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
호어스트 에버스 지음, 김혜은 옮김 / 작가정신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오늘은 회사에서 조찬이 있다고 해서 아침 7시까지 회사에 왔다. 이제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이렇게 와야 된단다. 나 참 어이가 없다. 왜 돈 쓰면서 사람을 혹사시키는지 아무리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해봐도 그 속을 알 수가 없다. 아무튼 남들 일어날 시간에 출근을 했으니 가뜩이나 잠이 많은 나의 머리는 점심시간이 다 돼 가는데도 여전히 띵띵하다. 갑자기 문득 드는 생각. 이럴 때 호어스트 에버스라면 어떻게 할까?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의 행동은 언제나 나의 상상력을 초월하므로. 길을 잃고 차비도 없고, 게다가 더 이상은 한 발자국도 뗄 수 없을 만큼 기진맥진할 때. 그럴 때 나는 어떻게 대처할까. 호어스트 에버스는 내가 지금껏 상상하지 못했던 해법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일단 눈에 띄는 피자 가게에서 피자를 주문하고 집 주소를 알려주며 배달을 요청한다. 그리고 배달하러 나가는 아저씨에게 이왕 피자를 배달하는 길에 자기도 같이 배달해 달라고 조른다. 정말 기가 막히지만 탁월한 해결책이다. 나는 한 번도 생각지도 못해 본 방법. 절로 키득키득 웃음이 나온다.

지금 뭐하는 거야 호어스트, 시간을 이렇게 낭비하면 어떻게 해?
아차, 그렇지.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해야지.
그런데, 시간 좀 낭비하면 안 되나? 어짜피 내 시간인데.

가끔씩, 아주 가끔씩 자신의 게으름을 질책하다가도 금새 자신의 방만한 생활 리듬을 잃지 않는 놀라운 집중력! 대단하다는 감탄사만 절로 나올 뿐이다.

게으름의 지존, 의지박약 최고 권위자, 시간낭비의 달인. 게다가 시간을 낭비하는 것과 지저분한 방안에서 오랫동안 참기 분야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다.

이런 호어스트의 모습은 감동적이라거나, 느림의 '미학'을 보여준다거나 하는 것과는 아예 거리가 멀다. 무언가 나사 하나가 풀린 사람 같고, 그가 보여주는 매일매일이 황당할 뿐이다. 그는 빡빡하고 정신없이 돌아가는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들에게 여유로운 삶을 보여준다기 보다는 오히려 한심한 편에 더 가깝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온다.

하지만 18년 째 호어스트는 무대에서 자신의 글을 낭독하고 있으며 그의 낭독은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TV 시청료를 내기 싫어 조사관을 돈으로 매수하려다 TV로 매수하게 돼 버린 호어스트. 뭔가 찜찜하긴 하지만 그래도 TV 볼 시간이 줄어들게 됐다며 흐뭇해 한다. 이런 그의 모습에 사람들이 따뜻한 애정을 보낸다니.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재미있어서 일 수도 있고 신선해서일 수도 있고 그 발상이 기가 막혀서 그럴 수도 있고.

어찌 됐던 간에 호어스트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서 다행이다. 그의 모습 속에서 아주 조금, 나의 모습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청소를 하지 않아 집에서 냄새가 난다고 일주일 넘게 노숙을 한다거나, 매번 버스에서 잠이 들어 종점까지 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자명종 시계를 목에 걸고 잔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아침잠 1시간을 위해서라면 연봉 천만원 정도의 감소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기는 한다. 나와 아주 조금, 아주 조금 비슷한 사람을 만나서 반갑다.  

서평을 오전부터 쓰기 시작해서 오후 5시가 돼서야 글을 마무리했다. 아직도 내 머리는 띵띵하다. 지겹고 따분한 금요일. 이럴 때 호어스트라면 어떻게 할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박수진 2009-07-12 0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 아는 형은 담배가 너무피고 싶은데 300원밖에 없었데.
그래서 버스정류장에 있는 모르는 분한테 사정을 했데.
'제가 너무 담배가 피고 싶은데 300원이 모자랍니다. 좀 빌려주세요'
그 아저씨가 좀 당황해 하고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동전을 꺼네며..
'죄송한데 500원짜리 밖에 없네요'라고 하며 동전을 다시 넣으려고하니..
형이 손을 덥석 잡으며..
'500원이면 디스도 살 수 있습니다..' 결국 그형 그걸로 디스 샀단..;; 10년도 더 된 얘기.

