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독서 - 세상을 바꾼 위험하고 위대한 생각들
유시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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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처음본 건 ‘항소이유서’를 통해서였다. 우연한 기회에 회자되던 항소이유서를 작성한 이가 '그'라는 말을 들었고, 당시로선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상당 기간이 흐른 후 우연한 장소에서 그 글을 읽게 됐다. 분명한 철학적 토대와 정치한 논리에 호소력까지 갖춘 글은 호흡을 길게 가져갈 틈을 주지 않았다.

 

이후 토론진행자와 지식소매상이라는 타이틀을 들고 그가 나타났을 때 다소 이물감이 없지 않았지만 그가 항소이유서에 피력했던 철학을 현실정치에 대입하려는 시도에 공감했다. 적어도 기개 넘친 청년의 실험이란 신선하기도 할 것이고, 잘 되면 새바람을 불어오리라는 기대감이 적지 않았다.

 

러던 그가 주류에 편입한 것도 잠시, 여당정치인이었지만 엄밀히 말하면 정권은 여가 쥐고 있었으면서도 여야가 뒤바뀐 참으로 이상한 구도에서 주류 아닌 주류로 행보한 그 시기에도, 그는 여전히 청년으로 남았다. 어딘가 불안한 청년. 그 굴레는 당시 386 정치인들이 공히 덧쓰고 있던 굴레였다. 386 정치인이 아마추어로 재단되던 시기를 거쳐 정치경제적 혼란의 주범으로 몰리며 마침내 정권을 넘겨주고 난 후 더 이상 386이란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사라진 세대. 청년기가 오래되지 않듯이, 그리고 때가 되서 기억나기 전에는 그 시기가 송두리째 잊혀지듯이 386 세대는 잊혀진 세대의 전형이자 천형이 되었다. 그가 누구와 정당을 창당한다는 얘기가 들리는 와중에 책 한 권이 그의 이름으로 나왔다. 그는 청년기의 그를 사로잡았던 지성의 산실을 책에서 길었다. 〈죄와 벌〉, 〈전환시대의 논리〉, 〈공산당선언〉, 〈인구론〉, 〈대위의 딸〉, 〈맹자〉, 〈광장〉, 〈사기〉,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종의 기원〉, 〈유한계급론〉, 〈진보와 빈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역사란 무엇인가〉를 그는 '세상을 바꾼 위험하고 위험한 생각들'이란 부제에 담았다.

 

참다운 공부를 대학이 아닌 서클에서 배웠다고 소개한 그는 그 각각의 책을 통해 자신 안에 올곧게 형성된 세계관과 전망, 향후 지향점 등의 소회를 밝히는 한편 딸을 위시한 이 땅의 청년들이 엄혹한 청년기를 보냈던 선배의 삶을 기억해주기를 조심스럽게 요구(?)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과거 어느 때보다 필력은 밖을 지향하여 터지기보다 안으로 파고들고, 예의 거침없던 논지도 논술자의 그것처럼 설핏 건조해 보인다.

 

그러면서도 인용한 글에 대한 정치한 해석과 그 해석의 근거를 밝히는 데 있어선 여전히 항소이유서의 멋들어진 논리가 번뜩인다. 조용히 어르고 타이르는 어른의 말에 대꾸할 엄두조차 나지 않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새삼 떠오른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앞으로 그가 어떤 실험을 계속해갈지 예단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그 길에 청년정신을 견지한 지식인의 작지만은 않은 행보가 점점이 박혀있으리라는 기대는 할 수 있을 것이다.

 

항소이유서에서 지식소매상시절의 글, 그리고 《청춘의 독서》에 이르는 동안 그의 글의 편력은 일정 궤적을 그리며 유영하고 있다. 세파에 부딪혀 잠시 우회가 길어지는 듯하지만 뚝심만큼은 더욱 그 골을 견고히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청춘의 독서》가 맥없는 글의 상찬으로 여겨지지 않은 큰 이유일 것이다.

 

소매상은 한 몫에 큰 것을 얻지 못한다. 소매상의 시장은 도매상의 그것에 비해 턱없이 작지만 그 작은 곳에서 소비자와 얼굴을 가깝게 마주할 수 있다는 장점을 향유한다. 소매상은 단골 장사다. 얼마나 많은 단골을 두느냐에 따라 소매상의 성패가 갈린다. 그 점을 모르지 않을 그가 지식소매상으로서, 그리고 여전히 행보를 놓지 않는 현실정치인으로서 보다 큰 그림을 그려주길 바란다.

