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사비에르 드 메르트르 라는 사람이 <나의 침실 여행>이라는 신선한 여행기를 1790년에 썼단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단다.

"아무리 게으른 사람이라 하더라도 돈도 노력도 들지 않는 즐거움을 찾아 출발하는 일을 망설일 이유가 없을 것이다."

아무리 게으른 나는, 그의 말에 힘입어 여름 휴가 시즌을 맞아 나의 침실을 여행하고자 한다.


어디서부터 시작해 볼까. 머리맡부터 시작을 해보자. (이렇게 세세하게 묘사해도 될까? ㅋㅋ) 머리맡에는 행어가 있다. 치마부터 시작해 개어 놓으면 망가질 만한 옷들이 빼곡히 걸려있다. 입을 만한 옷은 거의 없다. 모든 여성들이 그렇듯. 입을 만 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버리기도 아까운 옷들이 꽤 많다. 암튼 그 행어에 있는 옷들은 잘 입지 않는다. 분홍색 세무 겨울 점퍼, 예전에 산 주황색 점퍼도 걸려 있다. 입지 않는 버버리도 있고 아, 허리띠나 목도리도 옷걸이에 걸어서 행어에 걸어 놓았다. 자켓도 걸려있고... 뭐 많이 걸려 있긴 한데, 뭐가 있는지 잘 생각이 안 난다. 조금 당황스럽다.


행어 아래에는 각종 가방들이 보관돼 있다. 작년에 엄마가 홈쇼핑에서 사 준 3세트 가방이 그곳에 있다. 화장품을 사고 사은품으로 얻은 황금색 손가방도 있다. 노란색 가방이랑 뒤로 매는 가방도 있다. 또 뭐가 있지? 잔뜩 있긴 한데 잘 생각이 안 난다. 다시 뒤져 봐야겠다.



그리고 방 한 가운데는 이불이 깔려 있다. 이 이불은 항상 깔려 있는 상태다. 엄마 말로는 2인용 이불이라고 하는데 잘 모르겠다. 베개가 이불 위에 놓여있고 덮는 이불은 두 개다. 하나는 빨간색에 꽃무늬가 있는 극세사 이불이고 다른 하나는 하얀색 바탕에 역시 작은 꽃무늬 같은 것(꽃무늬인지 잘 모르겠다.)이 있는 얇은 솜이불이다. 최근에는 날이 더워 극세사 이불은 다리를 올려 놓는 데 사용한다. 자꾸 다리가 부어서 말이다.


오른쪽 벽에는 스위치가 있다. 두 개다. 하나는 천장 위 형광등 스위치고 하나는 오른쪽 벽면 위에 붙어 있는 백열등 스위치다. 아래 스위치가 형광등 스위치인데 거기에는 분홍색 야광별 스티커가 붙어 있다. 아마 예저에 살던 사람이 붙여 놓았나 보다.


왼편에는 빈 책꽂이용 상자가 2개 나란히 놓여져 있다. 머리맡 쪽에 더 가까운 상자에는 키티 탁상시계가 들어 있다. 건전지는 빼 두었다. 작은 방에 시계 가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서 거슬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방에는 핸드폰 외 시계는 없다. 다른 상자에는 파란색 색연필이 있다. 침실에서 책을 읽을 때 사용하려고 가져다 두었다.


그리고 발밑 쪽 벽에는 책꽂이가 있다. 책꽂이는 위에서 설명한 상자 12개를 쌓아놓은 것이다. 가로 3개, 세로 4개씩이다. 맞나? 가로가 네 개일 지도 모른다. 아무튼 가로 3개, 세로 4개라고 전제하고. 각 상자는 거의 다 빼곡이 책들이 꽂혀 있다. 맨 오른쪽 밑에서 두 번째 상자에는 시집들을 주로 꽂아 두었다. 기준없이 마구 꽂은 책꽂이 중 그나마 기준을 두고 꽂은 구역이다. 그리고 가운데 줄 위에서 두 번째(혹은 세 번째) 상자에는 아직 다 읽지 못한 책들, 그리고 읽다 만 책들을 꽂아 두었다. 아, 심플한 내 침실이 이렇게 가물가물하다니. 이것 참.


이게 전부다. 전부인가? 더 상세히 묘사할 수도 있겠지. 아니다. 더 상세히 묘사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세세하게 또렷이 기억나지 않는다. 벽 어딘가에 무슨 얼룩이 있어서 마음에 안 들어 했고, 원래 카펫이 깔려 있는 바닥을 장판으로 바꾸었는데 조금 들뜨게 발라져서 그것도 거슬려 했다. 아, 장판을 바를 때 아저씨가 부러진 칼날을 그대로 장판 밑에 깔고 발랐던 게 이제 기억이 난다.


가장 간단한 내 침실도 이렇게 묘사하기가 어렵다. 세상 곳곳을 여행하기엔 세계는 너무 넓다. 모든 것을 빠르게 변하고, 할 일은 너무 많다. 돌아봐야 할 것도 해야 할 일도 너무 많은데 시간은 부족해 마음이 갑자기 조급해진다. 그리고 나는 '아무리 게으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그 많은 것 중 내가 꼭 해야 할 일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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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6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모바하는거 같지만, 동네 탐방기를 써보는건 어때? 사실 산책하면서 지나친 가게들도 잘 모를때 있고, 동네 카페에 앉아서 듣고 봤던 걸 다시 보고 써도 잼날거 같어 ㅋ
ps. 머리카락은 빠지면 안될 듯

옥이 2010-08-17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생각이에요~ 잼미잇겠다~ 근데 알랭 드 보통이 벌써 했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