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풍경 - 김형경 심리 여행 에세이
김형경 지음 / 예담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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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살이가 힘겹거든 잠시 쉬어가도 좋겠지요.

동행이 있으면 더 좋겠고요.

그렇지 않더라도

나를 이해해 줄 책 한 권이 손에 들린다면 적잖이 위로가 될 겁니다.

 

 

어느 때고 여행 한 번 떠나보자고 크게 결심할 때가 있습니다.

굳이 ‘크게’ 라는 부사를 결심 앞에 붙인 건 여행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데 있습니다.

훌훌 털고 일어나면 왜 여태 이 좋은 걸 못했나 싶은 게 여행의 참맛인데요.

여행 맛이 들어도 또 다시 그걸 결행하기가 쉽지 않더군요.

 

여행 갈 마음을 먹으면 치이는 게 또 얼마나 많던가요?

남겨 질 아이들 걱정에 데려가려고 하면 턱턱 걸리는 게 일정이고,

간신히 직장에 말미를 얻어 놨다 해도 혹여 나로 인해 고생할 직원 생각하면 마음 편치 않지요.

나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이런 저런 생각에 치이다 보면 여행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자는 말이 뱃속에서 스멀거리지요.

‘그래 아예 잘 됐어’ 하고 여행가지 않기로 한 결심을 대견해 하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마저 생기는 게 우리네 일상다반사입니다. 그렇죠?

 

그런데 우리와 좀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몇 년 전으로 기억하는데요.

어느 부부가 집 팔아 세계여행을 다닌 일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네들이 낸 책이 제법 팔리기도 했고요. 하지만 이들이 주목을 받은 건 다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부부 관계가 소원했었나 봅니다.

돌파구가 필요한 던 게지요.

기억이 맞다면 아내가 먼저 짐 싸들고 집을 나섰더랍니다.

다시는 안 볼 요량으로 목적지도 안 알리고 떠났다지요.

몇몇 나라를 휘돌다 인도에선가 편지를 썼다네요.

편지를 받은 남편이 득달같이 날아갔답니다.

반 년 동안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삶을 총체적으로 돌아볼 기회를 가졌겠지요.

크게 틀어질 뻔 한 관계가 회복된 건 물론이고요. 서로 주고받은 상처 또한 말끔히 씼겼다네요.

 

집 팔고 떠나면 아무 것도 남지 않을 줄 알았는데, 집값 전부는 아니어도 인세가 제법 쌓였고요.

삶에 대한 의지도 몰라보게 솟구치더랍니다.

이후 소식은 듣지 못했지만 아마 알콩달콩 잘 살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전 보다 열심히 사느라 돈도 제법 모았겠지요.

무엇 주고도 살 수 없는 부부의 정을 한 아름 안고 돌아왔으니 뭐 다른 게 필요 있었을까, 짐작만으로도 마음이 뜨끈해졌습니다.

 

이 책 저자도 그랬다는군요.

부부 관계가 틀어진 건 아니고요.

집 팔아 여행에 나섰답니다.

유난히 겁이 많고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저자는 여행을 통해 찬찬히 자신을 들여다보고 싶었을 것도 같습니다.

그가 살면서 제일 잘 한 것 두 가지를 꼽았는데요.

그 중에 하나가 집 팔고 떠난 여행이랍니다. 참고로 다른 하나는 정신분석을 받은 것이고요.

그의 여행 궤적을 따라 가보면 여행이 자기 치료의 과정이었음을 짐작하게 되는데요.

그건 작가인 그가 여행기를 쓰지 않으리라 결심한 여정에서

다름 아닌 자신의 과거를 깊게 돌아본 데서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유아기 때 형성된 자아가 실은 부모,
그에게선 특히 어머니의 영향이 지배적으로 작용한 ‘내면 아이’ 또는 ‘어른 아이’였음을 알아차리는데,

그 때서야 비로소 그가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서 느낀 감정과 과거 심리학서적을 탐독하며 쌓은 지식들이 덩어리져

그런 현실과 엮이더라는 고백에 이르면 남의 말 같이 들리지 않더군요.

그가 인용한 그 자신의 내면 아이가 실은 내 안에도 도사리고 있었음을 깨닫는 이유도

이 책이 지닌 ‘솔직한 자기 성찰’에 무게중심이 올려져있기 때문일 겁니다.

 

며칠 전부터 아내와 틀어져 있던 전 아내를 이해해주지 못한 저 자신을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자상함을 자주 내비치지 않은 아버지 밑에서 자란 탓이라 하기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아내를 몰아붙인 어제 일이 문득 생각이 났고요.

