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까지 성경을 읽을 때, 아니 읽어야지 할 때에는 그 시점에는 분명 의도가 있었다. 

하지만 돌아보면 거의 안다는 식의 건성으로, 건너뛰기와 오독까지 하는 경우도 많았다. 

'성서를 열다'에서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불가해한 세계 앞에서' 라는 말이 덧붙여있다. 

이제껏 너의 익숙함에서 벗어나 성서의 낯선 세계를 만나야 하고 그 속에서 너 자신을 열어 보이라고 말하고 있다. 

책에서는 이렇게 성경과 마주한 사람들로, 파졸리니, 에리히 프롬, 본회퍼, 윌리엄 포크너를 언급하고, 타종교, 동양 경전 등까지 성서와 비교하기까지 한다. 

차례에 나오는 6가지 질문에 답해보는 맛도 있다. 각자의 답이 있겠지만, 정답(?)이나 오답을 가리기 위해 애쓰며 읽었지만 잡힐 듯하지만 한마디로 채점하지 못한 답만 남아 있다. 결국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리라. 중간 중간에 나오는 성경 구절이 책 읽기에 방해가 되었다면, 이 말씀들이 너무 익숙해서 그냥 넘기고 싶은 충동까지 싸우다 보니, 몰입도가 떨어지고 주의가 분산되니 어렵다는 생각까지 들었다고 변명한다.


그럼, 진지하고 정직한 자세로 답해보자.

성서는 어떤 책인가?

성서를 읽는 당신은 누구인가?

누가 성서에 들어가는가?

성서에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가?

성서로 들어가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성서에서 무엇이 열리는가?


이 참에 성경을 제대로 읽어 볼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긴 역사 속에서 다양한 저자들과 편집자들의 손을 거친 성경은 읽을 때마다 다른 의미와 해석이 나오기도 하고, 새롭게 알게 된 사실도 생겨나는 것 보면, 이 또한 '성서를 열다'와 맞물려 있는 것은 아닌지 애써 합리화한다.


더 생각할 부분으로 부록에 나오는 내용(151-153쪽), 인간은 '차악'을 선택하므로 그나마 납득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여기면서 자신에게 '무고함'을 판정하는 궁극적인 힘을 부여하게 된다. 잘못을 저지르고 용서를 구하는 인간은 잘못했다 할지라도 '정당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며, 힘을 소유하게 된다. 우리가 잘못을 저질러도 괜찮다고 '미리' 말함으로써 우리는 힘과 권력을 얻게 되며, 내적 갈등 없이 우리를 정당화하게 된다. 그러면서 우리는 갈등을 외부화한다. 내면에서의 충돌은 사라지고, '나'가 아닌 '타자', '우리'와 '다른 타자들','저들'과의 갈등만 존재한다. '합리적인 나'와 '불합리한 타자','나'라는 의미 있는 존재와 '타인'이라는 무의미한 존재 사이의 갈등만 존재하게 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예전에 본 영화, '밀양'이 떠올랐다. 전도연이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해 주려고 만났는데, 범인은 '나는 이미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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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를 열다 - 우리에게 다가오는 불가해한 세계 앞에서 비아 시선들
토마스 머튼 지음, 정다운 옮김 / 비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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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를 이해하는 길은 분투의 여정입니다. 그래야 합니다. 그저 의미를 찾아보려고 참고서적 뒤지듯 성서를 읽어서는 안 됩니다. 성서를 이해하는 길은 성서에 내재한 극명한 걸림돌과 모순을 정직하게 마주하려 분투하는 길이며, 그 길로 나아가려 애써야 합니다. (52쪽)

우리는 성서, 우리가 ‘읽는‘ 책이라 여기는 그 책이 본래는 특정 무리, 그 메시지와 호흡을 맞춰온 무리가 ‘낭송‘하며 또 ‘듣던‘ 글임을, 구전 전승들의 모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중략) 성서의 메시지는 공동체와 모임의 정체성을 세우고 굳건히 하려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말씀은 예배를 위한 것으로, 공동체가 함께 믿고 응답하며 받아들이고 확증하며 찬미하고 감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성서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이를 알아야 합니다. (78-79쪽)