 

그 그림은 이 글처럼 안으로 파고드는 형태를 띠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거대담론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고 작은 실천 안에서 시민과 공감하는 그림을 그린다고, 그 그림이 작다고 할 수 있을까? 어깨 힘을 뺀 정치, 섣불리 가르치지 않는 글 속에서 그림은 더욱 커져갈 것이다. 그리고 그 그림은 당초 그가 항소이유서에서 품었던 이상으로 견고해질 것이다.

 

현실 정치와 지식인 사회의 벽이 높다하더라도 이상만 하겠는가. 높은 이상을 안고 살수록 그 인생은 고단하나 그 이상이 품은 그늘의 크기가 날로 성장할 것을 기대하는, 하지만 힘겨운 싸움을 그래도 견지해주길 바란다. 그늘이 자꾸 사라져가는 세상에 그가 큰 나무가 돼주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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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 산책
김준호 지음 / 신론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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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 산책”




가벼운 경제학을 선언하고 나선 김준호 교수의 경제학 개론서다. '경제학이 무거울 필요가 있느냐', '경제학은 학문으로 학문적 무게가 있어야 한다'는 원론적인 공방이 오간 지 벌써 수십 년이다. 그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실제 그보다 더했을 시간 동안 경제학은 인간의 경제 활동을 분석하고 그 활동의 공간인 세계를 이해하는 데 대단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 결과 지금과 같은 고도의 학문체계를 이루었다. 학문적 기초가 쌓이고 그것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면 자연히 층이 생기고 다시 그 층이 세분화되어 각종 진입장벽이 쌓이기 마련이다. 경제학이라고 예외일 수 없어서 일반인이 교양으로 경제학을 대하는 일이 녹록치 않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수년 전 도표 없는 경제학 또는 수식 없는 경제학이 시도되기도 했다. 이후 그런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는 보도는 없다. 명맥조차 유지할 수 없는 ‘- 없는 경제학’은 이제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다만 경제학의 일 분과, 예를 들면 행동경제학이 일부 그런 시도를 하고 있는 듯하지만 그것도 전혀 도표와 수식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앞서 언급한 사항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 책, 〈경제학 산책〉의 저자가 말한 바와 같이 경제학이 인간의 빵문제를 해결하려는 학문이라면 그렇게 어려울 필요가 있을까? 빵문제는 눈에 보이는 문제다. 먹고 사는 문제는 일일이 계산하고 따질 성격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먹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분석이 중요하다면 복잡다단한 인간의 이성, 비이성적 구조를 이해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다.

 

인간을 다루는 학문은 심리학이 보다 직접적이다. 명확히 구분할 수는 없지만 굳이 인간의 문제를 다루려 한다면 그 분야는 오히려 최근 수면으로 떠오른 행동경제학에 맡기는 편이 옳다. 경제학은 합리적 인간 가설을 전제한다. 경제학은 어느 장소와 어느 때에서든지 인간이 합리적인 판단과 의사결정을 내린다는 인간에 관한 굳은 신념을 최우선 조건으로 세운 후 학문적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인간에 대한 경제학의 확고한 전제는 하지만 현실세계에서 찾기란 사실상 힘들다.

 

현실세계의 인간은 탐욕 등의 비이성적 행동과 제한된 정보에 의한 비합리적인 의사결정을 주로 하는 인간일 뿐이다. 따라서 인간에 대한 제한된 인식을 학문적 전제조건으로 하는 경제학은 인간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하기엔 곤란하다. 빵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그 빵을 먹는 인간을 경제학적 정의 내에서 살피고 있는 것이다. 경제학은 인간에 대한 연구라거나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관한 연구가 아니다. 그 각각에 빵을 먹은 또는 빵을 둘러싼 이라는 형용어구가 앞서 들어가야 한다. 즉 경제학은 '빵을 먹는 인간에 대한 연구'(마샬), '빵을 둘러싼 인간과 인간의 관계'(엥겔스)를 다루는 학문이다. 경제학이 빵의 문제라면 더더욱 어려울 이유가 없다.