그런 저런 내 내면 아이가 이와 같은 책을 통해서든, 그것이 밖으로 나와 크게 터지는 과정에서든 여실히 드러나야

언제고 치유가 가능하다는 점에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쯤이면 고개를 주억거리며 크게 맞장구치는 생각 하나가 들곤 하는데요.

“지식아란 게 그렇더라”는 씁쓸함 같은 겁니다.

‘아는 지식이 깨달음으로 연결되지 않을 때 그 지식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자문도 하고,

’안다는 일이 얼마나 치명적이더냐!‘는 자못 의미심장한 말투에 사로잡히기도 하지요.

아마도 여행기도 아니면서 심리학 서적도 아닌 이 책이 사람 마음을 은근슬쩍 건드리는 묘한 구석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공감이 가능하게 말하면 그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

독자가 쉽게 경계를 지울 수 없는 통에 저자의 의도에 말려드는 거라고 너스레를 떨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많은 걸 보고 들은 사람도 실제 겪은 사람을 당하진 못하겠지요.

유난히 감성이 풍부했던 저자가 우리가 쉽게 지나치는 상황에 자주 발길이 채여 넘어졌으리란 건

이 책을 조금만 읽어도 이해할 수 있는데요. 아마도 그런 것이었을 겝니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의 조금 다른 행동과 그들을 대하는 저자의 태도,

그리고 그들이 남긴 뒷이야기와 느낌들이 아롱져 저자의 내면을 타고 깊이 흐르는 걸 알아채는 순간

“어어” 하며 한 발 물러서게 될 겁니다.

 

그런 행동은 경계의 표시지요.

속마음을 들킨 데서 온 즉각적인 반응이라고 할 수도 있고요.

그리곤 좀 더 살피게 되겠지요. ‘무슨 말을 하나?’ 하고요.

그리곤 이내 그런 생각을 했던 걸 잊어버리지요. 정확히 표현하면 더 이상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겁니다.

이상하리만치 너무도 생생한 내 얘기더라는 공감이 물밀 듯이 밀려오는데, 더 이상한 건 그런 사실조차 알아채지 못하더란 거죠.

그냥 젖게 됩니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그냥 그렇게 말이죠.

 

읽어야 할 경제 관련 서적이 산더미 같이 쌓여있었는데 이 책 읽는 게 아깝지 않았습니다.

머리를 식힐 요량으로 한두 편 읽다보니 그새 만쯤 읽었더군요.

공감 한 표, 공감 두 표 하는 식으로 책장을 넘긴 게 그렇게 쌓였고 반대로 시간은 보통 책의 한 배 반이 걸렸습니다.

저자를 통해 옛날의 내 모습을 자주 마주보았던 탓입니다.

말을 걸 순 없었지만 ’그랬구나, 그랬어‘ 하고 다독거려 줄 순 있었습니다.

 

지금은 잠시 이 책을 비껴서 있습니다.

생각의 끈을 좀 더 이어가자는 생각에서고요.

늘 일삼던 버릇처럼 야금야금 읽어가려는 요량 때문입니다.

아픈 상처 쯤 하나 둘씩 안 갖고 있는 사람이 없겠지만

그런 아픔을 꺼내놓기가 쉽지 않은 세상에서 놀랍도록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을 만나는 건,

그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참 행복한 경험“ 중에 하나일 겁니다.

 

속 깊이 공명하는 그의 이야기가

오늘 힘겨운 날을 나고 있는 세대에게 위로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거듭 추천합니다.

위로는 상대방이 답을 줘서가 아니라

내 속사정에 공감한 데서 오는 걸 잘 알려준 이 책에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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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개조론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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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의 〈대한민국개조론〉: 사람이 희망인 민주적 리더십의 회복 선언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헌법 제1장 제1조다. 국민은 권력의 창설자다. 따라서 여하한 권력도 국민의 승인이 없는 한 민주공화국 내에서 합법성을 지니지 못한다.




더욱이 현대헌법은 국민이 불법적 국가권력을 실력행사로 저지할 권리를 부여하고 있으며 비록 명시적으로 규정하지 않더라도 헌법에 저항권이 내재되어 있다고 봄이 통설이다. 그만큼 권력의 창설자로서의 국민의 지위가 상당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현실은 어떤가?