옥이 2009-07-13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그 형도 형이지만 그 아저씨가 더 웃기다~
200원 더 주기 싫었나벼~
ㅋㅋㅋ
 
효재처럼 살아요 - 효재 에세이
이효재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효재처럼 살아요.

효재처럼? 어떻게 사는 게 효재처럼 사는 건지 생각해 봤다.

느리게: 쉴새없이 바쁜 현대인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는 그녀.
여유있게: 몇 시에 볼까?라는 질문에 7시나 7시 반이 아닌, 그냥 '이따 봐'라고 대답하는 그녀다.
별나게: 조금은 별난듯 하다. 인형을 좋아하는 거며 남편과 떨어져 사는 것 하며.
소중하게: 생명 하나하나, 풀 한 포기도 귀하게 여기는 그녀.
재미있게: 재미있어 하는 것 같다. 자수놓고 한복 만들고 보자기를 만들고 하는 모든 일들을.
여리게: 특별한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여려 보인다. 소녀처럼.
안타깝게: 그녀를 보면서 이런 마음도 그냥 들었다.
사랑스럽게: 사랑스럽다. 남들은 다들 싫어하는 설겆이도 조심조심하는 그녀의 모습이.
성숙하게: 사람은 나이를 하나 둘 먹을수록 성숙해져야 한다는 그녀의 말에 괜히 뜨끔했다.
아름답게: 화려한 옷을 입지도, 진하게 화장을 하지도 않았지만 그녀의 모습은 지금 그대로 충분히 아름답다.
조용하게: 살면서 큰 소리 한 번 치지 않았을 것 같다. 조근조근, 차분차분.
정감있게: 효재에 놀러오는 사람들에게 밥을 해 먹이고 부채며, 나물이며 선물을 나누는 그녀의 모습에서 넉넉한 마음이 느껴진다.
따뜻하게: 사람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그녀.
그러나 조금은 외로운 듯하게: 가끔은 외로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렇게 살 수 있을까? 난 자수 놓기도 싫어하고 부채 만들기도 싫어하고 설겆이는 더더군다나 싫어해서, 효재처럼 살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래도 한 번 효재에 놀러가고 싶다. 가서 효재 선생님이 주시는 밥도 얻어 먹고 싶고 보자기 싸는 법도 배우고 이것저것 챙겨주시는 선물도 받고 싶다. 정원을 느릿느릿 돌아보기도 하고 집안 구석구석 배어있는 선생님의 정성을 천천히 둘러 보기도 하고.

그러면 며칠 푸욱 쉰 것 처럼 힘이 날 것 같다.

왜 그런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 곳에 다녀오면 모든 걱정과 불만들이 사그러들면서 편안한 경지에 이르를 것만 같다. 타인에게 휴식을 주는 사람.

나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그저 찾아가 한동안 바라만 보고 있어도 위로가 되는 사람. 눈물 나게 서글픈 날 무작정 찾아가 차 한 잔 함께 마시고 싶은 사람. 마주보고 앉아 함께 마시는 그 한 잔의 차 향기로 억눌렸던 모든 것들이 해소되는 그런 사람...

켁! 택도 없다. 그러기에 나는 너무 조급하다. 속이 좁다. 넉넉치 못하고 신경질적이고 예민하기까지 하다. 그러니 어림도 없는 소릴게다. 타인에게 쉼을 주기 보다는 오히려 타인으로부터 많은 위로를 받기 위해 헤매는 게 나라는 사람이다.

그래도 아직은 어리니까! 물론 10대 20대라는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직은 30밖에 안 됐으니까. 지금부터 계속 연습하고 노력하면 효재 선생님처럼 50이 됐을 때는 누군가에게 평안함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아직은 어리니까, 어리니까라고 되뇌이며 지금의 부족한 모습을 합리화하기는.

