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 기쁨과 슬픔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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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밥벌이도 힘들지만 벌어놓은 밥을 넘기기도 그에 못지않게 힘들다. 술이 덜 깬 아침에, 골은 깨어지고 속은 뒤집히는데, 다시 거리로 나아가기 위해 김 나는 밥을 마주하고 있으면 밥의 슬픔은 절정을 이룬다. 이것을 넘겨야 다시 이것을 벌 수가 있는데 속이 쓰려서 이것을 넘길 수가 없다.'


작가 김훈은 '밥벌이의 지겨움'이라는 책에서 위와 같이 말했다. 3년 전 위 구절을 읽으면서 씁쓸하게나마 웃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지겨움은 아직도 계속이다.


밥벌이가 지겨워지게 된 것은 알랭 드 보통에 따르면 이렇다. 업무가 분화되고 전문화되면서 한 인간이 해야 하는 일은 한 가지 업무에 집중되었다.


'200년 전 우리 선조들은 자신이 먹는 음식이나 소유하고 있는 한정된 수의 물건 하나하나의 정확한 역사와 유래, 나아가서 그 생산에 관여한 사람이나 연장까지 알았을 것이다. 그들은 돼지, 목수, 직조공, 베틀, 우유 짜는 아낙네와도 알고 지냈을 것이다.'


그러게. 위의 글처럼 우리들은 여러 가지 업무들로 바빴을 텐데 이제 우리는 한 가지 업무에 집중하게 되면서,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야 하면서부터 일이 지겨워졌다. 그렇지 않아도 밥벌이는 지겨운 것이고 인간성을 해치는 것인데.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했었단다.


'엔지니어들은 스캐닝 기계의 속도에 관한 논문을 쓰고, 컨설턴트들은 선반에 물건을 쌓는 직원이나 지게차 운전다의 동선을 약간이라도 줄이는 방법 연구에 경력을 바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지겨운 일을 계속 해야 하는 이유는 '생존' 때문이다. 먹고 살아야 하니까. 어디서 돈이 나오나. 아버지로부터 넉넉한 유산을 물려받은 쇼펜하우어나, 역시 먼 친척으로부터 유산을 물려받은 버지니아 울프가 아닌 이상에야, 우리는 어디서 돈 나올 구멍이 없다.


김훈의 말처럼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근로감독관들아, 제발 인간을 향해서 열심히 일하라고 조져대지 말아 달라. 제발 이제는 좀 쉬라고 말해 달라. 이미 곤죽이 되도록 열심히 했다. 나는 밥벌이를 지겨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친구가 되고 싶다. 친구들아, 밥벌이에는 아무 대책이 없다. 그러나 우리들의 목표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다. 이걸 잊지 말고 또다시 각자 핸드폰을 차고 거리로 나가서 꾸역꾸역 밥을 벌자. 무슨 도리가 있겠는가. 아무 도리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아쉽게도 알랭 드 보통은 이에 대해서는 어떤 해답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모든 일들이 다 그렇다는 식이라는 철학을 제공할 뿐.


제도적으로 아무리 보완을 한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밥벌이에 '목을 맬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둘째 치고, 지금 매일매일 9시에 출근해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서 서류더미를 보는 게 지겨운 '나'는 당장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너무 이기적인가? ㅋㅋ)



정답은 내가 알고 있다. 다만 실천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을 뿐. 더 나은 삶을 위해 Che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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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6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밥벌이의 지겨움은 하는 일이 지겹다는 말인가? 지식이 미천한 난 무슨말인지 이해가 잘 안되네... 혹시 그냥 어떤 목표나 희망없이 하루하루 살아가는게 힘들다는 말인가?
정답을 알고 있으면 나도 알려줘~

옥이 2010-08-16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답을 알려달라구여? ㅋㅋㅋ 나도 모르지요~ 알아도 안 알려줘요~ ㅋㅋ
 
강남몽
황석영 지음 / 창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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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아버지를 둔 내 친구는 8학군 강남지역에서 외고를 나와 한국에서 손꼽히는 명문대학에 진학했다. 사법고시를 패스한 그는 역시 변호사가 되었다. 그리고 검사 배우자를 만나 결혼을 했다. 그들은 잠실에 3억짜리 전셋집을 얻어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그 역시 자신의 아버지처럼 자신의 자식을 뒷받침해 줄 것이고, 그 자식 역시 후에 기득권자로 이 사회에 자리 잡을 가능성이 많다.