이 책,〈대한민국개조론〉의 저자는 남명 조식의 단성소(丹城疏)를 서문에 인용함으로써 우리 현실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1955년 남명 조식은 단성현감 자리를 제수 받는다. 그 때는 12세 명종을 대신해 문정왕후가 섭정한지 10년이 흐른 때였다. 파평 윤씨가 국정을 농단하고 연이어 사화를 일으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던 살벌한 시대였다.




“대비(문정왕후)께서는 신실하고 뜻이 깊다하나 깊은 구중궁궐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전하(명종)는 아직 어리니 다만 돌아가신 임금님의 한 고아에 불과합니다.”




남명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당시 최고 권력자인 문정왕후를 과부로, 임금을 고아로 표현하고 있다. 이쯤 되면 목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이어 남명은 어린 임금이 학문에 힘을 쓰고 인재를 두루 등용하여 선정을 베풀기를 간곡히 간청한 후 그때가 되면 미관말직이라도 관직에 나가겠다는 말로 단성소를 끝맺고 있다.




왕과 견해가 다를 때 거침없이 직언하는 풍토가 살아있던 시대. 그 시대는 적어도 초야의 선비가 군주에게 직언하는 것을 처벌하면 언로를 막아 국사를 위태롭게 한다고 진언한 용기 있는 언관들이 살아있던 시대이기도 했다. 덕택에 남명은 죽지 않았다. 저자의 말대로 대통령에게 쓴소리를 했다고 목숨이 오락가락하던 시대는 1987년에 끝났다. 그런 시대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현실을 보면 과연 그럴까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방송을 장악한 데 이어 당연한 귀결로 관제보도가 횡행하고, 정부공식발표 외 모든 통신을 유언비리로 규정하고 처단하겠다고 나선 토목정권과 그 하수인들에게 과연 조선시대만큼의 언로개념이 있는지 묻고 싶다.




저자는 이 책을 남명을 따라 오늘날 왕인 국민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수단으로 삼고자 했다. 먼저 이 책의 쓴소리를 들어야 할 이들이 있다.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무단방기하고 제멋대로 국정을 농단하는 현 정권과 그 하수인들이 그들이다.




1997년에 첫 출간된 이 책은 출간시기로만 따지면 벌써 구시대의 소리로 치부되어야 마땅하다. 1년이 다르게 변화되는 세상에서 3년이나 지난 말은 우선 설득력을 갖추기가 쉽지 않을뿐더러 재탕한다면 쓸데없는 잔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또 그래야 한다.




진보가 계속되는 한 과거의 말은 과거의 임무를 끝내고 잠드는 게 마땅하다. 하지만 요즘 구시대 유물이 현 장권에 의해 자주 출토 또는 재생되는 통에 과거의 일로 잊혔던 쓴소리가 가치를 발휘하고 있다. 이 책 또한 예외가 아니다. 책은 16개 꼭지로 구성되어 있다. 각 꼭지의 소제목만으로도 그 시기의 굵직한 이슈를 들여다볼 수 있어 전부 인용한다. 이렇다.




성공한 나라, 불행한 국민

선진통상국가, 박정희 대통령의 유산

사회투자국가, 지구촌 경쟁에서 이기는 전략

비전 2030, 사람이 희망이다.

대한민국, 진화는 계속된다.

전통적 복지정책과 사회투자정책

사회 서비스 시장과 일자리 창출

책임성 없는 진보, 일관성 없는 보수

의료급여제도 혁신

약제비 적정화와 한미 FTA

건강투자정책

파랑새 플랜

대한민국의 슬픈 자화상, 국립서울병원

시한폭탄 국민연금

공적개발원조

민주적 리더십




제목만 일별해도 촌철살인이 느껴질 정도로 1997년, 그리고 오늘 우리 현실을 가늠하는 주요 화두로 손색이 없다. 씁쓸한 화두이기도 하다. 전혀 앞서가지 못한 우리 현실. 우리가 선택한 정권이니 그 대가마저 우리의 몫이라면 할 말은 없다. 권력획득의 원천이 국민투표라는 데서 정당성을 인정받는다 해서 정권이 권력의 창설자인 국민에 대한 봉사와 국민을 위한 국정운영이라는 행정적, 법적 행위마저 정당성을 얻은 것이 아니다.




