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 기쁨과 슬픔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번역 출간된 시기로 볼 때 〈행복의 건축〉을 시작으로 인기가 치솟고 나서 〈여행의 기술〉과 〈불안〉이 재출간되는 등 2007년을 기점으로 새롭게 주목받는 외국작가의 출현에 기대감을 갖게 된 건 그가 개척해가고 있는 독특한 형식 때문이었습니다.

 

우린 누군가가 자신만의 영역을 활기차게 열어갈 때 상찬의 뜻으로 ‘~표’라는 이름표를 붙여줍니다. 배움의 길을 힘차게 걸은 후에 그 배움 너머를 읽고 빠르게 변용 또는 신천지를 개척하는 일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진보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현상유지가 아니라 퇴보가 될 것이기에 오늘도 많은 사람들은 오늘 보다 나은 내일을 향해 부단히 경주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작가가 예외일 수 없겠지요?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하고 그 영역을 창조적으로 재생산하는 작가는 그래서 더욱 주목받기 마련입니다. 그런 작가의 반열에 알랭 드 보통을 올려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책에 실린 저자 약력에 따르면 1969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태어나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수학한 그는 자전적 경험과 풍부한 지적 위트를 결합시켜 사랑과 인간관계에 관해 탐구한 독특한 연애소설 3부작 〈Essays in Love〉(1993), 〈The Romantic Movement〉(1994), 〈Kiss &Tell〉(1995)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또한 우아하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문학과 철학과 역사를 아우르며 현대적 일상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에세이 〈How Proust Can Change Your Life〉(1997), 〈The Consolation of Philosophy〉(2000), 〈여행의 기술The Art of Travel〉(2002), 〈불안Status Anxiety〉(2004), 〈행복의 건축The Architecture of Happiness〉(2006) 등을 연이어 출간하며, 다음 작품이 가장 기대되는 작가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는 철학적 사유라는 프레임으로 사물과 사람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오늘 소개할 〈일의 기쁨과 슬픔〉은 그의 사유의 일단을 내밀히 드러내 보이고 있습니다. 이 책 뿐 아니라 〈행복의 건축〉, 〈여행의 기술〉 모두 부드러운 문체에 기댄 주제의식이 돋보입니다. 그리고 그만큼 가볍게만 읽을 수 없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가벼움이 선호되는 시대에 그의 작품이 인기를 끈 이유를 그가 주목을 받은 시기인 1997년 상황과 비교해봐야 할 듯싶습니다.

 

1997년은 두드러지게 일본소설이 우리 독서계에 파고들던 때입니다. 함량에 관계없이 일본소설의 번역 출간이 줄을 이었고 그 소설들이 베스트셀러 상위목록에 이름을 올리는 일이 많았습니다. 일본소설 열풍은 그만큼 우리 소설의 기반이 약했다는 반증 외에도 다채로운 형식과 내용을 갖춘 작가의 부재가 그런 현상에 한몫했음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아무튼 일본소설은 빠르게 독자층을 확대해갔습니다. 지극히 가볍고 지극히 간단하며 지극히 흐름마저 이해하기 쉬운 일본소설은 경제난과 취업난에 빠진 젊은 독자들에게 골치 아프지 않은 소설로 인식되면서 고단한 현실에서 잠시 벗어날 주요한 도구로 확대 인식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재미까지 갖추고 있으니 더할 나위 없었겠지요.

 

하지만 그런 흐름이 주도적인 흐름을 이어갈 수 없던 데는 근본적으로 우리의 심성 안에 자리 잡은 삶과 죽음, 노동과 휴식 등 성찰적 사유를 필요로 하는 철학적 물음에 그렇듯 가벼운 소설들이 전부 답할 수 없지 않느냐는 고민이 지워지지 않은 상처처럼 몸 내부에 붙어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부분을 충격한 것이 알랭 드 보통의 일련의 작품입니다. 지나치게 철학적이지 않고 지나치게 가볍지 않은 일종의 틈새시장을 겨냥한 작품과도 같은 그만의 형식이 어필 차원을 넘어 환호에까지 이르는 데 그리 큰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당분간 그에 대한 열광은 쉽게 식을 것 같지 않습니다. 

 

관심 영역을 확대해가는 것 못지않게 그가 사물과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의 깊이와 너비 모두 그 스펙트럼이 상당하기 그지없습니다. 스펙트럼의 층위가 다양하다는 것은 여전히 그가 쓸 것이 많다는 사실과 연결될 것입니다. 그가 관찰하는 영역이 생활과 밀접한 현장에 맞닿아 있다는 데서 그에 대한 신뢰를 보다 강화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의 차기작이 사변적이거나 현학적으로 흐를 우려는 조금은 뒤로 밀칠 수 있다는 얘기와 같습니다.

 

삶의 현장이라는 티브이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브라운관 스타들이 전국 각지의 사업장을 찾아 일손을 보태고 그 대가로 일당을 받는 프로그램입니다. 건강한 노동과 진한 땀방울이 신선함을 주는 외에도 그 프로그램이 인기리에 방영되는 이유는 지나치게 쉬운 노동의 현장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비작위적인 장면을 송출하고 있던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모르긴 해도 1시간의 방송분량을 내기 위해 그 몇 배의 시간을 촬영했을 것입니다. 방송을 글로 옮길 경우 영상으로 처리할 디테일한 부분까지 기술하려면 상당한 끈기와 집요한 관찰이 필요합니다. 방송에선 눈으로 보고 이해할 장면을 글로 표현할 때는 사실감 넘치게 서술해야 독자가 유사하게 그 장면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일의 기쁨과 슬픔〉은 생생한 관찰과 명확한 초점을 갖춘 시선이 돋보입니다. 저자는 10개의 현장 속 일상을 꼼꼼히 관찰하고 있습니다. 이런 정도의 관찰력이라면 그의 성격조차 짐작할 만하겠습니다. 머리가 벗겨진 넉넉한 인상과 달리 그의 눈매가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는 이유일 것입니다.

 

여행 작가에게 관찰과 기록은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특히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과 풍경에서 철학적 사유를 끌어내는 작가라면 관찰과 기록에 더해 인문학적 교양과 품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인문학적 교양은 축적된 지식 뿐 아니라 그 지식을 삶에 녹여내는 스킬이 어우러져야 비로소 빛을 발합니다. 아무리 인문학적 교양이 빛나고 철학적 사유가 돋보인다 해도 그것들이 삶에 녹아들지 않으면 종이에 적은 글 나부랭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비록 이 작품이 여행 작가의 신분에서 기록한 것이 아니어도 기본적인 성격은 여행 작가의 체험으로 살아 숨쉬는 글과 다르지 않습니다.

 

시종 저자는 사물의 운행과 사람의 생각에 의문부호를 부여하고 그것들 각각의 의미를 캐내어 일이 주는 즐거움과 괴로움을 적절히 전달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일에 이와 같이 여행가적인 자세와 관찰자의 시선, 그리고 넘치는 에너지를 담아 그 의미의 광맥을 찾으려한 시도로서는 이 작품이 처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에 관한 철학적 수준의 고찰과 가볍게 일의 의미를 되새길 에세이를 좌우로 놓고 이 책의 위치를 가늠할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번역투의 문장이 눈에 거슬리기는 것이 다소 아쉽습니다. 그렇다 해도 전체적으로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일의 기쁨과 슬픔의 의미를 되짚는 데는 크게 지장을 주지는 않습니다. 이 책을 통해 저자가 우리에게 들려주려는 일의 본질적인 의미를 크게 되새겨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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