 

우린 이번 경제위기 국면에서 그 어려운 경제학으로부터 지혜를 얻지 못했다. 엄밀히 말하면 경제학을 다루는 학자에게서 경제학다운 위기분석과 위기대응을 듣지 못했다. 케인스 경제학의 거두인 폴 크루그먼 조차 침묵한 경제학자들에게 개탄의 목소리를 발한 바에야 달리 더 이를 것이 없다. 물론 그의 발언은 일부 자신을 겨냥하여 한 말이므로 책임회피성 발언이 아님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이유야 어떻건 경제학자들이 경제학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대중에게 일정한 정보를 제공하지 못하는 구조가 다분히 오랫동안 고착화되었다고 봄이 타당하다. 

 

위기가 전대미문의 사태로 번져가는 상황에서 어느 경제학자라고 유효한 판단을 내리기가 쉬웠으랴는 점은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와 같은 감안이 경제학자에게 면죄부를 줄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느냐의 문제는 별개의 영역에 속한다. 비중만을 놓고 보면 경제위기에 빵문제를 다뤄온 경제학자가 침묵한 일은 경제학을 유용성 논란에 빠뜨리기에 충분할 정도로 중대한 사안이다. 전문가의 침묵은 일반인의 침묵과 다른 의미가 있지 않은가.

 

중차대한 시기에 전문가가 빛을 발하지 않는다면 그런 전문가를 키우는 데 재정적 후원을 아끼지 않은 사회는 어디에서 보상을 받아야할지 난감하다. 기회비용 측면에서도 일반인은 당연히 전문가에게 전문가의 견해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 정보화 사회가 전문지식 지향으로 구조화되는 과정에서 일반인은 일반지식 습득의 기회를 그만큼 상실하게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전문가의 유효한 분석과 적절한 조언은 사회에 자양이다. 특히 위기의 시대에 그 가치는 더욱 빛을 발한다. 전문가의 역할이 기대되는 때에 그 전문가가 침묵하는 일은 단순한 침묵 이상의 해악을 사회에 미친다고 봄이 상당하다. 경제위기국면에서 정보가 없던 시민들의 충격은 쇼크에 견줄만했다. 지난 1997년의 아이엠에프 사태로 특정 사안에 따라 트라우마를 드러내지 않을 수 없는 시민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경제학이 시민적 필요에 응당 부응하는 경제학의 필요성은 그래서 경제위기 국면을 지나고 있는 우리 사회에 그 의미가 도드라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책이 그런 시민적 요구에 응답하는 책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지 여부는 아직 미지수다. 당초 이 책의 발간 취지로 볼 때 '시민적 요구에의 응답' 운운하는 데 가당치 않은 면이 분명 있다. 제목에서 풍기는 인상마저 '가벼운' 또는 '여기의' 라는 형용사와 어울린다. 그럼에도 그와 같은 경제학에 다소 과중할지 모를 부담을 지우는 것은 경제학자들이 서민적인 경제학에 관심을 가져주기 바라는 마음에서다. 이해하기 쉬운 경제학, 어려운 때 길을 알려주는 경제학, 불안할 때 진정제가 되는 경제학에 대한 요구가 그렇게 지나친 것은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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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아의 서울대 말하기 강의 - 소통의 기술, 세상을 향해 나를 여는 방법
유정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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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안을 책으로 내게 됐다'는 말은 겸양의 덕이 아니었다. 책은 전체적으로 강의록이라 해도 좋을 만큼 이론적이다. 말하기와 관련된 실기를 원했던 독자라면 실망감을 감추지 못할 듯싶다. 이런 주제의 책일수록 경험담이 중요한데, 그 중요한 것이 뒷부분에 잠시 등장하는 수준이다. 그것도 전체 분량의 10분의 1이 채 되지 않으니 해갈은커녕 갈증만 더하게 생겼다.

 

말하기를 소통과 연관 지어 소통에 따르는 다양한 이론을 소개하고 이론에 앞서 필히 다루어야하는 용어를 풀이한 것 까지는 좋았는데 이쯤에서 실제적인 측면을 다루겠지 하는 기대를 보기 좋게 날려버렸다. 탁 터놓고 말해서 말하기가 이론으로 처리될 문제는 아니지 않은가. 이론적인 부분은 이 책이 아니어도 커뮤니케이션 관련 책에 널려 있다. 굳이 이론을 들여다볼 생각이었다면 어느 누구도 이 책을 기웃거리지 않았을 것이다.