성서를 읽을 때 우리는 각 성서 저자가 의도한 바, 그 실제적인 의미를 찾기 위해 객관적이고도 현실적인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중략) 성서 안에 있는 각 책은 제각기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고, 문학적으로도 폭넓은 양식을 지니며, 다채로운 역사적 배경 속에 쓰였다는 사실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성서가 분리될 수 없는 한 권의 책이며 동일한 신학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러면 불가피하게 성서 바깥에 있는 무언가, 즉 전통과 함께 읽어야 할 테지요. 전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는 또 다른 문제이지만, 적어도 성서에 여러 저자뿐 아니라 다수의 편집자가 참여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저자들의 의도와 더불어 편집자들의 의도 역시 고려해야 합니다. 편집한다는 것은 곧 해석한다는 뜻이며 이는 성서 본문에 이미 다양한 층위가 존재함을 보여줍니다. (100-101쪽)

성서를 읽으며 우리 자신이 문제임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결코 이 자유의 역동으로, 이러한 이해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성서는 화해와 일치의 책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자리한 근원적인 분열, 일치와 화해에 반발하는 마음을 끌어내 자각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 분열에 대한 고통스러운 깨달음을 통해 우리는 역사 속으로, 그 뼈아픈 현실 속으로 걸음을 내딛게 되며, 무책임과 본능에 분별없이 빠져들지 않게 됩니다. 역사 속으로 걸음을 내디딘다는 것은 해야 할 일이 생기는 것, 어떤 운명을 감내하는 것, 자기 자신과 타인에 대한 지난한 의무를 다하는 것을 뜻합니다. 하느님이 인간을 자유로 부르셨다는 말은 인간이 이 사랑의 세계를 건설할 수도 있고, 그 일을 거절한 수도 있다는 뜻, 탐욕, 미움, 욕정, 살해의 욕구에 사로잡힌 자리에 머물기로 결정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116-117쪽)

이성을 잃어 끔찍한 일이 일어나는 상황 대신, 미래에 있을지도 모를 좋지 않은 일을 피하려 이상보다 훨씬 ‘덜 이상적인‘ 일을 냉정하고 합리적으로 계산해 낸다면 어떨까요? 이때 계획은 ‘부도덕‘할 수밖에 없습니다. 차악에 관한 교리는 혼란스럽고 어려운 경험을 되돌아보고 하느님의 자비 가운데 어떤 의미를 빚어내는 방식이 아닌, 복음의 급진적인 요구를 계속 회피하는 방식으로, 계속 ‘상대적으로 덜 나쁜‘ 길을 택하게 만듭니다. (중략) 극단적인 상황에서 일어나는 극단적인 선택을 미리 합리화하는 것은 우리의 도덕적 상상력을 마비시키고, 어떠한 도전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어떠한 흔들림, 내적 갈등없이 자신을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이때 갈등은 내부에서 외부로 이동합니다. (151-1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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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행 야간열차] 대신 카렐 차페크가 쓴 [조금 미친 사람들]을 챙겨 떠났다.

사이 사이 멋진 삽화까지 그려 넣은 100년 전에 쓴 여행기라니, 놀랍지 않은가.

카렐 차페크는 기차를 타고 체코를 출발해서 몇몇 나라를 거쳐 가장 스페인다운 곳을 여행했고, 나는 비행기를 타고 소위 유명하다는 곳을 다녔다. 그러나 그렇게 긴 시간 차가 있었지만 그가 다닌 길과 거의 유사했다. 

출발 전에 읽기 시작하여 그가 다닌 곳을 따라가면서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한 기시감까지, 카렐 차페크와 같이 여행하고 있다는 착각까지 들었다. 서로의 좋아하는 영역과 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살아 있는 사람들의 거리야말로 가장 좋은 박물관(41쪽)'이라는 사실은 유사했다. 영어가 아니라 넘치는 스페인어, 낯선 문화, 그렇지만 이런 편안함과 풍성함, 즐거움은 뭐지, 여행은 이런 것이다, 이런 맛에 다니는 것이다를 처음 느꼈다. 

제목은 역자가 저자가 엘 그레코를 가리켜 한 말, '눈이 자신의 비전에 열정적으로 고정된 사람은 모두 조금 미친다(55쪽).'에서 [Trip to Spain] 대신 따온 것이리라. 

미치지 않고서야 가 볼 수 없는 곳을 다녀왔다. 한 때 세계에서 일등을 했던 스페인에는 뿌리깊은 뭔가 있었다. 도무지 설명할 수 없으니까, 아무 말로 끄적거린다.


*그러고보면 미쳐야만 지금을 온전히 살아 낼 수 있다. 

