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대한민국 개조론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07년 7월
평점 :
유시민의 〈대한민국개조론〉: 사람이 희망인 민주적 리더십의 회복 선언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헌법 제1장 제1조다. 국민은 권력의 창설자다. 따라서 여하한 권력도 국민의 승인이 없는 한 민주공화국 내에서 합법성을 지니지 못한다.
더욱이 현대헌법은 국민이 불법적 국가권력을 실력행사로 저지할 권리를 부여하고 있으며 비록 명시적으로 규정하지 않더라도 헌법에 저항권이 내재되어 있다고 봄이 통설이다. 그만큼 권력의 창설자로서의 국민의 지위가 상당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현실은 어떤가?
이 책,〈대한민국개조론〉의 저자는 남명 조식의 단성소(丹城疏)를 서문에 인용함으로써 우리 현실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1955년 남명 조식은 단성현감 자리를 제수 받는다. 그 때는 12세 명종을 대신해 문정왕후가 섭정한지 10년이 흐른 때였다. 파평 윤씨가 국정을 농단하고 연이어 사화를 일으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던 살벌한 시대였다.
“대비(문정왕후)께서는 신실하고 뜻이 깊다하나 깊은 구중궁궐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전하(명종)는 아직 어리니 다만 돌아가신 임금님의 한 고아에 불과합니다.”
남명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당시 최고 권력자인 문정왕후를 과부로, 임금을 고아로 표현하고 있다. 이쯤 되면 목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이어 남명은 어린 임금이 학문에 힘을 쓰고 인재를 두루 등용하여 선정을 베풀기를 간곡히 간청한 후 그때가 되면 미관말직이라도 관직에 나가겠다는 말로 단성소를 끝맺고 있다.
왕과 견해가 다를 때 거침없이 직언하는 풍토가 살아있던 시대. 그 시대는 적어도 초야의 선비가 군주에게 직언하는 것을 처벌하면 언로를 막아 국사를 위태롭게 한다고 진언한 용기 있는 언관들이 살아있던 시대이기도 했다. 덕택에 남명은 죽지 않았다. 저자의 말대로 대통령에게 쓴소리를 했다고 목숨이 오락가락하던 시대는 1987년에 끝났다. 그런 시대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현실을 보면 과연 그럴까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방송을 장악한 데 이어 당연한 귀결로 관제보도가 횡행하고, 정부공식발표 외 모든 통신을 유언비리로 규정하고 처단하겠다고 나선 토목정권과 그 하수인들에게 과연 조선시대만큼의 언로개념이 있는지 묻고 싶다.
저자는 이 책을 남명을 따라 오늘날 왕인 국민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수단으로 삼고자 했다. 먼저 이 책의 쓴소리를 들어야 할 이들이 있다.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무단방기하고 제멋대로 국정을 농단하는 현 정권과 그 하수인들이 그들이다.
1997년에 첫 출간된 이 책은 출간시기로만 따지면 벌써 구시대의 소리로 치부되어야 마땅하다. 1년이 다르게 변화되는 세상에서 3년이나 지난 말은 우선 설득력을 갖추기가 쉽지 않을뿐더러 재탕한다면 쓸데없는 잔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또 그래야 한다.
진보가 계속되는 한 과거의 말은 과거의 임무를 끝내고 잠드는 게 마땅하다. 하지만 요즘 구시대 유물이 현 장권에 의해 자주 출토 또는 재생되는 통에 과거의 일로 잊혔던 쓴소리가 가치를 발휘하고 있다. 이 책 또한 예외가 아니다. 책은 16개 꼭지로 구성되어 있다. 각 꼭지의 소제목만으로도 그 시기의 굵직한 이슈를 들여다볼 수 있어 전부 인용한다. 이렇다.
성공한 나라, 불행한 국민
선진통상국가, 박정희 대통령의 유산
사회투자국가, 지구촌 경쟁에서 이기는 전략
비전 2030, 사람이 희망이다.
대한민국, 진화는 계속된다.
전통적 복지정책과 사회투자정책
사회 서비스 시장과 일자리 창출
책임성 없는 진보, 일관성 없는 보수
의료급여제도 혁신
약제비 적정화와 한미 FTA
건강투자정책
파랑새 플랜
대한민국의 슬픈 자화상, 국립서울병원
시한폭탄 국민연금
공적개발원조
민주적 리더십
제목만 일별해도 촌철살인이 느껴질 정도로 1997년, 그리고 오늘 우리 현실을 가늠하는 주요 화두로 손색이 없다. 씁쓸한 화두이기도 하다. 전혀 앞서가지 못한 우리 현실. 우리가 선택한 정권이니 그 대가마저 우리의 몫이라면 할 말은 없다. 권력획득의 원천이 국민투표라는 데서 정당성을 인정받는다 해서 정권이 권력의 창설자인 국민에 대한 봉사와 국민을 위한 국정운영이라는 행정적, 법적 행위마저 정당성을 얻은 것이 아니다.
가깝게는 6.2 지방선거가 국민이 결코 준 적 없는 무소불위의 권력에 태클을 걸 호기이며, 멀게는 2012년 대선에서 결정적 퇴장명령을 발동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더 이상 우리가 ‘불행한 국민’이 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자위권이며 ‘민주적 리더십’을 회복하는 길이 될 것이다. 아울러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져야 하지만 여전히 낯선 ‘사람이 희망’인 ‘파랑새 플랜’이 시동을 거는 시초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