 

말하는 데 자신감이 부족하다고 늘상 아쉬워한 아내의 말을 기억하고 이 책을 건네는 것까지는 좋았다. 습관대로 여러 분야의 책을 섭렵하다가 티브이 옆에 이 책이 놓인 것을 발견하고 호기심에 서둘러 읽게 되었다. 호기심이 지루함으로 바뀌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지루함이 간신히 매달린 기대감마저 앗아가는 데는 더욱 그러했다. 마지막 부분에 저자의 실제 경험담에서 다소간 위안을 얻었는데 그뿐이다. 너무 늦게, 그리고 너무 짧게 언급된 탓이다.

 

서울대 최초의 말하기 강좌라는 프리미엄과 현직 방송 진행자라는 메리트만 가득한 책을 앞에 두고 헛헛한 기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소통의 기술, 세상을 향해 나를 여는 방법’이라는 부제가 무색할 정도로 실용과 무관한 책이라는 평가를 내리는 심정은 더더욱 착잡하다. 이 책을 손에 든 아내의 환한 표정을 지워내야 한다는 것이 못내 슬프다.

 

그럴리 없지만 이론을 가르치려한 책이라는 항변은 받아들이겠다. 하지만 부제에서 풍기는 인상도 그렇고 “말 잘하는 방법엔 정답이 없다! 나에게 맞는 말하기 방법을 찾아주는 ‘맞춤식 강의’”라는 출판사 카피가 주장하는 바와도 전혀 일치하지 않는 이와 같은 책은 내용이 아닌 제목과 지명도 있는 저자를 내세워 독자를 우롱하는 처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지 않아도 말하는 데 콤플렉스를 지닌 다수를 또 다른 콤플렉스(커뮤니케이션 이론과 관련 용어를 생소하게 바라봐야 하는)에 시달리게 해서야 곤란하지 않을까.

 

저자 또한 거대담론의 폐해를 책에서 일부 드러내지 않았나. 담론은 대부분 이론에서 나온다. 이론이 실용을 견고히 하고 그 바탕을 이루는 것이라면 환영받을 일이지만 이론이 실용과 동떨어질 경우 그 폐해는 고스란히 사회를 겨냥한다. 그 단적인 예가 오래 전 우리 사회를 강타한 거대담론의 물결 아니었던가.

 

이제 겨우 작은 실천의 필요성에 눈뜨고 그와 같은 실천에 발 벗고 나서는 사회, 다양성의 사회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이 책의 역기능을 말하는 것이 저자의 입장에선 지나치게 부당하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책을 낸다는 것은 사회적 활동이다. 독자에게 미치는 영향이 그만큼 크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론만 무성한 사회에 또 다시 이론을 덧칠하는 행위는 이제 좀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

 

바라건대 후속탄을 준비하고 있다면 정말 경험담이 바탕에 짙게 포진한 ‘도움 되는 책’을 써주길 부탁드린다. 소통은 일상생활에만 중요한 게 아니라 저자와 독자 사이에서도 그만큼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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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좋은 사람
줌파 라히리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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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남은 식구가 옹기종기 모여앉아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우며 맛난 음식을 연신 입가에 가져가는 저녁 식탁의 모습은 여느 가정 어디서나 마주치는 정겨운 일상입니다. 하루 일과가 아무리 힘들고, 그래서 지친 어깨를 끌어올릴 힘조차 없다 해도 그날 맞는 저녁은 그새 훌쩍 큰 자녀들과 언제나 다정한 아내로 인해 충분히 보상이 되고 남습니다.




문 여는 소리를 들은 막내가 “아빠, 아빠” 하며 목을 끌어안는 순간 “잠깐, 이것 놓고 얘기하자!”고 아이 손목을 떼놓으려고 하지만 싫어서가 아니지요. 매달린 아이가 힘들까봐 하는 말입니다. 이제 다 큰 첫째가 “아빠 다녀오셨어요?” 하고 무뚝뚝하게 말을 던져도 좋습니다. 속마음은 그게 아니란 걸 알기 때문입니다. 둘짼 둘째대로 그 중간에서 말을 받아칩니다. 제각각 다른 아이들과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아이, 아빠 힘들겠다.”며 연신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아내가 정말 예쁘고 사랑스럽지요.