가깝게는 6.2 지방선거가 국민이 결코 준 적 없는 무소불위의 권력에 태클을 걸 호기이며, 멀게는 2012년 대선에서 결정적 퇴장명령을 발동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더 이상 우리가 ‘불행한 국민’이 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자위권이며 ‘민주적 리더십’을 회복하는 길이 될 것이다. 아울러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져야 하지만 여전히 낯선 ‘사람이 희망’인 ‘파랑새 플랜’이 시동을 거는 시초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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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태교동화
오선화 글, 김은혜 그림 / 강같은평화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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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태교동화》: 할머니 무릎에 앉아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를 듣는 듯한 포근한 감성의 동화

                                              - 태아는 물론 어른에게도 좋은 동화 -

 

90년대 초반 ‘모차르트 이펙트’라는 말이 크게 유행한 적이 있었다. ‘모차르트 이펙트’는 항간에 소리와 음악에 관한 인간의 선천적인 청각능력을 개발하면 창의성과 학습효과를 높이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알려졌다. EQ에 대한 관심이 커졌던 때라 정서를 고양하고 태교에도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발매회사의 광고카피는 파급효과가 대단해서 고객들을 연일 레코드점으로 불러들였다.




당시 레코드점은 모차르트 음악 CD를 사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고, 없어서 못 판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CD는 레코드점에 갖다놓기가 무섭게 팔려나갔다. 태교 음악으로 클래식을 들은 산모의 자녀가 건강하고 정서적으로 더 안정됐다는 심리학자들의 보고가 이어지자 임산부들까지 클래식 CD 사재기에 앞 다퉈 나서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사회는 모자르트 열풍에 휩싸였다. 이후 효과성에 의문이 제기되면서 ‘모차르트 이펙트’는 차츰 잊혀져갔다. 그렇다고 태교에 대한 관심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제 태교는 태교음식, 태교동요, 태교운동, 태교동화 등 다양한 형식과 내용을 갖추고 빠르게 시장을 확대해가고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관련 자료에 관한 콘텐츠가 성경에 많음에도 여태까지 이렇다 할 성경태교서적 하나 제대로 출간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성경은 그 안에 셀 수 없이 많은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있다. 또한 인물들을 장단점에 따라 선별하지 않고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생활 곳곳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사건들을 처리하는 데 필요한 순도 높은 노하우를 손쉽게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추구할 바와 장래계획에 관해 그들이 선택한 것을 유심히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추구와 계획이 어떤 형태로 전개될지 사전에 검증해 볼 수 있다. 더욱이 가정과 직장 또는 그 외 조직생활에 필요한 신의와 성실, 그리고 우애 등의 덕목의 완전한 형식과 내용인 하나님의 가없는 사랑을 가깝게 마주할 수 있다.




태교에 흐르는 원초적인 형식이 사랑이라는 데 동의한다면 그 완전체인 하나님의 사랑을 돌아보는 일은 여전히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다. 부모의 사랑이 아무리 무조건적이라고 해도 죄 없는 자기 아들을 다른 사람들의 죄를 사해주기 위해 내준 하나님의 사랑보다 크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사람에게 불어넣기를 좋아하셨다. 죄로 인해 사람 안에 심겨진 사랑이 희석되고 그만큼 희미해졌지만 그럼에도 그 사랑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근본 뿌리가 되어 면면히 흐르고 있다. 그런 이유로 사람이 하나님께로 갈 길이 닫히지 않는 것이다. 성경 속 인물들을 통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둘씩 알 수 있는 것도 같은 이유다. 마치 야곱의 맹목적인 사랑, 요셉의 너그러운 사랑, 모세의 웅대한 사랑, 리브가의 애틋한 사랑 등으로 표현하듯이 말이다.




이 책 《성경태교동화》의 저자는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을 사람 안에 얼마나 아름답게 수놓았는지를 섬섬옥수로 자상하고 온화하게 형상화해 놓았다. 이미 저자는 〈영재태교동화〉를 썼을 정도로 태교동화에 관한 한 검증받은 작가다. 베다니교회의 태아교육 사역팀장 및 영아부교사로 다년간 태교에 헌신한 저자는 임산부와 영아를 섬기는 과정에서 만난 하나님의 사랑을 여성의 섬세한 감각과 부드러운 눈매에 담아 쉽고 재미있게 풀어놓았다.




책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총 25편이다. 각각의 이야기는 익히 잘 알려진 이야기다. 하지만 남다른 점이 있다. 읽다보면 어느새 할머니 무릎에 앉아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를 듣는 듯한 포근한 감성에 젖어들고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연신 보채는 눈망울로 할머니를 응시하는 어린아이가 떠오른다. 물론 어린아이는 책을 읽는 독자 자신이다. 책을 읽으며 잠시라도 아이가 된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로 돌아가 당시 심정을 공감각적으로 경험하는 경이를 이 책이 선사하고 있다고 보면 틀림없다. 이는 곧 저자가 구체적으로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과 그 사랑을 글로 엮은 저자의 솜씨가 결합돼 익히 들은 이야기마저 전혀 새로운 이야기로 탈바꿈한 결과다.