나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운 좋게, 정말 운이 좋았나 보다. 특별하게 고액과외나 족집게 학원을 다니지 않고, 그야말로 교과서 위주로 공부해 내 친구와 같은 대학, 같은 학과에 지원했다. 그러나 나는 사법고시를 패스하지 못했고, 이제 나도 명퇴를 걱정하고 노후를 걱정해야 하는, 노후는 커녕 결혼해서 집 사고 아이들 키울 일이 막막한, 힘겨운, 이 사회의 평범한 샐러리맨이 되었다. 내 친구와 나의 연봉차이는 거의 두 배 이상이다.


이게 '현실'이다. 그와 나의 능력차이도 물론 있겠지만, 한 사람이 사법고시를 패스하기 위해 집안에서 지원받아야 하는 비용은 생각 외로 크다. 경제적으로는 물론, 심리적, 감정적인 배려 물론 필요하다. 이런 지원을 받는 자와 받지 못하는 자 사이의 차이는 사법시험 합격 여부로 나뉜다. 연일 신문에서 떠드는 우리 사회 '부의 세습'이 바로 이것이다.


언론이나 학계, 시민단체 등에서는 '부의 세습'을 뿌리 뽑아야 한다고 난리다. 물론 제도적으로 태생적인 경제차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이는 다른 사람들도 흔히 말하는 이야기고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조금 다른 차원이다.


엄연히 '현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젊은이들에게 무엇이든지 열심히만 하면 그 꿈을 이룰 수 있다, 성공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시리도록 서글픈 현실을 무시한 채 무조건 희망을 꿈꾸라고 강요한다. 순진한 청년들은 그 말을 철썩 같이 믿고 도전하고 도전한다. 실패를 염두에 두지 않았기에 이들이 맛보는 패배감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들이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주변 상황 때문에 실패할 수도 있음을, 그러한 실패도 감당해야 하는 것이 삶임을 미리 가르쳐야 하는 게 아닐까.


문제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만일 도전이 실패로 끝났을 경우 그 책임은 모두 개인의 무능력으로 돌아간다. '내가 못나서, 내가 더 열심히 하지 않아서' 실패한 것이다. 왜? 무한 경쟁사회에서는 누구든지 능력만 있으면, 열심히만 하면 꿈을 이룰 수 있는데, 실패를 했다는 것은 본인이 능력이 없거나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구를 탓하랴.


순진한 청년들은 부모의 경제력에 의해 개인의 능력이 좌우되는 사회에 어리둥절해 있다가 쓰디쓴 실패를 맛보고, 그마저 실패에 대한 죄책감 등 이중 삼중의 고(苦)를 맛보게 된다. 여기서 문제는 또 도출된다. 상실감, 좌절감을 맛본 청춘들을 우리 사회는 도닥이는 것이 아니라 한 번 실패했다고 왜 패배감에 묻혀 사냐고 또 다른 도전을 시작하라고 강요한다. 좌절감에 젖어 있는 청년들을 사회는 또 너무 나약하다, 곱게만 자랐다, 이래서 문제다, 라며 비난한다. 어느 누구도 이들을 도닥이고 따뜻하게 위로하지 않는다. 미안하다며, 우리 사회가 이 모양이라서, 이런 현실을 차마 이야기 할 수는 없었다고 사과하지 않는다.


희망을 강요하는 것은 '부의 세습'만큼이나 가혹하다. 너의 능력이 부족해서 네가 실패한 것이라고 비난하는 것 또한 비인간적이다. 오히려 현실의 차를 건강하게 받아들이고, 이를 인정하면서 최선의 노력을 할 수 있도록 격려를 해주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젊은이들을 억지로 웃게 만들고, 억지로 씩씩한 캔디로 만드는 것은 이제 그만하자. 속은 썩어 문드러지는데 억지로 씩씩한 척 힘을 내는 청춘들이 눈물겹게 안쓰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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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6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런 사람을 따라 잡을 수 없다고 그냥 지금에 만족하며 사는게 좋을까? 따라 잡을 수 있다고 억지로 노력하는 게 좋을까? 담에 줄거리 알려줬으면 좋을 거 같어..궁금해..

