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불안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5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불안에 떠는 이유는 무얼까.
책을 덮고 깊게 고민해 봤다. 난 왜 불안해 할까에 대해.
일단은 지금의 일자리가 불안하다. 이제 인간은 100세까지 산다는데 그때까지 뭘 해서 먹고사나, 하는 생각. 그것이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생각을 한 걸음 더 진전시켜봤다. 정말 지금의 내 일자리가 불안한가, 하고. 음.. 그렇다. 남자도 40세가 넘으면 짤리는 마당에 특별한 능력이나 자격증이 없는 오피스걸은 언제나 해고 0순위다.
생각이 또 저어만큼 나간다. 어쩌면 내 불안은 스스로 자신의 지위에 만족을 못하는데서 연유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객관적으로 내 일자리가 불안정한 것이 아니고, 스스로 지금의 일에 만족을 못하고 계속 다른 것을 부러워하니 상대적으로 나의 지위가 불안해보이는 건 아닐까. 변호사나 기자 정도가 돼줘야 안정적으로 자신의 능력에만 의존해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다른 직업은 모두 불안해질 수밖에. 억만금을 쌓아놓고 살아야겠다는 욕심은 없지만 그래도 평범한 샐러리맨은 파리목숨이니까 그보다는 나아야겠다는 욕심. 백만장자의 안정감을 100, 샐러리맨의 안정감을 10이라 했을 때 나는 한 30정도를 원하는 듯하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가는 생각들. 그렇다면 왜 10에는 만족하지 못하는가. 돈이 부족해서? 물론 돈은 많으면 많은수록 좋다. 하지만 돈에 큰 욕심이 없는 나이기에 단순히 그 이유만은 아닌 것 같다. 언제 짤릴지 몰라서? 앞에서 말한 것처럼 불안의 한 원인이다. 허나 지금의 지위에 만족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니다. 내 불만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존중'. 샐러리맨은 불안할 뿐 아니라 인간적인 존중도 받지 못한다. 기계처럼 매일 똑같은 시간에 나와 똑같은 자세로 책상 앞을 지켜야 하는 몰상식. 인간은 기계도 아니고, 집 지키는 개도 아닌데. 상사 눈치에, 아첨에, 교활한 웃음에.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비인간적인 모멸감을. 언젠가 '내가 변호사든, 기자든, 말단사원이든 내가 받는 인간적인 대우는 동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누군가에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직업에 따라 누리는 경제적인 풍요는 다르겠지만, 어떤 명함이든지간에 인격적으로는 충분히 대우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우리사회는 그렇지 않다. 직함에 따라 우리들이 받는 존중의 정도는 천지차니...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타인의 웃음과 존중에 목이 말라서. 설사 그것이 겉치레에 불과한 것일지라도, 인격적으로 좀 더 존중받고 싶어서 더, 더 높은 지위를 꿈꾼다. 그것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전력 질주한다. 그럴듯한 명함, 더 큰 집, 보다 비싼 차, 세련돼 보이는 옷. 랄프 왈도 에머슨은 이런 문제들에서 다른 사람의 관념에 맞추다 보면 얼굴에 서서히 '우둔한 표정'이 나타나게 된다고 말했지만, 그런 것들로 인해 인간의 가치가 결정되는 시대니. 알랭 드 보통은 그래서 속물적 전술을 사용하면서 더 높은 지위를 향해 돌진하는 사람들은 존엄에 대한 욕망이 채워지지 않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어쩌면 경멸하기보다는 슬퍼하고 이해하는 것이 옳을지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우리가 더욱 심혈을 기울여 생각해 봐야 할 문제는 과연 어떻게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불안의 가장 큰 원인이 자신에 대한 타인의 존중에 달려 있다면, 그런데 이 기준이 나의 내면이나 인격의 성숙이 아닌 명함과 직함과 돈이라는 잘못된 기준에 의해 좌지우지 된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과감히' 타인의 존중을 갈구하기 위해 불안의 망령에 사로잡히는 고통의 고리를 끊어야 하지 않을까. 물질만능주의 시대의 기준으로 스스로를 불안하게 만들지 않으려면 과거, 현재, 미래를 통틀어 꿰뚫 수 있는 올바른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또 타인의 평가로 인해 지나치게 상처받지도 않아야 하며 타인의 무관심과 조롱을 어느 정도는 우습게 여길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장터에서 모욕을 당하는 소크라테스를 본 행인이 그에게 물었단다. '그렇게 욕을 듣고도 괜찮습니까?' 소크라테스는 대답했단다. '안 괜찮으면? 당나귀가 나를 걷어찼다고 내가 화를 내야 옳겠소?' 라고. 이 정도의 단단함.
비난 가운데도 오직 진실한 비난만이 우리의 자존심을 흔들어 놓을 수 있다. 따라서 사람들의 인정을 바라며 자학하는 습관을 버리고 그들의의견이 과연 귀를 기울일 만한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우리가 사랑을 구하는 사람들의 정신에 존경할 만한 구석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때도 있다.
이 세상에는 외로움이냐 천박함이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허나 알랭 드 보통은 이런 자신감을 갖더라도 우리 인생에서 불안을 완벽히 제거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인생은 불안을 충족시키고 다시 새로운 불안과 맞닥뜨려 이를 해결하는 과정의 연속이기 때문에. 다만 철학이나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 등을 통해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들의 위계질서를 새롭게 정립해 새로운 불안감을 느껴야 한다고 말한다. 현재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지위가 아닌 진정한 가치, 즉 사랑이나 인간의 존엄성이나 나눔, 자유 , 평등과 같은 것들. 이런 것들을 물질보다 우위에 둬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런 가치들을 충족시키지 못해 불안해 한 적이 있나, 하며 나를 되돌아 본다. 타인에게 충분한 사랑을 주지 못해 괴로운 적이 있었나... 합리적인 이유없이 차별을 받는 자들을 보며 마음 아파한 적이 있었나... 내 것을 나누지 못해 부끄러워하고, 힘 있는 자들이 힘 없는 자들을 짓밟는 것을 보면서 분노한 적이 있었나...
이런 저런 생각의 터널을 지나 그 끝에 와보니, 참으로 낯설고 어색한 불안이 자리 잡고 있다. 조금은 당황스럽다. 가능한 불안일까? 이런 불안감, 시험에 떨어지고 취업이 안돼 느꼈던 그 때의 불안처럼, 그것과 꼭같이 생생하게 느껴볼 수 있을까? 아직은 생소하다. 하지만 이제 낯선 불안으로 인해 잠 못드는 날들이 점차 많아 지기를... 말이나 생각 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지기를... 그리고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조금은 더 많아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