할머니의 옛날이야기와 태교동화의 같은 점은 화자가 무한한 사랑으로 청자를 대한다는 데 있다. 화자와 청자의 그와 같은 관계는 근본적으로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청자는 어떤 이야기든 들을 준비가 돼 있으며 화자는 청자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노력한다. 이때 그들 사이를 매개하는 이야기는 단순히 이야기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그들에게 이야기는 상호의 친밀감 확대를 넘어 건강한 가정과 사회를 구성하는 기초가 된다. 가정을 사회의 최소한으로 정의할 때 그것이 가정의 중요성을 내포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야기가 가정의 사회성을 증대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성경동화를 통해 우리 아이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선다는 것은 크게 의미 있는 일이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아이는 이후 하나님 안에서 건강하게 자랄 것이기 때문이다. 경쟁의식을 부추기고 성공에 대한 강박관념을 재생산하는 사회에 매몰되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귀한 자녀로 자라나는 데 성경동화의 역할이 결코 작지 않다.




둘째, 할머니의 이야기와 태교동화는 그 이야기에 각각 교훈이 들어있다. 본질적으로 교훈은 이야기 자체에 심겨져 있기도 하지만 화자가 청자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바가 담겨있다. 이야기가 담고 있는 교훈은 화자의 뜻에 따라 얼마든지 변용이 가능한데, 그것은 청자의 입장이나 수용능력을 어느 선에 두느냐와 관련이 있다. 결국 교훈의 각색은 오롯이 화자의 몫이라는 얘기다.




저자는 《성경태교동화》를 할머니 무릎에 앉아 귀를 쫑긋 세운 어린아이의 입장에서 할머니의 손자사랑에 버금가는 애정으로 거듭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고 있다. 저자는 특히 성경동화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녹아있어 그 말씀이 우리에게 건강에 필요한 ‘약’이 되는 점을 간과하지 않고 각각의 이야기 속에 담긴 성경적 교훈을 자상하게 드러내고 있다. 베다니교회에서 태아교육팀장을 맡고 있는 교사로서 저자는 성경동화가 아이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침을 임상적으로 잘 알고 있을 터다. 아마도 그와 같은 임상 경험이 저자를 성경에 관한 한 드문 이야기꾼으로 만들지 않았나 싶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대부분 엄마 손에 폭 잠기는 포근한 느낌처럼 귓전을 울리고 봄볕처럼 포근하게 가슴에 아련하게 포말을 일으킨다. 




아울러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그들 주변의 이야기를 상상력을 동원해 지면에 불러냄으로써 각각의 인물들을 살아 숨쉬는 동시대인으로 형상화하고 있어 인상적이다. 그것이 《성경태교동화》의 인물들을 마치 눈앞에서 목격하는 듯한 느낌을 주고, 독자가 그들의 삶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선택에 함께 공명하는 기회를 부여하는 주요인일 것이다. 태아 또한 같은 경험을 하지 않을까? 엄마의 이야기를 귀를 쫑긋 세우고 듣다가 궁금증이 너무 들어 ‘세상 밖으로 나가면 물어봐야지’ 하는 마음이 들지 않겠는가. 아이가 자라면서 엄마 곁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운다면 전부는 아니라 해도 태아시절 엄마가 들려준 이야기가 한몫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태아에게는 어떤 세상이야기보다 사랑과 소망이 가득한 성경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좋다. 유감스럽게도 세상이야기는 그 안에 경쟁의식 고양, 상하관계 조장, 상승욕구 과열 등의 문제를 안고 있다. 표면적으로 그렇지 않다 해도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부모가 세상에 대한 태도를 바꾸지 않는 한 언제든지 그 반대의 의미로 아이에게 전달될 개연성이 높다. 부모가 이야기와 달리 나누고 다소 손해 보는 듯 살아서는 안 되는 세상이라는 관념을 갖고 있다면 이야기는 이야기로 그칠 뿐 아이의 삶 속에 공명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힘은 화자의 이야기에 대한 긍정적 동의와 청자의 공감이 결합될 때 증폭된다. 저자가 각각의 이야기 말미에 엄마 자신의 목소리를 담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 당부의 말에는 태어날 아이가 꼭 기억해주길 바라는 엄마의 심정이 깊이 담겨있다. “어때, 요한은 정말 사랑으로 변화된 사람이지? 엄마 아빠도 우리 아가한테 많은 사랑을 줄 거야. 예수님만큼은 아니어도 정말 많이 사랑하도록 노력할게. 그러니까 우리 아가도 버럭버럭 화내는 사람보다는 신중한 사람이 되어야 해. 요한처럼 보아너게(천둥의 아들이란 뜻)라고 불리면 안 되잖아. 엄마 아빠도 너에게 천둥보다는 구름이 되도록 노력할게.” 이런 말을 들고 자란 아이가 건강한 품성과 곧은 심성을 갖지 않을 재간이 있을까.