옥이 2010-08-16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그건 너무 어려운 문제네요.. 답을 알면 알려줘요~ 어떻게 해야 되는지~ㅋㅋ
줄거리에 관심이 많네요~ ㅋㅋ
 
인간적이다
성석제 지음 / 하늘연못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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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랬던가. 작가 성석제를 '낙천적인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작가에게서 자주 발견되는 선천적 우울함이, 그에게는 없다고 말했다. 장난꾸러기 같은 웃음이 아직도 작가의 사진에서 묻어나온다. 그는 뭐든지 신나는 사람이란다. 글을 쓰는 것도 재미있게 쓰고, 작가가 되기 전 회사도 신나게 다녔단다. 50년 정도 세상을 살다보면, 인생의 신맛과 고달픔을 알게 되고 그러다 보면 장난기도 사라질 만한데, 작가 성석제는 그렇지 않다.


이 책에도 작가의 위와 같은 성향이 그대로 녹아있다. 이야기는 우울하지도, 절망적이지도 않다. 심오하거나 어렵지도 않다. 그저 '이야기'일 뿐이다. 무언가 큰 깨달음이나 교훈을 주는 것 같지 않다. 옛날 옛날 할머니, 할아버지가 들려주셨던 전래동화처럼 짧고, 재미있다. 심지어 글을 읽고 나면 "뭐야?"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너무 싱겁고, 단순하고, 가벼워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고압선에서 튀는 불꽃같은, 서늘한 한 줄기 바람처럼 흘러가고 벼락 치듯 다가오는 우연과 찰나의 연쇄가 나를 흥분시킨다.'라고 말했다. 그렇구나. 짧은 이야기 속 한 장면, 한 장면에서 그는 전율을 느끼는구나.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어찌 보면 시답지 않은 한 순간, 한 순간 속에서. 어찌 보면 장난인 것 같은 허무맹랑함 속에서, 그는 무엇인가를 느끼는구나.


생각해보면 우리 인생은 그런 짧은 찰나, 작은 순간들의 끊임없는 연결이다. 사람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에 울고, 웃고, 행복해하고, 불행해하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작은 것들의 파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순간순간을 망각하며 산다. 마치 더 크고 중요하고 엄청난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듯 착각하면서. 초등학교 단짝 아무개와 뒷산에 올라가 아카시아를 따먹으며 장난치던 그 순간, 중학교 소녀 시절 버스 정류장에서 자주 마주치던 이름 모를 한 남학생에 대한 짝사랑, 눈이 오는 날 연인과 함께 걸으며 들었던 철지난 유행가. 참 많은 순간을 보내왔지만 또 참 많은 것을 잊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런 소소한 것을 아예 인식하지도 못한다.


글을 쓰면서 제일 곤혹스러운 것은, '내 글이 너무 사소한 것은 아닌가.' 혹은 '내 글이 너무 가벼운 것은 아닌가.'하는 의구심이다. 분명 어느 날에는 그것으로 인해 신음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와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유치하게만 느껴진다. 글이라 함은,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보다는 좀 더 무게 있는 문제를 다뤄야 하고, 무언가 큰 줄거리 속에서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항상 시달린다.


작가는 그렇지 않아서 '좋다.'(이 '좋다'라는 단순한 표현도 마음에 든다. 무언가 거창한 수식어나 고급스러운 단어 대신, 그저 밑도 끝도 없는 '좋다.'다.) 마음이 가는 대로 표현했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서술했고, 자신이 마주쳤던 아주 아주 작은 이야기들에 집중했다.


나를 스쳐갔던 아주 아주 작은 이야기들도 참 많다. 단지 내가 잊었거나, 사소하게 생각했거나, 무언가 다른 일에 지쳐 망각했을 뿐이다. 많은 이야기들이 나에게로 왔었다. 그 이야기들을 하나씩 되살려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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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6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작은 소소한 얘기를 써 놓은 책같은데, 내용이 뭘까?