일상에서 맞는 소소한 기쁨이 인생을 사는 데 얼마나 큰 자양이 되겠습니까? 그런 맛에 산다고들 하는 걸 보면 가정이라는 울타리의 힘을 무시할 수 없겠지요. 그런 힘이 다음날 거친 세파를 이기는 힘이 돼 줄 것은 자명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힘들다 해도 가정이 버팀목으로 작용하는 한 “그까짓 것” 하며 호기어린 소리를 내지르면 그만입니다. 살아온 배경과 살아갈 세상이 유사한 가족, 그리고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람과 사물 또한 부모 세대나 자손세대가 유사한 구조 속에서 사는 일은 심리적 안정감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1980년대 자본자유화 조치 이후 외국인 근로자들이 대거 입국해 외국인들을 보는 게 지금이야 별스럽지 않지만 불현듯 마주치는 외국인들을 슬슬 피해 달아나기 일쑤였던 때에서 갓 10년을 넘었을 뿐입니다. 문화충격이라는 말이 새삼스럽지 않게 인식된 것도 그 시기와 궤를 같이 할 정도로 우리 사회가 단일민족이라는 터울에 오랜 세월 갇혀있었다고 봐도 무방하겠지요.




최근, 아마도 수년 전부터였을 겁니다. 이민 2세대, 또는 3세대 가정에 드러난 가족 간 문화적 차이가 때론 작은 충돌로, 크게는 씻을 수 없는 비극으로 변해 안타까움을 던져주곤 했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는 한국 태생, 아들은 한국에서 태어나 이른 나이에 미국 거주, 손자는 미국 태생으로 이뤄진 3세대 가정의 경우 생각보다 세대간 문화 차이가 심각한 것으로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가치관과 세계관, 가족관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이 대부분을 차지할 것입니다.




그런 차이가 많은 경우 작은 충돌과 신속한 화해로 해결되기도 하지만 때론 급격히 폭발하는 양상을 보임으로써 원치 않은 결과를 가져오는 때가 종종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세대간 문화 차이와 그런 차이가 불러온 갈등을 어떤 방식으로 인정하고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새로운 고민거리로 등장할 만큼 이민사회가 겪는 고통은 우리가 짐작하는 그 이상이라고 봄이 타당할 겁니다.




이 소설, 〈그저 좋은 사람〉의 저자 또한 차이와 갈등이 켜켜이 쌓인 이민세대입니다. 우린 이 작품 곳곳에서 그녀가 그런 차이와 갈등을 폭력적으로 해결하지 않은 단초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녀에게 문학은 차이와 갈등을 드러내는 장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세대간 차이와 갈등은 이민세대에게 적잖은 현상입니다. 다만 당사자가 그런 차이와 갈등을 숨긴다든지 포장한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회피기제를 작동시킬 때 문제가 커지는 법입니다. 그런 경우 대부분 잠재적 폭발력을 예단할 수 없습니다. 앞서 언급한 예는 어떻게 보면 극히 표피적인 양태일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인도인 부모를 두고 영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랐습니다. 인도인 부모로부터 정서적인 면을 타고 났으며, 영국이라는 귀족적 습속의 세례와 그곳 태생이라는 자부심을 자양으로 미국의 자유분방한 사고를 향수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합니다.  단편, '그저 좋은 사람'에서 이 부분의 일단을 찾을 수 있습니다.




"수드하는 런던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자기가 태어난 곳이었다. 떠나기 전 그녀는 영국 여권을 신청했다. 그녀가 태어났을 때 부모님이 미처 만들지 않은 서류였다. 히스로 공항에서 여권을 보여주었을 때 이민국 직원은 고향으로 돌아온 걸 환영한다고 했다.  ...... 태어난 곳이어서 그런지 런던이 바로 친근하게 느껴졌고, 길은 몰라도 고향같았다." - '그저 좋은 사람', p174-175


 

달리 보면 그녀를 형성하는 인도와 영국, 미국적 배경이 심리적으로 충돌을 일으킬 경우 그 확산을 자신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 소설은 대부분의 소설, 그러니까 보편타당하게 ‘소설은 작가의 상상력이 고도화된 양식’이라는 원론적인 답을 비켜가게 만듭니다. 비록 소설이 그와 같이 작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전부 상상력에 기초하고 있는 점을 인정한다 해도 이 소설에서 만큼은 대부분의 단편 소설 주인공이 저자와 동일시되는 환각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런 환각에 저자의 태생적 배경이 한몫했음이 분명하지만 그것 이상의 조력이 있음 또한 부인할 수 없습니다.




