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쩜 글을 이리도 맛깔나게 쓰셨을까,로 번역했다. '맛깔나게' 단어 속에는 그 간의 저자의 희.노.애.락이 다 녹아있다. 희노애락의 큰 스펙트럼 안에 잘디잔 감정들을 아프게 느끼면서, 원문과 가장 유사한 번역을 위해 살아온 저자의 노고를 알 수 있다.  

어쩌면 잘 사는 삶이란, 나의 말을, 감정을, 행동을, 더 나아가 타인의 말들, 감정들, 행동들에 대해 번역을 잘 해야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로 해석할 수 있다 .

일방적이든, 주고 받든, 말과 감정과 행동은 서로 교차되어 또 다른 언어를 만들어 내고, 그 속에서 내게 맞는 말로 번역된다.

나의 수준과 기분에 따라 번역되는 말은 원문과는 동떨어질 수도 있고, 더 넘치기도 한다. 그래서, 오해와 이해가 난무하여 다시 볼 수도 있고, 다시는 안 만나기도 한다.

심지어 나를 가장 잘 알고 가장 아끼는 엄마의 말조차 믿지 못하니, 애초부터 우리는 오역하며 살도록 태어나지 않았을까, 오역의 크기를 줄여가는 게 삶의 과정 아닐까,하는 생각까지 든다. 

특히, 

*90쪽 'I'm not defined by you(나는 당신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다.)' 내가 한 말이 원문이니까, 나는 내가 정의하도록 하고, 굳이 의견을 듣고 싶다면 나를 가장 잘 알고, 나를 가장 아끼는 사람의 말을 듣자. 

*144쪽 '그냥 보고 싶어서 그래',를 그대로 받아 들일 수 있는 감각을 놓치지 말자. 

*영화 대사가 떠오른다, '라면 먹을래요(라면 먹고 갈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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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역하는 말들 - 황석희 에세이
황석희 지음 / 북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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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계획대로 뚜벅뚜벅 가고 있으면서도 가끔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다며 의도적으로 내 여정을 오역했다. 지쳐서, 다 놓고 쉬고 싶어서. (47쪽)

"난 왜 이렇게 못생겼어?"
엄마는 단호하게 답한다.
"넌 못 생기지 않았어."
어기는 엄마의 말을 믿지 않는다. 나를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이니까 당연히 그런 대답을 하리라.
"엄마는 내 엄마니까 그러는 거잖아."
엄마는 의아한 얼굴로 되묻는다.
"내 생각은 엄마라서 안 중요해?"
"안 중요해!"
(중략)
"엄마의 생각이니까 제일 중요한 거야. 내가 널 제일 잘 아니까."
하긴 그렇다. 엄마의 생각이니까 안 중요한 게 아니라 오히려 엄마의 생각이니까 제일 중요하다. 세상에서 나를 제일 잘 알고 제일 아끼는 사람이 하는 말이니까. 어마만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의 말을 더 귀담아 들어야 하는 게 논리적으로 옳다. (88-89쪽)

"I‘m not defined by you."
(나는 당신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다.)
(중략)
가령 어떤 사람이 나를 고구마라고 부른다 해서 내가 고구마가 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나를 형편없는 번역가, 못난 부모라고 한다 해서 내가 형편없는 번역가나 못난 부모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의 말엔 날 정의할 권위나 권리가 전혀 없다. (90-91쪽)

어떤 논리가 있든 어떤 사정이 있든 내 마음에 안 들면 틀렸다고 주장하는 태도. 이런 상황이 연출되면 대개는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긴다. 목소리 큰 사람과 싸우는 건 피곤한 일이거든. (157쪽)

자식들은, 특히나 궁하게 자란 자식들은 그저 부모의 인생이 불행했을 거라고 넘겨짚는다. 하지만 부모의 인생은 부모의 인생대로 희로애락이 있었을 거다. 어떻게 나는 그 시절을 한번 물어볼 생각도 않고 당신의 불행을 멋대로 단정했을까. 자고로 번역가라면 원문을 제대로 확인하려는 노력은 기울었어야 했다. (167-168쪽)

반복된 농담이 사회적 인식을 형성하는 과정은 단순하면서도 강력하다. (174쪽)