어느 토요일. 무작정 놀러 가고 싶다. 밥 먹고 차 마시고 선물도 받고. 효재 선생님의 넉넉한 마음으로 풍성해지고 싶은 그런 날, 결례를 무릅쓰고 불쑥 찾아가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오직 글쓰고 책읽는 동안만 행복했다 - 원재훈 시인이 만난 우리시대 작가 21인의 행복론
원재훈 지음 / 예담 / 200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두 번이나 읽었다. 읽는 동안 환하고 따뜻해서. 그들의 얼굴에 퍼져 있는 잔잔한 미소가 나를 평온하게 만들었나 보다. 온갖 잡념들과 욕정이 사그라드는 것 같은 해방감.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이 조용히 '퐁퐁' 소리를 내며 솟아올랐다. 글 쓰고 책 읽는 동안 '행복했다'고 말하는 그들의 편안함이 나에게까지 전염됐다.  오랫만에 맛보는 힘찬 나른함. 그 오묘한 느낌이 좋아, 그래서 굳이 두 번이나 읽었다.

그들은 정말 행복해 보였다. 유년 시절이 어려웠음에도, 혼자인 것이 그리 외로웠음에도, 한동안 몸이 아파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음에도. 그래도 지금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자유롭다. 그들을 옭아매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그들의 얼굴은 평안, 그 자체다. 고통스러웠던 시간들을 묵묵히 견뎌냈고 세상과 다른 기준으로 삶을 일궈낸 것이 행복의 비결인 듯하다. 그들은 자신의 아픔을 글로 승화시키려 했고, 그것으로부터 위안을 얻었다. 세간의 평가가 어떻든,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든 못 받든 그들은 꾸준했다. 지금 그들이 누리고 있는 행복은, 그간 허물어지지 않고 견뎌 냈던 단단함의 보상일 게다.

그래도... 이렇게 그들의 노력을 치하해도, 어쨋든 그들은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들이다. 노력도 노력이지만 그들은 분명 재능있는 사람이니까. 자신의 일에 만족하며 행복한 삶을 살고 있으니까. 그건 진정 축복이다.

그래도... 다시 생각해보니 운만 있다고 될 일도 아닌듯 싶다. 기존의 것과 다른, 자신만의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기 위해 그들은 이를 악물고 바둥거리지 않았을까. 그런  과정을 겪어서 인지 이제 그들은 삶에 초연한 듯 보였다. 억지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 같은 그들의 자연스러운 표정. 부드러운 바람 같았다.


그랬다. 책을 읽으며 행복했고 편안했고 따뜻했고 부러웠다. 읽고 싶은 대로 후루룩 읽기도 하고, 멍하니 느릿느릿 읽기도 하고, 창 밖을 바라보기도 하고, 작가들이 말한 좋은 책 제목을 적어놓기도 하고.  별 거 안 했는데도 괜히 충만하다.

또다시 여유를 잃고 찌들 때, 다시 집어들어서 읽고 싶다. 그리고 주저리 주저리 말하기 보다는 여운을 조용히 느끼고 싶은 책. 나는 그랬다.  

 p.s. 가끔 서평을 쓰다보면 책을 통해 느꼈던 감정들을 말로 표현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울 때가 있다. 이번 서평이 그랬다. 기껏해야 편안했다, 따뜻했다라니... 빈약한 어휘력이 아쉽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enghazikim 2009-07-01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글을 읽고 나서 저는 절대 돌아서지 않습니다. 돌아서면 잊어 버리기때문에.....쩝..그리고 책이 이야기 하는 것과 내 느낌을 다시 써보려 하면 어느샌가 느꼈던 감정과 내용들이 기억나지 않고..가물가물...하지만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저의 기억 속이나 마음 속 한 군데 남아있고 언제가 갑가지나타날 것을...

옥이 2009-07-01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는 우리도 알지 못하는 것들이 등장하고, 우리가 꿈꾸던 것들이 실현되겠지요~?*^^*
벵가지김님과 저는 나이차이가 나지만, 그런 면에서 우리는 든든한 동지이고 시퍼런 '청춘'인 것 같습니다. 벵가지김님과 같은 인생의 선배가 있어 감사합니다. ㅋㅋ 물론, 돌아서서 가물가물 무엇인가를 잃어버리고 사서에게 째려봄을 당하지만은요~ 푸하하하 *^^*
 
불안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5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불안에 떠는 이유는 무얼까.