*꼬르타도 커피, 알람브라 맥주, 상그리아, 착즙오렌지, 에그타르트, 빠에야, 바깔라우, 젤라또, 하몽, 타파스, 츄러스 등 맛보았다. 

*부에르타 델 솔(솔광장)에는 다양한 크리스마스마스(122416) 조명으로 반짝거렸고, 곰동상, 제로포인트, 펠리페 3세 기마상 주변에는 사람들로 더 붐볐다.

*톨레도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유적이 공존하는 장소이자 스페인의 옛 수도다. 특히 엘 그레코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식] 그림이 있는 산토도메 성당은 좁은 골목들 사이에 아주 작은 곳이었다.

*세비야 대성당의 콜럼버스 묘가 인상적이었고, 성당내 굳게 닫힌 개인 기도처가 곳곳에 있어 낯설었다.

*공항 검색대보다 더 철저한 검색을 통과하여 들어간 미술관이 인상적이다. 온전히 자국민의 작품만 있다 해서 더 놀라웠다. 

*육만봉을 병풍삼은 베네딕트 수도원, 보압딜이 알람브라 궁전을 이사벨 여왕에게 건네주고 눈물흘린 무어인의 한숨 고개, 좁은 골목길, 혼합된 고딕 및 바로크 양식과 아랍 양식의 건축물, 가우디가 영혼을 갈아 만든, 아직도 진행중인 성가족성당, 누에보 다리, 헤밍웨이가 작품 구상한 론다, 온전한 그들만의 문화 투우, 세상의 끝 호카곶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울림을 마음에 담아왔다.  

*구성진 목소리의 가수, 남녀 무용수, 기타리스트로 구성된 플라멩코를 보는 데 눈물이 났다. 

*오렌지 나무가 가로수라니, 끝없는 들판에는 몇 백년을 살아 낸 올리브 나무들이 도열해 있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아껴가며 읽는 중이다.

*내가 다닌 곳과 카렐 차페크가 다닌 곳을 사진으로 연결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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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미친 사람들 - 카렐 차페크의 무시무시하게 멋진 스페인 여행기 흄세 에세이 6
카렐 차페크 지음, 이리나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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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에서 길을 잃어도 후회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도 우리는 날렵한 발굽으로 돌길을 재빠르게 걷는 당나귀를 피할 테고, 열린 안뜰과 마졸리카 계단을 볼 것이며, 무엇보다 현지 사람을 만나게 될 테니까. (37쪽)

살아 있는 사람들의 거리야말로 가장 좋은 박물관이다. 여기서 마치 다른 시대로 헤매 들어온 것 같다고 말하려 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진실은 한층 이상하다. 다른 시대란 없다. 과거에 있던 것이 지금도 있다. 만약 저 기사가 칼을 찼고, 저 사제가 알라의 경전을 해설했으며, 저 소녀가 톨레도의 유대인이었다면. 그것이 톨레도 거리의 성벽보다 이상하고 멀어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다른 시대로 들어간다면, 그것은 다른 시대가 아닐 것이다. 그저 몹시 아름답고 숭고한 모험일 뿐이다. 톨레도처럼, 스페인 땅처럼 말이다. (41쪽)

그렇다. 이 그리스인(엘 그레코)은 압도적인 천재였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미쳤다고 한다. 눈이 자신의 비전에 열정적으로 고정된 사람은 모두 조금 미친다. 혹은 적어도 그는 비전의 소재와 형식을 다른 어느 곳도 아닌 자신에게서 가져오기 때문에 매너리즘에 빠진다. (55쪽)

우리는 그저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을 움켜지고 만지작거린다. (98쪽)

투우를 보는 동안 나는 매우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잊을 수 없는 아주 놀라운 순간이 있었고, 차라리 땅이 나를 삼켰으면 바랐던 고통스러운 시점도 있었다. 물론 가장 멋진 광경은 투우사들이 투우장으로 엄숙하게 입장하는 모습이다. (120쪽)

스페인의 깊은 비밀 중 하나는 지역색이다. 이는 유럽 다른 지역에서는 사라져가는 독특한 미덕이다. 자연과 역사, 그리고 국민성의 결합체인 스페인이 아직 자연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역사를 잊지 않았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스페인은 이렇게까지 스스로를 보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한 민족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경이로운 마음으로 지켜보는 것뿐이다. (181쪽)

친애하는 독자여, 익숙하지 않았던 무언가를 보거나 다르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사물과 사람 간의 다양성은 우리 삶의 지평을 넓혀준다. (2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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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 템페스트는 래퍼, 작사가, 시인으로서 [연결된] 산문을 공연에 빗대어  '셋업'에서 시작하여, '사운드체크', '문', '찬조공연', '준비', '무대로', '연결의 순간'으로 공연 과정과 접목하여 독자와 연결하고 있다.

