고 있습니다.
곰삭은 맛처럼 깊이 우러나는 영성의 향취
그 시대에도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었나 봅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내 영혼이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찾게 된다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부류는 “무작정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무조건 사랑해야 한다고 여겼으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지 확인하고 나서 사랑해야 한다”고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녔던 것도 같습니다. 존 오웬은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는 요한일서 4장 10-11 말씀을 들어 답하고 있습니다.
이웃 사랑의 출발이 자기사랑이라면 자기사랑의 근원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실 뿐 아니라 얼마나 끔찍이 사랑하시는지 아는 데 있습니다. 일단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는 등 능력을 행하고 돌아와 자랑했을 때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그 상황과 관련한 구체적인 정황을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않지만 사랑으로 행하지 않는 능력의 위험성을 경고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우린 의미심장한 선언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고린도전서13:2)”
영성의 본질 또한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사랑이 생수의 강처럼 흐르는 영성, 자신이 통로가 되어 사랑을 흘려보내는 영성. 그와 같은 영성이 이 책을 이 시대의 아포리즘과 성경 옆에 함께 두고 오래도록 읽힐 신앙지침서로 만들고 있습니다. 시대가 바뀌었다고 본질마저 바뀌지는 않습니다. 300년을 훌쩍 넘긴 시간을 타고 흐르는 신앙고백이 이물감이 전혀 들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가 지극히 속물화된 시대에 사랑이 곧 하나님이심을 또렷이 드러낸 이 책을 통해 자기사랑과 이웃사랑의 참의미가 되새김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