책을 덮고 깊게 고민해 봤다. 난 왜 불안해 할까에 대해.

일단은 지금의 일자리가 불안하다. 이제 인간은 100세까지 산다는데 그때까지 뭘 해서 먹고사나, 하는 생각. 그것이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생각을 한 걸음 더 진전시켜봤다. 정말 지금의 내 일자리가 불안한가, 하고. 음.. 그렇다. 남자도 40세가 넘으면 짤리는 마당에 특별한 능력이나 자격증이 없는 오피스걸은 언제나 해고 0순위다.

생각이 또 저어만큼 나간다. 어쩌면 내 불안은 스스로 자신의 지위에 만족을 못하는데서 연유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객관적으로 내 일자리가 불안정한 것이 아니고, 스스로 지금의 일에 만족을 못하고 계속 다른 것을 부러워하니 상대적으로 나의 지위가 불안해보이는 건 아닐까. 변호사나 기자 정도가 돼줘야 안정적으로 자신의 능력에만 의존해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다른 직업은 모두 불안해질 수밖에. 억만금을 쌓아놓고 살아야겠다는 욕심은 없지만 그래도 평범한 샐러리맨은 파리목숨이니까 그보다는 나아야겠다는 욕심. 백만장자의 안정감을 100, 샐러리맨의 안정감을 10이라 했을 때 나는 한 30정도를 원하는 듯하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가는 생각들. 그렇다면 왜 10에는 만족하지 못하는가. 돈이 부족해서? 물론 돈은 많으면 많은수록 좋다. 하지만 돈에 큰 욕심이 없는 나이기에 단순히 그 이유만은 아닌 것 같다. 언제 짤릴지 몰라서? 앞에서 말한 것처럼 불안의 한 원인이다. 허나 지금의 지위에 만족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니다. 내 불만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존중'. 샐러리맨은 불안할 뿐 아니라 인간적인 존중도 받지 못한다. 기계처럼 매일 똑같은 시간에 나와 똑같은 자세로  책상 앞을 지켜야 하는 몰상식. 인간은 기계도 아니고, 집 지키는 개도 아닌데. 상사 눈치에, 아첨에, 교활한 웃음에.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비인간적인 모멸감을. 언젠가 '내가 변호사든, 기자든, 말단사원이든 내가 받는 인간적인 대우는 동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누군가에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직업에 따라 누리는 경제적인 풍요는 다르겠지만,  어떤 명함이든지간에 인격적으로는 충분히 대우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우리사회는 그렇지 않다. 직함에 따라 우리들이 받는 존중의 정도는 천지차니...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타인의 웃음과 존중에 목이 말라서. 설사 그것이 겉치레에 불과한 것일지라도, 인격적으로 좀 더 존중받고 싶어서 더, 더 높은 지위를 꿈꾼다. 그것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전력 질주한다. 그럴듯한 명함, 더 큰 집, 보다 비싼 차, 세련돼 보이는 옷. 랄프 왈도 에머슨은 이런 문제들에서 다른 사람의 관념에 맞추다 보면 얼굴에 서서히 '우둔한 표정'이 나타나게 된다고 말했지만, 그런 것들로 인해 인간의 가치가 결정되는 시대니. 알랭 드 보통은 그래서 속물적 전술을 사용하면서 더 높은 지위를 향해 돌진하는 사람들은 존엄에 대한 욕망이 채워지지 않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어쩌면 경멸하기보다는 슬퍼하고 이해하는 것이 옳을지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우리가 더욱 심혈을 기울여 생각해 봐야 할 문제는 과연 어떻게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불안의 가장 큰 원인이 자신에 대한 타인의 존중에 달려 있다면, 그런데 이 기준이 나의 내면이나 인격의 성숙이 아닌 명함과 직함과 돈이라는 잘못된 기준에 의해 좌지우지 된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과감히' 타인의 존중을 갈구하기 위해 불안의 망령에 사로잡히는 고통의 고리를 끊어야 하지 않을까. 물질만능주의 시대의 기준으로 스스로를 불안하게 만들지 않으려면 과거, 현재, 미래를 통틀어 꿰뚫 수 있는 올바른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또 타인의 평가로 인해 지나치게 상처받지도 않아야 하며 타인의 무관심과 조롱을 어느 정도는 우습게 여길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장터에서 모욕을 당하는 소크라테스를 본 행인이 그에게 물었단다. '그렇게 욕을 듣고도 괜찮습니까?' 소크라테스는 대답했단다. '안 괜찮으면? 당나귀가 나를 걷어찼다고 내가 화를 내야 옳겠소?' 라고. 이 정도의 단단함.