어른의 시선으로 아이의 행동을 번역하다 보면 이런 오역을 저지르기 쉽다. 마치 영어 번역을 해야 하는데 일어 사전을 들고 번역하는 것과 같다. 아이의 말과 행동을 번역할 땐 어른 사전을 잠시 치우고 아이 사전을 펼쳐야 한다. (215쪽)

가난은 개인의 책임이 아닌 경우가 훨씬 많다. 이런 말은 그들이 그저 미련했기에, 노력하지 않았기에 가난하게 죽는다고 말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미련하지도 않을뿐더러 몸을 갈아가며 노력한 사람들이 가난하게 죽는 것을 나는 너무나도 많이 봤다. (중략) 가난은 쉽게 죄악시할 대상도, 자랑할 대상도 아니다. 그보다 훨씬 실존적이고 실제적인 비극이다. (223쪽)

성공은 ‘오로지 운‘도 아니고 ‘오로지 노력‘도 아니다. 개화할 정도로 충분히 쌓아 온 노력이 좋은 때를 만나 결실로 구체화하는 게 성공이 아닐까. 그러니 남들이 운이 먼저라고 하든, 노력이 먼저라고 하든, 또 다른 뭔가가 먼저라고 하든 일단은 멈춰서 고민하기보다 뚜벅뚜벅 제 길을 갔으면 좋겠다. (중략) 누가 뭐라건 자기 의지로 걸아야 한다. 외부에서 유발한 동기는 가치도 효용도 없다. 내부에서 유발한 동기만이 나를 투과하지 않고 남는다. (233쪽)

애초에 좋은 위로의 말이라는 게 존재하는지도 의문이다. 격과 식을 갖춘 말이야 있겠지만 온전히 마음을 달래 줄 수 있는 마법 같은 위로의 말 따위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난 이번에도 위로의 말을 찾지 못하고 종일 먹먹하다. (중략) 개인적인 행복과 타인의 불행을 동시에 마주하는 순간에도, 때로는 죄책감으로 때로는 감사함으로 삶을 이어간다. 삶은 이토록 모순적이고 불가해하다. 감히 번역해 낼 수 없을 만큼. (272쪽)

나의 온기를 나누거나 타인의 온기를 인식하는 것은 감각의 영역 같기도 하다. 나의 나의 온기를 나누거나 타인의 온기를 인식하는 것은 감각의 영역 같기도 하다. 나의 온기가 필요한 순간을 포착하는 것도, 외부의 손길이 계산 없는 온기라는 것을 판단하는 것도 감각이다. (2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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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작가의 글을 읽고 사진 속의 그를 한참 보았다. 찰스 부코스키다. 

부코스키의 유럽 여행 사진 87장과 에세이, 시가 들어 있는 책, '셰익스피어도 결코 이러지 않았다Shakespeare Never Did This'

진짜 날 것의 글로 가득하다. 자주 자주 보이는 '조또, 써글, 씨펄, 또라이, 떡 치고' 같은 왠지 나오면 안 될 거 같은 단어들이 작가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느끼는 대로 감정에 의해 행동한다고 말한 작가의 에세이와 시는 자기 마음이 가는 사람들에 대해서 쓴 글이다.

흔히 감정대로 행동한다는 사람들과는 별개로, 작가는 다치고, 고문 당하고, 저주 받고, 길 잃은 사람들에게 마음이 향한다. 그리고 보통의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거의 모든 것에 무관심하다. 그러나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떠돌이 개, 공장 근무자의 생활, 길바닥의 삶, 빈자와 불구자와 미치광이의 방 같은 하찮은 것들에 관심을 둔다. 그런 하찮은 것을 가지고 글을 쓴 부코스키는 미국의 저명한 시인이자 산문 작가였다. 이제야 알았다. 또 마흔아홉 살에 전업 작가가 되었단다. 

부코스키와 린다 리는 서로 대척점에 있지만,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견딜 만하면서도 견딜 수 없는 거리distance가 오히려 그들을 묶어주었고, 사진에서도 그들은 완벽했다.

부코스키의 글은 삶에서 나온 것들, 진짜 삶에서 나온 것들, 지어낸 것들이 아닌 진짜의 글이었다. --- 이들처럼 관계를 유지하고, 그 사람처럼 글을 써야겠지. 그럼 술도 많이 마셔야 할까... 하찮은 것들에게 마음이 자꾸 가려하면... 정작 내 마음은 길 잃은 사람들에게 가긴 할까, 싶다. 


지금 나는 이러한 상태다.