각각의 소설 속 주인공은 서구적 인물이 표창하지 않는 웅숭깊은 속내를 보이고 있습니다. 커리향이 짙게 밴 옷을 입고 안으로 침잠하는 사고를 패턴적으로 드러내며 이야기의 속도를 적절한 수준에서 조율하고 있습니다. 지나치게 앞서지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로 쳐지지도 않는 그 지점에 소설은 언제나 머물러 있습니다. 그래서 여타 소설의 빠른 속도감과 기상천외한 전개에 젖은 독자라면 다소 지루하다는 인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책을 덮고 다른 책을 찾아 나설 수도 있습니다. 실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독자는 생각보다 큰 것을 놓치게 될지 모릅니다. 이 소설의 맛은 진중함에 있습니다.

 

빠른 속도로 창가를 스치는 풍경은 눈에 전부 담을 수 없습니다. 찬찬히 그 길 위를 걸으며 주변 풍광을 본 사람만이 느끼는 품격을 이 소설이 속 깊이 내장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밑을 들추지 않으면 잘 익은 김치를 얻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김장 김치의 참맛은 깊숙이 자리 잡은 웅숭깊음에 있습니다. 오랜 세월 입맛을 사로잡은 김장 김치의 비결을 은근한 맛에서 찾는 이들이 많습니다. 은근함은 느림의 미학과 통합니다. 빠르고 재미있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때론 천천히 걸어야 할 때가 있듯이 우리의 소설 또한 인생을 성찰적으로 들여다 볼 정도의 저속이 필요한 법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사는 일의 엄밀함과 살아가는 삶의 진중함을 두루 경험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소설의 가치가 빛을 발하고 있는 겁니다.




이 소설은 기본적으로 우리에게 이국적입니다. 계단 위에 계단이 이어지듯이 중층적으로 연결된 이국적인 태양을 가득 지니고 있습니다. 인도가 지닌 수도사적인 풍경과 영국의 엄숙주의, 미국의 분방한 자유  외에도 그 나라들이 우리에게 각인한 이미지가 이국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특히 같은 아시아권에 속하면서도 무언가 다른 구석이 많아 보이는 인도라는 나라가 그런 이국적 심상을 더욱 강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와 같은, 분명 다르지만 크게 다르지 않다는 공감을 불러내는 장치를 우린 부모 세대가 자녀에게 가르치려는 습속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루마의 어머니는 벵골어에 엄격했고 루마는 어머니에게 영어로 말한 적이 없었습니다.'('길들지 않은 땅', p20) 캘커타에 사는 프라납 삼촌의 부모는 그가 미국인 여성과 결혼하려 들자 격렬하게 반대하기도 했습니다.('지옥-천국') 미국 내에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는 자녀 세대들에게 그런 습속은 사춘기 소년소녀가 한사코 뿌리치고 싶어한 부모 세대의 유물이자 낡아빠진 골동품에 지나지 읺았습니다. 그럼에도 그 습속엔 묘한 구석이 있습니다. 여느 때와 다른 날이면 그 습속에선 마치 고향과도 같은 푸근함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등장인물들은 그런 부모 세대의 습속에 저항하기도 하고 순응하기도 하는 양면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생활양식이 서구적이라고 해서 유전자마저 탈구속과 탈가정에 경도될 것으로 보는 것은 섣부른 판단입니다. 동양적 유전자는 여전히 가족간 유대와 안정감을 선호합니다. 표면적으로 유전자에 박힌 부모세대의 세계관과 현세대가 지닌 자유분방함의 세계관이 충돌을 계속하는 듯 보여도 각각의 세대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며 끌어안기에 부심하는 사이 그런 충돌은 서서히 소멸합니다. 다만 그 속도가 빠르지 않아 충돌의 외피가 크게 보일 뿐입니다. '길들지 않은 땅'과 '지옥-천국'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인물 간 화해의 과정이 옅게 밴 작품 구도는 2세대 또는 3세대 이민가족이 부딪히는 간단치 않은 우리세대, 보편적으로는 부모세대와 갈등하는 현세대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파괴적입니다. 인물들은 자주 그 속에서 파열하지만 그 파열이 파멸로 화하지 않습니다. 이상하리만치 저자의 세계는 재생의 에너지로 가득합니다. 그 이유의 일단을 인물들의 건강한 양식과 가족애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런 점이 이 소설에 서서히 빠져들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감기약의 안정제 성분이 몸속을 타고 흐르는 동안 몽롱한 기운이 몸속 곳곳을 누비는 걸 막을 재간이 없듯이 그렇게 빠져드는 중독기를 이 소설은 갖고 있습니다. 치명적인 독소라고 표현해도 좋을 중독기, 이만한 중독기라면 누구라도 그런 중독의 위험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을 것 같기도 합니다.