비난 가운데도 오직 진실한 비난만이 우리의 자존심을 흔들어 놓을 수 있다. 따라서 사람들의 인정을 바라며 자학하는 습관을 버리고 그들의의견이 과연 귀를 기울일 만한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우리가 사랑을 구하는 사람들의 정신에 존경할 만한 구석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때도 있다.

이 세상에는 외로움이냐 천박함이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허나 알랭 드 보통은 이런 자신감을 갖더라도 우리 인생에서 불안을 완벽히 제거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인생은 불안을 충족시키고 다시 새로운 불안과 맞닥뜨려 이를 해결하는 과정의 연속이기 때문에. 다만 철학이나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 등을 통해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들의 위계질서를 새롭게 정립해 새로운 불안감을 느껴야 한다고 말한다. 현재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지위가 아닌 진정한 가치, 즉 사랑이나 인간의 존엄성이나 나눔, 자유 , 평등과 같은 것들. 이런 것들을 물질보다 우위에 둬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런 가치들을 충족시키지 못해 불안해 한 적이 있나, 하며 나를 되돌아 본다. 타인에게 충분한 사랑을 주지 못해 괴로운 적이 있었나... 합리적인 이유없이 차별을 받는 자들을 보며 마음 아파한 적이 있었나... 내 것을 나누지 못해 부끄러워하고, 힘 있는 자들이 힘 없는 자들을 짓밟는 것을 보면서 분노한 적이 있었나...

이런 저런 생각의 터널을 지나 그 끝에 와보니, 참으로 낯설고 어색한 불안이 자리 잡고 있다. 조금은 당황스럽다. 가능한 불안일까? 이런 불안감, 시험에 떨어지고 취업이 안돼 느꼈던 그 때의 불안처럼, 그것과 꼭같이 생생하게 느껴볼 수 있을까? 아직은 생소하다. 하지만 이제 낯선 불안으로 인해 잠 못드는 날들이 점차 많아 지기를... 말이나 생각 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지기를... 그리고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조금은 더 많아지기를...


댓글(1)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2월 드레스 2009-06-15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불안은 늘 아직 젊은 나를 힘들게 한다
무슨이유에서인지 스스로를 보듬고 자랑스러워하기 힘들다
현실은 납처럼 무겁게 거대한 산처럼 나를 감시한다.
행복의 이유가 뭔지 늘 철학적으로 궁지에 몰려놓기도 하고, 앞으로의 불안을 떨쳐내기위해 자본주의 경제시장에서 남들과 똑같은 경쟁을 한다.
뒤쳐지기 싫어 또다시 관심도 없는 일에 발을 담그고... 생존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라며 위로한다. 얼마만큼 긴 터널을 지나야 진정한 빛을 볼수 있을까?
시험에 실패하고 다시 사회로 돌아가 생활을 잘할수 있을까에 대한 불안감....
사람에 대한 신뢰가 다시 흔들리는 불안감...20대인 난 늘 불안하다.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
알랭 드 보통 지음, 이강룡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한 개인이 전기(傳記)작가를 갖는다는 것은, 즉 누군가가 내 인생을 전기로 써 준다는 것은 크나큰 축복이요, 행운일 것이다. 전기를 쓰기 위해서는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안다는 것은 참 흔하지 않은 일이다. 부모도 어려서의 일만을 파악할 뿐이요, 형제도 그렇다. 친구도 모든 일들을 속속들이 알지는 못할 것이고, 이는 부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들을 들어주고 자신이 벌인 활동과 기억을 정리해줄 전기 작가가 없었다. 그는 서로 다른 그릇들에 자신의 전기를 흘려 담아버린 것이다. 그들은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잠시 듣고 나서 그의 어깨를 어루만진 다음 각자의 일상으로 뿔뿔이 사라져버렸다.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이입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들은 자기 일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각기 다른 그릇에 흩어져 버리고 마는 한 사람의 일생. 그 조각나버림이 안타까워 알랭 드 보통은  누군가에게 온전히 마음을 쏟아 보기로 결심한다. 이 책은 그 고달프고 지난한 과정들을 설명하고 있다.