옥이 2010-08-17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빌려줄게요~ ㅋㅋ
 
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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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에르 드 메르트르 라는 사람이 <나의 침실 여행>이라는 신선한 여행기를 1790년에 썼단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단다.

"아무리 게으른 사람이라 하더라도 돈도 노력도 들지 않는 즐거움을 찾아 출발하는 일을 망설일 이유가 없을 것이다."

아무리 게으른 나는, 그의 말에 힘입어 여름 휴가 시즌을 맞아 나의 침실을 여행하고자 한다.


어디서부터 시작해 볼까. 머리맡부터 시작을 해보자. (이렇게 세세하게 묘사해도 될까? ㅋㅋ) 머리맡에는 행어가 있다. 치마부터 시작해 개어 놓으면 망가질 만한 옷들이 빼곡히 걸려있다. 입을 만한 옷은 거의 없다. 모든 여성들이 그렇듯. 입을 만 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버리기도 아까운 옷들이 꽤 많다. 암튼 그 행어에 있는 옷들은 잘 입지 않는다. 분홍색 세무 겨울 점퍼, 예전에 산 주황색 점퍼도 걸려 있다. 입지 않는 버버리도 있고 아, 허리띠나 목도리도 옷걸이에 걸어서 행어에 걸어 놓았다. 자켓도 걸려있고... 뭐 많이 걸려 있긴 한데, 뭐가 있는지 잘 생각이 안 난다. 조금 당황스럽다.


행어 아래에는 각종 가방들이 보관돼 있다. 작년에 엄마가 홈쇼핑에서 사 준 3세트 가방이 그곳에 있다. 화장품을 사고 사은품으로 얻은 황금색 손가방도 있다. 노란색 가방이랑 뒤로 매는 가방도 있다. 또 뭐가 있지? 잔뜩 있긴 한데 잘 생각이 안 난다. 다시 뒤져 봐야겠다.



그리고 방 한 가운데는 이불이 깔려 있다. 이 이불은 항상 깔려 있는 상태다. 엄마 말로는 2인용 이불이라고 하는데 잘 모르겠다. 베개가 이불 위에 놓여있고 덮는 이불은 두 개다. 하나는 빨간색에 꽃무늬가 있는 극세사 이불이고 다른 하나는 하얀색 바탕에 역시 작은 꽃무늬 같은 것(꽃무늬인지 잘 모르겠다.)이 있는 얇은 솜이불이다. 최근에는 날이 더워 극세사 이불은 다리를 올려 놓는 데 사용한다. 자꾸 다리가 부어서 말이다.


오른쪽 벽에는 스위치가 있다. 두 개다. 하나는 천장 위 형광등 스위치고 하나는 오른쪽 벽면 위에 붙어 있는 백열등 스위치다. 아래 스위치가 형광등 스위치인데 거기에는 분홍색 야광별 스티커가 붙어 있다. 아마 예저에 살던 사람이 붙여 놓았나 보다.


왼편에는 빈 책꽂이용 상자가 2개 나란히 놓여져 있다. 머리맡 쪽에 더 가까운 상자에는 키티 탁상시계가 들어 있다. 건전지는 빼 두었다. 작은 방에 시계 가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서 거슬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방에는 핸드폰 외 시계는 없다. 다른 상자에는 파란색 색연필이 있다. 침실에서 책을 읽을 때 사용하려고 가져다 두었다.


그리고 발밑 쪽 벽에는 책꽂이가 있다. 책꽂이는 위에서 설명한 상자 12개를 쌓아놓은 것이다. 가로 3개, 세로 4개씩이다. 맞나? 가로가 네 개일 지도 모른다. 아무튼 가로 3개, 세로 4개라고 전제하고. 각 상자는 거의 다 빼곡이 책들이 꽂혀 있다. 맨 오른쪽 밑에서 두 번째 상자에는 시집들을 주로 꽂아 두었다. 기준없이 마구 꽂은 책꽂이 중 그나마 기준을 두고 꽂은 구역이다. 그리고 가운데 줄 위에서 두 번째(혹은 세 번째) 상자에는 아직 다 읽지 못한 책들, 그리고 읽다 만 책들을 꽂아 두었다. 아, 심플한 내 침실이 이렇게 가물가물하다니. 이것 참.