 

모처럼만에 이국적인 풍모를 가득 지닌 소설을 음미하며 잘 읽었습니다. 이름난 서구작가의 작품을 주로 대하던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인도인 부모를 두고 영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란 남다른 이력의 작가의 작품 세계에 홀연히 빠져드는 묘한 느낌의 체험을 갖게도 됐습니다. 저자의 태생과 성장처가 영국과 미국이라고 해서 그의 작품 경향마저 전적으로 서구적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성장과정에서 부모로부터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가정교육과 유전자에 각인된 인도적 습성, 엄연히 서구인의 모습과 구별되는 외모 등이 작품에 반영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입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의 작품이라는 프리미엄까지 두루 갖춘 이 소설이 두루 읽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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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기쁨과 슬픔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번역 출간된 시기로 볼 때 〈행복의 건축〉을 시작으로 인기가 치솟고 나서 〈여행의 기술〉과 〈불안〉이 재출간되는 등 2007년을 기점으로 새롭게 주목받는 외국작가의 출현에 기대감을 갖게 된 건 그가 개척해가고 있는 독특한 형식 때문이었습니다.

 

우린 누군가가 자신만의 영역을 활기차게 열어갈 때 상찬의 뜻으로 ‘~표’라는 이름표를 붙여줍니다. 배움의 길을 힘차게 걸은 후에 그 배움 너머를 읽고 빠르게 변용 또는 신천지를 개척하는 일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진보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현상유지가 아니라 퇴보가 될 것이기에 오늘도 많은 사람들은 오늘 보다 나은 내일을 향해 부단히 경주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작가가 예외일 수 없겠지요?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하고 그 영역을 창조적으로 재생산하는 작가는 그래서 더욱 주목받기 마련입니다. 그런 작가의 반열에 알랭 드 보통을 올려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책에 실린 저자 약력에 따르면 1969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태어나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수학한 그는 자전적 경험과 풍부한 지적 위트를 결합시켜 사랑과 인간관계에 관해 탐구한 독특한 연애소설 3부작 〈Essays in Love〉(1993), 〈The Romantic Movement〉(1994), 〈Kiss &Tell〉(1995)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또한 우아하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문학과 철학과 역사를 아우르며 현대적 일상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에세이 〈How Proust Can Change Your Life〉(1997), 〈The Consolation of Philosophy〉(2000), 〈여행의 기술The Art of Travel〉(2002), 〈불안Status Anxiety〉(2004), 〈행복의 건축The Architecture of Happiness〉(2006) 등을 연이어 출간하며, 다음 작품이 가장 기대되는 작가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는 철학적 사유라는 프레임으로 사물과 사람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오늘 소개할 〈일의 기쁨과 슬픔〉은 그의 사유의 일단을 내밀히 드러내 보이고 있습니다. 이 책 뿐 아니라 〈행복의 건축〉, 〈여행의 기술〉 모두 부드러운 문체에 기댄 주제의식이 돋보입니다. 그리고 그만큼 가볍게만 읽을 수 없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가벼움이 선호되는 시대에 그의 작품이 인기를 끈 이유를 그가 주목을 받은 시기인 1997년 상황과 비교해봐야 할 듯싶습니다.

 

1997년은 두드러지게 일본소설이 우리 독서계에 파고들던 때입니다. 함량에 관계없이 일본소설의 번역 출간이 줄을 이었고 그 소설들이 베스트셀러 상위목록에 이름을 올리는 일이 많았습니다. 일본소설 열풍은 그만큼 우리 소설의 기반이 약했다는 반증 외에도 다채로운 형식과 내용을 갖춘 작가의 부재가 그런 현상에 한몫했음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아무튼 일본소설은 빠르게 독자층을 확대해갔습니다. 지극히 가볍고 지극히 간단하며 지극히 흐름마저 이해하기 쉬운 일본소설은 경제난과 취업난에 빠진 젊은 독자들에게 골치 아프지 않은 소설로 인식되면서 고단한 현실에서 잠시 벗어날 주요한 도구로 확대 인식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재미까지 갖추고 있으니 더할 나위 없었겠지요.

