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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좋은 사람
줌파 라히리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09년 9월
평점 :
여남은 식구가 옹기종기 모여앉아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우며 맛난 음식을 연신 입가에 가져가는 저녁 식탁의 모습은 여느 가정 어디서나 마주치는 정겨운 일상입니다. 하루 일과가 아무리 힘들고, 그래서 지친 어깨를 끌어올릴 힘조차 없다 해도 그날 맞는 저녁은 그새 훌쩍 큰 자녀들과 언제나 다정한 아내로 인해 충분히 보상이 되고 남습니다.
문 여는 소리를 들은 막내가 “아빠, 아빠” 하며 목을 끌어안는 순간 “잠깐, 이것 놓고 얘기하자!”고 아이 손목을 떼놓으려고 하지만 싫어서가 아니지요. 매달린 아이가 힘들까봐 하는 말입니다. 이제 다 큰 첫째가 “아빠 다녀오셨어요?” 하고 무뚝뚝하게 말을 던져도 좋습니다. 속마음은 그게 아니란 걸 알기 때문입니다. 둘짼 둘째대로 그 중간에서 말을 받아칩니다. 제각각 다른 아이들과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아이, 아빠 힘들겠다.”며 연신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아내가 정말 예쁘고 사랑스럽지요.
일상에서 맞는 소소한 기쁨이 인생을 사는 데 얼마나 큰 자양이 되겠습니까? 그런 맛에 산다고들 하는 걸 보면 가정이라는 울타리의 힘을 무시할 수 없겠지요. 그런 힘이 다음날 거친 세파를 이기는 힘이 돼 줄 것은 자명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힘들다 해도 가정이 버팀목으로 작용하는 한 “그까짓 것” 하며 호기어린 소리를 내지르면 그만입니다. 살아온 배경과 살아갈 세상이 유사한 가족, 그리고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람과 사물 또한 부모 세대나 자손세대가 유사한 구조 속에서 사는 일은 심리적 안정감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1980년대 자본자유화 조치 이후 외국인 근로자들이 대거 입국해 외국인들을 보는 게 지금이야 별스럽지 않지만 불현듯 마주치는 외국인들을 슬슬 피해 달아나기 일쑤였던 때에서 갓 10년을 넘었을 뿐입니다. 문화충격이라는 말이 새삼스럽지 않게 인식된 것도 그 시기와 궤를 같이 할 정도로 우리 사회가 단일민족이라는 터울에 오랜 세월 갇혀있었다고 봐도 무방하겠지요.
최근, 아마도 수년 전부터였을 겁니다. 이민 2세대, 또는 3세대 가정에 드러난 가족 간 문화적 차이가 때론 작은 충돌로, 크게는 씻을 수 없는 비극으로 변해 안타까움을 던져주곤 했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는 한국 태생, 아들은 한국에서 태어나 이른 나이에 미국 거주, 손자는 미국 태생으로 이뤄진 3세대 가정의 경우 생각보다 세대간 문화 차이가 심각한 것으로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가치관과 세계관, 가족관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이 대부분을 차지할 것입니다.
그런 차이가 많은 경우 작은 충돌과 신속한 화해로 해결되기도 하지만 때론 급격히 폭발하는 양상을 보임으로써 원치 않은 결과를 가져오는 때가 종종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세대간 문화 차이와 그런 차이가 불러온 갈등을 어떤 방식으로 인정하고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새로운 고민거리로 등장할 만큼 이민사회가 겪는 고통은 우리가 짐작하는 그 이상이라고 봄이 타당할 겁니다.
이 소설, 〈그저 좋은 사람〉의 저자 또한 차이와 갈등이 켜켜이 쌓인 이민세대입니다. 우린 이 작품 곳곳에서 그녀가 그런 차이와 갈등을 폭력적으로 해결하지 않은 단초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녀에게 문학은 차이와 갈등을 드러내는 장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세대간 차이와 갈등은 이민세대에게 적잖은 현상입니다. 다만 당사자가 그런 차이와 갈등을 숨긴다든지 포장한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회피기제를 작동시킬 때 문제가 커지는 법입니다. 그런 경우 대부분 잠재적 폭발력을 예단할 수 없습니다. 앞서 언급한 예는 어떻게 보면 극히 표피적인 양태일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인도인 부모를 두고 영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랐습니다. 인도인 부모로부터 정서적인 면을 타고 났으며, 영국이라는 귀족적 습속의 세례와 그곳 태생이라는 자부심을 자양으로 미국의 자유분방한 사고를 향수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합니다. 단편, '그저 좋은 사람'에서 이 부분의 일단을 찾을 수 있습니다.
"수드하는 런던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자기가 태어난 곳이었다. 떠나기 전 그녀는 영국 여권을 신청했다. 그녀가 태어났을 때 부모님이 미처 만들지 않은 서류였다. 히스로 공항에서 여권을 보여주었을 때 이민국 직원은 고향으로 돌아온 걸 환영한다고 했다. ...... 태어난 곳이어서 그런지 런던이 바로 친근하게 느껴졌고, 길은 몰라도 고향같았다." - '그저 좋은 사람', p174-175
달리 보면 그녀를 형성하는 인도와 영국, 미국적 배경이 심리적으로 충돌을 일으킬 경우 그 확산을 자신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 소설은 대부분의 소설, 그러니까 보편타당하게 ‘소설은 작가의 상상력이 고도화된 양식’이라는 원론적인 답을 비켜가게 만듭니다. 비록 소설이 그와 같이 작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전부 상상력에 기초하고 있는 점을 인정한다 해도 이 소설에서 만큼은 대부분의 단편 소설 주인공이 저자와 동일시되는 환각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런 환각에 저자의 태생적 배경이 한몫했음이 분명하지만 그것 이상의 조력이 있음 또한 부인할 수 없습니다.
