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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몽
황석영 지음 / 창비 / 2010년 6월
평점 :
변호사 아버지를 둔 내 친구는 8학군 강남지역에서 외고를 나와 한국에서 손꼽히는 명문대학에 진학했다. 사법고시를 패스한 그는 역시 변호사가 되었다. 그리고 검사 배우자를 만나 결혼을 했다. 그들은 잠실에 3억짜리 전셋집을 얻어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그 역시 자신의 아버지처럼 자신의 자식을 뒷받침해 줄 것이고, 그 자식 역시 후에 기득권자로 이 사회에 자리 잡을 가능성이 많다.
나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운 좋게, 정말 운이 좋았나 보다. 특별하게 고액과외나 족집게 학원을 다니지 않고, 그야말로 교과서 위주로 공부해 내 친구와 같은 대학, 같은 학과에 지원했다. 그러나 나는 사법고시를 패스하지 못했고, 이제 나도 명퇴를 걱정하고 노후를 걱정해야 하는, 노후는 커녕 결혼해서 집 사고 아이들 키울 일이 막막한, 힘겨운, 이 사회의 평범한 샐러리맨이 되었다. 내 친구와 나의 연봉차이는 거의 두 배 이상이다.
이게 '현실'이다. 그와 나의 능력차이도 물론 있겠지만, 한 사람이 사법고시를 패스하기 위해 집안에서 지원받아야 하는 비용은 생각 외로 크다. 경제적으로는 물론, 심리적, 감정적인 배려 물론 필요하다. 이런 지원을 받는 자와 받지 못하는 자 사이의 차이는 사법시험 합격 여부로 나뉜다. 연일 신문에서 떠드는 우리 사회 '부의 세습'이 바로 이것이다.
언론이나 학계, 시민단체 등에서는 '부의 세습'을 뿌리 뽑아야 한다고 난리다. 물론 제도적으로 태생적인 경제차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이는 다른 사람들도 흔히 말하는 이야기고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조금 다른 차원이다.
엄연히 '현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젊은이들에게 무엇이든지 열심히만 하면 그 꿈을 이룰 수 있다, 성공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시리도록 서글픈 현실을 무시한 채 무조건 희망을 꿈꾸라고 강요한다. 순진한 청년들은 그 말을 철썩 같이 믿고 도전하고 도전한다. 실패를 염두에 두지 않았기에 이들이 맛보는 패배감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들이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주변 상황 때문에 실패할 수도 있음을, 그러한 실패도 감당해야 하는 것이 삶임을 미리 가르쳐야 하는 게 아닐까.
문제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만일 도전이 실패로 끝났을 경우 그 책임은 모두 개인의 무능력으로 돌아간다. '내가 못나서, 내가 더 열심히 하지 않아서' 실패한 것이다. 왜? 무한 경쟁사회에서는 누구든지 능력만 있으면, 열심히만 하면 꿈을 이룰 수 있는데, 실패를 했다는 것은 본인이 능력이 없거나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구를 탓하랴.
순진한 청년들은 부모의 경제력에 의해 개인의 능력이 좌우되는 사회에 어리둥절해 있다가 쓰디쓴 실패를 맛보고, 그마저 실패에 대한 죄책감 등 이중 삼중의 고(苦)를 맛보게 된다. 여기서 문제는 또 도출된다. 상실감, 좌절감을 맛본 청춘들을 우리 사회는 도닥이는 것이 아니라 한 번 실패했다고 왜 패배감에 묻혀 사냐고 또 다른 도전을 시작하라고 강요한다. 좌절감에 젖어 있는 청년들을 사회는 또 너무 나약하다, 곱게만 자랐다, 이래서 문제다, 라며 비난한다. 어느 누구도 이들을 도닥이고 따뜻하게 위로하지 않는다. 미안하다며, 우리 사회가 이 모양이라서, 이런 현실을 차마 이야기 할 수는 없었다고 사과하지 않는다.
희망을 강요하는 것은 '부의 세습'만큼이나 가혹하다. 너의 능력이 부족해서 네가 실패한 것이라고 비난하는 것 또한 비인간적이다. 오히려 현실의 차를 건강하게 받아들이고, 이를 인정하면서 최선의 노력을 할 수 있도록 격려를 해주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젊은이들을 억지로 웃게 만들고, 억지로 씩씩한 캔디로 만드는 것은 이제 그만하자. 속은 썩어 문드러지는데 억지로 씩씩한 척 힘을 내는 청춘들이 눈물겹게 안쓰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