세월은 빨리 간다마는, 겨울로 가는 길목이 제일 싫다. 이 때의 날씨에 가장 민감하다. 재채기가 연신 나오고, 콧물이 흐르고, 손발이 시리다. 이 만큼 나이가 되면 적응도 되었잖아, 그러려니 하면서 살자.

연주회 갔는데, 사회자는 괜한 말(공연과 관련된 말만 하면 된다) 해서 사과하고, 연주자 중 한 명은 본인 파트가 쉴 때 부산하게 움직여 집중을 흩뜨렸다. 그러나 나머지는 너무 좋았잖아, 다른 건 신경 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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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도 결코 이러지 않았다
찰스 부코스키 지음, 황소연 옮김 / 자음과모음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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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린다 리는 더러운 지중해 물속에 발목을 담그고 첨벙거렸다. 내가 지루해하는 것이면 뭐든 즐기고, 내가 즐기는 것이면 뭐든 지루해하는 여자 같으니. 우리는 완벽한 짝이었다.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견딜 만하면서도 견딜 수 없는 거리distance가 우리를 묶어주었다. 우리는 매일 만났지만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고 해결할 기회도 없었다. 완벽했다. (20-21쪽)

대부분의 사람들이 흥미를 느끼는 것에 나는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그 목록에는 이런 것들이 포함된다. 사교댄스. 롤러코스터 타기, 동물원 구경, 소풍 가기, 영화 보러 가기, 천문관 관람, 텔레비전 시청, 야구 경기 관람 등. 장례식, 결혼식, 파티, 야구장, 자동차 경주, 시 낭송회, 박물관, 집회, (중략) 스포츠 경기에도 가기 싫다.... 또한 해변, 수영, 스키, 크리스마스, 새해. 7월 4일 독립기념일, 록 음악, 세계사, 우주 탐험, 반려동물, 축구, 성당, 위대한 예술 작품에도 관심 없다. 거의 모든 것에 무관심한 남자가 어떻게 글을 쓸 수 있을까? 글쎄, 나는 쓸 수 있다. 나는 그것들을 제외한 나머지에 대해 글을 쓰고 또 쓴다.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떠돌이 개, 남편을 살해하는 아내, 햄버거를 씹는 강간범의 생각과 기분, 공장 근무자의 생활, 길바닥의 삶, 빈자와 불구자와 미치광이의 방 같은 하찮은 것들을 쓴다. 나는 그런 하찮은 것들을 많이 쓴다. (54쪽)

나는 시 낭송 사이사이 청중과 대화를 나누었다. (중략) 독일 군중에겐 다른 점이 있었다. 나는 그간 수많은 낭송회를 가졌다.(중략) 낭송회 청중은 특정한 부류의 시를 선호했는데, 그들은 웃기는 시를 좋아했다. (중략) 그런데 함부르크 군중은 이상했다. 내가 웃기는 시를 읋으면 웃음을 터뜨렸지만 심가한 시를 읋으면 열렬히 박수를 쳤다. 정말이지 다른 문화였다. (중략) 내 시는 지적이지 않았지만, 일부 청중은 진지했고 열광했다. 군중에게 내 시를 이해받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정신이 말똥해져 술을 더 마셔야 했다. (72-73쪽)

한 청년은 계속 내 얼굴에 마이크를 디밀었고, 녹음테이프는 계속 돌아갔다. 그는 나에게서 깊이 있는 것을 끌어내려고 계속 질문을 던졌다. "삶이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십니까?" "내 얼굴에 디민 이 마이크만 없다면 그렇겠지, 멍텅구리 씨...." "여성을 싫어합니까?" "아이들만큼 싫진 않아." "인생의 의미는 어디 있을까요?" "부정否定하기" "그럼 인생의 기쁨은?" "자위행위" "그럼 인생의 참맛은?" "반값 세일" 그날 밤이 어떻게 파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113-114쪽)

나는 느끼는 대로 감정에 의해 행동한다. 내 감정은 다치고, 고문당하고, 저주받고, 길 잃은 사람들에게 향한다. 동정심이 아니라 형제애의 발로에서. 나 역시 길을 잃었고, 혼란스러복, 저열하고, 쪼잔하고, 겁 많고, 비겁하기 때문이다. 불공정하기 때문이다. 가끔씩 반짝 친절을 베풀 뿐이다. (115쪽)