우리는 사회의 인정과 수용에 갇혀 그것으로 자신을 규정한다. 이러한 어긋남에 균열을 내어 온전히 나 자신에게로, 나의 삶으로, 더 나아가 세계와 타인을 공감할 수 있는 연결에 대하여, 연결은 저절로 그저 되는 게 아니라 부단한 애씀이 필요하고, 이러한 애씀은 말이나 관념이 아닌 창착이라는 행위로 가능하다고, 창작은 거창한 행위가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시선을 옮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창작이라는 것. 자신과 잘 연결되면 타인과도 연결된다고 말한다.


창작 서로의 거리가 좁혀지는 것, 자기인식에 다가서는 순간이다. 창작에 머무름은 연결의 지향을 품는 것이다. 예로 옷을 입고 창틀에 색을 입히고 아이를 키우고 연인에게 마음을 다하는 일, 이러한 일에 창작이 소환된다. 


행위의 인식은 이미지가 아니라 실제에 근거할 때 진실이 된다. 예로 지금 어떤 집단의 누구와 함께 있느냐에 따라서 다른 사람으로 연기한다면, 그래서 친밀하지 않은 관계에서는 상대방의 말을 중간에 끊기보다는 설령 인종차별적인 발언이나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발언이 들려온다 하더라도 그냥 흘러넘기는 편이 개인적인 사회생활의 기준에 부합한다 여겨 그렇게 행동한다면, 자기동일성의 어떤 삐걱댐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또한 그러한 사회적 순응은 타인에게 동조하려는 욕구, 타인과의 갈등을 회피하려는 욕구에 나의 신념의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라 해석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상황에서 제정신으로 버티려면, 기능을 수행하려면, 성공하려면 나/타인/세계로부터 멀어짐 또는 무감함이 필요하다. 이는 진실된 감정의 결여이다. 생각하지 않기로 선택하면서 익숙함에 갇히게 된다. 


8쪽 우리는 모두 시대가 만든 세계의 체계 속에서 스스로의 드라마투르그이자 배우로 살아가며 사회적 기호들을 연기한다. 이는 불가피하고 또한 의미 있는 삶의 일부다. 다만 그 기호의 사회에 붙들려 '전적으로 시대의 정신으로 살아가'면서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얕아지거나 아예 벗어나는 일, 그리하여 '연기하기를 멈추었을 때 누가 남게 되는지 모르'는 지경에 이르는 일은 피하고자 말한다.


137쪽 내가 무슨 말을 어떻게 했든, 그들이 진짜 관심이 있지는 않다. 그들은 자기가 한 말로 괴로워하기에도 바쁘다. 온라인에서 내 말을 두고 시비를 건 이가 지금 화를 내고 있는 상대는 그 자신이다. 더욱이 나는 누군가의 평가로 규정되지 않는다. 나를 규정하는 것은 이곳 지금이다. 소리 높여 나누는 인사, 멈춰서는 차 소리, 경적, 아이와 여우와 라디오와 강아지의 외침, 세상의 모든 소리는 살아감이다.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배경음이 아니다. 다만 가까이 다가선다. 앞으로 가운데로. 수많은 건물의 수많은 창을 올려다본다. 그곳에 살아감이 있다. 나는 미루어둔다. 내려놓는다. 타인에게로 시선을 향한다. 나뭇가지의 움직임에, 갑자기 찾아 든 비에, 물결의 무늬에 시선을 둔다. 벤치에 앉아 두 손을 모은 사람, 잔디밭에 몸을 누인 두 사람, 건널목에서 머리칼을 당기며 노는 셋, 손에 든 짐의 무게를 이리저리 옮겨가며 엄마의 굳센 두 다리를 쫓아가는 아이. 그들에게로 시선을 향한다. 그곳에 중요한 것이 있다. 그곳에 아름다움이 있다.


번역을 참 잘하셨다. 


올해도 잘 살았다! 

새해는 독서에 집중하자!

[리스본행 야간열차], [당신의 포르투갈은 어떤가요] 챙겨 떠난다.


Merry Christmas n Happy New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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