세상은 태아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각종 매체를 이용해 빠르게 부모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태교동화에서부터 태교음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식과 내용을 갖춘 교육기자재 개발에 앞 다퉈 나서고 있음 또한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앞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태교동화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성경 관련 동화의 수 또한 크게 낫지 않다. 이는 성경교육 전반에 대한 인식이 세상의 그것에 크게 미치지 못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모쪼록 이 책이 태아 및 유아교육의 중요성을 실질적으로 일깨우는 기폭제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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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4 2010-05-11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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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의 나이를 훌쩍 넘긴 두 아들과 딸이 못살겠다고 어미 집에 기어들어왔다. 어머니는 화장품 판매 일을 하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먼저 들어온 건 큰아들이었다. 100킬로그램이 넘는 몸무게에 유난히 먹는 걸 밝히는 큰 아들은 둘째가 들어온 날, 자기 몫을 빼앗길 걸 염려한 나머지 동생과 싸움을 벌인다. 하지만 허구한 날 형에게 맞던 옛날의 동생이 아니다. 팽팽한 기 싸움이 흐른 후 그들은 공생을 택한다. 아들 둘이 어머니 집에 얹혀살려고 아등바등 거리는 데도 어머니는 가타부타 말이 없다.




가난한 집은 엎친 데 덮친다고 했던가. 시집간 딸마저 못살겠다고 손녀를 대동하고 그 집에 눌러앉는다. 이제 바야흐로 어머니와 아들 둘, 딸 하나, 그리고 손녀의 동거가 시작됐다. 중학생 나이에 벌써부터 되바라진 손녀는 삼촌들과 섞이지 못하고 사사건건 말썽을 일으킨다. 삼촌이라고 어디 제대로 된 삼촌이라야 대접을 하지. 삼촌들의 짓이란 조카가 사온 피자 뺏어먹기, 학원 빼먹은 약점을 잡아 용돈 빼앗기, 마흔을 넘겨도 제 밥벌이 하나 못하면서 조카가 예절 없이 군다고 말로 치고 받기, 조카가 많이 먹을세라 허겁지겁 고기 먹기 등등 가히 인간말종이 달리 없다. 돌파구란 조금도 없어 보이는 그들에게 예상치 못한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우는데...




그들의 화려한(?) 이력을 살펴보자. 큰 아들은 학창시절부터 싸움질을 잘 했다. 당연 폭력배의 길로 들어섰고, 하여튼 그 바닥에서 잘 나갔다. 몇 번인가 감방을 제집처럼 드나들던 그, 그 일에 신물이 났는지 도통 집밖을 나가는 일이 없다. 둘째? 명색이 영화감독이다. 단 한편의 영화로 아주 물먹은 그는 충무로에선 알아 모시는 실패자다. 그에게 돈을 댄 제작자를 그 영화 한편으로 파산시키고 말았는데,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아무도 그를 불러주지 않았다. 수일을 굶고 죽기로 결심한 날, 닭죽 먹으러 오라는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무작정 달려왔다. 셋째 딸은 어엿한 남편을 두고도 바람을 피우다 들킨 지 여러 번이다. 바람을 피우더라도 제발 소문내지 않고 피라고 애원하는 남편을 보란 듯이 조롱하던 딸은 동네에 '소문난 바람녀'로 명성이 자자하다. 손녀라고 나을 리 없다. ‘척하면 삼천리’라고 복잡한 가정사에 치이다 보니 앞서 언급한대로 말본새부터 남다르다. 나중에 밝혀지는 어머니의 과거까지.