인생이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척 연기하려고 배웠을 뿐이다. 간혹 자살 사건이 일어나거나 누군가 정신병원에 입원하지만, 대다수의 대중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만사 즐거운 듯 계속 연기한다. (121쪽)

바벳이 부엌에 들어가 그 물고기(강꼬치고기)를 가지고 나왔다. "이것 좀 봐! 이 이빨 좀 보라고! 엄청난 놈이야!" 그의 손에 그것이 매달려 있었다. 죽은 몸으로. 길고 날씬한 전직 킬러가 우리 눈 앞에. 바로 앞에 있었다. 놈은 죽어서도 아름다웠다. 한 치의 오류도 없었고, 한 점의 과다한 지방도 없었다. 거짓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창조물. 찢고, 뜯고, 둘러보고 헤엄치는 삶. 도덕도, 성경도, 친구도 없는 그저 돌진하는 삶. (153쪽)

독일은 내가 태어난
곳.
할리우드는 내가 사는
곳.

나는 독일에 갈
것이다
말들과 이 방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우드 앤더슨이 우리와 동행할
것이다.
양식이 떨어졌을 때
그의 책은 내게
양식이었다.

-‘다 함께‘ 중에서(176쪽)

독일인들은 1914년 이후 두 번의 세계대전에서 패했다. 그렇게 패배자가 되어가는 것일까. 하지만 그들의 과묵하고 자제하는, 특별히 눈에 띌 필요를 느끼지 않는 섬세함은 내 기운을 돋우었다. 자신과 타인을 인내하는 무관심이라니.

만하임 기차역에서 맥주꾼들을 바라보노라면 우리가 믿는 무엇이 선포하고 성취하는 것을 목도한다. 역사의 한 장과 삶의 한 현장에 선 그들이 시연하는 것은, 삶이란 때때로 지독하게 다가오지만 어떨 때는- 어쩌면 자주 -아득바득 악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맥주 맛이 좋고, 기차는 올 테니까.

-‘기차역‘ 중에서(2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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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지에서 계간지로 나오는 소설 보다를 자주 구매한다. 

-바우어의 정원(강보라)은 내면과 외면의 불일치, 연극으로 포장되어 나오기는 하지만, 나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기억을 되짚어 보면 그러한 모습들은 나의 경험과 관련있다. 이제는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스무드(성해나)는 외모는 한국인이지만 미국인보다 더 미국인인 내가 한국에 와서 이물같은 존재로서 서로의 이해와 몰이해의 간극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자신과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관계랄 거도 없는 관계,도 마찬가지임을 알게 된다. 

-남은 여름(윤단)은 덩그러니 놓여있는 소파와 늦게 입사하여 관계보다는 자리에 연연해온 추팀장은 어쩌면 동일 선상에 있다. 잘못한게 없는 데도 관계가 없으니, 관계를 못하니, 잘못한 사람이 된다. 


2. 봄날의 이야기(오정희)를 같이 읽으면서 저자들의 나이만큼 소설의 내용도, 깊이도 엄청났다. 봄날의 이야기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묵히고 묵혀 삭혀서 만들어 낸, 삶의 끝자락에서 회한도 아니고 위로도 아닌, 제3의 눈으로 보거나,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거나, 자식이 돌아보면서, 회상하는 글들에서 남은 자들은 어떡하든지 그 기억들을 소화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 나머지 시간들을 살아 낼 수 있다.  


'달아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꼼작도 할 수 없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이렇게 예정되어 있었고 나는 이 순간을 오래 기다려왔던 것 같기도 했다(봄날의 이야기).'

'잊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라지만 나이 팔십이면 잊는 것도 잃는 것도 그다지 안타까워할 일은 아닌 것이다. 기억이 너무 많으면 영혼이 무거워서 저승 가는 길이 힘들어질 것이다(보배).'

'어머니가 앞서 힘겹게 통과한 그 모든 시간들을 나 또한 지나가고 있으며 겪어내야 한다고 생각하면 안도감이 들고 두려움이 가셨다. 다 견뎌낼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도 생겼다(나무 심는 날).'


*오정희 글에 마음이 더 간다. 익숙한 문체랄까, 나이가 들어가면서 공감대가 더 생긴 이유일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간간히 보이는 이러한 단어들(어둑신, 비긋이 등등)이 무척 친근했다. 

*예쁜 내 동생 환갑에 다녀왔다. 축하했다.

*스페인 포르투갈 여행을 예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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