각각의 소설 속 주인공은 서구적 인물이 표창하지 않는 웅숭깊은 속내를 보이고 있습니다. 커리향이 짙게 밴 옷을 입고 안으로 침잠하는 사고를 패턴적으로 드러내며 이야기의 속도를 적절한 수준에서 조율하고 있습니다. 지나치게 앞서지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로 쳐지지도 않는 그 지점에 소설은 언제나 머물러 있습니다. 그래서 여타 소설의 빠른 속도감과 기상천외한 전개에 젖은 독자라면 다소 지루하다는 인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책을 덮고 다른 책을 찾아 나설 수도 있습니다. 실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독자는 생각보다 큰 것을 놓치게 될지 모릅니다. 이 소설의 맛은 진중함에 있습니다.
빠른 속도로 창가를 스치는 풍경은 눈에 전부 담을 수 없습니다. 찬찬히 그 길 위를 걸으며 주변 풍광을 본 사람만이 느끼는 품격을 이 소설이 속 깊이 내장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밑을 들추지 않으면 잘 익은 김치를 얻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김장 김치의 참맛은 깊숙이 자리 잡은 웅숭깊음에 있습니다. 오랜 세월 입맛을 사로잡은 김장 김치의 비결을 은근한 맛에서 찾는 이들이 많습니다. 은근함은 느림의 미학과 통합니다. 빠르고 재미있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때론 천천히 걸어야 할 때가 있듯이 우리의 소설 또한 인생을 성찰적으로 들여다 볼 정도의 저속이 필요한 법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사는 일의 엄밀함과 살아가는 삶의 진중함을 두루 경험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소설의 가치가 빛을 발하고 있는 겁니다.
이 소설은 기본적으로 우리에게 이국적입니다. 계단 위에 계단이 이어지듯이 중층적으로 연결된 이국적인 태양을 가득 지니고 있습니다. 인도가 지닌 수도사적인 풍경과 영국의 엄숙주의, 미국의 분방한 자유 외에도 그 나라들이 우리에게 각인한 이미지가 이국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특히 같은 아시아권에 속하면서도 무언가 다른 구석이 많아 보이는 인도라는 나라가 그런 이국적 심상을 더욱 강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와 같은, 분명 다르지만 크게 다르지 않다는 공감을 불러내는 장치를 우린 부모 세대가 자녀에게 가르치려는 습속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루마의 어머니는 벵골어에 엄격했고 루마는 어머니에게 영어로 말한 적이 없었습니다.'('길들지 않은 땅', p20) 캘커타에 사는 프라납 삼촌의 부모는 그가 미국인 여성과 결혼하려 들자 격렬하게 반대하기도 했습니다.('지옥-천국') 미국 내에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는 자녀 세대들에게 그런 습속은 사춘기 소년소녀가 한사코 뿌리치고 싶어한 부모 세대의 유물이자 낡아빠진 골동품에 지나지 읺았습니다. 그럼에도 그 습속엔 묘한 구석이 있습니다. 여느 때와 다른 날이면 그 습속에선 마치 고향과도 같은 푸근함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등장인물들은 그런 부모 세대의 습속에 저항하기도 하고 순응하기도 하는 양면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생활양식이 서구적이라고 해서 유전자마저 탈구속과 탈가정에 경도될 것으로 보는 것은 섣부른 판단입니다. 동양적 유전자는 여전히 가족간 유대와 안정감을 선호합니다. 표면적으로 유전자에 박힌 부모세대의 세계관과 현세대가 지닌 자유분방함의 세계관이 충돌을 계속하는 듯 보여도 각각의 세대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며 끌어안기에 부심하는 사이 그런 충돌은 서서히 소멸합니다. 다만 그 속도가 빠르지 않아 충돌의 외피가 크게 보일 뿐입니다. '길들지 않은 땅'과 '지옥-천국'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인물 간 화해의 과정이 옅게 밴 작품 구도는 2세대 또는 3세대 이민가족이 부딪히는 간단치 않은 우리세대, 보편적으로는 부모세대와 갈등하는 현세대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파괴적입니다. 인물들은 자주 그 속에서 파열하지만 그 파열이 파멸로 화하지 않습니다. 이상하리만치 저자의 세계는 재생의 에너지로 가득합니다. 그 이유의 일단을 인물들의 건강한 양식과 가족애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런 점이 이 소설에 서서히 빠져들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감기약의 안정제 성분이 몸속을 타고 흐르는 동안 몽롱한 기운이 몸속 곳곳을 누비는 걸 막을 재간이 없듯이 그렇게 빠져드는 중독기를 이 소설은 갖고 있습니다. 치명적인 독소라고 표현해도 좋을 중독기, 이만한 중독기라면 누구라도 그런 중독의 위험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을 것 같기도 합니다.
모처럼만에 이국적인 풍모를 가득 지닌 소설을 음미하며 잘 읽었습니다. 이름난 서구작가의 작품을 주로 대하던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인도인 부모를 두고 영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란 남다른 이력의 작가의 작품 세계에 홀연히 빠져드는 묘한 느낌의 체험을 갖게도 됐습니다. 저자의 태생과 성장처가 영국과 미국이라고 해서 그의 작품 경향마저 전적으로 서구적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성장과정에서 부모로부터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가정교육과 유전자에 각인된 인도적 습성, 엄연히 서구인의 모습과 구별되는 외모 등이 작품에 반영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입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의 작품이라는 프리미엄까지 두루 갖춘 이 소설이 두루 읽히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