한집에 모인 다섯 식구의 면면은 막장인생의 집합소처럼 불안 불안하다. 뭔가 큰 일이 터질 것 같은 분위기. 하지만 중반에 이르도록 소설은 잔잔한 가정사(?)를 이어간다. 여전히 먹성 좋은 첫째와 그런 형을 증오하는 둘째, 그새 특기를 살려 연하 남을 꿰찬 딸, 용돈 끊길 것이 염려돼 학원 문턱만 줄기차게 밟는 손녀의 일상이 가히 난공불락이다. 그러던 어느 날 손녀가 쪽지 하나 써놓고 훌쩍 집을 나간다. 이때부터 그들의 일상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동시에 복잡한 가정사의 이면이 드러나는데...




그로 인해 첫째도 집을 나간다. 이제 남은 사람은 셋. 둘째는 조카를 찾는 비용에 충당하기 위해 마지막 자존심마저 버리고 포르노 영화감독 제의를 받아들인다. 계약금을 받은 그가 조카를 찾아 대문을 나서려는데, 집 나간 형이 조카와 함께 들이닥친다. 사연은 이랬다. 그 또한 조카를 찾기 위해 바지 사장을 자청했고 조직두목의 힘을 빌려 지방에 있던 조카를 불러올 수 있었던 것. 하지만 그 바닥 생리대로 조만간 감방에 대신 들어갈 처지에 직면한다. 이후 놀라운 반전이 준비되는데... 이것마저 말할 순 없다. 하여튼 이름하여 《고령화 가족》, 대박을 낸다.




'막장인생이라고 돌파구가 없겠느냐'고 묻는 작가에게 고개를 주억거리는 한편으로 사회의 마지막 교두보인 가정은 언제든 가족이라는 이름하에 건강성을 회복하는 아름다운 승리를 보여준 데 감사한다. 우리 사회는 한참 전 ‘사오정 세대’ 운운하던 시절을 지나 오늘 ‘88만원 세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을 양각화한 그와 같은 용어에 기선을 제압당한 게 사실이다. 장밋빛 미래를 그리는 일이 사치스러운 시대가 된 요즘 세태에 “그래도 보듬어줄 가족은 살아있다”는 저자의 격려가 가파른 길을 힘겹게 오르고 있는 이 땅의 청년과 중년 모두에게 적지 않은 힘이 되길 바란다. 《고령화 가족》의 작가는 〈고래〉를 2004년 제10회 문학동네 소설상에 올린 천명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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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들의 섬 밀리언셀러 클럽 3
데니스 루헤인 지음, 김승욱 옮김 / 황금가지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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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의 미덕은 반전에 있다. 꼬일 대로 꼬인 사건을 독특하지만 수긍이 가지 않을 수 없는 방식으로 끈덕지게 추적해가는 주인공의 집요한 추리도 묘미지만, 주인공의 화려한 추리에 넋을 놓은 독자들이 그 추리에 기대어 결말을 예상할 즈음 둔탁한 망치로 뒷머리를 가격당한 듯한 충격에 비견될 결말을 마주할 때의 그 기분이란, 다시 말하지만 역시 최고다!




그 기분은 극도로 긴장된 머리와 옴짝달싹 못하게 옥죄인 가슴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터지려는 마지막 순간 스르르 풀려나는 해방감에 비할 만하다. 일상에 찌든 몸과 마음을 어렵게 찾아든 바닷가에서 가없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그곳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에 훌훌 털어내던 때의 심정에 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갓 딴 소다수 한 잔에 꽉 막힌 속이 뻥 뚫리는 상쾌한 기분에 견주기도 하겠다.




어느 것이든 추리소설은 사건의 현장에 찾아들어 그 현장을 관찰하고 단서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예정된 수순에 반기를 들듯 연이어 터지는 '반전에 반전'에 묘미가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 《살인자들의 섬》은 별 다섯 개를 줘도 좋다.