 

하지만 그런 흐름이 주도적인 흐름을 이어갈 수 없던 데는 근본적으로 우리의 심성 안에 자리 잡은 삶과 죽음, 노동과 휴식 등 성찰적 사유를 필요로 하는 철학적 물음에 그렇듯 가벼운 소설들이 전부 답할 수 없지 않느냐는 고민이 지워지지 않은 상처처럼 몸 내부에 붙어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부분을 충격한 것이 알랭 드 보통의 일련의 작품입니다. 지나치게 철학적이지 않고 지나치게 가볍지 않은 일종의 틈새시장을 겨냥한 작품과도 같은 그만의 형식이 어필 차원을 넘어 환호에까지 이르는 데 그리 큰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당분간 그에 대한 열광은 쉽게 식을 것 같지 않습니다. 

 

관심 영역을 확대해가는 것 못지않게 그가 사물과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의 깊이와 너비 모두 그 스펙트럼이 상당하기 그지없습니다. 스펙트럼의 층위가 다양하다는 것은 여전히 그가 쓸 것이 많다는 사실과 연결될 것입니다. 그가 관찰하는 영역이 생활과 밀접한 현장에 맞닿아 있다는 데서 그에 대한 신뢰를 보다 강화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의 차기작이 사변적이거나 현학적으로 흐를 우려는 조금은 뒤로 밀칠 수 있다는 얘기와 같습니다.

 

삶의 현장이라는 티브이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브라운관 스타들이 전국 각지의 사업장을 찾아 일손을 보태고 그 대가로 일당을 받는 프로그램입니다. 건강한 노동과 진한 땀방울이 신선함을 주는 외에도 그 프로그램이 인기리에 방영되는 이유는 지나치게 쉬운 노동의 현장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비작위적인 장면을 송출하고 있던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모르긴 해도 1시간의 방송분량을 내기 위해 그 몇 배의 시간을 촬영했을 것입니다. 방송을 글로 옮길 경우 영상으로 처리할 디테일한 부분까지 기술하려면 상당한 끈기와 집요한 관찰이 필요합니다. 방송에선 눈으로 보고 이해할 장면을 글로 표현할 때는 사실감 넘치게 서술해야 독자가 유사하게 그 장면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일의 기쁨과 슬픔〉은 생생한 관찰과 명확한 초점을 갖춘 시선이 돋보입니다. 저자는 10개의 현장 속 일상을 꼼꼼히 관찰하고 있습니다. 이런 정도의 관찰력이라면 그의 성격조차 짐작할 만하겠습니다. 머리가 벗겨진 넉넉한 인상과 달리 그의 눈매가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는 이유일 것입니다.

 

여행 작가에게 관찰과 기록은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특히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과 풍경에서 철학적 사유를 끌어내는 작가라면 관찰과 기록에 더해 인문학적 교양과 품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인문학적 교양은 축적된 지식 뿐 아니라 그 지식을 삶에 녹여내는 스킬이 어우러져야 비로소 빛을 발합니다. 아무리 인문학적 교양이 빛나고 철학적 사유가 돋보인다 해도 그것들이 삶에 녹아들지 않으면 종이에 적은 글 나부랭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비록 이 작품이 여행 작가의 신분에서 기록한 것이 아니어도 기본적인 성격은 여행 작가의 체험으로 살아 숨쉬는 글과 다르지 않습니다.

 

시종 저자는 사물의 운행과 사람의 생각에 의문부호를 부여하고 그것들 각각의 의미를 캐내어 일이 주는 즐거움과 괴로움을 적절히 전달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일에 이와 같이 여행가적인 자세와 관찰자의 시선, 그리고 넘치는 에너지를 담아 그 의미의 광맥을 찾으려한 시도로서는 이 작품이 처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에 관한 철학적 수준의 고찰과 가볍게 일의 의미를 되새길 에세이를 좌우로 놓고 이 책의 위치를 가늠할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번역투의 문장이 눈에 거슬리기는 것이 다소 아쉽습니다. 그렇다 해도 전체적으로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일의 기쁨과 슬픔의 의미를 되짚는 데는 크게 지장을 주지는 않습니다. 이 책을 통해 저자가 우리에게 들려주려는 일의 본질적인 의미를 크게 되새겨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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