처음 관계를 맺을 때 필요한 것은 단연 '애정과 관심'. 애정이 있어야 타인과 관계를 맺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얄팍한 관심으로는 한 사람을 오롯이 알기에 부족하다.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를 파악해야 하니까. 어린시절부터 가족관계, 식습관, 성격, 로맨스, 가치관, 철학 등등. 심지어 성격 상의 단점이나 깎아버린 발톱 등 지극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것까지. 그 모든 것들을 혐오하지도 않고 질려하지도 않을 만큼의 충분한 애정이 필요하다, 한 사람과 관계를 맺기 위해선... 그러한 관심을 '인내'라 표현하고 싶다.

인내심을 가진 결과 어느 정도 친밀한 관계가 형성된 이후. 그 때는 본격적인 감정이입이 필요하다. 그 사람이 느끼는 감정을 함께 느끼고 그에 공감하는 것.  알랭 드 보통은 이 단계에서 필요한 것은 바로 '경험'이라고 이야기했다. '베개 이론'을 설명하면서. 베개 이론이란 나 자신의 경험을 통해 남들의 경험 한 조각을 이해할 수 있다는, 타인의 심리적 동기를 이해하는 것은 베개 밑을 보듯 뻔 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사랑 때문에 괴로워 하는 사람을 보면, 자신 또한 걸려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며 많은 밤들을 견뎠기에 그를 이해할 수 있다고 알랭드 보통은 말했다. 하지만 그는 중요한 의문을 제기한다.

'베개 아래 놓여 있는 것이 거의 없다면?'

그렇다면 누군가를 이해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 된다. 아이를 잃은 어미의 심정을, 아이도 낳아보지 않은 사람이 이해할 수는 없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다른 이의 경험을 상상하기 위해서는 진정성 있고 충분한 경험이 바탕이 돼야 한다... 우리가 경험해 보지 못한 타인의 고통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이야기 한다.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구나... 또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바에 대해서 함부로 떠들면 안 되겠구나...

어쨌건 저쨌건, 이런 저런 고비를 넘어 한 사람에 대해 충분히 알게 됐다고 생각되는 경지에 이르른 다음. 그 때 필요한 것은 '지속적인 의지'. 흔히 우리는 이 사람과 친해졌다고 생각이 들면 더 이상 그 사람에게 처음만큼의 관심과 애정을 보내지 않는다. 마치 서로를 지겨워 하는 오래된 연인처럼. 그들은 처음 서로에게 보냈던 따뜻한 시선을 보내지 않고, 상대방의 일에 흥미를 잃는다. 그저 서로를 밋밋하게 바라볼 뿐.

'누군가를 알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질수록 알고자 하는 의지는 줄어든다.'

더 세밀하게 알려하지 않고, 더 깊이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무관심. 서로에 대해 심오한 이야기를 나누기는 커녕, 시시껄렁한 농담 따위를 주고 받으며 무의미하게 흘려 보내는 시간들. 이미 나는 너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교만함. 그러면서 우리는 서로 알지 못하는 이전의 관계 쪽으로 서서히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어찌된 역설인지...

누군가에게 '온전히 마음을 쏟았다.', 누군가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었다.'라는 것은 그래서 쉽지 않은 듯하다. 그것이 남녀 관계든 아니든. 동료, 친구, 상사, 심지어 가족까지. 나, 누구를 성급히 판단한 적은 없는지.. 혹은 누군가 나를 함부로 규정지어 울고 싶은 날은 없었는지. 제대로 나를 알아주지 않아 외롭다고 생각한 시간들이 있었는지... 반면 내가 조급히 판단해버린 그들도 나처럼 아파했겠지...  

나를 알아줄 사람은 과연 누굴까. 그리고 내가 알아줘야 할 사람은 또 누굴까. 살면서 그런 지기들을 몇이나 만나게 될 수 있을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