영화를 먼저 본 독자라면 이 소설에서 영화에서 다루지 못한 디테일한 부분을 확인하는 재미를 놓쳐서는 안 된다. 영화에선 암호로 ‘제4의 법칙’과 ‘67번째 환자가 누구인가?’ 하는 두 문장에 한정되어 있지만 소설은 그렇지 않다. 소설은 보다 복잡한 암호체계를 다양한 숫자에 담아 여러 차례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독자는 셔터 아일랜드의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와 테디 다니엘스의 혼란을 근접 관찰할 수 있다. 아울러 전개될 스토리 내에 잠재된 정신병리학적 혼돈에 빠져들며 결말로 치닫는 소설의 경우의 수를 생각해내느라 두 눈이 쉴 새 없이 깜빡이는 걸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정신병동을 탈출한 환자를 찾기 위해 파견된 연방보안관, 테디 다니엘스와 척은 첫날부터 셔터 아일랜드의 잡역부들에게서 어떤 단서도 얻지 못한다. 오히려 잡역부들은 시큰둥한 반응을 당연시하며 사사건건 이상한 행동과 말로 수사 혼선을 부추긴다. 마침 테디 다니엘스는 탈출 환자의 방에서 쪽지 하나를 발견하는데, 그가 남긴 것으로 보이는 쪽지엔  ‘제4의 법칙’과 ‘나는 47, 그들은 80이었다’, ‘+당신은 3’, ‘우리는 4, 하지만 누가 67?’ 이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무공훈장에 빛나는 퇴역군인으로 익히 수사에 관한한 그 마당에서 영웅대접을 받는 테디 다니엘스는 예의 날카로운 판단력과 용의주도한 사건해석으로 셔터 아일랜드의 실체에 한발 한발 접근해 간다. 몸통에 다가갈수록 더욱 깊어지는 두통과 거듭되는 환영이 발목을 잡는 것 같아 신경이 쓰이긴 하다. 사실 오래 전부터 테디 다니엘스는 셔터 아일랜드에서 정신병자들을 상대로 세뇌실험을 벌인다는 징후를 포착하고 있었다. 이번 파견도 동일선상에서 그가 적극적으로 자원한 것이었다. 다만 척이 동행하게 되었을 뿐 달라질 건 없다. 더욱이 셔터 아일랜드엔 아내를 불태워 죽인 앤드루 레이디스가 수감되어 있다지 않은가.




세뇌실험의 장소로 등대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갑작스럽게 사라진 척을 뒤로 하고 테디 다니엘스는 그곳으로 잠입하는 데 성공한다. 그런데 그곳엔 어떤 수술 장비도 수술진도 없다. 예상 밖의 상황에서 마지막 방을 밀치고 뛰어든 테디 다니엘스 앞에 버티고 선 닥터 존 코리가 너무도 태연하게 그를 맞는다. 곧 테디 다니엘스는 엄청난 충격에 사로잡힌다. 박사가 테디 다니엘스의 이력과 행동을 너무도 자세하게 풀어냈던 것. 이어 67번째 환자가 밝혀진다. 테디 다니엘스가 덫에 걸린 건지, 그가 실제 악한 앤드루 레이디스인지는 알 수 없다. 척에게 섬을 탈출할 계획임을 밝힌 테디 다니엘스 앞으로 병동 잡역부와 닥터가 서서히 다가선다.

 

 

정교하게 짜인 스토리와 결말을 둘로 가르는 모호한 상황설정이 이 소설의 묘미며 잡음(?)의 원인이기도 하다. 영화와 소설이 완전히 끝난 뒤에도 관객과 독자는 화면에서 눈을 거두지도, 손에서 책을 놓지도 못한다. 추리로 포장한 종전의 작품들은 모두 마지막 장면에서 그동안 켜켜이 쌓아놓은 의혹들을 전부 털어냄으로써 관객과 독자에게 완벽한 배설감과 무한 카타르시스를 베푸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작품은 전혀 그렇지 않다.




여전히 결말은 예측 불가능 상태로 남겨있고, 테디 다니엘스를 중심으로 사건과 결말을 두 경우의 수로 구분해 놓아 봐도 그 각각에 아쉬운 구석이 없잖다. 마치 아귀가 맞지 않은 바퀴가 삐걱 이듯 두 추리 모두 어색한 양상을 띠며, 그 정도의 추리 밖에 못했느냐는 조롱을 발뒤축 너머로 연신 흘려낸다. 도대체 결론이 뭐냔 말이지!!! 테디 다니엘스의 착란? 셔터 아일랜드의 덫?




독자와 관객마저 가둬버린 섬, 셔터 아일랜드. 누구든 그곳에선 탈출이 불가능하다. 연방 보안관 테디 다니엘스든, 지금 여기서 영화와 소설을 본 당신이든 상관없다. 도서관의 독자든 영화관의 관객이든 폎자리 누군가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셔터 아일랜드에 당도한 당신은 고독한 존재일 뿐이다. 당신에게 닥터 존 코리의 말이 들리지 않는가. “당신한테는 파트너가 없습니다. 당신은 여기 혼자 왔어요.” 셔터 아일랜드는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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