이게 전부다. 전부인가? 더 상세히 묘사할 수도 있겠지. 아니다. 더 상세히 묘사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세세하게 또렷이 기억나지 않는다. 벽 어딘가에 무슨 얼룩이 있어서 마음에 안 들어 했고, 원래 카펫이 깔려 있는 바닥을 장판으로 바꾸었는데 조금 들뜨게 발라져서 그것도 거슬려 했다. 아, 장판을 바를 때 아저씨가 부러진 칼날을 그대로 장판 밑에 깔고 발랐던 게 이제 기억이 난다.


가장 간단한 내 침실도 이렇게 묘사하기가 어렵다. 세상 곳곳을 여행하기엔 세계는 너무 넓다. 모든 것을 빠르게 변하고, 할 일은 너무 많다. 돌아봐야 할 것도 해야 할 일도 너무 많은데 시간은 부족해 마음이 갑자기 조급해진다. 그리고 나는 '아무리 게으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그 많은 것 중 내가 꼭 해야 할 일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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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6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모바하는거 같지만, 동네 탐방기를 써보는건 어때? 사실 산책하면서 지나친 가게들도 잘 모를때 있고, 동네 카페에 앉아서 듣고 봤던 걸 다시 보고 써도 잼날거 같어 ㅋ
ps. 머리카락은 빠지면 안될 듯

옥이 2010-08-17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생각이에요~ 잼미잇겠다~ 근데 알랭 드 보통이 벌써 했더라구요~
 
나는 춤이다
김선우 지음 / 실천문학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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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글은 처음이었다. 세세한 모세혈관 끝까지 일어나는 듯, 감각적이다. 달빛, 빨강, 향기, 나비... 화려하고 느린 손짓, 폭발할 것 같은 열정. 그녀의 글에 순식간에 빨려 들어간다.


호기심이 무구하고 위태롭다.

화려하면서 적막한 움직임... 늙고 환한 나비.

가파르게 헐떡이고 있는 서로의 심장.

그 풋것은 맥박이 가팔랐지만.


그녀의 글은 섬세하고 예민했다. 글이 주는 자극이 너무 섬세해서 때로는 머리끝이 찌릿, 하며 신경질이 나는 듯 했다. 그녀의 글을 통해 묘사된 최승희는 차분하고 느리고 침착했지만, 격정적이었고 성난 파도 같이 역동적이었다. 누가 신경이라도 거슬리게 하면 곧 터질 것처럼 위험해 보였다. 두 가지 모순을 그녀와 최승희는, 잘도 그려냈다.


아름다웠다. 시인인 그녀가 묘사한 한 줄 한 줄이 아름다웠고, 최승희의 몸짓 하나하나와 그 몸짓으로 이루어진 삶이, 아름다웠다. 감각적인 시어들로 구성된 글을 읽어 내려갈수록 또렷한 영상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산뜻하고, 신선했으며, 숨이 막힐 듯, 세심했다.


작가와 최승희의 삶이 한데 엉켜 최상의 미(美)를 창출했다. 조선의 춤에 목숨을 건 최승희의 삶이 아름다웠고, 이를 시각, 미각, 후각 등 모든 감각을 이용해 써 내려간 작가의 글이 아름다웠다. 그녀의 삶과 그녀의 묘사, 그녀의 열정과 그녀의 전개가 명확하게 구분질 수 없게 마구 섞였다. 춤이라는 예술과 글이라는 예술이 뒤엉켜 극한의 아름다움이 탄생했다.


두 명의 그녀가 만들어낸 아름다움을 지금의 내가 지켜본다. 인간 최승희는 죽었지만, 나는 지금 그녀가 빚어낸 춤사위를 머릿속에 떠올린다. 시간은 무심히 흘러가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은 나에게 남는다. 그녀의 글도 마찬가지일 게다. 아름다움을 후세에 남기는 이들은 분명, 행운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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